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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35편 (35/60)

2026-09-30 18:55:31 조회 17
그렇다면 두 번째 사람은 누구요?" 좌중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터졌다. 임조영이 미소를 머금으며 가만히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굳은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조영의 가슴에는 두 가지의 상념이 자리했다. 여러 사람들이 왕중양의 인품에 대해 존경하고 있음에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여인이 그를 알고 있다는 것에는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인이 두 번째 호걸에 대해 털어놓았다. "두 번째 분은 비록 명성이야 왕중양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꽤 유명한 호걸이지요. 기실 난 이 두 번째 분을 더 좋아하고 있는데……." 여인이 갑자기 머뭇거리며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약간 숙였다. 사람들은 지레짐작으로 혹시 여인과 정분이 난 사내가 아닐까 해서 더욱 눈망울을 바쁘게 굴려 댔다. "하지만 그분은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예요." 이 말에 사람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인을 좋아한다고? 뭇사내들의 표정에는 실망과 함께 묘한 기운이 교차했다. "무공 역시 왕중양과 별 차이가 없는 임조영이라 하는 여인이죠." 순간적으로 왕중양과 임조영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동자엔 오직 한 사람의 형상만이 비쳤다. 이들은 곧 여인이 누구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해냈다. 왕중양이 속으로 뇌까렸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저 여인은……?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왔을까?' 반가움 때문에 그랬는지 임조영이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시만……." 왕중양이 슬쩍 그녀의 옷깃을 잡으며 만류했다. 이런 자리에서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임조영도 그런 왕중양의 의도를 간파했는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여인이 좌중을 향해 또 입을 열었다. "또 다른 한 분이 있지요. 그러나 그 분에 대해서는 여기서 밝히지 않겠어요." 왕중양과 임조영은 그녀가 말하지 않은 세 번째 사람이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을 밝히면서 굳이 모용준을 숨기는 까닭이 뭔지 의아스럽기만 했다. 사람들이 아쉽다는 듯 불만의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여인은 한 번 둘러본 시선을 거두더니 입을 굳게 다물었다. "흥, 누군가 했더니 그 잘난 왕중양이었구먼!" 하고 흙탕물을 튀길 듯 하고 나선 사람은 이괴였다. 그는 왕중양이 그저 운이 좋아 맹주가 된 것이라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빈정대며 덧붙였다. "만약 내가 왕중양을 죽이고 또 임조영인지 뭔지 하는 여인까지 목을 친다면 어떻게 하겠나? 그때는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줄 텐가?" "호호호, 그 재간으로 왕중양에게 덤비겠다는 말인가요? 또 그 잘난 머리로 임조영을 이길 수 있다고 믿나요?" 여인이 한껏 비웃으며 이괴를 놀려 댔다. 그러나 다짜고짜 여인에게로 이괴가 달려들었다. 동작이 크고 우수꽝스러웠지만 민첩하기 이를 때 없었다. 이괴가 여인의 어깨를 꽉 움켜쥐려고 할 때였다. "어!" 이괴의 손은 여인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뻣뻣하게 굳어졌다. 누군가 그 짧은 틈을 노려 이괴의 혈에 손을 댄 듯싶었다. 이괴의 이마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누구얏!" 이괴가 목울대를 출렁이며 소리쳤지만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괴 곁에는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누가 이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러고도 내 얼굴을 보겠단 말인가요?" 여인이 계속 쩔쩔매고 있는 이괴를 놀렸다. "이그, 구미호 같은 네 년에게 잘못 걸려들어 내가 이 수모를 겪는구나!" 이괴가 고개를 뒤로 꺾으며 장탄식을 터뜨렸다. "오호호, 그러지 마시고 보시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여인이 살짝 면사포를 들더니 이괴에게만 제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이괴는 도깨비에게라도 홀린 듯 아무 말도 못하고는 목젓이 다 보일 정도로 입을 헤 벌렸다. "이젠 되었나요?" 여인이 애교스럽게 한마디 건네자 이괴가 멍청한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하루에 한 번씩 이곳에 들려 여러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왔지만 오늘은 기분이 썩 내키지가 않네요." 좌중을 향해 이렇게 인사를 마친 여인이 홀연히 계단 쪽을 향해 걸어갔다. 작고 어여쁜 발로 사뿐싸뿐 걸어가는 여인의 뒤태에 시선을 박은 뭇사내들은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사수양괴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침통한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이 주루에 온 목적은 여인을 혼내주기 위함이었는데 영 뒤틀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기 형 대괴의 말만 믿고 따라왔던 이괴는 오히려 여인에게 반해 버린 상태였다. "내가 몇 번이나 충고를 했더냐? 그 계집의 쌍판은 절대 볼 생각을 말라고. 그런데도……." 대괴가 옷자락을 툭툭 털며 신경질을 부렸다. "씨끄럽소! 또 한 번도 그따위로 혀를 놀렸다가는 가만두지 않겠소!" 이괴가 성깔을 부리자 대괴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주루를 빠져 나와 거리 안쪽으로 들어섰다. 자기들이 묵고 있는 객점 안에 들어가니 웬 아리따운 젊은 여인 둘이 생글생글 웃으며 반겨 주었다. "우리집 낭랑께서 두 호걸들을 뵙자는데 어서들 가시지요." 여인들의 나긋나긋한 말솜씨에 반한 이괴가 관심을 보였다. "낭랑이 누구요?" "호호, 금방 우리 낭랑과 만나시고도 모르신단 말씀인가요?" 이 말에 이괴의 가슴이 쿵쿵 다시 방아질을 해댔다. "그래? 알았어. 우리 형님과 같이 간다고 일러라." "우리 낭랑께서 이르시기를 오늘 밤 너무 적적하니 두 분을 급히 모셔 오라고 하셨거든요. 어서 가시지요." 지금까지 품었던 여인에 대한 반감 따위는 잊어버린 채 대괴까지 덩달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은 여인들을 따라 성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자 차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우리를 어디까지 데리고 갈 셈이냐?" 이괴가 묻자 여인이 미소를 띠며 차분한 말투로 대꾸했다. "우리 낭랑께서는 한적한 곳을 좋아하신다는 것도 모르세요? 사람들이 많은 곳은 공기마저 더럽다 하시어 낭랑께서는 피하십니다요. 호호호." 이들은 별 수 없이 여인들을 따라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은 저희들끼리 웃고 까불면서 히히덕거렸지만 이괴나 대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들이 한참 만에 당도한 곳은 거대한 막사가 쳐 있는 곳이었다. 어마어마한 막사인데도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점에 이들은 또 한 번 의심을 품었다. 안에는 촛불이 수없이 켜져 있어 대낮보다 더 밝았다. 그리고 사방에는 사내와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그림들이 현란하게 붙어 있었다. 그 음란한 그림들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던 대괴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너희 낭랑이 정말 황비란 말이렷다!" "자꾸 물으시면 안 되옵니다. 황궁의 깊은 내막을 알려고 하면 화가 미칠지도 모르니까요." 여인의 충고에 대괴는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이윽고 여인이 저쪽에서 걸어왔다. 그녀는 사수양괴를 보고는 방긋 웃으며 반겨 주었다. "난 팔자가 기구한 여인이랍니다. 두 분을 여기까지 모셔온 이유는 긴히 드릴 청이 있어서인데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괴는 잠잠코 있었는데 오히려 대괴가 선뜻 나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분부인지 말씀만 하십시오. 우리 형제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만사 제쳐 두고 해올리겠소." 낭랑이 활짝 웃으며 반색했다. "그럼 좋아요. 먼저 술부터 나누시지요." 섬섬옥수를 들어 여인이 대괴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이괴에게도 술을 권했다. 이괴는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술마저 사앙할 수는 없었다. 술잔을 단숨에 비운 이괴가 그가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이제 그 청을 한 번 들어봅시다." 여인은 잠시 우물쭈물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곧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인간 세상의 영화와 부귀를 다 누리는 사람이지만 한편 남의 시기와 모욕 역시 받고 있는 몸이랍니다. 두 분께서는 모두 천하 호걸들인데 나를 도와 이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여인의 말에는 애절하고도 촉촉한 슬픔이 담겨져 있는 듯했다. 무슨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저러는가 싶어 여인의 입만 쳐다보고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감지했다. 한잔 술에 벌써 취하는가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정신이 몽롱하고 눈앞이 가물거리는 것이 이상했다. 여인이 면사포를 벗겨 냈다. 그리고 얼굴을 두 사람 가까이 들이대며 향기로운 입김을 토했다. "두 분께서는 날마다 저를 보시기를 원하시겠죠?" 여인의 눈빛에 끌린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애욕에 불타고 있는 눈빛으로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이 여인을 안아 주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인이 이괴의 입술 가까이로 자기 입술을 갖다대며 다시 향기로운 입김을 불었다. "날 꼭 도와주셔야 해요." 이괴는 코끝을 간지럽히는 여인의 향기에 맥을 못 추었다. "무…… 물론이지요." "그럼 난 이제 다시는 울지 않을 거예요." "울긴 왜 운단 말이요. 우리 두 형제가 이렇게 있는데. 걱정 마시고 우리들만 믿으시오." 대괴가 자신 있게 장담을 했다. "정말 고마워요."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두 사람의 손을 맞잡고는 천천히 뒤쪽으로 이끌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이괴가 눈앞으로 달려든 현기증을 팔로 휘저어 내쫓으며 물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재미를 드리려고 해요." 더욱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여인이 두 사람의 팔을 잡아당겼다. 갑자기 사수양괴의 눈이 커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들을 에워쌌던 것이다. 사수양괴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이렇게 많은 여인들 속에 파묻히다니. 여인들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열심히 혀끝을 놀려댔다. 그 혀는 양수양괴의 몸을 간지럽히며 때로는 짜릿한 전율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이들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여쁜 여인들은 하나같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얇은 망사로 된 옷만을 걸쳤을 뿐이었다. 백옥 같은 살결에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달아오를 듯한 풍만한 젖가슴……. 이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골짜기로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눈앞에는 자그마하게 생긴 계집 하나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이들은 이제서야 자기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꿈이란 말인가? "너희 낭랑은 어디에 있느냐?" 이괴가 오도카니 서 있는 계집에게 물었다. "당신네들과 함께 계셨잖아요?" 오히려 되묻는 계집의 태도에 이괴가 발끈했다. "잔소리 말고 어디롤 갔는지 어서 말하거라!" 그러나 계집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우리 낭랑이 뭐 당신네들 놀잇감인 줄 아시나요?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뭐라고!" 조그마하게 생긴 계집은 줄곤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했다. "이제 다시는 낭랑을 볼 수 없어요. 또 한 번 보겠다고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예요." 이괴가 화를 벌컥 내며 계집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괴는 맥없이 푹 고꾸라졌다. 오금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고는 누운 채로 버둥대기만 했다. 명치 끝이 칼로 쑤시는 듯하여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악! 아이구!" 이괴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계집이 종알거렸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나 아세요? 강남 구신산(九呻散)을 먹었어요. 또 한 번 더 기운을 써보시지요.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구. 흥!" 이들은 심한 자괴감에 몸을 떨었다. 강호에서 알아준다는 자신들이 한탄 계집 앞에서 수모를 당하다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너희들의 정체를 밝혀라! 혹시…… 강남 모용씨네 사람이 아니더냐?" 이괴가 아픔을 참아 가며 소리질렀다. "그래도 아직 앞가름할 정신은 있나보죠? 알았으면 됐어요. 그리고 한 가지 몸을 쓰려고 하면 안 돼요. 화도 내지 말고 운기(運氣)나 연공(練功)을 써도 안 돼요. 열흘 동안 가만히 있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당장 죽음을 부른다는 걸 명심하세요!" 자그마하게 생긴 계집의 입에선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지독한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은 대괴가 이괴의 손을 부여잡고는 통곡을 했다. "아이고, 동생, 모두가 내 탓이야. 내가 그만……." "형님을 탓할 수는 없소. 내가 경고망동을 해서……." 두 사람은 얼싸안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계집의 싸늘한 목소리가 두 사람을 덮쳤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모용세가의 사람이 된 줄 아세요. 이제부터는 대연국의 신하랍니다. 당신들의 시중은 내가 들어요." 계집이 무척이나 무표정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곧 강에서 방금 건진 물고기와도 같은 매끄러운 몸매가 드러났다. 계집이 두 사람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갖은 교태를 다 부렸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망각의 골짜기를 향해 들어섰다. 물리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서서히 계집을 껴안고는 욕정의 늪 위를 뒹굴었다. 최근 며칠 사이 영주에서는 밤마다 강호객들이 꽤나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었다. 지금까지 무려 30여명이 넘는 호객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로 갔으며 누가 데려갔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기이한 모습을 하고 뭇사내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여인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름아닌 둘째 아우 모용준의 여인인 자지였던 것이다. 자지가 왜 이곳 영주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무림대회에 참가한 모용준을 따라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모용준과도 헤어진 지 이미 오래라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모용준의 행방도 묘연한 지금 자지를 보게 된 것이 이들에게 기쁨이기는 했지만 모용준을 찾을 길 없어 내심 안타까웠다. 일단 두 사람은 모용준을 찾는 일이 급선무라 판단했다. 그래서 벌써 영주의 객점들을 모두 돌아보았다. 그러나 모용준은 없었다. "둘째는 돌아간 게 분명해. 차라리 강남에 가서 둘째를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왕중양이 힘없이 말하자 임조영이 그러자고 했다. 이들은 곧 영주성을 나와 드넓은 평야 위를 걸었다. 인연이 묘해서 그랬는지 이들은 공교롭게도 대형 막사가 세워져 있는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왕중양은 어느 부호가 노숙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왕중양이 유심히 그쪽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괜한 말썽이 생길지도 모르니 우린 돌아서 가는 게 좋겠어." 임조영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디선가 불현듯 요란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핫! 큰공자님과 셋째 공자님이 아니신가요? 왜 여기까지 와서 들어오시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 하십니까요?" 황급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뜻밖에도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두 사람은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 의아스럽기도 했다. "우리 공자님께서 두 분을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두 분을 만나지 못하면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정말 반갑습니다요." 지청이 두 사람을 모용준의 처소로 안내했다. 막사 안에 있던 모용준은 두 사람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달려나왔다. "아니 형님, 제가 얼마나 찾았는 줄이나 아십니까? 셋째도 역시……." 모용준이 두 사람을 막사 안으로 이끌며 사람들에게 일렀다. "어서 주안상을 푸짐하게 차려 오너라! 우리 삼형제가 오늘 모처럼만에 회포를 풀어야겠다!" 세 사람은 마주 앉아 흥겹게 술잔을 들었다. 모용준이 두 사람에게 있었던 그동안의 일에 대해 궁금해했다. 왕중양이 사가자와 싸운 이야기를 하자 모용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중원에서 뱀을 다루는 자가 몇 있지만 모두 개방 사람들인데 사가자란 이름은 처음 들어 봅니다. 중원 무림의 사람이 아니기 쉽군요." "무심 공자를 따라다니는 걸 봐선 몽골에서 데리고 온 작자일 가능성도 있지." 왕중양의 발언에 모용준이 수심어린 낯빛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앞으로 그 자를 만나면 조심해야 할 겁니다. 타관에서 온 그런 자들은 중원의 뱀을 부리는 사람들과는 달리 더욱 사악할 테니까요." 술잔을 들려다가 멈춘 모용준이 말을 이었다. "형님과 동생도 내 이 모용준이란 사람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난 목우와 주정의 일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감히 형님을 해치려 들었다니 정말 화도 나지만 부끄럽기도 합니다. 처음엔 두 놈이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길래 정을 생각해서 멀리 쫓아버렸지요. 그러나 생각할수록 괘씸해서…… 그래 부하들을 시켜 이 두 놈을 다시 잡아오라 일렀지요. 하늘이 도왔는지 두 놈의 덜미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모용준이 기침을 두번 하자 일기충천 지청과 절금수 허불잉이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두 사람을 앞으로 밀치며 들어섰는데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했다. 주정과 목우였다. "자지가 저와 혼례를 치른 뒤 많은 일을 도와주었답니다. 역시 이번도 큰일을 했답니다. 영주에 와서 나름대로 방법을 써 저 두 놈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날 저 두 놈이 주루에 나타난 것을 잡을 수가 있었죠." 왕중양과 임조영은 모용준의 말에 퍼뜩 깨달은 것이 있어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이 놈들, 어디 말해 봐라. 너희들에게 내가 섭섭하게 한 것도 없는데 어찌 형님을 해치려고 하였느냐?" 모용준이 곧 목이라도 칠듯 험악하게 꾸짖었다. "흥, 그때 난도질을 해서 태호에 쳐박았어야 하는 건데. 그랬더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테고……." 주정이 뉘우침 없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더니 대들었다. "난 공자님 혼자서 천하를 독차지하시라고 저 사람을 죽이려 했던 겁니다. 가만 놔두었다가는 필시 공자님과 천하를 다투게 될 테니 알아서 하십시오!" 이것은 목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뭐, 내가 천하를 독차지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공자님의 속셈을 제가 모를 줄 압니까? 천하를 차지하려는 일념으로 모든 쾌락도 다 저버리고 있다는 걸. 에잇, 내가 그때 저놈을 한칼에 베어버렸어야 하는 건데……." "이놈! 닥치지 못하겠느냐? 내 너희들을 수족보다 더 가깝게 여겼거늘 형님과 동생을 해치려 들다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다시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러자 모용준이 소리치며 외면했다. "난 이제부터 너희들과 형제가 아니다!" 그리고는 어서 데리고 나가 목을 치라고 지청에게 명령했다. 지청으로서는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이들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 사이로 지낸 터라 영 내키지 않았다. "공자님, 이번만은 너그럽게……." 지청이 사정을 하자 모용준은 더욱 대노하며 두 눈을 부릅 떴다. "듣기 싫다! 내 말을 거역한다면 너 역시 형제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동생, 그렇게 하게나. 저들을 용서해 주게나." 왕중양이 너그럽게 말하자 임조영도 거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들이 이렇게 무사하니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저들에게 이곳을 떠나 제 갈길로 가라 이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모용준이 흥분을 가라앉히더니 검을 쑥 뽑았다. 주정과 목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놈들! 똑바로 보거라. 이제부터 너희들과 나는 형제가 아니다. 이 검과 같이 제각기란 말이다!" 하고는 검을 두 동강내 버렸다. "어서 사라져라!" 모용준의 말이 떨어지자 곧 이들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고는 휭하니 나갔다. 모용준이 왕중양과 임조영을 향해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중양이 이해한다는 뜻으로 지긋이 눈을 감았다. 지청이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고, 내 정신 좀 봐. 깜박 잊을 뻔했네. 70년이나 묵은 좋은 술이 있어요. 강남 홍사장(紅蛇杖) 여노파의 성친주(成親酒)이지요. 이렇게 삼형제가 모였으니 그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겨 보십시오." 잠시 후 지청이 고색이 만연한 술병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겉만 봐도 보통의 술이 아니라는 게 확연했다. "예전의 강호 사람들은 그 괴상한 노파가 화김에 집을 몽땅 불살라버린 일을 모두 알고 있지요. 그 노파는 성깔도 그렇게 괴퍅하지만 술 만드는 법도 괴상하답니다." 지청의 말에 흥이 오른 모용준이 받아쳤다. "그래? 어떻게 만든단 말이더냐?" "예, 알려드리지요." 하며 지청이 그 술에 얽힌 이야기를 줄줄 외워 나갔다. 몇십년 전 무림에는 여소화(余小花)라는 기이한 여인이 살았다. 그녀는 송나라의 충신인 양계업(楊계業)의 부인 여색화(余색花)를 가장 흠모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여소화라 지은 것이다. 한창 피어나는 처녀 시절엔 이 이름이 좋았지만 늙어 주름이 가득하게 되자 걸맞지 않아 웃음거리로 남았다. 하지만 이 여소화라는 노파는 술빚는 기술이 특이하여 소문이 나게 되었다. 천하의 다른 술은 마시지 않을지언정 소화네 술은 꼭 마셔야 한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정말 그렇게 유명했단 말이냐?"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모용준이 묻자 지청이 제법 진지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