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16편 (16/60)
왕중양이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자 그가 다시 눈을 부릅떴다. "내 네 놈의 입을 열게 만들 테다!" 왕중양이 다급하게 제갈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니오. 나는 물결에 떠밀려 이곳까지 온 사람일 뿐이오." 뒤를 따라 내린 속문성이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렸다. "말로 해서는 실토할 것 같지 않군." 그런데 속문성이 왕중양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어, 이자는 반화대회에 참가했던 협사가 아닌가?" 사자우도 왕중양을 알아보고는 혀를 찼다. "쯔쯧, 대협이니 뭐니 하는 놈들 역시도 한패거리로군. 어서 말하지 못하겠느냐?" 왕중양은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다. 사자우가 왕중양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는 두 눈을 흡뜬 채로 발버둥을 쳤다. 사자우가 눈앞에 있는 물고기를 발견하고는 왕중양을 내동댕이쳤다. "여기에. 먹을 만한 것이 있군!" 이들은 지금 몹시 허기에 시달리고 있는 처지였다. 이곳까지 오면서도 서로를 믿지 못해 배 위에 있는 음식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 독을 넣었을까 봐서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눈 앞이 가물거릴 정도의 시장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늪 속에 있는 물고기마저 의심을 하고 있는 듯했다. 사자우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왕중양을 발로 툭 찼다. "네 놈이 물고기를 잡아라!" 왕중양이 차가운 물을 헤치고는 물고기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그것을 먼저 앞에 있던 제갈정에게 던지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바보 같은 놈이로구나. 네 놈은 사숙님이 보이지 않더냐? 음식은 선배님이 먼저 자시는 게 법도이다." 제갈정이 물고기를 집어 사자우에게 건넸다. 그는 물고기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에이, 이 물고기는 싱싱하지가 않아. 다시 건져라." 왕중양은 이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물고기를 차례대로 건져 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곧 물고기를 아구아구 뜯어먹기 시작했다. 물고기로 일단 배를 채운 이들은 소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한참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에 대해 의논을 하던 석초수가 갑자기 엉덩방아를 찧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누가 내게 독약을 먹였어? 아이고, 난 이제 죽는구나!" 그러자 제갈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넌 죽어야 해. 네 놈이 죽어야 우리 집 식솔들을 죽일 근심이 덜어진다구. 헤헤헤, 네 놈이 죽거들랑 시체를 호수에 던져 토실토실하게 물고기들을 살찌우게 하겠다." 속문성도 목을 움켜쥐며 컥컥 댔다. "캑! 이건 이상한 독이 분명해!" 사자우가 눈꼬리를 위로 올리더니 제갈정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분명 그대 제갈정이 넣은 독이렷다? 그대는 그 비상한 재간으로 우리에게 독을 먹였군!" 사자우도 허리를 숙인 채 끄윽 하는 소리를 냈다. "제갈정, 어서 해독제를……." 그러나 지금껏 가만히 있던 제갈정이 풀썩 고꾸라지며 역시 목을 움켜잡았다. "나……도 도, 독을……." 네 사람은 한꺼번에 쓰러진 채 일제히 왕중양을 향해 손을 뻗치려 했다. 사자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왕중양을 불렀다. "이……봐, 어서 해독제를 주게." 왕중양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제갈정이 움푹 들어간 두 눈을 사납게 굴려댔다. "만약 해독제를 내놓지 않으면 네 놈을 죽여 버릴 테다!" "난 모르오." "네 놈이 우리들을 중독시키고도 모른다고? 잔말 말고 어서 해독제를 내놓아라!" 왕중양이 계속 모른다고 하자 제갈정과 석초수 그리고 속문성은 서둘러 기공으로 독을 배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가 않아 이들은 이마에 식은땀만 흘릴 뿐이었다. 사자우가 안 되겠다는 듯이 허연 이빨을 내보였다. "우선 저 놈을 죽여 놓고 보자!" 사자우의 말에 제갈정이 득달같이 왕중양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는 두 손을 갈구리처럼 만들더니 왕중양의 목을 걸었다. "네 놈을 먼저 지옥으로 보낼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속문성과 석초수도 합세했다. 왕중양은 유운장 4대 고수의 발톱에 걸린 꼴이 되고 말았다. 왕중양이 몸을 굴려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석초수가 왕중양의 앞으로 나서더니 그의 가슴을 향해 장을 날렸다. 왕중양의 몸이 높이 솟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왕중양이 호수에 떨어졌다. 죽어서 가는 길목치고는 험난하지 않고 오히려 황홀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왕중양은 눈앞으로 물고기들과 새우들이 무리를 지어 노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둘러보니 이곳은 분명 호수의 밑바닥이 분명했다. 왕중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필시 자신은 장을 맞아 호수로 떨어졌는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니. '과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몸이 이동하는 것을 느꼈다. 숨도 제대로 될 수 있지 않은가.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이럴 수가!' 왕중양은 그때서야 자신이 커다란 거북이의 등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호수에 떨어지면서 다행히도 거북이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숨을 온전히 쉴 수 있는 것은 또 어찌 된 일 인가? 그가 누워 있는 거북이의 주변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왕중양은 더욱 놀라웠다. 물은 거북이와 장벽을 쌓아 놓은 듯 이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왕중양이 거북이의 등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 속은 새하얗고 단단하였다. 마치 징을 연상하게 했는데 한복판이 오목하고 테두리가 위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바가지를 닮아 있기도 했다. 복판으로부터 주위 쪽에 나 있는 볼록한 아홉 개의 선은 네 변을 이루면서 돌출되어 있는 형상이었다. 그 선은 새카맣고 반들반들했다. 왕중양은 이것을 원수구태( 暠龜 )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용이 새끼 아홉 마리를 낳았는데, 그 아홉 마리 새 끼는 서로 다른 원수( 暠)였던 것이다. 이들이 허물을 벗는데 그 허물 속에는 아홉 개의 선이 있으며, 다시 선 안에는 열여덟 알의 구슬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구슬은 능히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또 장수하게도 하며, 특히 수화(水火)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 아홉 개의 선들에는 각기 자웅으로 된 한 쌍의 진주가 박혀 있어 모두 열여덟 개를 이루었다. 바로 야명(夜明), 거독( 毒), 벽화(酸火), 분수(分水), 정안(定顔), 모주(母珠), 구사(驅邪), 명목 (明目), 양심(養心) 등이다. 이 열여덟 개의 구슬은 비할 데 없이 진귀한 것이었다. 왕중양은 이곳이 바로 태호 기슭에서 이름난 소인(巢人)의 소굴 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이 원수구태는 소인의 보물인 셈이었다. 소인은 이 원수구태를 침대삼아 잠을 자곤 했다. 또 외출을 할 때면 원수구태를 태호에 넣어 두고는 큰 돌로 눌러 놓았다. 왕중양은 거북이 위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다행히도 거북이의 등에 떨어져 목숨을 구할 수 있었구나! 그런데 과연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온몸에 쇠바늘이 박혀 있는 것처럼 아픔만이 느껴졌다. 기혈들마저 서로 뒤엉켜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일어나 앉은 왕중양은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선천신공(先天神功)'이라는 내공심법을 떠올렸다. 이 신공심법(神功心法)은 왕중양이 우연히 얻게 된 것이었다. 그 심법은 천하지성(天下至聖)의 심법인데 공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전후좌우(前後左右)가 온통 물이고 얼음이 없는 곳'을 얻어야 한다. 왕중양 이전에도 이 선천신공을 닦으려 한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어디에 가서 '전후좌우가 온통 몰이고 얼음이 없는 곳'을 만날 수 있었겠는가? 왕중양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입가에 경이로움과 환희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바로 이곳이지 않은가, 바로 이곳!' 주정과 목우는 임조영을 바라보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흐흐, 그대는 이 굴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어. 아무리 재간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 굴속에서는 죽게 돼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목우도 비웃음을 던졌다. "임 공자, 만일 그대가 이곳에서 죽게 되면 우리 가문의 공자님은 의형제가 없게 돼. 그 사람은 왕중양도 잃어버리고 또 그대까지 잃게 된단 말이지. 우리의 모용 공자는 여전히 혼자 남게 되겠지. 하하하……." 임조영이 씁쓰레한 표정으로 이들에게 호령했다. "넌 어떤 놈이냐? 어서 너의 공자님을 데려오너라!" "우리 공자님이 널 만나 줄 것 같으냐? 그리고 큰 공자님이란 작자는 지금쯤 태호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게다. 너도 곧 그의 뒤를 따르게 될 테니 너무 재촉하지 말아라." 목우의 빈정거림에 임조영이 화를 벌컥 냈다. "좋다. 내 너희들을 먼저 보내 주마!" 임조영이 몸을 추스리려고 하자 이들이 동시에 침을 쏘았다. 침을 피한 임조영이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목우가 주정에게 이죽거렸다. "계집을 죽일 필요 있나? 죽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잖아?" 임조영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본색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임조영은 이 석굴 안에서의 싸움이 결코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놈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욕설만을 늘어놓고 있는 것에 더욱 애가 탔다. '네 년은 곧 우리들의 노리개가 되어 줄 텐데 공자님을 만나서 무엇하겠느냐?" 목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이 임조영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들은 임조영과 적수는 되지 못했지만 잠시 색에 미쳐 앞뒤를 재보지 못했다. 주정이 임조영의 뒤로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목을 조여 왔다. '독수리가 닭을 덮치는'초수로서 기세가 맹렬했다. 목우도 손에 가느다란 사슬을 휘감고는 공격을 해왔다. 임조영도 그 사슬이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기에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천년 이나 눈이 녹지 않는다는 설산의 잠사( 絲)로 꼬아 만든 것으로 한번 몸에 묶이면 살아날 수가 없었다. 임조영이 비로소 검을 뽑아 들고 위를 향해 힘껏 찔렀다. 임조영의 검끝에서 세 가지의 초수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하나는 '화산출수(華山出岫)'라는 초식이었다. 이는 화산파의 검법 중 한 가지인데 기세는 극히 평온했다. "앗!" 검날이 목우의 눈앞을 스치면서 그의 오른팔을 겨누었다. 목우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잽싸게 비틀었다. 임조영이 쓴 두 번째 초식은 '교룡(蛟龍)이 진주를 빼앗는' 형상으로 상대의 두 눈을 목표 로 삼았다. 목우가 다시 몸을 움츠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년이 나를 죽이려고 용트림을 하는구나!" 목우가 사슬을 휘두르며 공격은 하지 않고 어르듯 눈앞에서 교란을 펴기 시작했다. 임조영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두 놈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이곳을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함정 안에 빠지긴 했지만 두 놈이 나타난 것을 보면 어딘가에 출구가 있는 게 분명했다. 세 사람은 무려 10여 합을 싸웠다. 놈들의 저항도 쉽지가 않아 임조영이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었다. "얍!" 임조영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검을 비스듬히 올렸다. 목표는 목우였다. 사슬을 들고 있던 손이 잘려 나가면서 피를 뿌렸다. "아!" 목우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시커멓게 변해 갔다. 사슬을 쥔 채 잘려 나간 손목은 깊게 파들어간 구덩이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목우에게 있어서 그 사슬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다. 그가 구덩이 속으로 얼른 고개를 들이밀자 임조영이 다시 회심의 검을 그어댔다. 목우는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구덩이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임조영의 검에 어깨를 찔렸는데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면서 피가 공중으로 솟구치는 게 보였다. 주정 역시 겁을 집어먹고는 한 발짝 뒤로 물 러섰다. 임조영은 틈을 주지 않고 날아가 주정의 머리를 향해 검을 뻗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정이 뒷걸음 치다가 돌부리에 넘어지는 바람에 검이 빗나갔다. 주정은 자기 머리 위로 무서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검 소리를 듣고는 공포에 질려 버렸다. "날 건드린 너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주정의 걸음걸이를 주시하며 임조영이 다시 기회를 엿보았다. 뒤로 조금씩 물러서던 주정이 석벽에 다다랐을 때였다. 임조영이 번개같이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앞으로 내민 채 날아갔다. 검에 찔 려 죽었을 거라 믿었던 주정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주정은 사라지고 검은 석벽에 깊이 박히고 말았다. 임조영은 검을 쥐고 있는 손으로 석벽의 거대한 무게가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정마저 해치우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우선 급한 것은 이곳을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임조영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옳기며 주위를 살폈다. 석벽에 난 가느다란 틈을 통해 한 줄기의 빛이 들어오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잠시 후였다. 임조영이 석벽을 밀어 보려고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조영은 느닷없이 몰려온 위기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석벽에 난 틈을 이용할 수 없다면 길은 오직 하나 자신이 이곳으로 떨어졌던 함정의 출구뿐이었다. 임조영은 위를 올려다보며 높이를 가늠했다. 가능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두 발에 기를 모은 임조영은 곧 몸을 솟구쳐 벽에 착 달라붙었다. 한차례 깊은 숨을 들이마 신 그녀는 다시 위쪽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구까지는 꽤 되었다. 차츰 팔과 다리에 힘이 빠져 가자 그녀는 안간힘을 다했다. 열 손가락의 손톱은 이미 부러졌는지 참을 수 없는 아픔이 전해졌다. '아, 더는 견딜 수가 없는데……." 갑자기 한쪽 팔의 근육들이 한곳으로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녀는 그만 힘이 모자라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동안 팔에 뭉쳤던 근육을 풀고 정신을 차린 임조영은 재도전을 해 보았다. 그러나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나중에는 기력이 모두 떨어졌는지 자기 키도 못 넘고는 밑으로 주르르 미끄러지기만 했다. 온몸의 힘을 모두 잃어버린 그녀는 석벽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녀는 손톱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자지는 창문 앞에 앉아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그녀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전에는 단 한 번도 마음에 두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오히려 어서 그를 만나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였다. 여인의 마음이란 이토록 가냘프고 보잘것없는 것인가? 그녀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며 한편으로는 남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모용준은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애가 탔다. 자지는 모용준에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고 싶었다. 반화대회에서 처음 만난 모용준에 대해 변해 버린 자신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모용준은 날을 아껴 주고 또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내였다. 자지는 서서히 그를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일종의 감미로운 사랑의 맛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한 사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모용준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지는 자신의 마음을 닮아 아주 미세한 바람에도 몸을 흔들고 있는 촛불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지하궁에 있는 밀실은 다시금 끈끈한 점액질을 뿌려 놓은 듯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모용준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용상 위에 앉아 환락을 누리기 위해 여인들을 불렀다. "짐은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경들은 자기의 재주를 한껏 부려 나를 즐겁게 하라!" 일제히 고개 숙여 대답하는 여인들의 안색은 그러나 창백하기만 했다. 너무 오랫동안 지하에서만 지내 온 탓이었다. 얼굴만 창백한 것이 아니라 움직임조차 굼뜬 듯 무기력했다. 하지만 창백한 안 색과 잰 몸놀림이 없어도 여인이란 사실은 바꿀 수 없는 법이다.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용준의 눈에는 다시금 불길이 당겨지고 있었다. 여인들 역시 모용준의 심사를 흐트러놓을 수는 없다는 듯 저마다 교태를 부리며 알몸이나 다름없는 몸뚱어리를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 다. 모용준이 손을 들어 시선을 모았다. "짐은 국사에 노심초사하다 보니 매우 지치고 따분하다. 짐을 즐겁게 할 수 없는 여인들은 백이 있다 해도 소용이 없다!" 모용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십여 명이나 되는 여인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들은 곧 모용준에게로 다가와 마치 뽕잎을 갉아 먹는 누에처럼 그에게 매달려 입술을 움직였다. 촉촉하게 침을 묻힌 입술로 그의 허벅지며 가슴을 애무하고 앞이빨로 잘근잘근 과육을 아껴 먹듯 그의 젖꼭지를 깨무는 등 갖은 교태가 이어졌다. "으, 으……." 여인들의 애무에 차츰 달아오른 모용준이 드디어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눈을 감은 채 여인들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던 그는 참을 수 없는지 고개를 뒤로 꺾으며 신음했다. 여인들의 혀끝은 벌레의 발과 더듬이가 되어 모용준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어 나갔다. 모용준이 또 한차례 몸을 뒤틀면서 신음을 토하자 여인들이 그의 몸에 납짝 엎드렸다. "성상, 소청이 '낙불구(樂不 )라는 물건을 하나 발명했는데 한 번 써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한 여인이 모용준의 귓가로 입술을 갖다 대며 뜨거운 숨을 불어 넣었다. 모용준이 흥미 있어 하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좋다. 어서 보이거라!" 그녀가 말한 낙불구란 자그마하게 생긴 수레였다. 수레 위에는 원통형의 찻간이 있는데 그 찻간 뒤에는 양쪽으로 팔걸이가 달려 있었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은 서로 모양이 달랐는데 그 팔걸이들은 전후좌우 마음대로 움직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찌꺽찌꺽……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치 남녀가 한바탕 재미를 보고 있는 소리 같기도 해 모용준의 가슴은 금방 달아올랐다. "그래, 저 수레를 어떻게 쓰는 것인고?" 모용준이 관심을 보이자 그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애교스러운 웃음을 띄웠다. "소침이 보건대 성상께서는 너무 조급하십니다요. 언제나 저희들을 불러 놓고 급히 즐거움을 얻으시려는 걸 보고 제가 고안을 했지요. 앞으론 이 수레를 이용하세요. 성상께서 세 여인과 함께 이 수레 안에 들어가 즐거움을 나누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수레는 두 가지의 아주 좋은 점을 갖고 있는데……." "좋은 점? 그래, 무엇이더냐?" "호호호, 만일 성상께서 이 수레에 들어가신다면 그때 말씀을 드리겠사옵니다." 모용준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수레 안으로 서둘러 들어간 모용준은 밖에서 볼 때와 다른 점에 또 한 번 감탄을 했다. 안은 아주 정교하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고 꽤 넓어 보이기도 했다. "자, 이제 네 말대로 들어왔으니 어서 말해 보거라." 여인이 수레 안에 있는 온갖 장치를 일일이 가리키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장치는 자유자재로 여인들과 재미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란 말에 그의 몸은 점점 달아올랐다. 그것은 장치를 이용해 여인의 위치를 마음대로 조절해 가며 즐길 수 있는 도구였다. 설명을 마친 여인이 어깨에 걸치고 있는 깁천을 스르르 아래로 떨어뜨렸다.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성상 폐하, 소청이 이 수레를 만들었으니 성상께서는 그 상으로 저를 지목하셔야 하겠나이다." 모용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꼭 그래야 하는 법이라도 있느냐?" 그러나 여인은 모용준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는 수레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이 안으로 들어오자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가닥의 띠 같은 것이 그녀의 몸을 단단히 묶어 버렸다. 바로 눈앞에 단단히 묶여져 있는 알몸의 여인을 바라보는 모용준의 눈빛이 묘하게 뒤틀렸다. 모용준이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여인이 귓속으로 다시 뜨거운 입김을 넣어 주었다. "밖의 여인들이 듣지 못하게 해요." 모용준은 여인의 지혜에 탐복을 마다하지 않았다. 후에 이 여인에게 후한 상을 내리리라 마음먹었다. 모용준이 급하게 여인의 몸을 끌어안고는 얼굴을 들이밀려고 하자 여인이 한 손으로 제지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모용준이 동그랗게 눈을 뜨자 다시 여인의 한 손이 무언가를 틀어쥐었다. 찌꺽찌꺽 하는 소리가 나더니 곧 여인의 자세가 묘하게 변해 버렸다. 그러면서 여인이 음탕스런 눈빛을 모용준에게로 흘렸다. 아마도 모용준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자세를 고르라 는 뜻인 것 같았다. 여인이 방금 만든 자세는 도저히 침대 위에서는 해보일 수 없는 그런 기묘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곳 수레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여인은 마치 공중에 붕 뜬 채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모용준은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여인의 다리 사이로 몸을 막 들이 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수레 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수레 안에다 작은 종과 방을 따위들을 잔뜩 달아 두었던 것이다. 한껏 달아 오른 몸으로 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모용준은 기분이 상했다. "이건 또 뭐야?" 그러자 여인이 달뜬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소첩은 성상께서 수시로 즐거움을 느끼게 하시라고 이렇게 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