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9편 (9/60)
그대들은 나의 둘 째와도 형제 사이이니 나와도 역시 수족 같은 사이가 아니겠소. 그러니 달리 생각 마오. 내가 술을 마시고 싶었다면 벌써 찾았을 거요. 하지만 난 지금 저 달빛과 이 호수를 즐기고 싶소." 그러자 주정이 버럭 화를 내었다. "우린 공자님을 꼭 마시게 하겠수다! 어쩔 셈이오?" 고집을 부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중양이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 형께서 정 이렇게 나오니 그러리다." 그는 이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술만 자셔서야 어디 재미가 나겠소.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취흥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주정의 말에 목우가 거들며 나섰다. "좋지, 그거 좋지!" 왕중양은 주정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는 이곳까지 오면서 별로 입을 열지 않는 사내로 비쳤었다. 그런데 그런 주정이 갑자기 화젯거리를 찾자 왕중양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주정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먼저 한마디 하겠소. 이전에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게 된 일이 있었소. 그런데 의형제를 맺기 전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지요. '난 내가 죽을 때 나머지 두 형제와 한곳에 묻히기를 원하오.'하지만 이 사람은 속으로는 전혀 다른 꿍심을 갖고 있었소. 그는 속으로 두 형제들이 먼저 죽기를 원하고 있었던 거죠. 또한 다른 한 형제가 말하기를 자신이 죽게 되면 두 형제가 친 혈육처럼 슬피 울어 주기를 바랐지요. 하지만 이 사람 역시 속으론 두 사람의 아들이 죽고 그 손자가 결혼을 할 때까지도 살아 있고 싶어했습니다." 왕중양은 주정의 말을 들으며 문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에게서 피비린내를 맡았던 것이다. '둘째 동생 신변에 이같은 자들이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조만간에 만나게 되면 깨우쳐 줘야겠어. 조심하라고 말이야.' 속으로 혼자 다짐을 하고 있는데 이번엔 목우가 입을 열었다. "에이, 그런 얘기는 재미가 없어. 차라리 술먹기 내기를 하는 게 어때? 진 사람이 물에 들어가는 거야." 여름을 넘긴 가을 중간이라 물은 몹시 찼다. 그런데도 목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주정이 껄껄 웃으며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거 좋지. 내가 먼저 너와 내기를 하겠어!" 그러면서 그가 슬쩍 왕중양의 눈치를 살폈다. "저분은 공자라 우리와는 내기 따위를 하지 않을 게 분명해. 그러니 우리끼리 즐기자구." "잠깐, 나도 내기를 하겠소!" 왕중양은 그들에 대한 속마음을 숨기고 가급적이면 이 두 사람과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왜냐하면 이들과 아직도 며칠을 더 함께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사이가 벌어지면 아무래도 손해를 입을 것만 같았다. 주정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지껄였다. "좋소. 공자님이 그렇게 마음을 정한 것을 대환영하오." 술마시기 내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대적하려니 왕중양이 딸렸다. 그는 내기에 질 때마다 벌주를 마셔야 했다. 이래저래 취한 왕중양은 앞이 약간 흐려지는 기운에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주정이 흥에 취해 팔을 휘저으며 떠들어댔다. "이제부터는 처음 약속대로 지게 되면 호숫물에 뛰어드는 거요." 다시 가득 채운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주정이 지고 말았다. 그는 약속대로 호수에 몸을 던졌다. 목우가 그를 두고 빈정댔다. "자낸 평소에도 좀 못된 성미를 지녔었다구. 그러니 물 속에서 정신을 말끔하게 씻고 나오게나." 그러자 주정이 손과 발로 물을 저어 대며 숨가쁜 소리를 냈다. "뭐, 뭐라고! 요 놈의 자식, 네가 나에게 욕을 한다 이거지? 허헉!" 그가 곧 허우적대더니 배 위로 올라왔다.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 졌다. "다시 하자. 이번엔 너희들 두 사람을 물 속에 처넣을 테니 두고 보라구!" 달빛은 더욱 창연하여 배의 그림자를 호수 위로 드넓게 펼쳐 놓았다. 이들은 배 위에 앉아 다시 술내기를 시작하였다. 드디어 왕중양이 걸리고 말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 속으로 풍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난 헤엄에 서투르니 이만 올려 주오!" 허우적대던 왕중양이 뱃전으로 기어오르려 하자 주정과 목우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왕중양은 간신히 뱃전에 매달린 채로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취기로 얼룩진 시야에 달빛마저 가미해 이들의 얼굴이 한층 괴상하게 비쳤다. 마치 호수에 살고 있을 듯한 괴물을 보는 듯했다. 왕중양이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애원했다. "어서 손을 잡아 주오. 내가 기력이 모자라 혼자는 힘이 드오." 그런데 주정이 느닷없이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드는 것이 아닌가. 또한 왕중양은 그의 손에 큰 구리망치가 들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에잇!" 그가 힘껏 왕중양을 향해 망치를 내리쳤다. 왕중양이 머리를 옆으로 피하는 바람에 뱃전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다시 왕중양이 물을 헤치며 손을 뻗어 뱃전을 잡으려고 하는데 주정의 망치가 내리꽂혔다. 이번엔 왕중양의 어깨에 적중하고 말았다. "악!" 왕중양은 비명을 내지르며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왕중양이 가라앉은 곳에서 꼬르륵꼬르륵 하는 물방울들이 솟아오르더니 곧 그가 떠올랐다. "푸우! 어서 손을!" 왕중양이 소리를 질렀지만 주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못 들은 척했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목우가 다급히 주정을 불렀다. "주정, 자네 미쳤나? 저분은 모용 공자의 큰형님이신데 어쩌려고 하는가?" 그러나 주정은 이미 왕중양을 죽일 속셈인 모양이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왕중양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던졌다. "난 저 놈을 죽여 버릴 테다! 큰형님은 무슨 놈의 큰형님이야. 내 보기엔 저 놈은 쓸모 없는 궤짝에 불과하다구. 기력도 없는 형편없는 몸으로 어찌 우리 공자님의 형님 노릇을 하겠다는 게야!" 주정의 화는 좀체 가라앉을 줄 몰랐다. 왕중양은 망치로 얻어맞은 어깻죽지의 통증 때문에 더 이상 뱃전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고통스런 얼굴로 숨을 몰아쉬자 옆에 있던 목우가 대신 손을 내밀었다. "자, 큰형님! 내 손을 잡아요." 그러자 주정이 금속성의 목소리로 목우의 행동을 꾸짖었다. "가만 놔두지 못하겠어! 이대로 태호 물에 빠져 죽게 놔두란 말이다!" "모용 공자가 우리에게 한 말을 자넨 잊었나? 이분을 죽인다면 훗날 어찌 모용 공자를 대하겠는가?" 주정이 외면하며 혼자말처럼 흘렸다. "난 조금도 모용 공자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어. 구태여 있지도 않은 마음까지 모아 가며 머리 숙이고 싶지는 않아." 그러나 목우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왕중양을 얼른 끌어 올렸다. 배 위로 올라온 왕중양은 기진맥진하여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주정이 다가와 망치를 높이 쳐드는 것을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악!" 왕중양은 눈앞으로 스치는 노을을 보았다. 그것은 아찔함을 동반한 섬광 같은 빛이었다. 주정이 휘두른 망치의 위력은 왕중양의 가슴이 한 뼘이나 깊이 들어갈 정도로 대단했다. 다시 물 속으로 곤두박질 친 왕중양은 서서히 떠오르며 사지를 길 게 늘어뜨렸다. 두 사람이 방금 왕중양을 해치는 것을 본 뱃사공은 겁을 먹고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주정이 힐끔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이봐 사공!" 주정이 묘하게 입꼬리를 위로 치켜 올리며 물었다. "사공, 너는 방금 전 무엇을 보았지?" "전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뎁쇼." 사공은 질린 목소리로 들릴락말락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목우가 상체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대는 똑똑히 그 눈깔로 보고도 왜 거짓말을 하는가?" 뱃사공이 더욱 졸아든 목소리를 쥐어짜듯 말했다. "저, 정말 모릅니다요." 목우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애써 왕중양을 끌어올려 주던 방금 전과는 다른 또 하나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똑똑히 목격한 사공은 그래서 더욱 몸을 벌벌 떨어댔다. "악!" 주정이 날린 구리망치에 사공의 머리는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잘려 나간 목이 먼저 물 속으로 떨어지고 곧 몸뚱이가 따라 풍덩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주정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술잔을 높이 들자 목우도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웃음 소리에 달빛마저도 마구 흔들렸다. 해불개는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주어 옥총의 뺨을 갈겼다. "욱!" 옥총이 옆으로 몇 걸음 미끄러지다가 얼른 버티어 섰다. 그의 입과 귀에서는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불개는 유기에 대한 앙갚음을 잊을 수 없는지 씩씩거리며 중얼댔다. "옥총 동생, 이건 분명 그대를 때리는 게 아니라 저 유기란 놈을 때리는 걸세!" 해불개가 유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기가 약간 긴장을 한 얼굴로 옥총을 응시했다. "옥총 동생, 그댄 왜 이 고통을 자청하는가?" 유기의 안타까워하는 말을 뒤로한 채 옥총이 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불개 형님, 어서 더 때리시오." 그러자 해불개가 유기를 돌아보며 도리질을 해댔다. "안 되겠어. 내 손에 그대가 큰 타격을 입을까 걱정이 되네. 나머지는 저 유기가 맞도록 하는 게 좋겠어." 유기가 나섰다. "좋소. 이봐 옥총, 자낸 어서 물러나게." 그런데 해불개가 혼자만의 생각이 있는지 손을 들어 유기를 제지했다. 옥총이 고개를 들어 해불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따악! 하며 해불개의 손이 번개같이 옥총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엔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옥총이 꼼짝을 않은 채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해불개는 체면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모두들 휘둥그래진 눈으로 해불개와 옥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해불개가 다시 손을 들어 옥총의 뺨을 갈겼 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처럼 옥총이 맥없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옥총이 겨우 일어나더니 볼멘소리를 냈다. "불개 형님, 어서 더 때리시오!" 옥총의 뺨은 퉁퉁 부어 올라 마치 심통이 난 사람처럼 돼 버렸다. 이빨도 흔들리는 것 같아 옥총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는 만약 해불개가 몇 대 더 손을 쓴다면 상처를 달래는 데도 오랜 시일이 걸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불개가 질렸다는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옥총 동생, 어서 물러나게!" 옥총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해불개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온통 피멍이 들어 보기조차 민망할 지경이었다. 옥총이 아픔을 참아 가며 입을 떼었다. "불개 형님, 이제 겨우 네 대를 맞았을 뿐이오. 약속대로 하지 않고 여기서 중단한다면 난 결국 쓸데없는 공매를 맞은 셈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옥총, 그대는 총명한 사람이야. 그런데 어째서 괜한 고집을 부려 죽음을 재촉하려는가? 그댄 정말 유기를 위해 죽을 각오라도 돼 있는 건가?" 옥총이 탈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우스운 형상으로 지껄였다. "불개 형님이 설마 날 죽이기야 하겠소?" 옥총은 그러나 속으로 만일 해불개가 다시 손을 든다면 더 이상 견뎌 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유기를 돕자고 나선 일인데 여기서 중단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할 게 분명했다. 유기가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침통한 얼굴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옥총 동생은 이만 물러나게. 내가 차라리 저 놈과 한판 겨루겠어!" "안 돼요!" 옥총이 매우 단호하게 제동을 걸자 유기가 주춤했다. 옥총이 아예 유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해불개의 성질을 돋우었다. "왜 겁이라도 나는 거요? 망설이지 말고 어서 때리란 말이오!" 그러자 해불개가 화를 벌컥 내며 곧 잡아먹을 듯 이빨을 내보였다. "오냐, 좋다. 죽여 달라고 해도 난 마다하지 않겠다!" 딱! 딱! 딱! 해불개가 연거푸 옥총의 뺨을 후려갈겼다.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옥총은 그만 정신을 잃고는 바닥에 녹아 내리듯 쓰러졌다. 해불개가 아직 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유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유기 네 놈은 그래도 죽어야 한다! 옥총이 대신 매를 맞았다고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러나 유기의 눈에는 오로지 자기 때문에 변을 당한 옥총만이 들어왔다. 그는 옥총을 끌어안고는 목을 놓았다. "옥총 동생!" 다행히 옥총은 천천히 의식을 되찾고는 눈을 떴다. 유기를 본 옥총이 고통을 이빨로 사려물며 어렵게 입을 떼었다. "혀, 형님은 무엇 때문에 그까짓 반화대회를 구경하신단 말이오. 형님은 이제 연세도 많으신데 그걸 구경해서 무엇하겠소?" 유기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래, 동생 말이 맞아. 난 다시는 이같은 강호의 싸움엔 말려들 지 않을 생각이야." 유기는 마음이 상해 더는 옥총을 하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해불개가 다가와 옥총을 향해 지껄였다. "그래도 더 맞겠다고 하겠는가? 고집을 버리게나. 그러다가 죽는다구." "유기 형님, 절 좀 부축해 줘요." 유기에게 의지한 채 일어선 옥총이 해불개를 노려보았다. "불개 형님, 당신은 이제 나의 형님이 아니오. 그러니 나를 동생으로 여기지 말고 어서 마저 때리시오. 내가 이까짓 아픔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옥면낭군(玉面郎君) 옥총으로 강호에서 불릴 수 있겠소?" "하하하!" 해불개가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싹 거두고는 옥총의 눈을 빼먹을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역시 자낸 심지가 곧은 데가 있어 좋아. 좋다, 그럼 어디 자네의 그 잘난 이름을 지켜 보라구!" 말을 마친 해불개가 이번엔 아예 몸을 날려 옥총의 면상을 호되게 갈겼다. "웁!" 옥총은 뒤로 자기 키보다 높게 떠서 뒤로 날아갔다. 옥총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질렀다. 돌로 된 바닥에 금이 갔던지 아니면 옥총의 몸 어디가 부러진 듯했다. 그런데도 옥총은 굴하지를 않았다. "흐흐, 겨우 이 정도요. 이처럼 용기가 있고 무예가 뛰어난 당원이 왜 유운장 사람들 앞에서는 손안에 잡힌 개미처럼 허둥대었단 말이오? 또한 어찌 임 공자 앞에서는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돌아섰단 말이오?" 해불개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들어갔다. 가슴에서 열기가 솟구쳐 지레 고꾸라질 것 같은 해불개는 입을 벌린 채 옥총을 노려보았다. 강호에서 이처럼 사내답지 못한 일들이 알려진다면 그것은 곧 최후를 예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찌 강호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해불개가 분노를 짓누르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허허, 그대는 정말 내 형제답게 처신을 하려는군." 그러나 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해불개는 더 이상 솟아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강호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일이 있어도 옥총의 기고만장함을 영원히 잠재울 생각이었다. 딱! 딱! 딱! 해불개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옥총의 뺨을 마구 갈기기 시작했다. 옥총은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얻어맞고는 죽 뻗어 버렸다. 하지만 부릅뜬 두 눈은 여전히 해불개를 향 해 열을 내뿜고 있었다. 해불개가 씩씩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크게 몇 번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옆으로 길게 찢으며 말했다. "나와 유 장주 사이에 일은 이 정도로 하고 묻어 두겠다. 하지만 훗날 다시 만나 그 죄값을 받아낼 것이다! 얘들아, 가자!" 해불개가 명령을 하자 살아 남은 부하들이 그를 따라 떠나갔다. 임조영과 자지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운 채 말이 없었다. 자지 처녀의 가냘프면서 규칙적이지 못한 숨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은 쉽게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자지가 한쪽으로 몸을 옮기며 한 숨을 내뱉었다. "그분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임조영은 언뜻 짚이는 데가 있어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자지는 임조영이 왕중양을 마음에 두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 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눈치가 무딘가 봐요. 호호호!" "왜 웃지?" "아니……." 이곳으로 오던 길에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일이 떠올라 황급히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때 임조영은 너무도 태연하게 두 사람과 의형제의 굳은 결의를 다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자지는 왕중양과 모용준이 어리석고 우둔하게 여겨져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웃음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고개를 들어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왕 공자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분은 달라요." "누구? 모용준을 두고 하는 말이냐?" "예." "그럴 리가 없다." 다시 자지의 긴 한숨 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자지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털어놓은 것은 그 긴 한숨이 지나고 또 얼마간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머물다 간 뒤였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피살이 되었고 혼자 지금까지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 왔었다. 자지의 사정을 듣고 난 임조영은 나지막이 한숨을 부려 놓았다. 이때였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조영이 머리를 그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누구요?" 모용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 왔다. "셋째 동생, 큰일이 났어. 빨리 일어나 보라구!" 두 사람이 급히 일어나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모용준이 안으로 들어서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임조영 방에 있는 자지 처녀를 확인한 그는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러나 모용준은 더 급한 일이 벌어졌다는 듯 임조영의 팔을 잡았다. "큰형님이 떠났는지 보이지가 않아!" 임조영이 깜짝 놀라며 문밖으로 황급히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큰형님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모르겠어. 큰형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난 내 방으로 갔을 뿐이야. 이젠 어떡한다지! 한 가지 짚이는 것은 형님과 나눈 대화였어. 형님은 나와 동생에게 부담이 된다는 말을 했었어. 난 극구 말 렸지. 가려거든 다 함께 가자고 했었어. 또 동생이 형님을 극진히 생각하고 있다는 말도 했었지. 만약 정 떠나려거든 동생에게 알리고 나서 가시라고까지 했는데. 그런데 큰형님은……." 갑자기 말끝을 흐리는 모용준에게서 무언가 범상하지 않은 기운 을 감지한 임조영이 물었다. "그래, 큰형님이 또 뭐라고 하시던가요?" "큰형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원래 우리와 의형제를 맺을 마음이 없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우리 두 사람과 함께 있자니 부담스럽기만 하다면서……. 내 말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네. 난 형님을 설득하다가 내 방으로 돌아왔지. 날이 밝거든 다시 의논해 보자는 약속까지 했는데 그만……." "그래 곳곳을 찾아보기는 했나요?" "소용없어. 벌써 멀리 가셨을 테니까. 따라잡기도 어려워." "큰형님은 무공을 쓸 수 없는 몸인데다가 경공마저도 어려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자지도 임조영의 말을 듣고는 함께 왕중양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런데 모용준이 안 된다며 두 사람을 막았다. "동생, 내가 동생의 입장이라면 큰형님을 찾지는 않을 거야." "무슨 뜻이죠?" "큰형님은 그대와 나를 동생으로 삼고 수족같이 여기고 있어. 우리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떠났는데 우리가 다시 찾아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냔 말이지." 임조영의 가슴은 휑하니 바람구멍이라도 난 듯 허전하기만 했다. 스스로도 왜 이다지 가슴을 졸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만 큼 왕중양이 차지하고 있던 마음자리가 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큰형님께서는 제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나요?" 임조영은 아직 가슴에 그의 목소리와 얼굴이 깊이 새겨져 있음을 상기하며 자신을 위해 한마디라도 남겼을 거라 믿고 싶었다. "맞아요. 왕 공자님께서 떠나실 때 필시 둘째 오라버니를 통해 무슨 말인가를 남기셨을 거예요. 여기 있는 임……, 임 공자님께 어서 말씀드리세요." 자지가 나서서 거들었다. 그녀는 자칫 임조영의 정체를 드러낼 뻔했다. 그러나 모용준은 짐짓 말을 더듬는 자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큰형님은 셋째가 피곤할까 봐 깨우지 않았던 거야." 그러나 임조영이 알고 있는 왕중양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토록 무책임한 행동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갈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말게. 내가 혹시나 해서 벌써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으니까. 그들이 큰형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 모용세가로 정중히 모시라고 당부를 했네." 자지가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용세가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곳에 가서 일단 큰 오라버니를 만나자고요." 자지의 제안에 임조영이 순간 눈빛을 반짝였다. 별수없다는 듯이 모용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하하, 역시 동생들의 말이 옳아. 그리고 난 두 동생들의 깊은 마음에 탄복했다고. 그래, 우리 함께 가서 큰형님을 만나자고. 우리 모용세가를 두 동생이 방문해 준다면 나 역시 영광일 테니까." 모용준의 말에 모두들 길을 떠나기 위해 서두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불어오는 바람에 주름살을 더해 가는 물결이 햇빛에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