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34편 (34/60)
전 무심 공자님이 대인의 도량을 가졌다고 믿었는데 이러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요." 머리를 가로로 흔들던 옥총이 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무심 공자님, 그렇다면 절 놔두시고 가던 길이나 가보시지요." 무심이 입꼬리를 위로 치켜 올리면서 쏘아붙였다. "내 말이 틀렸단 말인가?" "물론입죠. 먼 옛날 천하가 어지럽던 전국시기에 제(齊), 초(楚), 조(趙), 진(晋), 이 네 나라 공자님들은 모두 가뭄에 물 구하듯 현인들을 구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천하를 얻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글쎄다. 나도 요행히 책을 접해 그런 역사쯤은 알고 있는데……. 하지만 천하를 얻은 공자는 없는 줄 알고 있다만." "맞아요. 천하를 얻은 사람은 없었어요. 허나 그 네 나라는 각기 네 명의 공자가 있었기에 먼저 멸망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공자들이 없었더라면 그 나라들은 벌써 망했을 게 분명합니다. 이런 이치로 보자면 무심 공자님도 대송 강산을 얻으려면 먼저 송나라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야 합니다. 민심만 얻으면 천하는 조만간에 손안으로 굴러들어오고 될 겁니다. 지금 공자님께서 나를 대하듯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고 내치려고 한다면 대송 강산은커녕 무림의 맹 주도 될 수 없을 겝니다." 옥총의 눈빛이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이 무심이 반드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악한이라 생각했다. 무심은 옥총의 말에 외눈 하나 꿈적이지 않고는 오히려 웃으며 좋아했다. 사실 그런 야심을 속으로 품고는 있었지만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했던 게 무심의 심정이었다. 일개의 옥총이었지만 대신 그것을 일깨워주자 기분이 흡족해졌던 것이다. "알았네. 내 자네의 말을 기꺼이 듣겠네. 그럼 우리하고 함께 가자구." 이렇게 말하고는 한쪽에 떨어져서 왕중양의 흔적이라도 찾고 있는지 두리번대고 있는 챵바를 불렀다. "이 사람을 업고 어서 여기를 뜨자." "난 싫어!" 엉뚱하게도 챵바가 뭉그적댔다. 그의 입은 불만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옥총의 죽 끓듯 하는 변덕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챵바의 소고집을 익히 알고 있는 무심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사가자에게 일렀다. "할 수 없군. 그럼 자네가 대신 수고를 좀 해 주게. 이 옥총을 자네가 업고 가야겠어." 사가자는 두말 없이 옥총을 등에 업었다. 이들은 천천히 다른 곳을 향해 떠나갔다. 왕중양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독기를 빼내고 서서히 원기를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젠 우리도 가야지." 왕중양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아까 그들이 있던 곳까지 나와 방향을 잡으려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띄어 주춤했다. 땅바닥에는 '궁전. 궁전'이라는 몇 글자가 씌어져 있는 게 아닌가. 손가락으로 다급하게 새긴 것으로 짐작되었다. 왕중양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옥총이 쓰러뜨리고 달아난 그 사람 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음성이 귀에 익은 듯하네. 근데…… 누구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저도 그래요.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가 분명한데……." 임조영의 눈길을 보는 왕중양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인 줄 모르고 결의형제를 맺겠다고 했으니…….' 그때의 일을 생각하던 왕중양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해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어디 가서 요기부터 하지?" 왕중양의 말에 임조영이 가볍게 주억거렸다. 그녀는 왕중양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흐뭇했다. 이들이 거리를 걷자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몰렸다. 아마도 천하의 미남 미녀를 보고는 감탄하는 모양이었다. 이들은 곧 한 주루에 들어가 술과 안주를 시켰다. 날라온 음식들을 먹고 있는데 이층에서 요란한 발짝 소리가 들려 왔다. 술시중을 들던 심부름꾼의 방정맞은 말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이구, 귀객들이 오셨는데 뭣들 하는 거야! 귀객들이 오셨다고!" 누 아래에 있던 심부름꾼들마저도 그 소리에 우당탕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귀객이란 누구요?" 왕중양이 급히 한 사람을 붙잡고는 물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도 잘 모른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곧 이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이윽고 아래로 다시 내려온 심부름꾼 중 하나가 느릿느릿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왕중양이 그를 불러 재차 물었다. 그가 설명해 주었다. "황궁의 황비낭랑이 나오셨어요. 글쎄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영주까지 다 오셨는지……. 벌써 사흘인가 나흘인가 되었다고 합니다. 궁에서 데리고 나온 시녀들만 삼백이 넘는대요. 그때 한 강호객이 그 여인의 교자를 붙잡고는 미모를 보겠다며 늘어졌지 뭡니까. 은 오십 냥이나 바치겠다면서 고집을 피웠어요. 그 강호객은 보나마나 녹림대도(綠林大盜)였지요. 그 녹림대도는 물론 이 여인의 신분을 모르고는 그런 고집을 부린 겁니다요. 문발을 한 번만 거두어 미모를 보여 준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사정을 했지요." 왕중양과 임조영의 시선이 마주쳤다. 영주라는 곳에 이렇듯 기이한 일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천성이 남에 대해 미주알고주알하는 게 특기인지 심부름꾼이 더욱 열을 올리며 계속 나불거렸다. "녹림대도가 그렇게 말하자 교자 안의 여인이 대답했습죠. 은자만 내면 자기 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고. 그러자 다시 녹림대도가 사정을 하니 여인은 다른 사람을 물리라고 했습죠. 녹림대도가 곧 여인의 분부대로 했습니다요. 그렇지만 기막힌 구경거리를 놔두고 어떤 놈이 물러가겠습니까? 오히려 히히거리며 자리를 뜨지를 않았지요. 그 강호객이 그중 한 놈의 뱃구레를 발로 걷어차 버리는 불상사까지 일어났지 뭡니까." 함창 신명을 떨어가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심부름꾼이 그 일이 눈에 보이는지 입을 헤 하고 벌렸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고는 뿔뿔이 흩어지게 이르렀습니다. 드디어 문발을 거둔 여인이 녹림대도의 소원을 들어주었지요. 비록 면사포에 가려져 있었지만 대단한 미색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임조영이 궁금한 점이 있어 그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고 달아났는데 당신은 어찌 그것을 볼 수 있었나요?" 그러자 심부름꾼이 헤헤 웃었다. "난 그때 주루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거든요. 나는 그 자가 오십 냥짜리 은자를 열 개나 내놓는 것도 똑똑히 보았어요. 그러자 여인이 면사포를 벗었어요. 그 자의 입은 술독만큼 벌어졌지만 곧 여인이 그만 가자고 하지 뭡니까. 헌데 교자가 꿈쩍도 하지 않는 거예요. 보니 그 자가 교자를 놔주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어요. 자기는 원래 무림의 맹주가 되고자 이곳 영주까지 온 몸인데 다 집어치우고 은자로 여인을 사는 일에 목숨을 걸겠다지 뭐예요. 그 자가 품에서 은표) 열몇 장을 꺼내 보였어요. 여인이 그게 전부 얼마나 되냐고 물었어요. 오백 냥이라고 대답하자 여인이 자기 시녀 하나를 불러 자기들의 지니고 있는 은표 뭉치를 내보이라고 했어요. 시녀가 은표 뭉치를 꺼냈는데 어마어마한 액수였어요. 여인이 말하기를 그 은표를 줄테니 가서 다른 여인이나 알아보라고 했어요. 교자가 이윽고 움직이려는데 그 자가 교자를 향해 칼을 꺼내 들었어요." 말을 중단한 심부름꾼은 그후 어떻게 되었겠냐는 투로 왕중양을 쳐다보았다. 왕중양이 눈만 껌벅이자 다시 심부름꾼이 말을 이었다. "그자는 그만 코를 땅에 박고는 엎어지고 말았죠. 여인도 또 그 누구도 그 자를 향해 손을 쓰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요." 그게 사실이라면 보통의 여인은 아닐 거라 여겨졌다. "그래, 그 여인이 바로 저 아래에 와 있다는 말이요?" 왕중양이 운을 떼자 심부름꾼이 반색하며 받아쳤다. "물론 그 여인이고말고요. 정말 대단한 미인입니다요. 여기 계신 분도 미모가 뒤떨어지지는 않지만……." "그런데 그 여인은 왜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나요? 혼자 온 건가요?" 임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심부름꾼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왜 혼자겠습니까요? 처음엔 혼자 오는 것같더니만 그 후로는 여러 사람과 대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강호 사람들이죠. 그들도 처음에 여인과 생면부지인 처지였지만 차츰 가깝게 지내게 되었죠. 지금은 여인과 알고 지내는 강호객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예요." 도대체 누구일까? 왕중양과 임조영은 또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토록 영주까지 와서 수많은 강호객들을 사귀는 여인의 정체에 대해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답답함만 늘어갔다. 심부름꾼이 나섰다. "강호객들은 술을 마신 뒤 여인을 따라 어디론가 가곤 하는데 이상한 것은 그때마다 여인은 별로 취하지 않은 것 같고 오히려 취한 건 강호객들이었죠." 심부름꾼의 말에 왕중양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한 번 그 여인을 만나보지 않겠어요?" 하고 제의를 한 것은 임조영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왕중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조영이 먼저 일어섰다. 왕중양도 뒤따라 몸을 일으켜 그녀와 함께 윗층으로 올라갔다. 제20장 다시 만난 의형제들 왕중양과 임조영은 나란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 주루는 대단히 큰 규모여서 두 사람이 나란히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를 않았다. 이층에 올라간 두 사람은 눈앞의 광경에 약간 놀라고 말았다. 이층에는 강호 사람들로 보이는 인물들로 빈자리 하나 없이 들어차 있고 그 열기 또한 대단했다. 중간쯤에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앉아 있고 그녀 주위로 한 무리의 시녀들이 서 있었다. 시녀들 역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미색이었다. 여인이 걸치고 있는 의복은 호화스러웠고 신발도 귀한 구슬들이 박혀 있어 미색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여인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임조영은 조금 무안 한 기색을 띠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 역시 왕중양 앞에서 그렇게 자신을 감추고 다녔기 때문이다. 수많은 강호객들은 여인의 손짓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면서 저마다 사내임을 뽐내고 있었다. "난 이미 석 잔이나 마셨는데 어떠신가요?" 여인이 앞에 앉은 중년의 사내에게 촉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의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술이 너무 과해져서 그만두겠소." "호호호, 그래요? 그것 참 모를 일이네요. 제가 알기로는 제갈풍운(諸葛風雲)씨께서는 미인과 마주앉아 큰 사발로 무려 열 차례나 술을 비웠다고 하던데요? 그래, 제가 그 여인보다 못하다는 말씀인가요?" 제갈풍운이라 불린 사내가 허허 웃었다. 십 년 전의 그 일이 떠올라 아주 흐뭇한 모양이었다. 그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니라 내 나이가 원망스럽소. 그때처럼 청년의 나이였다면 몰라도……, 허허허."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한 젊은 사내가 제갈풍운의 웃음을 받으며 지껄였다. "하하, 하긴 그렇겠네요. 제갈 노형의 나이는 이젠 좀 많지요." 제갈풍운이 인상을 썼다. 자기 입으로 나이가 어떻고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새파랗게 젊은 놈이 옆에서 이죽거리자 은근히 노기가 뻗쳤다. "누군데 함부로 지껄이는 거요?" 제갈풍운이 버럭 화를 내자 젊은 사내 역시 뒤질세라 맞섰다. "당신보다 젊은 사람이외다."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턱턱 발소리를 유난히 내며 제갈풍운 앞으로 다가왔다. "제갈 노형, 나이가 많으니 적으니 하는 말은 내가 아니라 노형께서 먼저 꺼낸 것이오. 그리고 늙었으면 나이에 맞게 처신을 할 것이지 젊은 여인 앞에서 무슨 추태요?" 젊은 사내가 앞뒤 잴 것도 없이 빈정대는 투로 몰아붙이자 제갈풍운이 호통을 쳤다. "아니, 이 건방진 놈이 죽지 못해 환장을 했나?" 어느새 뽑아든 검날이 섬뜩한 기운을 내며 젊은 사내의 가슴을 겨누었다. 그러나 미인 앞이라 그런지 젊은이도 굽신거리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허, 이런다고 내가 벌벌 떨 줄 아시오?" 젊은이와 제 손에 들려있는 검을 번갈아 보던 제갈풍운의 눈이 휙 돌아갔다. "흥, 네 놈이 계속 날 깔보겠단 말이지?" 하며 검끝을 쿡 들이밀자 그제야 젊은이는 예전의 그를 떠올리며 조금 수그러드는 자세를 취했다. "선배님, 저 미인에 비하면야 늙은 게 사실 아닙니까?" 제갈풍운이 검을 단단히 틀어쥐며 또 한 번 호통을 쳤다. "뭐라구! 하기야 늙긴 늙었지만……." 제갈풍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옥구슬 구르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오호호호, 제갈 대협님, 왜 이러세요. 저 사람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제 눈에 그렇게 보이지만 않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러자 비로소 검을 거둔 제갈풍운이 여인을 돌아보았다. 비록 얼굴은 가리고 있으나 황홀함을 주기에 충분한 미색의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한풀 기가 꺾인 어조로 대꾸했다. "아가씨의 말대로 난 늙었소. 하지만 다른 놈이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소!" 그러면서 그가 풀썩 주저앉았다. 자기가 던진 말 한마디에 사태가 평정되자 스스로 흡족해진 여인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누군지 내가 한 잔 마시면 자기는 열 잔도 더 마시겠다고 한 분이 있었는데 누구시던가요?"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 저쪽에서 한 사내가 고개를 쳐들며 일어섰다. "바로 나였소이다. 아가씨가 원하시다면 독주라도 기꺼이 마시겠소." "호, 그러나저러나 뭐라고 부르시나요?" 그러면서 여인이 눈을 묘하게 뜨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 요염한 자태는 사내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나는 북방에서 온 조평(租平)이라는 사람올시다." 이내 주위가 술렁임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이 사내가 그럼 경성 4대 집안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던 그 독각대도(獨脚大盜) 조평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놀란 입을 좀체 다물 줄 몰랐다. 사람들은 조심스런 눈길을 조평에게 주었다. 조평이 좌중을 한차례 쓰윽 둘러보았다. 그는 매우 득의에 가득찬 표정이었다. "저도 아직 아가씨의 이름을 모릅니다. 하지만 들리는 말로는 거리에서 사수양괴(泗水兩怪) 중의 하나인 대괴어령(大怪魚靈)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조평의 물음에 다른 사람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는 여인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이면 어쩌자는 거죠?" 여인이 정색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목소리에 냉랭함이 감돌았다. "그 사수양괴는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지 않소?" "그래요?" 여인이 피식 웃었다. 조평의 말에 그녀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날 아가씨에게 맞은 그 놈이 반나절이나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니 정말 대단한 솜씨로군요." 조평이 눙치는 투로 얼른 그녀를 부추기며 나왔다. "글쎄, 그 사람이 그까짓 은자로 내 몸을 사겠다고 하니 화가 이만저만 나는 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별 수 없이……." 왕중양은 이제서야 심부름꾼이 한 말이 사실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처럼 큰 일을 저질러 놓고도 태연하게 사내들과 노닥거릴 수 있다니 보통 여인이 아닐 거란 생각도 뒤를 이었다. 조평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사수양괴는 지금껏 남에게 꺾여 본 적이 없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놈들입니다. 이곳에 온 것도 사실은 무림의 맹주 자리를 차지해 볼 야심으로 온 것이지요. 그런데 아가씨에게 망신을 톡톡히 당했으니 모르긴 해도 가만있지를 않을 겁니다." "그만 떠들고 앉아서 술이나 마셔요." 여인이 귀찮다는 기색으로 조평의 말을 툭 잘랐다. 조평은 무안하기도 하고 은근히 화도 나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여인에게 수모를 당하니 여간 밸이 꼬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뭇사내들이 어쩌면 여인의 편을 들고 나설지 모른다는 판단에 그는 노기를 억눌렀다. "아가씨, 난 오직 그대가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었소." 조평은 그 한마디만 던지고는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곤 술 두 잔을 쉬지 않고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여인의 감드러진 웃음 소리가 뒤를 따랐다. "호호호, 그래요.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그렇게 술이나 마시라고요. 일취해천수(一醉解千愁)라는 말도 있잖아요?" "맞아. 일취해천수라! 거참, 멋들어진 말이로군!" 좌중에서 누군가 이렇게 맞장구치며 나섰다. "나는 오늘날까지 강호에서 남에게 당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예요. 이렇게 집을 떠나서도 마찬가지였죠." 여인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녀의 말속에 행여 자기들이 기대한 것이 들어 있을까 귀를 기울였다. 혹시 그녀의 신분을 더듬어 볼 만한 것이 있나 해서였다. 그러나 여인은 이미 그같은 뭇사내들의 눈빛을 읽어 냈는지 한 마디로 일축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후에 꼭 알게 될 테니 서두르지 마세요. 설혹 사수양괴와 싸움이 붙는다 해도 저 혼자 나설 테니 여러분들은 염려 말고 술이나 마시라고요." 여인이 흐트러진 몸짓으로 사람들을 향해 한창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데 아래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 거만한 계집이 어디 있냔 말이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사수양괴가 쳐들어왔구나 하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전혀 동요되는 모습이 아니었다. 꼼짝도 않고 앉아서 빈 술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곧 두 괴한이 쿵쿵 계단을 올라왔다. 여인에게 참패를 당했던 그 사내와 또 다른 사내였다. 수모를 당한 사내가 뒤의 사내에게 툭 내뱉었다. "아우, 바로 저 계집이야. 저 계집!" 말하는 것을 보아서는 뒤에 있는 사내가 동생인 듯싶었다. 그런데 형뻘이 되는 사내가 일러바치는 것을 보니 동생이 더 무공이 뛰어난 모양이었다. 동생이 여인을 향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네 년은 누구길래 우리 사수양괴를 우습게 보는 거냐?" 여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 사이로 뛰어들었다. 조평이었다. 그가 여인을 대신해 사수양괴아 대적하려는 듯 자세를 취했다. "이봐!" 조평을 뒤에서 제갈풍운이 불렀다.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당신들이 정말 사수양괴가 맞소?" 여인이 여유 있는 태도로 물었다. "우리가 누구든 상관 말아!" "난 지금 여기서 호걸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예요. 볼일이 있거든 술자리가 파한 다음 보기로 해요." "……." 여인은 끝까지 애교와 거만함을 잊지 않았다. 동생 이괴(二怪)는 여인의 자태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형인 대괴(大怪)는 영 풀리지 않는 울화로 애가 타서 동생인 이괴에게 어서 손을 쓰라고 눈짓을 보냈다. 이것을 얼른 알아차린 여인이 이괴에게 눈웃음을 치며 다시 매끄러운 목소리를 뿌렸다. "그래 당신이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이괴가 미적거리며 슬쩍 형인 대괴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뭐, 그럴 생각까지는 없고, 우리 형님이 아가씨의 어굴 좀 보자는데 너무 하지 않았나 해서……." 여인이 깔깔대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언젠가 강회(江淮)로 오는 길에 또 신력(神力) 허명(許鳴)이란 사람이 그런 요구를 하더군요. 그래 난 은자 3천냥을 내면 응하겠다고 하였지요." 여인이 털어놓는 말에 사람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신력 허명이라 하면 대력 허패의 동생인데 그 무공이 사수양괴보다 월등한 자였다. "그 신력 허명을 내세워 우리를 눌러보겠다는 뜻이오?" 퍼뜩 정신을 차린 이괴가 여인을 노려보았다. "호호, 그렇지는 않지요. 난 오직 그깐 은자 5백냥으로는 날 어쩌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네가 황후낭랑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무슨 낯짝값이 그리도 비싸? 도대체 얼마면 되는 게냐?" "딱히 정해진 값이야 없지요. 내 마음에 내키는 사람에게는 한푼도 받지 않고도 보여 드리니까. 허나 그런 위인은 이 강호에서 꼭 세 분밖에는 없어요." 사람들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과연 이 여인이 강짜 한 번 부리지 않고 다소곳이 대한다는 호걸은 누구일까?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이 누구요?"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누구지?" 여기저기서 떠들어댔다. 왕중양과 임조영 역시도 여인의 말에 흥미가 일었다.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또 그 호걸들은 과연 누구 누구일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러나 막상 말을 꺼낸 여인의 태도가 좀 이상해졌다. 긴 한숨만을 탁자 위로 길게 부려 놓으며 탄식을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휙 돌아보던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는 그 세 사람은 여기에 없어요." "그럼 누군지 어서 속시원히 말해 보라구?" 이괴가 자기 가슴을 꽝꽝 내리치며 다그쳤다. "내가 말한 그 세 분 중에 첫째는, 조금 전 영주 들판에서 천하 무림의 맹주로 추대되신 왕중양이예요. 그는 당대의 영웅이지요." 여인이 이윽고 입을 열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왕중양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터라 누구 하나 그를 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그 벌판에서 금나라 기병들을 물리치는 광경을 지켜본 사람도 끼여 있어 여인의 말에 고개마저 끄덕였다. "왕중양이라면 이해가 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