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33편 (33/60)
이번엔 왕중양이 사가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부리는 뱀들을 보니 모두 독사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놈들 같은데 어떻게 길들였소?" 왕중양이 제법 진지하게 물어 온다고 느꼈는지 사가자가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한 번 내더니 대꾸했다. "내 가르쳐주지. 천하의 독사란 오독(五毒) 중의 상물(上物)과 성미들이 엇비슷하여 오직 그 독성을 잘 파악하기만 하면 부리지 못하는 독사는 없지. 헌데……." 사가자가 갑자기 말꼬리를 감추고는 화를 버럭 냈다. 왜냐하면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이 처음과는 달리 성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왕중양은 빙그레 웃기까지 하고 있어 더더욱 기분이 틀어졌다. "오라, 네 놈들이 나를 부추겨 그 비결을 알아내려고 하는 게지? 그래 비결은 알아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 것이냐?" 그가 태도를 바꿔 다시 으르렁대자 왕중양이 얼른 임조영에게 눈짓했다. 알겠다는 기색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인 임조영이 먼저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뒤를 따라 왕중양도 몸을 솟구쳤다. 이들은 아름드리에다 높이도 만만하지 않은 한 나무 위로 가볍게 오른 것이다. 이 나무 역시 독사들이 에워싸고는 있었지만 높이가 있어 안전하리라 믿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각각 다른 나무에 올랐는데 그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거의 자기와 같은 높이로 마주하게 되자 사가자가 투덜댔다. "왕중양, 정말 끝까지 속을 썩히는군. 그저 가만히 있으면 제 목숨대로 살 수 있을 텐데, 왜 맹주 노릇은 자청하고 나선 게지? 그러다가 죽으면 누구를 원망할 셈인가?" 말끝을 비온 뒤 드러난 돌부리처럼 삐죽 세운 사가자가 다시 사소를 불어댔다. 독사들은 그 소리에 맞춰 두 사람이 있는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두 사람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독사들은 신기하게도 땅에서보다 더 무서운 기운으로 꿈틀꿈틀 오르는 게 아닌가. 독사들이 줄을 지어 새카맣게 두 사람이 있는 나무로 오르자 사가자가 낄낄대며 좋아했다. "이제 너희들은 귀신이 될 테지. 그것도 살점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백골귀신이 될 텐데 볼만하겠구나!" 그러면서 그는 사소를 휘릭 휘릭 더욱 빨리 불어댔다. 대가리를 꼿꼿하게 세운 독사들이 그악스럽게 왕중양의 다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른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있던 왕중양은 검을 쓰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가지 하나를 뚝 잘라 힘껏 내던졌다. 선천신공이 담겨 있는 그 가지는 곧바로 막 임조영에게 혀를 낼름거리는 독사에게로 날아갔다.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간 가지가 독사의 대가리를 꿰뚫고는 나무에 깊이 박혔다. 임조영도 같은 방 법으로 독사들을 물리치려고 했다. 나뭇가지를 꺾어든 그녀는 역시 기를 넣어 독사를 향해 던졌다. 그녀의 무공도 대단했기에 독사들은 영락없이 대가리에서 피를 뿜었다. 그녀가 쓰고 있는 법수는 옥녀심경법(玉女心經法)으로 그 동작과 파괴력이 가히 으뜸이었다.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구나!" 사가자가 비아냥거렸다. 그는 대가리가 찢긴 채 나무에 처박힌 독사를 가엾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계속 눈알을 굴리며 악을 썼다. "어차피 죽을 목숨들인데 그렇게 발악해서 무엇 하겠어? 괜한 시간 낭비 말고 어서 죽을 준비들이나 하라구!" 왕중양과 임조영은 사가자가 떠들어대는 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은 계속 기어오르는 독사들을 향해 나뭇가지를 꽂았다. 그럴 때마다 단 한 번도 빗나가는 법 없이 독사들이 피를 뿜었다. 이들은 또 자신들이 매달려 있는 나무뿐만 아니라 서로를 향해 가지를 던지기도 했다. 왕중양의 다리에 휘감기려는 독사는 임조영이 막아주었고, 그녀 역시 왕중양이 날린 가지로 인해 위험을 넘겼다. 이렇게 해치운 독사가 무려 백 마리를 넘겼다. 이 독사들은 마치도 새롭게 돋아난 가지처럼 나무에 다닥다닥 매달려 보기에도 흉칙스러웠다. "너무 뻐기지 말라구. 너희들이 죽인 뱀은 별 것 아니니까. 난 수십만 마리도 넘는 독사를 갖고 있거든. 내가 사로를 불어대기만 하면 천지에 널려 있는 온갖 독사들은 다 몰려오게 돼 있지. 히히히, 그리고 네 놈들은 끝내 나뭇가지를 다 써버리고 나면 꼼짝없이 독사에 물려 죽게 될 테니 어디 그때까지만 용을 써보라구!" 사소소리가 더 집요하게 그리고 길게 이어졌다. 보이지 않던 독사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차라리 내려가 사가자를 칩시다!" 그러나 사가자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독사밭에 쓰러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왕중양은 이제 달려 있는 나뭇가지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위축이 되었다. 검을 뽑아들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검을 독사를 향해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이 나게 될 것이다. 결론은 검으로 가까이 접근해 온 독사를 내리치는 것인데 그것은 끝도 없는 사투가 될 것 같았다. "무림대회에서 너희들이 얼마나 위엄을 떨쳤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보기에는 용기없는 소인배와 다를 게 없다! 용기가 있다면 어서 내려와 나를 죽여 보시지 그래?" 사소 가락이 빨라질수록 독사들은 더욱 포악스럽게 대가리를 쳐들고는 기어올랐다. 이미 나뭇가지에 막고 죽은 다른 놈들을 타넘고 기어오른 독사들에게서 역한 냄새가 풍겨났다. 왕중양은 발로 힘껏 독사 대가리를 차 버렸다. 몇 마리의 독사가 아래로 떨어졌지만 별로 표시가 나지 않았다. 뒤를 이어 오르고 있는 독사들이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 죽은 채 매달려 있는 놈들과 그 위를 타넘고 있는 놈들 때문인지 왕중양이 서 있는 굵은 가지가 우직 부러지려고 했다. 원 래의 아름드리 나무에 매달려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가 있었겠지만 겨우 사람의 팔뚝만한 가지에 올라 있는 처지라 위태로웠다. 이같은 위기를 먼저 맞게 된 것은 임조영 쪽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가지가 우지직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막 부러지려 했다. "어서 뛰어내려!" 왕중양이 그쪽을 향해 급히 소리질렀다. 우직! 왕중양이 있는 가지에서도 더 크게 소리가 났다. 이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는 몸을 띄워 공중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각자 어깨와 머리로 방향을 조정하고는 아래로 빠르게 내려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사가자가 재빨리 사소를 불어댔다. 두 사람이 내려앉을 곳을 미리 계산해 두었다가 그곳으로 독사를 모으려는 수작이었다. 사가자의 이같은 술책이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이 사뿐히 내린 곳에는 어느 틈엔가 몰려든 독사들로 우글거렸다. 임조영이 황급히 발을 구르며 그중 몇 마리를 압사시켰다. 왕중양도 연신 발꿈치로 기어오르려는 독사를 쳐죽였다. "악!" 임조영의 비명소리였다. 그만 그녀가 독사에게 다리를 물린 것이다. 외마디의 비명을 토한 임조영이 비틀거리자 얼른 왕중양이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어서 이곳을 피하세요!" 검을 꺼내든 임조영이 독사를 내리치며 다급하게 내뱉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제 걱정 마시고 어서!" 그러면서 임조영이 다시 검으로 바닥을 훑었다. 바닥에서 물결을 이루고 있던 독사 중 수십 마리의 것으로 보이는 대가리들이 동시에 피를 뿌리며 튀어올랐다. 임조영의 검에 잘려 나간 독사의 대가리를 보던 사가자는 더욱 사소를 빨리 불어댔다. "야 앗!" 사소를 불고 있는 사가자를 향해 왕중양이 덮쳐 들었다. 비로소 왕중양이 자기의 곁을 떠나자 임조영은 정신을 바싹 차리며 검을 힘있게 틀어쥐었다. 범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사가자에게로 날아간 왕중양이 손을 뻗었다. 번쩍! 어깨춤까지 춰가며 사소를 불어대던 사가자가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의 손에서 사소가 떨어졌다. 왕중양의 장에 머리를 얻어맞은 그는 돌풍을 만난 삭정이처럼 사정없이 굴렀다. 그가 데굴데굴 구르면서 깔려 있던 낙엽들을 일제히 일깨우는 바람에 온 천지가 낙엽으로 뒤덮일 지경이었다. 큰 나무 밑둥에 가 퉁 하고 부딪친 사가자가 신음을 토했다. "으…… 으 내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보다!" 왕중양이 파파파팍! 하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왕중양의 신기한 보법을 보던 그가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저 독사들을 거두어 가지 않으면 당장 살아 있는 네 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왕중양이 멈칫 걸음을 세우며 겁을 주자 사가자가 나무 뒤에서 눈만 빠꼼히 내밀었다. "젠장, 오늘은 내가 몸이 안 좋아 물러가지만 다음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네 놈을 산 채로 씹어먹을 테다!" 왕중양의 두 다리를 유심히 살피며 사소가 떨어진 곳까지 조심조심 달려온 그가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휘이 휘이 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락을 뽑자 곧 독사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는 처음 나타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여유스런 몸짓을 하며 독사들을 이끌고는 멀리 사라져 갔다. "아아……." 신음소리? 왕중양은 퍼뜩 임조영이 떠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낮게 신음을 내뱉으며 막 바닥으로 허물어지려는 찰나였다. 한 걸음에 달려간 왕중양이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두 볼은 매우 창백했고 사지가 축 늘어진 것이 위급한 지경에 빠진 상태였다. 임조영의 눈빛이 강하게 타올랐다. 그녀는 내공으로 몸에 번진 독을 내몰고 있는 중이었다. 영주의 독사는 지독하기로 이름이 나 있는 것이라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임조영을 번쩍 안아올린 왕중양 은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저를 내려 주세요. 아직 독이……." 임조영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왕중양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에는 너무 늦을 거라 판단되었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그녀의 몸속에 있는 독을 빼내는 것이란 사실을 절감한 왕중양이 그녀를 다시 내려놓았다. 임조영이 자세를 겨우 추스려 앉자 왕중양도 그녀 뒤로 가 가부좌를 틀었다. 왕중양은 그녀의 등뒤에서 함께 일심정력을 다해 독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임조영을 도와 독을 빼내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을 때 갑자기 두 사람으로 짐작되는 그림자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뒤늦게 알아차린 왕중양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이들은 코앞까지 접근해 왔는데 미처 왕중양과 임조영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네네 공자는 그저 말뿐이야. 여지껏 행동으로 보여준 게 뭐 있나?" 한 사내가 입을 떼자 곧 다른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공자님을 탓할 게 아니지. 아직 그럴 시기가 되지 않았으니까. 때가 되면 공자님이 가만 있겠나? 다 알아서 자네를 기쁘게 해줄 걸세. 그러니 당분간은 좀 참고 기다리라구." 그중 한 사내의 낯이 익었다. 그랬다. 얼마 전 반벽산장에서 그곳 장주 유기를 즉인 옥총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일을 하고 나서는 하루도 편히 잠을 자 본 적이 없어. 눈만 감으면 꿈에 그 사람이 나타나 날 미치게 만들지 뭔가." 옥총이 얼굴을 찌푸리며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근심이 병이라고 하는 거야. 근심이 많으니 꿈도 많고 그러다보니 괴상망측한 꿈에도 시달리게 되는 법이라니까. 그러니 근심을 버리게나." "근심이 안 되게 되었어? 유기와 가깝게 지내던 벗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저러나 누가 유기와 가깝게 지내는 인물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어? 젠장, 이러다가 그들의 손에 칼침을 맞고 비명횡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옥총의 말에 다른 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계속 나는 걸 보니 그중 한 사람은 극히 초조해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안절부절못하고 발로 떨어진 낙엽들을 툭툭 차고 있는 소리일 거라 왕중양은 생각했다. 잠시 후 곧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던 사내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사정은 알겠는데 어쩌라는 말이야?"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옥총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듣자하니 자네 공자님 집안에는 그럴듯한 지하궁전이 있다던데……?" "뭐라고? 이 사람이 지금 잠꼬대를 하나?" 사내가 펄쩍 뛰면서 옥총을 나무랬다. 옥총이 빙긋 웃는 모습이 보였는데 누런 이빨이 다 드러났다. "참, 그렇게 날뛸 건 또 뭐요? 그대가 잡아뗀다고 모를 줄 알아. 모두들 다 알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내색 안 할 따름이라고." "허,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공자님에게 말 좀 해주게나. 그 궁전을 내 은신처로 삼고 싶다고 말이야." 왕중양과 임조영은 옥총과 말을 주고받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얼른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임조영의 몸에 든 독을 빼는데 더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라 그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또한 옥총과 마주보고 있는 이 상대는 등을 보이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임조영의 몸이 약간 움직이는 것 같자 왕중양이 더욱 강하게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밀어 주었다. 한편 옥총과 그 상대는 끊임없이 소곤대며 말을 주고받았다. 왠일인지 목소리가 너무 작아져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중양이 날카롭게 그쪽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옥총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을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이 개만도 못한 놈!" 옥총은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아마도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은 모양이었다. "공자님이 너 같은 놈을 궁전에 들일 거라 생각했더냐? 그곳은 모두 여인들뿐이지. 거세도 하지 않은 너를 그 궁전에 들였다가 무슨 뒷감당을 치르려고?" "으, 으……." 옥총의 양팔이 더욱 거세게 허공을 긁어대더니 이내 꿍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마터면 공자님 대사를 망칠 뻔했잖아." 사내가 혼자 씨부렁대며 손등을 슬그머니 옥총의 코끝에 갖다 대었다. "음, 아주 확실하게 손을 봐야지." 하며 그가 무언가를 머리 위로 치켜들더니 옥총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 이때 사람들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나자 그 사내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달아났다. 왕중양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무심과 그 황소보다도 힘이 센 미련한 챵바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 한 사람이 더 보였는데 뜻밖에도 아까 그 사가자였다. "그들 중 분명 하나가 다쳤다는 말이지?" 무심이 사가자에게 약간 흥분된 목소리를 던졌다. 그토록 사악하게 굴던 사가자가 어찌된 영문인지 무심 앞에서는 설설 기는 모습이었다. "물론이고 말고요.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요. 분명 여인이 뱀에게 물려 지금쯤은 죽어가고 있을 겝니다. 그런데 꽤나 미인이더라구요. 히히." "사내가 아니고 여인?" 이렇게 반문한 것은 챵바였다. 사가자는 챵바의 말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사실 챵바는 은근히 임조영을 마음에 품고 있던 참이었다. 임조영의 미모에 반해 가뜩이나 그리워하고 있는 판국인데 왕중양이 아닌 그녀가 다쳤다는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걱정 마십시오. 다음엔 꼭 이 사가자가 왕중양의 아가리 속에 뱀을 쳐넣으리다." 사가자가 헤죽거리며 비위를 맞추자 챵바는 더 이상은 다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르나?" 무심이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힐끔 둘러보며 다시 사가자에게 물었다. "글쎄요. 내 독사에게 한 번 물리면 서른 걸음도 못 가서 즉사를 하는 법인데 정말 요상합니다요. 사내가 부축을 해서 이쪽으로 가는 걸 보긴 했지만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네요. 여인은 죽고 사내가 그 시체를 떠메고 갔다고 해도 그리 멀리 벗어나지는 못했을 텐데……." 사가자의 심드렁한 대꾸에 무심이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무심이 몇 걸음 옮기며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어 그닥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왕중양은 긴장하며 소리를 죽였다. 이제 임조영의 몸에서 거의 독을 빼내 가고 있지만 쉽게 움직일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무심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두 사람을 없애는 방법밖에는 없어!" 그러자 챵바가 심통스럽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여인은 왜?" 무심이 기막히다는 눈길로 챵바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왕중양은 꼭 없애버려야해.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몽골이 금나라나 송나라와 대적할 때 화근으로 남게 된단 말이야." 왕중양은 이제 무심이 왜 자신을 이토록 증오하는지를 알았다. 무심의 속셈을 알게 된 왕중양은 분노가 치솟아 올랐지만 어쩌지 못하는 그 상황에선 타오르는 눈길로 쏘아볼 뿐이었다. 그런데 사가자가 별안간 몸을 사리며 큰소리로 외쳐 댔다. "저기 사람이 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자신들이 발각된 줄 알았다.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므로 왕중양은 큰 위기감을 느꼈다. 혼자의 몸이라면 얼마든지 저들과 상대할 수 있겠지만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임조영이 곁에 있는 한 섣불리 싸움에 나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무심과 챵바 그리고 사가자가 이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임조영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게 변해갔다. 그런데 중간쯤에서 걸음을 우뚝 세운 무심이 허리를 굽히며 발 아래를 보는 게 아닌가. 이들은 쓰러져 있던 옥총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었다. "에이, 벌써 죽은 사람이잖아. 살아있는 놈 같았으면 내가 독사를 불러 한바탕 놀아 볼까 했는데……." 사가자가 간죽거리는데 무심이 손을 들어 입을 다물라는 동작을 취했다. "숨결이 아직 붙어 있는 것 같다." 무심이 얼른 옥총 곁에 앉으며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음, 역시 아직 죽지 않았어." "정말입니까? 어디 나도 한 번 들어 봅시다." 사가자가 설레발을 치며 옥총의 가슴에 귀를 바싹 갖다 댔다. 한쪽 눈을 묘하게 치켜 뜨던 사가자가 히죽 웃었다. "흐흐, 정말 아직 죽지 않았네." 얼른 몸을 일으킨 사가자가 무심에게 속삭였다. "제게 있는 사담고심환(蛇膽苦心丸)을 한 알만 먹이면 벌떡 일어설 겁니다." 무심이 어서 그렇게 하라고 이르자 사가자가 품속에 있던 환약을 꺼내 옥총의 입 속으로 밀어넣었다. 사가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잠시 후 옥총이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고는 눈을 떴다. "당신들이 나를 살렸소!" 옥총이 무심에게 읍을 하며 감격해 했다. "그렇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자네는 그 반벽산장에서 남을 도와 자기 형제를 죽인 그 옥총이란 사람이지?" 무심의 질문에 옥총이 애써 반색하며 허리를 또 약간 숙였다. "무심 공자님, 잘 아시면서 뭘 또 물으십니까요. 전 원래부터 해불개 형님의 수하입니다." 옥총의 번들거리는 태도에 무심이 상체를 뒤로 젖혀 웃었다. "아니 왜 웃으십니까요?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옥총이 애가 타는지 이마에 잔뜩 주름을 그어대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냐, 그런 게 아니고. 난 자네가 해불개의 수하라는 건 벌써 알고 있었다네. 다만 난 자네가 견식이 형편없어 웃었을 뿐이라네." "예? 그건 또 무슨 뜻이죠?" 무심이 비웃듯 바람 소리를 피식 내며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새는 나무를 가려 깃을 만들고, 대장부는 주인을 가려 섬긴다는 말이 있지. 내 말은 자네 같은 유능한 사람이 하필이면 해불개를 따를 게 뭐냐는 말이네." "그렇다면……." "대장부로 났으면 한 번쯤은 사람 위의 사람인 인상인(人上人)이 되어야 하는 법이지. 허나 말 네 필이 이끄는 수레도 못 알아본다면 살아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자네는 그 우둔한 사람의 뒤나 따르고 있으니 답답하지 그지없네. 그럴 바에야 나를 따르는 게 낫지. 나를 따르면 적어도 벼슬 한자리는 괜찮게 할 수 있지. 처자권속도 근심 없이 잘 살 수 있을 테니 말일세." "공자님 말씀을 들으니 밤에 빛을 만난 듯 앞이 환하여집니다요. 죽은 목숨을 공자님께서 살려 주신 데다가 또 이렇게 앞길까지 열어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공자님 말씀이 없어도 제가 스스로 따르려 했던 바 앞으로는 일심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옥총의 말에 왕중양은 분노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무심이 다시 옥총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 혹시 두 남녀가 이쪽으로 오는 걸 보지 못했나?" 옥총의 빈 눈길로 주위를 훑고는 있었으나 그 역시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이 왕중양과 임조영이 있는 수풀에까지 미쳤지만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대로 지나쳤다. "글쎄요, 보지 못했는데요. 저를 해친 자와 함께 이곳에 이르렀고 또 서로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음, 그 사람과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되나?" "한 시간 남짓 되었을 겁니다." 무심이 뒤에 버티고 있는 챵바와 사가자에게 일렀다. "왜 서 있기만 하는 건가? 어서 그들을 수색해 봐야지!" 다시 옥총에게로 몸을 돌린 무심이 뱀눈을 떴다. "이봐 옥총, 그때 자네는 꽤나 약삭빠른 처세를 보이더군. 유기하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겠다고 의형제를 맺어 놓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해쳤으니 말이네. 세상일이란 그렇듯 예측하기 힘든 법이지. 흐흐." 옥총이 약간 발끈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공자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