쾌도강산 제1권. - 5편 (5/43)
도대체가 말이 되는가? 호랑이 아가리에서 고깃점을 빼내는 게 쉽지, 대(大) 백옥장에서 사람을 구해가다니. 대(大) 삼절방의 대리분타에서 말이다. 소귀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은 차치하고 일이 잘못 수뇌부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엔 꼼짝없이 무능력자 소리를 들을 판이었다. 낙광영은 즉시 사방으로 수하들을 풀어 그 괘씸한 놈들에 대한 자료수집에 나섰다. 다행히 그들의 흔적은 곧 발견되었다. 밤중에 점창산(點蒼山)쪽으로 향하는 일단의 무리를 본 사람이 여럿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수는 십여 명으로, 그중 한 사람은 업혀 있었다고 하니 틀림없을 것이다. 낙광영은 곧 비룡대(飛龍隊)의 소집을 명했다. 백옥장의 최고 정예라 할 수 있는 비룡대를 직접 자신이 지휘한다면 놈들은 다만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날파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이놈들, 잡기만 하면 갈아 마셔 버릴테다. 아니, 이목구비를 자르고 사지(四肢)를 하나하나 비틀어 과연 이 낙광영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그렇게 씩씩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던 낙광영이 약간이나마 안정을 찾게된 것은 문득 자신의 손에 들린 병기를 본 후의 일이었다. 언제 빼들었는지 모르게 섬뜩한 병기들이 자신의 손안에서 시퍼런 귀기를 번뜩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복(卜)자처럼 양날이 구부러져 베기도 찌르기도 용이한 석 자 두 치의 변형된 초겸과, 넉 자 일곱 치의 단봉이었다. 비로소 자신이 홧김에 병기들을 꺼내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낙광영은 후! 가벼이 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실었다. "어찌 나이를 먹었다는 놈이... ." 낙광영은 초겸의 꼬리와 단봉의 머리를 이었다. 철컥! 짧은 금속음이 울리고 결합된 단봉과 초겸은 길이 일곱자 반의 한자루의 훌륭한 대초겸(大硝鎌)으로 변신하였다. 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 이십 년이 넘도록 고락을 함께한 친구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이 오십이 넘어가도록 제 성질 하나 다스릴 줄 모르지만 너는 언제나 차분히 늠름하구나." 낙광영은 조심스럽게 애병(愛兵)의 몸을 어루만졌다. 숱한 풍상(風霜)의 흔적들이 손끝을 스쳤다. 그것은 서너 번의, 아니 어쩌면 예닐 곱, 아니 어쩌면 수십 번이 되었을지도 모를 제 자신의 목숨이었다. "네가 꺾인다면 나도 꺾이겠지." 그렇게 낙광영이 자신의 애병을 안고 회상에 잠겨있을 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이어 밖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속하 등각(藤殼)이옵니다." 등각은 낙광영의 오른팔로, 그 인물됨이 마치 등나무 껍질처럼 질기고 부드러운 인물이었다. 실질적인 백옥장의 이인자를 논하라면 바로 등각이 될 정도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낙광영은 다시 단봉과 초겸을 분리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깨끗한 용모에 다소 연약한 모습을 풍기는 사십 대 중년인이 모습을 보였다. 등각이었다. 낙광영은 왠지 그의 표정이 평소와 같지 않음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고 물었다. "준비됐느냐?" "준비는 마쳤습니다만, 총단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총단? 어떻게...?" 처음에는 소귀의 일 때문이라고 지레 짐작하던 낙광영은 문득 귀신이라 할지라도 이토록 빨리 소식을 접할 수는 없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아니지. 이렇게 빨리 들어갈 순 없는 일, 그렇다면 무슨 일로...?' 무슨 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척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낙광영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다더냐?" 그 한마디가 미처 끝나기 전 등각의 뒤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십 초반의 온화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이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그 인상에 어울리는 밝은 인사를 던졌다. "하하하! 낙장주, 신수가 훤하십니다." 한데 나타난 자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어 또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나타난 자는 오순의 중년인으로, 굳은 표정이나 칙칙한 회포에서 먼저 나타난 중년인과는 정반대되는 분위기를 풍겨내는 자였다. 다만 두 사람은 그 분위기에 상관없이 각각 뚜렷한 한 가지씩의 특징을 가지고있었다. 먼저 나타난 사순의 중년인은 큼지막한 한 쌍의 은빛 륜(輪)을 메고 있었고, 나중에 나타난 회포 중년인의 어깨엔 한 마리의 매가 앉아있었다. '칠대공(七大公)!' 두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낙광영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사를 던진 자는 칠대공 중의 막내인 근공(根公) 쌍륜(雙輪) 사마자웅(司馬子雄)이었고, 칙칙한 분위기의 인물은 넷째 풍공(風公) 신응(神鷹) 고량(固諒)이었다. 삼절방은 무천궁과 함께 천하를 양분하고 있다해도 좋을 거대한 조직이었다. 남으로는 사천(四川), 운남, 광서(廣西), 북으로는 감숙(甘肅)과 섬서(陝西)에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있는 것이다. 그처럼 넓은 지역을 관리하자니 자연 조직의 방대함은 세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간단한 예로, 대리분타인 백옥장만 하더라도 그 위세가 일반 거대문파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일궁(一宮)과 이전(二殿), 삼원(三院), 십삼분타(十三分舵)였다. 일궁은 일월성궁(日月星宮)을 말하고, 이전은 지선전(地宣殿)과 천도전(天道殿)을 가리키며, 삼원은 화도원(火途院), 도도원(刀途院), 혈도원(血途院)을 나타낸다. 그리고 십삼분타는 천하 각지에 산재해 있는 열 세 개의 분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 그 방대한 조직도 실상은 삼절방이 가지고있는 힘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삼절방의 힘의 나머지 절반은 바로 칠대공이라는 일곱 명의 초절정고수에 있었다. 칠대공! 방주(幇主) 직속으로, 각각 지수화풍공식근(地水火風空識根)으로 대변되는 칠대공. 그들은 거악(巨嶽)이오, 대해(大海)였다. 그것은 삼절방에 적(籍)을 올려놓은 자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설사 삼절방도가 아닌 타 문도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대소 수십 회의 전투에 그들이 나서서 승리하지 못한 적이 없었고, 대저 수백여 회의 분규에 칠대공이라는 이름이 올라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 없었다. 오죽하면 삼절방의 주인이 여덟이란 말이 생겨났을까. 그 정도로 삼절방에서 칠대공은 곧 법(法)이었고, 절대(絶對)적인 존재들이었다. 한데 그런 칠대공이 둘씩이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근공과 풍공 아니십니까." 낙광영은 신응 고량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보인 후, 뚜벅뚜벅 걸어가 덥석 사마자웅의 손을 잡았다. 비록 서열상으로는 비슷하다지만 실상 칠대공과 분타주와의 사이에는 적지 않은 격이 있었다. 다만 낙광영과 사마자웅은 그런 암중 서열상의 차이를 무시해버려도 좋을 정도로 친숙한 사이였다. 낙광영은 사마자웅의 손을 끌어 자리로 안내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오셨습니까? 보아하니 술 생각이 나서 오신 건 아닌 것 같고." 고량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사마자웅은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낙장주. 멀리서 찾아왔는데 차 한잔도 내오기 전에 용건부터 말하라니, 이거 인심이 너무 박하십니다." "아차차, 이거 정신이... 게 누구 없느냐?" 등각이 밖으로 나가려하자 사마자웅이 손을 저어 그를 불렀다. "들어오면서 주위를 모두 물리쳤으니 찾아도 없을 게야. 등각, 자네도 이쪽으로 오게. 내 별로 해줄 말은 없으나 그나마 자네도 들어두는 게 좋을 거야." 낙광영은 다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마자웅을 바라보았다. 등각이 가까이 오자 사마자웅은 입을 열었다. "어제 백옥장에 변고가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소." 낙광영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이었다. 하나 이어 들려온 한마디가 전혀 의외였다. "그들을 쫓지 마시오." "......?" 낙광영은 눈을 끔벅였다. 이해는커녕 의문을 토해내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건... 왜?" "그들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총단(總壇)에서 주목하고 있소이다. 다만 그대로 두고 보는 건 몇 가지 미심쩍은 부분과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있기 때문이오. 손을 쓰려면 언제든지 쓸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낙장주께서 그 사이로 끼여들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들은 결코 비룡대... 에게 당할 자들이 아닙니다." 낙광영은 사마자웅의 표정에서 그가 '비룡대'를 이야기함에 있어 잠시 멈칫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한마디가 빠져있었다. '따위'란 한마디가! 다시 말해서 사마자웅이 하고싶던 본래의 이야기는 '그들은 결코 비룡대 따위에 당할 자들이 아닙니다.'였던 것이다. 낙광영이 입술을 실룩이며 물었다. "놈들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소귀를 제외한 그들은 모두 여덟으로, 반선불 곽가량, 염객 서문상, 편복노조 이항, 초자도 문정인, 상문신 양표, 화왕비 송자영, 그리고 강산과 구청연이라는 신원미상의 인물이 끼여 있소." 사마자웅의 이야기가 시작됨에 따라 조금씩 꿈틀대던 낙광영과 등각의 입이 마침내 쩍 벌어지고 말았다. "그, 그런 자들이 어떻게...?" "정말 그들 여덟입니까?" 사마자웅이 씁쓸히 미소지었다. "그렇소이다. 하나같이 허술히 대할 수 없는 인물들이지요." 낙광영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밀어닥친 숱한 의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많은 의문 중에서 적어도 한가지는 밝혀진 셈이었다. 칠대공 중 둘이 출동한 이유는. 낙광영은 다소 마음이 진정되자 물었다. "필시 그 정도의 인물들이 모였을 때는 그에 걸맞은 일거리가 있어야할 터인데, 도대체 그들의 목적이 무엇...!"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 문득 낙광영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낙광영은 소스라치게 놀라 물었다. "혹시, 그들이 흑지(黑地)를...?" 사마자웅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낙장주의 추측은 틀리지 않을 것이오. 이 머나먼 운남 땅에서 강호무림에서도 내노라하는 일류고수 여덟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일이란 게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낙광영은 안색을 일변하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장 조치를 취해야 될 게 아닙니까?" 사마자웅은 너털웃음을 토해냈다. "허허! 낙장주, 내 이미 말씀드렸지 않소? 손을 쓸려면 언제든 쓸 수 있다고. 자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앉으시오." 낙광영은 더욱 핏대를 올렸다. "그게 무슨... . 놈들이 밀림 깊숙이 숨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찾는단 말입니까? 더구나 소귀를 구출해간 이상 호랑이 등에 날개가 달린 격인데. 사마공은 모르시겠지만 밀림에서의 소귀의 능력은 가히 천하제일입니다." "허허허, 이것 참!" 낙광영은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 조급해했고, 그를 바라보던 사마자웅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것 참, 이것 참 만을 연발하였다. 한편 한옆에 서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등각은 내심 짚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손을 쓸려면 언제든지 쓸 수 있다는 사마자웅의 말과, 또한 말을 할 때 힐끔힐끔 고량의 눈치를 보는 사마자웅의 행동에서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곧, 뭔가 큰 비밀이 있는데 '말을 해도 좋겠습니까?'라고 사마자웅이 고량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등각은 깊게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간자(間者)입니까?" 순간 무심히 천장을 응시하던 고량이 눈을 돌려 등각을 바라보았다. 하나 그도 잠시, 고량의 시선은 이내 천장을 향했다. "간자...? 간자! 그렇군!" 비로소 상황을 깨달은 낙광영은 똑바로 사마자웅을 응시했다. 잠시 낙광영을 마주 바라보던 사마자웅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참. 해서는 안될 말인데... 이렇게 된 바에야 할 수 없지. 그렇소. 그쪽에 우리편이 끼여 있소. 그러니 낙장주께선 과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2 낙광영이 사마자웅과 고량의 방문을 받을 즈음, 일행은 한참 점창산 사양봉(柶樣峯)을 넘고 있었다. 소귀는 여전히 구청연의 등에 업힌 채였다. 문득 뒤편에서 따라오던 곽가량이 구청연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구형, 내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구청연은 걷는 와중에 곽가량을 바라보았다. 곽가량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기 백옥장에서... 분명 암호는 '칠'에 '팔'이었는데, 어떻게 '십일'에 '사'가 된 것이오?" 구청연의 바로 뒤에서 걷던 강산은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 역시 곽가량과 같은 의문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구청연은 피식 웃음지으며 간단히 답했다. "합(合)입니다." 그 한마디가 강산의 머릿속을 환히 밝혀주었다. '그렇군. 숫자를 암호로 사용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군.' 곽가량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칠에 팔, 십일에 사. 옳아! 합이 '십오(拾五)'로구나. 과연 구형이오. 이 아둔한 놈은 백 번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이오." 구청연은 과분하다는 듯 엷게 웃음지었다. "원, 별말씀을." "내 다시 한번 구형에게 감탄했소이다." 거듭된 곽가량의 칭찬에 구청연은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하하, 이것 참." 두 사람이 하는 수작을 말없이 지켜보던 강산은 한 자 한 자 구청연의 이름을 마음으로 불러보았다. '구청연!' 그와의 첫 대면에서 강산이 받은 느낌은 '재사(才士)'라는 것이었다. 전장(戰場)의 최일선에서 용맹을 떨치는 장수(將帥)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략을 펼치는 지자(智者)에 어울리는 사내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번의 남만행(南蠻行)에 동행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의외였었다. 한데 그러한 판단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무려 한달 여에 이르는 오랜 여정(旅程)에서 구청연은 단 일보도 뒤처진 적이 없었다. 처지기는커녕 언제나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어왔을 정도였다. 지금도 그는 소귀를 업고 있었다. 무려 네 시진 이상을, 걸음걸이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 얇은 손목, 호리호리한 몸매, 깡마른 손과 발. 구청연의 외양 어디에도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었다. 따라서 그는 내가(內家)의 무공을 익힌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것도 태양혈(太陽穴)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의 절정(絶頂)의 경지에 도달했음이 틀림없었다. 강산은 천천히 일행 하나 하나를 살펴보았다. 곽가량은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구청연에게 바짝 붙어 조잘조잘 쉼없이 입방아를 찧고 있었고, 서문상과 양표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가끔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문정인의 한껏 여유로운 모습은 마치 꽃 구경 나온 한량인 듯 하였고, 이항은 병든 닭 마냥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입에 문 곰방대만은 놓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맨 후미에 선 송자영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터벅터벅 따라오고 있었다. 시빗거리가 없어 심심한 모양이었다. 괴이한,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행이다. 무언가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같고,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근본적으로는 모두들 구속을 싫어하는 낭인(浪人)들인데... 어떻게 이와 같은 일행이 생겨났을까? 강산은 다시 구청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차분한 걸음걸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일곱 마리의 이리를 거느리려면 호랑이가 아니면 안되겠지.' * * * "쩝, 아쉬운데요." 사양봉을 거의 벗어난 시점에서 소귀가 중얼거렸다. 구청연이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 아쉽나?" 소귀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옆 방의 어떤 놈하고 내기를 했다고. 이젠 말짱 도로묵이 됐으니.... 쩝! 열 냥이나 걸었는데." 옆에 있던 곽가량이 대화에 끼여들었다. "이제 누만금(累萬金)이 생길텐데 까짓 은자 열 냥이 그리 중한가?" 소귀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곽대협, 모르시는 말씀 마십시오. 이건 액수가 아닌 승부(勝負)의 문제입니다. 남자의 승부!" 순간 구청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승부? 허허, 남자의 약속은 그 다음인가?" "헤헤헤, 그 문제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딱 한 판만 하고 나온다는 것이 어떻게 일이 꼬여... . 참, 이젠 내려주십시오." "괜찮겠나?" "어르신, 저를 어떻게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까짓 물맛 좀 보았기로 천하의 소귀가 만 이틀을 업혀 다니란 말입니까?" 사실 소귀의 부상은 별 것이 아니었다. 긁힌 상처 몇 개가 전부일 뿐, 문제는 빠진 체력에 있었다. 구청연의 등에서 내려온 소귀가 휘휘 팔다리를 움직여보는데, 우득우득 시원스레 돌아가는 모양새가 과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관절을 다듬던 소귀가 문득 괴이한 눈으로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왜 그러나?" 구청연의 물음에 소귀가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음짓더니, 이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 이렇게들 밀림을 들어가시겠다는 겁니까?" 송자영은 소귀의 손짓에 따라 자신의 아래위를 살폈다. 평범한 녹피화에 바지, 그리고 간편한 경장차림. 뭐가 잘못됐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치마를 입어야한다는 말은 아닐테고. "뭘? 우리가 뭘 어쨌기에?" 송자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소귀가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물통 준비하신 분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또 백반이나 육포(肉脯), 밀림도(密林刀) 가지고 계신 분?" 그제야 중인들은 소귀의 지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일행은 전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밀림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전부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적어도 한 사람만은 준비가 있었다. 곽가량이 주섬주섬 허리춤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험, 적어도 난 물통은 준비했지."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곽가량을 향했다. 그들의 표정은 한마디로 경악, 그 자체였다. 구청연, 강산, 이항... 다른 누구도 아닌 곽가량이 물통을 준비했다니? '저 인간이...? 참, 별일도 다 있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던 송자영, 하나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때를 같이하여 소귀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뇌까린다. "그게 술병이지 어디 물통입니까?" 곽가량이 꺼낸 것은 술병이었던 것이다. 곽가량이 킁! 코웃음을 쳤다. "요즘 술병엔 물이 안 들어간다던가?" "쩝!"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소귀는 눈길을 돌렸다. 먼 곳으로 눈을 돌리고 그저 어이없어 할 뿐이었다. 그곳에는 끝도 없는 검푸른 수해(樹海)가 펼쳐져 이후의 험난한 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런 꼴통과 며칠인지도 모를 밤을 지새야하다니... . 한데 그런 소귀를 더욱 한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구청연이었다. "자넨 준비물을 탓할 자격이 없어." 소귀는 구청연을 보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만한 준비도 없이 밀림에 들어서려는 자가 있을까?" 소귀는 눈을 끔뻑이며 일행을 살폈다. 혹시 준비물을 감춰두고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전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저를 놀리시는... ." "준비야 벌써 마쳤지. 하나 우리가 그것을 챙기는데 시간을 허비했다면 과연 자네가 지금처럼 이곳에 서있을 수 있을까?" 소귀는 무식했다. 하지만 다행히 미련하지는 않았다. 구청연의 이야기인 즉, '준비물은 완벽했다. 한데 너 때문에 시간이 없어 챙길 수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미련하지 않은 것은 일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싸늘한 시선이 소귀의 한 몸에 쏟아졌다. 소귀로선 다만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하-하, 하... 하!" 그렇게 어색하게 웃던 소귀는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이윽고 손을 들어 맞은편 봉우리를 가리켰다. "저길 보십시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소귀의 손가락을 쫏았다. "방금 우리가 넘어온 곳이 창산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사양봉입니다. 그리고 맞은편의 저 봉이 불정봉(佛正峯), 그 다음이 바로 창산제일봉인 마룡봉(馬龍峯)입지요." 소귀는 일행의 눈치를 살피며 슬슬 걸음을 옮겼다. 대충 얼버무리며 상황을 벗어나보고자 한 것이다. "그 뒤로 용천봉(龍淺峯), 설인봉(舌刃峯), 학운봉(壑雲峯)이 줄줄이... ." 하나 그의 그러한 노력은 본시 헛된 것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닭 개구리 잡듯 날카로운 한마디가 틈을 비집고 파고들었다. 송자영이었다. "그래서?" "하하-! 그러니까 제 말은 갈 길이 머니 출발을 서둘러야한다는... 게 아니고, 급히 서두르다보면 많은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도 아니고... . 거- 뭐냐? 아하하! 본래 이 밀림이란 곳이 워낙 위험한 장소 아니겠습니까? 뱀, 독충, 질병, 더위, 물, 야만족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 "요지가 뭐야?" 한 순간 뻘뻘 식은 땀을 흘리며 주절대던 소귀의 눈이 커졌다. "야만족...? 야만족! 그렇습니다. 불정봉 근처에 원주민 부락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물통, 밀림도, 옷가지 따위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그런 말이지요. 에헤헤!" 소귀의 코앞까지 다가섰던 송자영의 주먹이 스르르 제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