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15편 (15/60)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코끝을 차갑게 스치며 지나갔다. 정강이라는 이 큰 거리에서 모용세가를 모르는 이라고는 없었다. 이유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모용세가의 노복이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황제가 있다 해도 그들의 눈에는 모용준과 모용세가보다는 중요하지 않게 비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곳 인구는 만 명이 넘었다. 서쪽에는 묘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죽게 되면 영락없이 그 묘지에 묻혔다. 한 가지 그 묘지에서는 평소에 괴이한 일이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 도였다. 그러나 묘지의 지하에 궁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그 궁전에서는 여인들이 모두 거의 알몸으로 지냈다. 그녀들은 몸에 얇은 천을 두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궁전 안에 여인이 얼마나 기거하고 있는지는 그곳 주인조차 잘 알고 있지를 못했다. 이 궁전은 변경(邊京)에 있는 황궁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황궁과 다른 것이라고는 매우 사치하다는 점이었다. 섬돌 아래에는 대신(大臣)들 대신 수많은 궁녀들이 알몸으로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무리 지어 오고 가는 궁녀들은 온갖 보물들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출입할 때 쓰는 경필(警 )이며, 옥새(玉璽) 등등 황제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지니고 다녔다. 섬돌 위에는 용상이 놓여져 있었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근엄한 자세로 앉아 궁녀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모용준이었다. 그의 얼굴은 매우 냉담했다. 섬돌 아래에 있는 궁녀들은 저마다 규얼(圭 )을 들고는 그에게 예를올리고 만세를 세 번 외쳤다. 모용준이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 아뢰어라!" 이윽고 한 여인이 올라오더니 허리를 숙였다. "정상 폐하, 용주(龍州)에서 몇몇 강호객들이 우리 대연의 은표를 약탈하려다가 잡혔나이다. 법으로 엄히 다스리는 게 어떠하오리까?" 모용준은 앞뒤 가름해 보지도 않고서 턱짓으로 일축해 버렸다. "대리사경(大理寺卿), 그대가 처리하라!" "예." 그러자 알몸의 여인이 쪼르르 달려나와 대답하고는 얼른 사라졌다. 이번엔 또 다른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성상 폐하, 신들이 궁전을 살펴보니 내궁에 주인이 없어 성상 폐하의 대사에 아주 불리한 줄 아옵니다. 성상께서 하루 속히 결단을 내리시어 한 관원을 선발하여 궁중의 낭랑(娘娘)으로 삼기를 청하옵니다." 여인의 교태 어린 콧소리는 그녀 자신이 낭랑이라는 자리를 탐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게 했다. 모용준의 손에는 옥이 들려 있었는데 광채를 뿜었다. 이것은 그가 반화대회에서 주기로 허락했던 대연의 옥이었다. 모용준이 옥을 들여다보더니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궁중의 낭랑은 내가 이미 선정하였노라. 후일에 내가 데리고 와서 그대들과 만나게 하겠노라!" 이 말에 여인들은 궁중의 예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궁 밖에는 성상 폐하의 마음에 든 여인이 있어 그녀가 대연의 황후로 책정이 돼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궁녀들은 그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눈치였다. 모용준이 헛기침을 하자 궁녀들이 수군거림을 멈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듣거라! 그대들은 모두 대연의 현명한 신하들이자 나 이 모용준의 어첩들이 아닌가. 당초의 내 조상들을 생각해 보면 모두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황제 노릇은 해서 무엇한단 말인가? 이름이 어떻든 황제처럼 살면 그뿐인 것이다." 궁녀들의 반응은 깔끔할 정도로 정돈되기 시작했다. 이런 모용준의 훈시에 이젠 아주 익숙해 있는지 모두들 머리를 숙인 채 교화 돼 가고 있었다. "경들은 궁전에서 누구나 많은 보물들을 지닐 수가 있다. 만일 밖으로 나가기를 원한다면 누구나 거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경들은 이 대연 황제의 말을 따라야 하며 제멋대로 궁전 출입을 해서는 안 된다. 궁전을 나가는 자는 자격을 박탈하고 능지처참에 처하겠노라!" 궁녀들이 입을 모아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좋다. 모두들 나를 따라 오너라!" 궁전 뒤에는 길쭉한 벽돌을 깔아 놓은 길이 나 있었는데 커다란 밀실과 이어져 있었다. 밀실 안은 아주 푸근하였고 용연향(龍延香)이 타오르고 있었다. 또한 그 안에는 요상하게 생긴 침대 하나 가 의자를 등에 업고 놓여져 있었다. 침대 위에 의자를 올려 두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작은 의자 위에는 용을 수놓은 비단까지 덮여 있어 그 광경이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궁녀들이 조용히 서서 모용준의 지시를 기다렸다. 모용준이 천천히 손을 들어 궁녀들을 지목했다. "그대, 그리고 또 그대 이렇게 두 사람이 올라가도록 해라." 지목을 당한 두 궁녀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녀들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얇은 천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곤 모용준의 옷을 벗겨 한쪽으로 가지런히 놓아 두었다. 한 궁녀가 옷을 벗겨 건네주면 다른 궁녀는 그것을 받아 정돈을 하였다. 옷을 모두 벗기자 모용준의 작은 몸뚱이가 드러났다. 두 궁녀가 조심스럽게 모용준을 들어 의자 위에 앉혔다. 모용준은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궁녀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작고 풀이 죽어 있는 남근을 궁녀들 앞에 드러낸 채 다시 지시를 했다. "좋다. 한 사람씩 오도록 해라." 그 안에는 모두 백 명에 가까운 여인들이 자리했다. 그녀들은 모두 얇은 천으로 어깨만 걸친 알몸으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모용준의 지시에 따라 한 사람씩 앞으로 나서더니 온갖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모용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가지 동작과 교성을 섞어 가며 밀실 안을 숨막히게 만들었다. 모용준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또다시 쓸쓸하게 여러 날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그녀들의 몸짓은 처절했다. 한 여인이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며 모용준의 앞을 스쳤다. 또 다른 여인이 자신의 젖가슴을 맞부딪쳐 묘한 소리를 만들어 내며 모용준을 현혹시키고자 애썼다.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은 춤을 추는 자세로 허리선을 비비 틀며 제자리에서 돌기도 했다. 모용준이 급기야 한 여인을 선택했다. "좋다!" 지목을 당찬 여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가 한쪽으로 물러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준이 다시 그중 살점이 통통하게 붙고 두리뭉실한 목덜미를 가진 한 여인을 지목했다. "좋다!" 두 여인이 모용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한 여인은 아주 애교가 철철 넘치는 쪽이었고, 다른 한쪽은 풍만한 몸매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두 여인이 모용준을 의자에서 들어 내린 다음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러더니 두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묘용준의 몸 구석구석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모용준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꿈틀댔다. 여인들은 어느 한곳이라도 지나치는 법 없이 구석구석을 혀로 핥아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인들의 애무는 계속되고 있었는데 모용준이 이상한 기미를 눈치챘다. 헛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에 물러나 있던 여인 중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쓰러지려 했다. 모용준이 그녀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몇몇 여인들이 그녀를 부축하고는 모용준 앞으로 데려왔다. 모용준이 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여인이 눈물을 흘렸다.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게냐?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잘 구경을 하란 말이다!" 모용준에게 매를 맞는 여인은 심한 형벌을 감수해야만 했다. 모용준과 살을 섞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도 받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여인들은 모두 정신을 바싹 차린 채 모용준과 두 궁녀가 벌이는 짓을 마치 눈에 하나하나 새기듯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모용준이 실컷 여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몸을 핥게 한 다음 비로소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너희들은 이제 물러가라." 두 여인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입가에도 촉촉하게 물기가 묻어 있었다. 이번엔 다른 궁녀 둘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다시 그녀들이 의자 위로 모용준을 옮겨 눕히자 한 사람씩 다가왔다. "황제 만세, 만만세!" 큰소리로 이렇게 외친 궁녀들이 차례대로 혀끝으로 모용준의 몸을 핥기 시작했다. 모용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그러면서 궁녀들에게 재촉했다. "어서, 어서 더 빨리 핥으란 말이다!" 이윽고 밀실 안에 있던 궁녀들이 차례대로 다가와 모용준의 몸을 핥았다. 그런데 중간쯤 되었을 때 한 궁녀가 아주 미친 듯이 혀를 놀리자 모용준이 공중으로 솟구칠 듯 심하게 몸을 꿈틀댔다. "좋아, 더 더!" 그러자 궁녀가 아예 자기 얼굴을 모용준의 사타구니에 처박고는 몸부림을 쳤다. 모용준의 눈이 허옇게 뒤집혀지면서 신음 소리를 냈다. "아으!" 곧 모용준이 온몸의 맥을 놓고는 팔을 떨어뜨렸다. "됐다." 드디어 모용준이 만족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여인들은 제각기 선 채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욕정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미처 모용준의 몸을 할지 못한 몇몇 여인들은 선 채로 제 손으로 자신의 음부를 애무했다. 큰 밀실은 조용해졌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여인들의 숨소리도 곧 멎었다. 모용준이 노도를 치러 낸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래, 오늘은 몇 사람이었더냐?" 그러자 한 궁녀가 무릎을 꿇고는 대답했다. "성상의 용체가 건강하시어 오늘 궁녀 서른일곱을 다루어 내셨나이다." 옆에 있던 다른 궁녀가 얼른 붓을 들고는 숫자를 적어 넣었다. 모용준이 흐릿한 시선으로 궁녀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모두가 자지로 보였다. "내가 건강하니 그대들은 행복할지어다!" 모용준이 가슴을 한껏 앞으로 내밀며 말하자 궁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한 궁녀가 모용준에게로 다가와 옆에 조용히 섰다. 그러더니 모용준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모용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숙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대연의 자손이로소이다!" "그대가 대연의 자손이라면 대연의 국군(國君)들인 선조들을 기억하겠는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궁녀의 음성이 더욱 강건해졌다. "그러다면 그대는 정령 누구인고?" "대연의 황제 모용준이로소이다!" 모용준이 다시 눈을 몇 번 꿈벅거리더니 덧붙였다. "대송이 나의 황제 자리를 빼앗은 지 오래이지만 나는 대연을 되찾아 오겠나이다! 꼭 대연을 되찾아 오겠나이다!" 다른 궁녀들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합창했다. "대연국은 흥할 것이로다. 대연국은 흥할 것이로다!" 밀실 안이 웅웅 울리며 다시금 흥이 오를 기색으로 변해 갔다. 자지는 두 비녀와 마주앉아 그녀들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 비녀들은 모용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모두 그를 존경하고 있다고 했다. 한 비녀가 약간 아쉽다는 얼굴을 지었다. "하지만 공자님께서 체격이 조금만 컸더라면 천하에서 가장 완벽한 사내가 되었을 거예요." 자지는 불현 모용준과의 일들을 떠올렸다. 낡은 절간 안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모용준과 몸을 섞어야만 했었다. 그전까지는 그녀의 가슴속에는 그가 조금도 들어 있지를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아내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를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가 추물 중에 추물이고 볼품없는 난쟁이라도 이젠 그를 거역할 수 없으리라. 비녀가 다시 입을 놀려 댔다. "공자님은 우리에게 참 잘 대해 주세요. 그분은 생전 우리에게 난폭하게 구는 일 없이 친절하게……." 자지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그분이 너를 어디에서 사왔냐는 말이다." 그러자 비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전 가족이 없었어요. 그런데 한 시골 부자가 절 마음에 들어해 첩으로 삼으려 했지요. 이 사실을 공자님께서 알고는 저를 데려오신 거예요." 자지는 그녀들의 말을 모두 듣고는 감동을 받았다. 이곳에 있는 비녀들은 한결같이 모용준이 구해 준 양갓집 딸들이란 점에 놀라움과 큰 감동을 받았다. 자지는 새삼 모용준에 대한 존경심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뜨락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 오자 비녀가 소곤댔다. "공자님께서는 악기도 잘 다루시고 검무(劍舞)도 뛰어나답니다. 구경하지 않겠어요?" 자지는 그녀들을 따라 뜨락으로 나갔다. 자지는 문득 그녀들이 목숨을 바칠 각오로 모용준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준이 악기 앞에 앉아 〈야장사 (夜長思)〉란 곡을 연주했다. 이 곡은 고인(古人) 무명씨의 작품인데 아주 외롭고 쓸쓸한 감흥을 주는 곡이었다. 모용준은 곁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모른 채 악기 연주에만 몰두했다. 비녀들은 옆으로 죽 늘어서서 흠모하는 표정으로 모용준을 쳐다보았다. 악기 소리가 멎었다. 모용준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비치고 있었는데 몹시 우울해 보였다. 그가 비로소 자지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띠었다. "그대도 와 있었구려?" 모용준은 그 일이 있고 나서 많이 변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한 날부터 그는 아주 예의 바른 사내로 다시 태어난 듯 다시는 그같은 언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자지 앞에서 항상 친절하게 행동했다. 모용준이 자지 뒤에 있는 한 비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명기(明棋), 내가 널 위해 혼처를 구해 놓았다. 좋은 집안인데 그 집 주인도 아주 선량한 사람이다. 일곱째 아들은 무예가 뛰어난 데 그 사람에게 시집을 가면 행복할 것이다." 바로 자지에게 모용준의 칭찬을 아끼지 않던 여인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주저앉으며 오열했다. "공자님,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저를 쫓아내시려는 거죠." 그러자 모용준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타일렀다. "바보 같은 소리. 여인은 사내와 달라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거다. 네가 전에 시집가기를 거부한 것은 상대가 늙었기 때문이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난쟁이도 아니고 젊고 영준한 도련님이라 마음 에 들 것이다." 모용준의 눈빛이 비감에 잠기듯 잔뜩 흐려졌다. 비녀는 계속 흐느졌다. "공자님께서 제게 베푸신 크나큰 은덕을 갚지 못하고 어떻게 떠 날 수 있겠어요?" 모용준이 고개를 돌려 한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일기충천 지청에게 일렀다. "그대는 내일 해야 할 일이 있네. 모용세가의 아두들을 밖에서는 모두 아가씨라 불러야 한다고 이르게. 모두들 우리 사람들을 잘 대해야 한다고 꼭 이르게. 그리고 예물을 준비하여 명기에게 주게나." 명기는 목이 메어 더는 울지도 못하고 엎드린 채로 고개를 주억 거렸다. 모용준이 자지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지, 그대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하시오." "전 부족한 것이 없답니다." 그러나 자지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모용준이 눈치를 챘는지 한동안 자지를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미 사람들을 보내어 큰형님과 셋째를 찾도록 하였소. 곧 소식이 올 테니 기다리시오." 사실 자지는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모용준이 먼저 말을 해주어 자지는 난처하면서도 속으로는 흡족했다. 자지가 모용준에게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전 임 공자님을 만나야겠어요. 그런 다음 다시 모용 공자님을 찾고자 합니다." 순간 모용준의 얼굴엔 먹장구름이 가득 드리워졌다. 실망의 빛에 휘감겨 당황하고 있는 모용준을 주시하며 자지는 속으로 뇌까렸다. '당신은 임 공자의 정체에 대해 모르시죠? 그러나 당신이 알게 되면 더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모용준이 자신의 마음을 수습하려는지 얼른 지청을 불러 몇 가지를 일렀다. 서둘러 사람들을 보내어 이재민들을 구원하고 또 강호에 사람을 풀어 이번 초겨울 정강부(靜江府)에 모여 대사를 상의 하도록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일기충천 지청이 일일이 모용준의 분부를 듣고 나서 나가기 전에 자지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자지 처녀는 방에 돌아가 푹 쉬고 계십시오. 무슨 소식이 있으면 내 즉시 알려 드리리다." 자지는 모용준을 훔쳐보며 다시 한 번 그에 대해 달라진 느낌에 휘청거렸다. 그는 정말 후덕한 인물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또한 그 일이 가슴에 걸려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그 점은 모용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자지와 나누었던 해괴한 일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지와 좀더 정답게 말을 나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저 자지에게 임조영을 찾게 되면 알려 주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돌아섰다. 그러는 모용준의 속마음은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일 때문에 갑갑하기만 했다. 제9장 선천신공을 얻은 왕중양 왕중양은 자신의 몸이 마치 구름 위에 뜬 듯 가볍게 들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결코 구름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젠 정말 끝이로구나. 이렇게 다시금 물 속에 처 박혔으니 살아날 길이 없구나.' 왕중양은 물 위에 뜬 채로 바람결에 밀려갔다.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모용준과 임조영 등의 얼굴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라 그의 가슴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물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이미 물을 많이 먹어 온몸에 힘이 없었다. 그가 물결을 따라 밀려온 곳은 어느 작은 섬이었다. 이 작은 섬에 서 있는 나무들은 이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줄기만 있을 뿐 잎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모래밭에 누운 채로 기이한 섬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왕중양은 땅을 기어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몸을 쉽게 이동시킬 수가 없을 정도로 나무들이 울창했다. 한참 만에 그는 평지에 이르렀다. 그곳은 마치 맹수들이 잠을 자거나 배를 불리기 위해 마련해 놓은 장소 같았다. 왕중양은 잔뜩 긴장하여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역시 예상대로 새하얀 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다행히도 사람의 뼈가 아니라 날카롭고 유난히 흰 물고기들이 뼈였다. 어떤 맹수인지는 몰라도 물고기들을 수 천 마리 는 족히 잡아먹은 것 같았다. 왕중양은 더욱 긴장을 했다. 그것이 맹수가 아닌 이름도 정체도 모를 괴물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만약에 괴물이 나타난다면 영락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이 섬은 웬만한 집을 두어 개 모아 놓은 정도의 매우 작은 규모였기에 도망갈 곳도 없었다. 사람은 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주위를 둘러본 왕중양은 평지 한가운데 작은 늪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수의 물을 이곳까지 끌어들인 게 틀림없었다. 물은 몹시 차가웠다. 그 안에는 물고기들이 많았는데 검은 빛을 띤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왕중양이 손을 집어 넣어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물고기들은 조금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라?' 이상한 생각에 그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는 그 까만 물고기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때였다. 머리 위로 빠르게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한 왕중양은 놀라 얼른 몸을 숨겼다. 완전히 자신을 가릴 수는 없었지만 왕중양은 납짝 엎드린 채 귀를 세웠다. "듣고 있는가? 유운장 사람이 찾아왔다!" 그런데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머리 위쪽으로 이상한 물체들이 획획 날아가는 것만을 감지할 뿐이었다. 잎이 나 있지 않는 나무 사이로 검은 물체가 엇갈려 날다가는 데 왕중양은 그 그림자가 모두 넷이란 것을 알았다. 또한 그들이 누구인지도 감을 잡았다. 한 사람은 사숙 사자우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제갈정, 그리고 나머지 둘은 속문성과 석초수였다. 이들은 미처 왕중양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계속 저희들끼리만 짧고 다급한 소리로 주고받았다. 석초수의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소인은 듣거라! 그대는 유운장 이름을 걸고 사람을 훔쳐서는 안 될 것이다!" 사자우의 목소리도 들렸다. "수색해! 손바닥만한 곳인데 제깟 놈이 어디로 숨겠어?" 네 사람은 나무 사이를 어수선하게 옮겨 다녔다. 제갈정의 음성이 들려 왔다. "사숙님, 사람이 없는데요. 그 색마가 아마 외출을 한 모양입니다요." "더 찾아보라구. 그 놈이 예쁜 여인들을 섬에 잡아 놓고 기공을 연마한다지 않는가?" 왕중양은 머리를 더 깊이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놈들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끝장이었다. 도저히 저들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왕중양으로서는 몸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크!" 그런데 왕중양이 한쪽으로 머리를 돌리려다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해골들이 널려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여인들의 것이 분명했다. 긴 머리칼을 듬성듬성 단 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여인의 시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아직 썩지 않은 젖가슴 쪽은 여기저기 마구 파헤쳐져 있어 끔찍했다. 왕중양은 사색이 되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 사이를 오가던 놈들이 왕중양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제갈정이 사뿐히 내려서며 왕중양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네 놈은 소인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