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13편 (13/60)
사내가 이를 악물며 왕중양에게로 다가왔다. "일단 당신은 내 앞에서 사라져야 해!" 그는 왕중양을 밧줄로 묶은 다음 곧 호수로 던져 버리려고 했다. 왕중양이 물 속으로 곤두박질 친다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장이었다. 사내가 왕정아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왜, 왜 이러세요? 오늘부터 오로지 당신에게만 충실할 테니 어서 그 눈빛을 거두세요." 다급해진 그녀가 그의 심사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내는 왕중양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으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흐흐, 내가 또 너에게 속을 줄 아느냐?" 단검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떨렸다. 그녀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뱃머리 쪽으로 갔다. 사내를 향해 돌아선 그녀가 다시 주워 입은 옷을 벗었다. 커다란 젖무덤이 드러났다. "지금 뭘 하려는 거지?" "저분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당신과 난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물 속이든 물 밖이든 우린 상관하지 않았어요." 사내가 왕정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몸은 찬바람에 가냘프게 떨렸다. 풀어헤쳐진 머리와 그 아래로 드러난 젖가슴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젖가슴이 만들어 놓은 계곡을 스 치듯 나풀거렸다. 사내의 눈빛은 어느새 배고픈 짐승처럼 빛을 발하며 그녀의 깊은 곳을 더듬고 있는 중이었다. "어서 저분을 풀어 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러자 사내가 갑자기 왕중양의 아랫도리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헉!" 왕중양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왕정아는 더 이상 사내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사내가 더욱 포악하게 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왕정아가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속삭였다. "우리 예전처럼 사랑을 나누어요. 네?" "버러지 같은 년! 내가 이 놈을 호수에 처넣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다!" 다시 그가 왕중양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가 다급하게 사내의 가슴에 매달렸다. "나를 당신에게 드릴 테니, 제발!"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왕중양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힘없이 숙였다. 사내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그런데 사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왕정아가 재빨리 그 단검을 집어 들었다. 사내에게 단검을 겨눈 그녀가 앙칼진 소리를 냈다. "어서 이분을 풀어 줘!" 사내가 깜짝 놀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아니!" 그녀가 왕중양 몸에 감겨 있던 밧줄을 풀었다. 그러자 맹수처럼 달려온 사내가 발로 왕중양의 배를 걷어찼다. 그 바람에 왕중양은 배 밖으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는 다행히 물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 배의 돌출 부분을 잡고 매달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을 놓지 마세요!" 사내가 노를 집어 들더니 왕중양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왕중양은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자지는 모용준을 따라 먼저 그곳을 벗어났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임조영을 남겨 두고 온 것이 어떤 아픔보다 더한 괴로움으로 자리했다. 그녀가 모용준에게 근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둘째 공자님, 셋째 공자님은 무사할까요?" 모용준이 일자로 다물었던 입을 벌리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네가 무공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셋째는 벌써 그 놈들을 물리 쳤을 테니 너무 걱정 말아." 다시 자지는 모용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언덕에 오른 두 사람은 모용세가를 바라보았다. 모용세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꽤 멀리 벗어나 있는 듯했다. 자지가 피곤한 기색으로 어깨를 주무르자 모용준이 미소 지었다. "그래, 여인의 몸이란 사실을 깜박 잊었군." 두 사람은 낡은 절 앞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모용준이 눈을 감고 양신(養神)을 하며 입속말을 흘렸다. "셋째가 어찌 되었는지……. 모용세가를 벗어났는지도 모르겠군.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자지의 얼굴엔 기쁨이 드리워졌다. 보기엔 추하게 생긴 사내였지만 마음은 비단결처럼 고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모용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셋째가 없으니 앞으론 내가 누이를 돌봐 주겠어." 자지는 임조영을 가슴에 새겼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날 밤 너무도 황당한 일을 당했기에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사내로만 알고 있던 임조영의 정체가 결국은…….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나?" 모용준이 묻자 자지가 웃음을 거두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우리 모용세가에 가서 셋째와 누이의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었어. 그런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 누가 알았겠나?" 결과야 꼭 그렇게 될 수는 없다 해도 모용준의 마음 씀씀이에 자지는 또 한 번 탄복했다. 자지의 생각으로는 모용준은 아직 임조영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없는 듯했다. 자지는 무엇 때문에 임조영이 자기의 신분을 의형제를 맺은 모용준에게까지 숨기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임조영이 스스로 밝힐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리라 다짐했다. 두 사람은 너무 피곤한 탓에 그만 앉은 채로 선잠에 빠지고 말았다. 자지는 어느 순간 누군가 모용준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자지가 눈을 떠보니 모용준이 좀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이 모용준에게 머리를 약간 숙이는 게 보였다. "듣자니 모용세가에 큰 난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용준이 힘없이 대꾸하며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공자님의 일은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꼭 좋아지리라 봅니다 요." 모용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세가에는 나 같은 불초의 자손이 없었지. 죽어서도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니 정말 난감한 일이야." 모용준이 침통해 하자 그 사람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셋째 공자님은 아직 정강 어딘가에 계실 겁니다. 정확한 장소는 모르지만 곧 알아내는 대로 알려드리지요." "꼭 찾아야 하네. 그는 나와 의형제이긴 하지만 친형제보다 더 가깝네. 난 그에게 벌써 두 번이나 은혜를 입었어." "저, 그런데 공자님께 할말이……." 그가 머뭇거리자 모용준이 미간을 오므렸다. "자낸 나의 하인이지만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내서 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네. 무슨 일이든지 어려워 말고 고하게나."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사실 강남의 강문(江門)에서 혼담이 왔는데 공자님의 의양은 어떠신지요?" 모용준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강문 처녀가 미색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들었네. 하지만 그녀의 성미가 괴팍하다던데 사실인가?" "하지만 무림세가의 처녀에게 장가를 드시는 게 공자님께는 도움이 될 겁니다. 다시 한 번 그 처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문이 대연국의 황제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또한 나 같은 사람이 태어났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만약 나에게 얌전하고 어여쁜 처녀가 시집을 온 다면 다시 한 번 우리 가문에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련만……." 자지는 눈을 감고는 그들의 말을 모두 듣고 있는 중이었다. 모용준이 깊은 시련에 잠기는 것을 보자 그 사람은 더는 말을 걸지를 않았다. "나는 사실 저 처녀와 결혼을 하고 싶었지." "공자님,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그 사람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모용준이 머리를 저었다. "저 처년 잠이 들었어. 몹시 피곤할 거야. 셋째와 인연을 맺은 처지인데 불행히도 그와 떨어져 온종일 걷느라 지쳐 있지." "공자님이 반화대회에서 저 처녀를 얻으려고 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여인에게는 이미 사내가 있으니 공자님은 강문의 처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음……."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법. 임 공자께서도 자지 처녀와 꼭 맺어진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대는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난 동생이 좋아하는 일을 중간에서 훼방 놓고 싶지는 않아. 그가 자지 처녀를 소유할 수 없는 몸이라 해도……." "잠깐!" 갑자기 그 사람이 한쪽을 향해 코를 벌름대더니 인상을 썼다. "어디선가 약향(藥香)이 나는군요." 모용준이 귀를 기울이자 먼 곳으로부터 쓰쓰쓰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모용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누가 온 것 같아. 그대는 자지 처녀를 깨우게. 내가 살펴볼 테니. 아무래도 낌새가 좋지 않아!" 휘파람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두 사람 주위를 수많은 무리들이 에워쌌다. 이들은 한결같이 거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차가운 인상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허리춤에 조롱박을 찼는데 모용준은 아마도 약냄새가 그곳에서 나는 것이라 여겼다. 자지도 일어나 불길한 시선을 모용준에게 던졌다. 세 가닥의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이 막 모용준을 가리키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훌륭한 모용 공자로군. 미녀를 끼고 떠돌아다니니 정말 팔자 한 번 좋아." "당신들은 약왕문(藥王門) 사람들이 아니오?" 모용준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노인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 모용세가는 이전에 당신들의 약왕문에 은혜를 베푼 바 있소. 그러니 섣불리 경고망동하지 마시오." 모용준 곁에서 사나운 눈초리로 이들을 지켜 보고 있던 그 사람이 물었다. "공자님, 약왕문 같은 보잘것없는 무리가 어디 감히 우리 모용세가를 넘보겠습니까?" 노인의 걸쭉한 웃음 소리가 주위를 일깨웠다. "우하하핫! 절금수, 네 놈은 무얼 믿고 나서는 게냐? 네 놈이 그 잘난 재간을 믿고 덤빈다면 살아 남지 못하리라!" 모용세가의 가신(家臣)인 절금수 허불잉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절기를 한 수 가르쳐 주시지?" 허불잉이 앞으로 득달같이 나서려는데 모용준이 손을 들었다. "그대들은 듣거라! 그대들은 결코 나와 허불잉을 당해 내지 못 하네. 그러니 피를 부르기 전에 이만 돌아들 가게!" 그러나 이들은 모용준의 말을 자기 발 밑에 깔려 죽을 개미로밖에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중 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이죽거렸다. "우리가 가진 재주 중 하나가 바로 약을 만드는 것이지. 그런데 우린 방금 한 가지 기약(奇藥)을 만들어 냈어. 이 약을 쓰면 백 명의 여인과 그 짓을 해도 지치지 않아. 히히히, 하지만 시험을 해 보려고 했으나 우리가 어디 가서 백 명의 여인을 구하겠나. 또한 아무 여인이나 대상으로 삼았다가는 그 약효가 떨어질 수도 있거든. 그런데 아주 절색을 하나 만났는데 그대가 순순히 내어준다면 우린 아량을 베풀겠네. 저 처녀를 넘기면 너희들 목숨만은 살려 주겠단 말이지 ." "허튼소리! 저 여인은 나의 누이다. 건드릴 생각일랑 아예 말아라!" 모용준이 목에 힘줄을 툭툭 새기며 고함을 지르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욕심을 보이지 말아야 하네. 하나는 티벳의 고승 라마들과는 다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우리 약왕문 사람들에게 덤비지 않는 것이네. 그리고 덧붙이자면 예전부터 제왕들이 왜 단약(丹藥)을 만들었는지 아나? 바로 여인들과 즐기기 위해서였지." 노인의 말에 모두들 배꼽을 쥐고는 웃어댔다. 모용준이 허불잉 에게 일렀다. "자네가 내 누이를 데리고 먼저 떠나게. 내 이 놈들의 버릇을 고쳐 놓고 뒤따라갈 테니." 허불잉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단호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처녀를 데리고 먼저 가십시오. 저 혼자 서도 얼마든지 저자들의 염통을 뽑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을 수 있습니다." "아냐. 난 두번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고 싶지는 않아. 셋째를 동정팔교의 무리들 가운데 놔두고 온 것만 해도 뼈아픈 고통이라네." 노인이 손가락 끝으로 모용준을 가리켰다. "모용준, 그렇다면 네가 나서겠느냐? 혹시 서로 미루면서 꽁무니를 빼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모용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하찮은 놈들과 싸우게 되어 손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노인 앞에 우뚝 선 모용준이 눈을 치켜 떴다. "모용준, 넌 이미 죽어 가고 있다!" 노인의 말을 잠시 헤아리려고 하는데 몸이 갑자기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다.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지탱하려고 해 보았으나 어려웠다. 모용준은 이들이 나타나면서 풍겨 왔던 그 약향을 기억해 냈다. 다급해진 모용준이 검을 뽑아 들면서 결사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쓰러지고 말았다. 허불잉이 급히 달려와 모용준을 안았다. "공자님!" 그러나 허불잉 역시도 곧 정신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조금 떨어져 있던 자지 처녀만 약기운을 조금 덜 쐬었는지 말짱했다. 그러나 그녀도 이미 약향에 차츰 나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몇 사람이 달려들어 모용준과 허불잉을 포승줄로 단단히 묶었다. 마치 노루테를 덮쳐 먹잇감을 확보한 맹수들처럼 민첩하게 몸을 놀렸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이 당부했다. "조심해야 돼. 모용준이란 놈의 무공은 대단해. 다행히 우리가 미리 약냄새를 풍겼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떼를 지어 저승길을 헤매고 있었을 거라고." 노인의 말에 약간 겁을 먹었는지 놈들은 찹쌀떡을 댓잎으로 싸듯 모용준의 몸을 포승줄로 친친 잡아맸다. 큰일 하나를 마무리 짓기 라도 한 듯 이들은 손바닥을 탁탁 털더니 이번에는 자지 쪽으로 다가갔다. 자지는 주저앉은 채로 앞이마를 짚고 있었는데 서서히 약 기운이 온몸으로 번지는 모양이었다. 자지를 빙 둘러싼 이들이 온갖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노인이 손을 들어 이들의 행동을 만류하고는 자지 앞에 섰다. "왜 벙어리인가? 죽여 달라든지 아니면 그 잘난 몸뚱이를 줄 테니 살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해야지, 안 그래?" 자지가 고개를 획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헤죽거리며 말을 걸어 왔다. "우리 약왕문에는 신기한 약이 많지, 그중 음양화합산(除暘和合散)이라는 게 있는데 그대가 한번 먹게 되면 곧 소리를 지르게 되지. 그 소리는 보통의 사람 소리와는 달라. 여인이 알고 있는 소리 중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만 쓰는 기묘한 소리야." 그 말에 무리들이 또 한 번 낄낄대며 웃었다. 자지 처녀가 맡은 약기운은 대단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자지는 원상태로 회복되었으며 정신도 맑아졌다. 혼미상태에 빠진 모용준과 허불잉은 무리들에게 들려져 절간 안으로 끌려갔다. 노인이 무리들에게 명령했다. "목정(木鼎)을 꺼내 놓아라!"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보물을 다루듯 품속에서 목정을 꺼냈다. 그가 목정을 앞으로 내밀자 다른 사내가 다가와 그 위에 약을 바르고는 목정을 싸매고 있던 천을 천천히 풀렸다. 노란 목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리들은 목정을 보자 모두들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그가 목정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노인이 다시 명령했다. "먼저 허리에 찬 약이 든 조롱박들을 풀어놓게." 이들은 일제히 허리에 각각 차고 있던 조롱박을 풀어 한 사내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조롱박을 걷어들인 사내는 곧 구덩이를 판 다음 그곳에다 조롱박을 집어 넣고 다시 묻어 버렸다. 노인은 자지 처녀를 데려다 자기 앞에 앉힌 다음 무리들에게 성진(星陳)을 이루듯 둘러싸라고 일렀다. 이들은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간격을 둔 채 빙 둘러앉은 다음 아랫배에 손을 얹고는 눈을 감았다. 자지는 한복판에 한쪽 손으로 땅을 짚고 비스듬히 엎어진 채 이들의 참선을 지켜 보았다. 한 사내가 손가락을 튕겨 신호를 하자 목정 속에서부터 한 줄기의 연기가 새어 나왔다.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연기였는데 바람이 없는 탓인지 곧게 공중으로 피어 올랐다. 이윽고 스르륵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절 밖으로부터 커다란 왕지네들이 기어오기 시작했다. 그 왕지네들은 순식간에 절 안으로 들어와 대가리를 곧추세우고는 목정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갔다. 왕지네를 처음 본 자지는 놀라움에 눈을 확 감았다. 노인이 슬쩍 자지의 혈도들을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네들은 탁자 위로 올라가더니 목정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노인이 양손을 높이 쳐들며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얼굴을 가려라!" 몇몇 사내들이 황급히 뛰쳐나오더니 천으로 모용준과 허불잉 그리고 자지 처녀의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 그리곤 자신들도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천은 앞을 볼 수 있도록 두 구멍이 나 있었는데 독한 약냄새가 물씬 풍겼다. 때를 같이하여 요란스럽게 날개를 치는 소리와 쩍쩍쩍 하는 울음 소리가 들리더니 밖에서 수천 마리의 새들이 날아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새들은 올빼미인 듯싶었다. 올빼미 떼가 목정을 중심으로 날다가는 슬쩍 그 안으로 침을 흘려 넣었다. 한참을 목정 주위를 날며 그 짓을 하다가 기진맥진했는지 날갯짓과 울음 소리가 차츰 약해져 갔다. 올빼미 떼는 곧 밖을 향해 느릿한 동작으로 날아가 버렸다. 멀리 사라지는 올빼미 떼를 확인한 노인이 다시 손을 들었다.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노인이 목정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모두들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목정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절 밖을 잘 살피거라!" 노인이 경각심을 일깨우자 무리들은 눈초리에 불을 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를 맞춰 몇 사내가 절 밖으로 나갔다. 노인이 좌중을 둘러보더니 품속에서 불쏘시개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것을 목정 가까이 갖다 대자 곧 왕지네와 올빼미의 타액이 섞이면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윽고 형용할 수 없는 김이 오르자 절 안은 기묘한 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달콤하기도 하면서 말로는 쉽게 표현될 수 없는 그런 향이었다. 노인이 비장한 얼굴을 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됐다! 이젠 쓸 수가 있어." 자지는 이들이 지금 무슨 해괴한 짓을 하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이들의 행동을 지켜 볼 뿐이었다. "바로 이 약이 네가 먹을 약이란다." 자지 처녀에게 능글능글한 웃음을 보내며 노인이 말했다. "이 약을 먹게 되면 사내를 받아들이는 힘이 무궁무진해지지. 결국 넌 나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무리들이 일제히 낄낄거렸다. 자지는 음탕스런 웃음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것에 못 견뎌 했다. 정신을 잃었던 모용준과 허불잉이 깨어난 것은 이때였다. 모용준은 노인이 자지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벼락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수작들이냐?" 노인이 대수롭지 않게 모용준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하하하, 음양화합(陰陽和合)이 왜 좋은가를 알려 주고 있다!" 모용준이 벌컥 화를 내며 몸을 심하게 뒤틀었다. 그러나 포승줄에 묶인 탓에 중심만 잃을 뿐이었다. "너희는 곧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셋째 동생인 임조영이 꼭 복수를 하러 찾아올 것이다!" "오호, 넌 가만히 보니까 주둥이부터 깨어나는 신통한 기술을 가졌구나." 노인이 감탄한 듯 과장된 동작을 취하자 누군가 이렇게 지껄였다. "보잘것없는 난쟁이도 한 가지 재주는 있다고 하더니만, 헤헤헤!" 노인이 꽝 하고 발을 구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걱정 말아라. 어찌 그가 이 일을 알겠느냐? 이 약을 쓰는 날이면 넌 대라신선(大羅神仙)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이 약을 먹은 저 처녀는 임조영이든 누구든 기억할 수 없게 된다!" 머리가 들쑤시는지 세게 흔들던 허불잉이 노인을 노려보며 욕을 퍼부었다. "이 천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영감아! 허튼 짓 그만하고 네 모가지나 잘 간수해라!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르니 있을 때 잘 봐두라구. 하하하, 네 놈의 모가지가 네 놈의 몸뚱어리를 곧 그리워하 게 될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허불잉, 너 역시 이젠 다리 잘린 호랑이요 부리 잃은 독수리나 마찬가지렷다!" 노인이 축지법으로 후닥닥 달려와서는 허불잉의 뺨을 한차례 갈겼다. 그리곤 무리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처녀에게 약을 먹여라!" "그런데 호법(護法)님, 제게 한 가지 묘안이 있는데 어쩔까요? 히히히." 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요상한 웃음 소리를 냈다. "흥미만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노인이 기꺼이 받아 주자 그가 모용준을 가리켰다. "제 생각에는 먼저 모용준에게 음양화합산을 먹인 다음 계집에게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흐흐……." 노인이 탁 탁 탁 하고 박수를 세 번 쳤다. "아주 기막힌 생각이다. 어서 그렇게 해라!" 사내들이 모용준을 향해 막 달려들려는데 다시 노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잠깐! 안 되겠다. 저 계집은 천하의 보기 드문 절색이다. 우리 형제들이 먼저 맛을 봐야지 무슨 소리냐!" 무리 중 하나가 크게 웃으며 나섰다. "하하핫! 제 생각으론 음노삼(陰老三)이 제시한 방법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결정한 대로 해 봅시다. 저 놈이 계집을 데리고 논다고 해서 썩어문드러지는 것도 아닌데 어떻습니까? 그 다 음에 우리가 맛을 봐도 늦지는 않습죠. 일단 난쟁이 놈이 벌이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