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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12편 (12/60)

2026-09-30 18:59:59 조회 17
임조영이 부담스러워 그를 말려야 할 정도였다. "잠깐, 그런데 당신들 두 사람이 왕 공자를 모시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던 게 아니었소? 그분은 어디 계시오?" 주정이 막 입을 열려다가 목우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만두었다. 목우가 대신 예의 웃음을 온 얼굴에 띄우며 허리 숙였다. "셋째 공자님께 알려 드립니다. 저희 두 사람은 왕 공자님을 모시고 오던 길에 동정호에 들렀었습니다. 왕 공자님께서 동정호를 구경하시겠다고 하여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배에 올랐는데……." 갑자기 목우가 눈물을 흘리자 임조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게 분명하리라. 임조영은 불길한 예감으로 초조해졌다. 목우의 말에 의하면 왕중양은 배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자꾸만 물 속에 뛰어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극구 말리자 왕중양은 심하게 꾸짖으며 고집을 피웠다. 이 때문에 두 사람과 왕중양 사이가 서먹해져서 배에서 내리고도 좋지 않은 감정이 자리했다. 왕중양이 두 사람에게 따지며 고집을 피웠다. "대장부가 남에게 이처럼 끌려다녀서 야 되겠는가? 난 내 스스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성미야. 그대들이 자꾸 갑갑하게 굴면 난 모용세가로 가지 않겠어!" 화를 버럭 낸 왕중양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후에 왕중양의 뒤를 밟았는데 안타깝게도 영주(永州)까지 와서 그만 놓쳐 버렸다며 목우는 마치 전설을 들려주듯 담담하게 뇌까렸다. 주정이 냉랭한 기색으로 왕중양을 헐뜯으려고 했다. "그 사람이 우릴 업신여기는 바람에 우리도 더 이상은 찾고 싶지가 않았소이다." 임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목우가 얼른 나섰다. "셋째 공자님, 우리 두 사람이 큰공자님을 찾지 않은 게 아니라 그분이……." 목우가 말을 다 맺지 못한 채 슬그머니 임조영의 눈치만 살폈다. 임조영은 침묵한 채로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왕중양이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무책임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신세를 지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더군다나 이들의 말처럼 상대를 업신여기는 행동은 더더욱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왕중양은 지금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너무 걱정 마십시오." 임조영의 심기를 달래고자 입을 연 것은 뜻밖에도 평소 말이 없는 주정이었다. 목우도 뒤질세라 목청을 돋우었다. "공자님, 이 사람이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모용세가의 세력이 강호에서는 아직 대단하기에 사람들을 동원하면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왕 공자님은 꼭 찾을 수 있을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임조영은 하는 수 없이 산장에서 특기로 했다. 달리 서둘러 떠나 야 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왕중양의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튿날 산장 사람들이 모용준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모용준이 동정팔교 무리들과 대적할 의사를 밝혀 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임조영에게 자기가 돌아갈 때까지 산장에 조금 더 있어 달라는 부탁도 하더라는 거였다. 임조영은 그보다 더욱 애가 타는 일이 있어 마음을 졸였다. 그를 따라간 자지의 안부와 계속 앙금으로 남는 왕중양에 대한 걱정이었다. 임조영이 망설인 끝에 떠나려는 의사를 보이자 목우가 극구 말리며 나섰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큰공자님을 잃어버렸는데 셋째 공자님마저 모시지 못한 것을 아시게 되면 저흰 모용 공자님께 죽음을 면치 못 합니다. 제발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임조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마음만 졸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쑥 주정이 한 가지 제의를 해왔다. "산굴 구경을 안 하시렵니까?" 임조영은 난데없는 산굴 구경이란 말에 의아해 하자 목우가 설명했다. "모용세가의 산장 뒤에는 땅굴이 하나 있는데 아주 기묘하기가 그지없습죠. 그 굴 안에는 모용세가의 무공초수가 적힌 서책들이 있는데 지금껏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임조영은 그다지 흥미가 끌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용세가의 비밀과도 같은 곳이라면 애써 가 본들 무엇하겠냐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의 상태로서는 그보다 더 값진 구경거리가 있다 해도 물리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공자님이 보신다면 매우 도움이 될 줄 압니다만……." 다시 목우가 같이 갈 것을 종용하였다. 임조영은 이들의 간곡한 청도 있고 또 그 굴을 구경하고 나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를 따랐다. 굴 안은 컴컴했고 어귀에는 가시덤불이 가득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지 않았음을 한눈에 짐작하게 했다. 그런데 목우가 엉뚱한 말을 흘렸다. "그런데 한 가지 공자님 혼자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저흰 이곳에서 기다릴 테니 혼자 마음껏 구경을 하십시오." 임조영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들은 숱하게 구경해서 그만 이력이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조영은 곧 횃불을 밝혀 들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굴 안의 석벽은 습하여 만지면 축축하게 물기가 묻어날 것만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발을 내딛을 때마다 철퍽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굴은 곧게 뻗어 있지 않았지만 매우 길고 웅장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큰 석벽이 눈에 띄었다. 거기에는 '대연이 부흥할 날이 있으리라(大燕復光 指日可待)'라고 붉은 색으로 커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그 글자들은 아주 깊이 파서 새긴 것으로 붉은 색은 사람의 피가 아닌가 싶었다. 혹시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석벽에 오랜 세월을 걸쳐 새겨 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에 임조영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손가락을 글자 위에 대고 획을 따라 움직여 보았다. 추측이 맞다면 이 글자를 새긴 사람은 매일 획을 따라 손가락에서 피가 나도록 수천 수만번을 그어 댔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혹시 여러 사람이 글자를 새긴 것은 아닐까. 모용준의 조상들이 이 대연국(大燕國)의 후예라는 사실을 몰랐던 임조영의 추측은 거의 맞은 셈이다. 그들은 대대손손 대연을 부흥시키고자 매일 자신들의 결의를 석벽에 새겼던 것이다. 지금은 그들의 광이 사라졌기에 모용준은 이곳에 와 덧글자를 새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수많은 병장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게 보였다. 그것들은 매우 오래 된 것으로 아마도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손들에게 이같은 유물 들을 물려주어 가문의 위풍을 잇고자 했을 게 분명했다. 계속 걸음을 안쪽으로 옮기자 이번엔 목우가 말해 주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책궤들이 임조영을 기다렸다. 책들은 가지런히 정돈된 상태였다. 그런데 보통 책과는 달랐다. 크기도 보통이 넘었지만 종이가 아닌 쇠로 만들었다는 게 달랐다. 임조영이 그중 하나를 힘들여 꺼내 살펴보았다. 겉에는 '복호권(伏虎拳)'이라 씌어져 있었다. 안을 보니 글자 대신 그림 몇 장이 있을 뿐이었다. 첫 그림은 한 노승이 권법을 익히고 있는 장면인데 그의 곁에는 맞아죽은 듯한 맹호가 쓰러져 있었다. 두 번째 그림은 한 섬약해 보이는 선비가 복호권으로 맹호를 죽인 그 노승을 때려 죽이는 형상이었다. 선비의 얼굴 옆으로는 '이때로부터 모용복의 손에 의하여 소림 복호권을 아는 사람이 더는 없게 되었도다(以玆 時超, 白募容覆手下, 少林伏虎拳面無人矣)'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임조영은 이 모용복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그는 일찍이 강호를 주름잡으면서 각 문파의 영웅들을 수없이 죽였고 복호권으로 맹호를 때려잡던 용음(龍吟) 대사도 그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모용복은 이 기록을 남겨 후손들에게 자기가 이 절기에 뛰어난 전인(傳人)이라는 것을 알리려 한 것이었다. 임조영은 한쪽 구석에 있는 대형 깃발들을 발견하고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깃발들에는 글자들이 적혀 있었는데 한결같이 연(燕)자였다. 임조영은 모용세가에 얽혀 있는 사연을 알지 못했기에 그저 단순히 깃발의 크기와 같은 글자에 대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두 벽에 온갖 글자와 그림들이 가득 들어찬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그림들은 일부 강호의 각 문파 무공초수들을 그려 놓은 듯했다. 무당파(武當派)의 전진검법(全眞劍法), 공동파( 派)의 공동구검( 九劍) 등등, 각 문파의 공법전술(功法傳術)이 총망라되어 있는 벽화였다. 임조영은 그중 몇 가지 무공은 천하에 드문 절기(絶奇)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벽에는 한 여인이 그려져 있었는데 옷을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커다란 섬돌 위에 앉아 있는 여인 옆으로는 역시 글자가 가득 씌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비범한 느낌을 받게 했다. 그저 단순히 그려 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글자가 나타내고 있는 뜻은 이러했다. 〈숙녀(淑女)는 옥녀(玉女)이다. 옥녀가 일찍이 황제에게 심경(心經)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물었다. 황제가 심경에는 심(心)과 행(行)이 들어 있다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옥녀에게 심경으로 몸가짐을 조절하는 비결을 말해 주었다. 이리하여 우리 모용씨의 무공은 아들에게만 전수하고 딸에게는 전수하지 않는다. 이 심경은 내게는 쓸모가 없으므로 여기에 기록하여 훗날을 위해 남겨 둔다.〉 글을 읽고 있는 임조영은 강한 느낌에 전율했다. 그녀는 기(氣)가 허선을 따라 차츰 올라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다시 기가 한곳에 모이는 느낌을 감지했다. 임조영이 더 자세히 보려고 한 발 을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발밑이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기가 상승하여 몸이 두둥실 뜨는 게 아닌가. 임조영은 상기된 얼굴로 발밑을 보려고 했다. 때를 같이하여 석벽이 무너지면서 무수한 돌조각들이 임조영에게로 날아와 박혔다. 꽈르릉! 임조영의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임조영은 재빨리 석벽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눈앞으로 흙먼지가 뿌옇게 흩날렸다. 잠시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임조영이 눈을 뜨고는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두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바로 주정과 목우 였다. 주정은 역시 말없이 잔뜩 굳은 얼굴을 했고 목우도 예의 웃음을 내보이며 천천히 임조영 앞으로 다가왔다. 제7장 호남아와 미인의 운명 왕중양은 왕정아가 무슨 심사로 자신을 괴롭히려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요절내고 멀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그녀가 하자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가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내가 투덜대자 왕정아가 매섭게 쏘아보았다. 사내는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음탕스런 말들을 흘렸다. "오라버니, 저 사람이 지껄이는 소리는 듣지 마세요. 저자는 사내도 아니랍니다. 밤마다 그 짓을 하면서도 세 번은 숨을 돌려야 하니 어디 사내라고 하겠어요?" 그녀가 사내를 잡아먹을 듯 부득부득 이빨을 갈아댔다. "다시 한마디만 조잘거렸다가는 죽여 버릴 테다!" 그러자 사내는 더 이상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멀리서 기운거리기만 했다. 배가 호만에 정박하자마자 그녀는 사내에게 명령을 했다. "오라버니께 대접하게 어서 물고기를 좀 잡아 와요." 사내는 고분고분 그녀의 말에 따라 차가운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곧 그가 배 위로 큼지막한 물고기 두 마리를 던져 올렸다.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물고기를 낡아채는 두루미에 못지않은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에게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게 뭐야? 맛좋은 고기를 잡아오라고 했는데 이까짓 퍽퍽하고 영양분도 없는 걸 누가 먹는다고 그래요?" 그녀는 그것으로 끝내지를 않고 사내가 애써 잡아 올린 물고기를 다시 배 밖으로 내던졌다. 사내는 배에 몸을 의지한 채 아직 물 속에 있는 상태였다. 그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를 배 위로 던졌다. "물이 너무 차서 그러니 일단 올라가겠어. 정 맛이 없으면 이것저것 넣고 국을 끓이면 될 텐데 버리기는 젠장……." 그녀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훈시하듯 말했다. "수년 간 훈련시킨 군사들도 오직 한 번을 위해 써먹는다는 것도 몰라요? 그런데 당신은 허구헌 날 물 위에서 살면서 맛좋은 물고기도 잡지 못한다면 그게 어디 사람 구실을 한다 하겠어요?" 사내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사라지자 그녀가 왕중양을 향해 자식을 돌보는 어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내가 다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것은 잡시 후였다. 그는 그녀의 요구대로 이번엔 질 좋고 맛이 괜찮다고 인정되는 물고기를 양손에 꿰어 들고는 올라왔다. 사내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사시나무가 무색할 정도로 온몸을 심하게 떨어댔다. 왕중양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 와 몸을 녹이시오." 그러자 왕정아가 눈을 흘겼다. "쉴 틈이 어디 있어요! 어서 가서 불을 지피고 고깃국을 끓이든지 지지고 볶든지 하란 말이에요!" 사내가 갑자기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시 한마디도 못한 채 물러가는 사내를 보는 왕중양의 기분은 영 뒤틀렸다. 사내는 뱃머리 쪽으로 가더니 가마솥을 올리고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왕중양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음탕스런 눈빛을 흘려댔다. 사내는 아마도 생선국을 끓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쯤 지나자 구수한 국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왕중양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그대는 저 사람에게 좀 잘해 주지 그러나? 내가 보기엔 착한 사람 같은데." 왕중양이 망설인 끝에 사내를 두들하고 나섰다. 그러나 왕정아의 가슴에서 사내는 이미 지워진 지 오래인 듯싶었다. "미친 짓이에요." 그녀가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때마다 커다란 젖가슴이 좌우로 혹은 아래위로 묘하게 요동을 쳤다. "사내라고 다 같은 줄 아세요? 당신은 귀하지만 저자는 버러지 보다 못한 족속이라구요." 왕중양은 더는 사내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별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사내가 선창 안으로 들어오더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국이 다 되었는데……." 사내의 목소리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녀는 왕중양 곁에 비스듬히 누운 채 음란한 공상에 젖어 있는 바람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왕중양은 기운을 차리려고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여전히 마음 같지가 않았다. 그녀의 한쪽 젖가슴이 자신의 어깨에 얹혀져 있어 사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국이 다 되었다니까!" 사내가 눈앞의 광경을 차마 지켜 볼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쳤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떠들고 야단이야! 왜?" "아니 국이 다 되었으니 먹으라고……." 사내가 주눅이 든 어깨를 움츠리며 대꾸했다. 그녀가 왕중양의 팔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 생선국을 드시면 힘이 날 거예요." 그녀가 왕중양의 팔을 부축하고는 뱃머리 쪽으로 갔다. 사내가 대접에 생선국을 퍼담고 있다가 왕중양의 거동을 슬쩍 훔쳐보았다. 비실비실 힘도 제대로 못쓰는 사내를 그녀는 어디가 좋다고 저 난리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이리 와서 같이 드시죠?" 왕중양이 사내에게 말을 건네자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눈을 흘겼다. "오라버니, 그렇게 공손하게 대할 필요 없어요." 사내가 다시 입을 봉한 채 한쪽으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이가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국대접을 왕중양에게 내밀며 생긋 웃었다. "오라버니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나요? 미인이었어요?" 왕중양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그 얼굴이 임조영이란 사실에 그는 속으로 몹시 놀랐다. '어째서 셋째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단 말인가!' 잠시 상념에 빠진 왕중양을 지켜 보던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입김을 불었다. "보아하니 오라버니는 아직 사랑하는 여인이 없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이 정아를 아내로 삼으시는 게 어때요?" 한쪽에서 쪼그리고 앉은 채 한숨을 푹푹 쉬고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정말 너절하게 노는구먼! 임자는 사내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는게 그리도 좋단 말이야? 그러지 말고 옛날처럼 사내를 종처럼 부리며 살라고!" 그러나 그녀는 사내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생선국을 떠서 후후 불어 왕중양에게 먹여 주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내미는 국을 받아 먹는 왕중양의 마음은 또 한 번 우울해졌다. "내가 먹겠소." "아이, 여인이 먹여 주면 더 맛이 난대요." 그녀는 고집을 피우며 연신 국을 떠 자기 입김을 불어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던 사내가 결심을 한 듯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난 떠나겠어!" 그 말에도 그녀는 외눈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가려거든 아주 멀리 가 버려요." 사내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젠장, 아주 단단히 미쳐 버렸군!" "아니오. 그만 가 봐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왕중양이 일어서려는 동작을 취하자 그녀가 억센 팔로 눌러 앉혔다. "가라고 놔두세요." "좋아, 어디 임자 혼자서 고기 잡고 배를 젓고 실컷 살아 보라구." 사내가 할말을 잃은 채 멍하니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중양이 사내를 불렀다. "정아의 말은 상관하지 말고 이리 와 제 술이나 한잔 받으시오." 사내가 우물쭈물 그녀의 눈치만 살피자 다시 왕중양이 말을 이었다. "만약에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을 거요. 그러니 두 분 모두가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오." 사내가 퉁명스럽게 왕중양을 쏘아보았다. "젠장, 이제 와서 그런 공치사를 늘어놓으면 뭘해?" 왕중양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사내를 설득해 왕중양이 술잔을 건네고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그녀가 끼여 들었다. "나도 당신들과 술을 마시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사내가 도끼눈을 뜨더니 툭 내뱉었다. "사내들의 일에 참견 말아! 이 버러지 같은 년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감히 누구에게 욕이야?" "뭐! 누가 욕을 했다고 그래?" "이젠 뱃심도 두둑해 졌네!" "흥!" "좋아요. 당장 꺼져 버려요!" 그런데 갑자기 왕중양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배를 움켜쥐고는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당황하며 황급히 왕중양을 부축했다. "오라버니, 왜 이러세요?" 그녀는 생선국을 잘못 먹어 탈이 난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에 국대접을 살폈다. 그런데 사내가 음흉스럽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술에 독약을 넣었지." "뭐, 뭐라고?" "너도 까불다간 이 놈과 함께 물 속에 처넣을 줄 알아!" "지사한 놈!" "아니 그럴 필요 없이 내가 이 놈과 함께 죽어 버리겠어. 그러면 너에게 남아 있는 사내는 없을 테니까." 왕중양이 잠시 잃었던 정신을 수습하며 눈을 떴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내리누르고 있는 압박감에 고통스러워했다. 이 순간사내가 품속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는 자기 가슴을 향해 찔렀다. "욱!" 다행히 칼은 어깨를 찔러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왕중양이 놀라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손에 기력이 전혀 없었다. "난 임자에게…… 임자에게 피로써 보답하는 거야." 왕정아도 몹시 당황했다. 평소 이같은 행동을 전혀 볼 수 없었던 그녀라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사내가 어깨에 박힌 단검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무릎을 꿇었다. "차라리 당신이 죽었더라면……." 왕중양은 차츰 독이 온몸으로 퍼져 근육들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사내의 상처를 돌봐 주고 피를 멎게 해 주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아 괴로울 따름이었다. 괜히 자기 때문에 사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더 고통스러웠다. "나를 구해 준 것은 바로 당신이었소. 그러니 난 당신에게 죽어도 할말이 없소." 왕중양이 힘없이 입을 열자 사내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그러나 난 원한을 풀 수가 없소이다. 당신이 이곳에 오기전까지 난 그런대로 정아와 행복하게 살았소. 매일 고기를 잡고 또 배 위에서 물새들을 벗삼아 사랑을 나누고……." 왕중양은 차라리 눈을 감고 어서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체념을 한 상태였다. 무엇이 자신과 이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또 안타까웠다. 그녀가 달래듯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이전처럼 지낼 수 있어요. 그러니 어서 오라버니에게 해독제를 먹여 독을 풀어 주세요." 사내의 표정은 묘하게 변해 갔다. 기쁨도 그렇다고 분노도 아닌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 사람이 죽기 전에는 임자의 마음은 돌아설 수가 없어. 이 사람을 죽이고 나도 죽겠소. 난 임자의 외로움을 벌로 주고 싶을 뿐이오." "안 돼! 어서 나를 호수에 던져 버리고 예전처럼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오." 왕중양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소리쳤다. 사내가 어깨에 박힌 단검을 쓰윽 뽑아냈다. 한차례 피가 뿜어지더니 팔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