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8편 (8/60)
그녀를 돌아보는 임조영의 표정은 침울하기만 했다. "당신은 왜! 왜…… 사내가 아니었나요?" 임조영은 아프게 자신의 귀를 후벼파는 자지의 잠꼬대를 들으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모용준은 침대 위에 앉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은 그다지 평온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른 날 같았으면 지금쯤 모용세 가에서 무예를 연마하지 않으면 여인들을 찾아 밖으로 쏘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일찍이 모용세가에 있는 여종들을 모조리 간음하여 그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었다. 모용준으로서는 그런 짓을 해야지만 마음의 평정을 이를 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마저도 내키지 않으면 무지막지한 무림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소일하곤 했었다. 비록 모용준이 난쟁이에 속하고 추물이었지만 성미가 사나워 누구도 그를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했다. 더욱이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모용세가의 공자님으로 행세했기 때문이다. 모용준은 지금 자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일 마음까지 갖고 있었다. 그 방법만이 자신의 무분별한 행각을 매듭짓고 어엿한 가장으로서의 위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불처럼 혹은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처럼 솟아나는 자신의 욕망도 쉽게 다스릴 수 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모용준은 가문의 보물까지 내놓으면서 자지를 사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자지를 그곳에서 빼내 왔지만 현재로는 자신의 손에 들어 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처음에는 해불개에게 넘어가려 하더니 이제는 임조영에게……. 순간 모용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빛을 토하며 반짝였다. 어쩌면 임조영이 사내가 아닐 뿐 아니라 절세의 미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것은 외모에서 느낄 수 있는 부드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엉뚱한 마음도 가슴 한켠으로 심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지와 임조영 둘 다를 품안에 안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해불개는 자기 부하들을 거두고는 그곳을 떠나 한 낡은 절에 이르렀다. 이들은 절에서 하룻밤 묵을 작정이었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겁에 질려 감히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 지를 못했다. 그런 점은 그의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불개가 당한 수모를 알고 있기에 가급적이면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장작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매우 심각하게 말들을 주고받았다. 한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큰형님, 내 보기엔 우리 형제들이 그 사람과 결사적으로 싸워 볼 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생깁니다요. 그자가 우리 강남 흑도의 모든 호한들을 다 이길 수야 없을 테니까요." 그러자 다른 사내가 말을 받았다. "너무 나서지 말어. 큰형 님께서 생각이 있을 테니 좀 기다려 보자구." 모두들 해불개의 입만 쳐다보았다. 해불개가 이윽고 쓴웃음을 지으며 지껄였다. "강남 흑도도 중요하지만 우선 그자의 검을 막아낼 수가 없으니 낭패스럽군." 모두들 놀라며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해불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일은 일단 접어 두고 오랜만에 우리의 옛친구들이나 환영하는 게 어때?" 그들은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사내들은 한쪽에 조용히 앉아 날카로운 눈매를 실룩거렸다. 이들은 저마다 손에 병 장기를 들고 있었는데 해불개가 명령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누구에게든지 덤벼들 태세였다. 이때 덜커덕거리는 수레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레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소리도 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이곳에 절이 있으니 쉬어 가는 게 어때요?" 그러자 노인이 몹시 피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꾸나. 좀 쉬었다가 일찌감치 떠나자. 각별히 주위를 살피고." 노인의 목소리엔 불안감이 잔뜩 어려 있음이 역력했다. 곧 수레가 멈추더니 십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절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절 안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와 있다는 것을 보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더군다나 이들이 해불개와 그의 부하들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더욱 질겁을 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노인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우린 다른 곳으로 가 조용히 쉽시다." 해불개의 부하 중 하나가 그 말을 듣고는 나섰다. "그럴 필요 없어! 유(劉) 나으리의 수레는 이곳에서 쉬었다 가는 게 좋을걸." 수레를 타고 온 이는 바로 반화대회에 참가했던 반벽산장의 장주 유기였다. 그는 해불개를 보자 매우 낭패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을 흘렸다. "불개 형님, 난 형님이 이곳에서 쉬고 계신 줄 몰랐수다. 내가 알았다면야 어찌 찾아와 시끄럽게 굴었겠소?" 잔뜩 눙치는 투로 떠벌리자 해불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별말씀을……, 내가 오히려 유 나으리에게 덕을 보고 있는 처지인데 당치도 않지." 그러나 유기는 해불개의 말속에 분명 가시가 박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유기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형님, 형님께선 강남의 가장 높은 나으리시고 우리 반벽산장은 형님의 뜻을 많이 받들어 왔지요. 우리 반벽산장에 무슨 흠이라도 있게 되면 항상 꾸짖어 주시기도 하셨잖습니까?" "듣자니 유 나으리 당신과 나의 관계가 아주 친밀하다고 떠들고 다닌다는데 사실인가?" "그럼요, 암, 그렇고말고요." "그래? 그렇다면 그대와 내가 은전 만 냥을 주고받을 만한 교분이라도 되는 건가?" 해불개는 그가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수를 썼다. 그런데 유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교분이 깊은데 그까짓 은전 만 냥이 대수인가요. 제게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더니 사람들에게 손짓을 했다. 유기를 따라 온 사람들도 사태를 짐작했는지 자기들이 지니고 있던 은전들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왔다. 유기가 은자와 은표들을 해불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 나 해불개는 그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를 매섭게 쏘아보며 비꼬듯 말했다. "유 장주, 당신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군. 난 은전이 필요한 게 아니라구. 난 그 난쟁이 사자우에게 몇만 냥이나 되는 은자를 거저 내주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게 많아." 그러자 유기가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형님, 제가 이까짓 은자를 가지고 무슨 충성을 나타내겠습니까. 그저 부하들이 술을 마시는 데 쓰라는 뜻입니다." 해불개가 비웃더니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듣거라! 반벽산장의 유 장주께서 은자 만 냥을 내놓아 너희들에게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는구나. 그래, 마실 생각들이 있느냐?" 그러자 한 사내가 칼을 뽑아 들더니 은자를 내리쳤다. 은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격앙된 그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은잔 필요 없어! 내가 요구하는 건 바로 네 놈의 대가리 야!" 그러나 유기는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기색으로 해불개를 주시했다. 해불개가 다시 입을 열어 사태를 결말지으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서 죽이지 그래!" 이렇게 소리친 사람이 풀썩 몸을 던져 유기에게로 덮쳐 들었다. 손엔 칼이 들려 있었는데 반벽산장 사람들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모두들 반격할 태세로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는 자세를 갖추었다. 유기가 해불개를 불렀다. "형님, 꼭 이렇게 해야 되겠소?" 그러더니 십여 보 정도 뒤로 재빠르게 물러난 유기가 순식간에 손을 썼다. 해불개는 유기의 행동을 주시하기만 했다. 그는 유기가 암기를 쓰려는 것을 눈치챘다. 유기의 암기는 강남에서 이름이 나 있는데 그의 손에서 한번에 삼십 알의 화주(火珠)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 화주는 구슬 같지만 구슬이 아니고, 가시 같지만 가시가 아닌 바로 구리 비녀였다. 그 끝에는 언제나 독액이 묻어 있어 맞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장인 아주 무서운 무기였다. 유기의 손에서 세 알의 화주가 튀어나왔다. "팍팍팍!" 해불개가 재빨리 칼을 뽑아 화주를 막았다. "나쁜 놈! 감히 내게 덤비겠다고!" 그런데 세 알의 화주 중 하나는 해불개의 칼에 맞고 소실되었고 하나가 그 뒤에 서 있던 부하의 얼굴에 명중되었다. 그는 단발마의 비명을 남기고는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절간 대들보에 깊숙이 박혔다. 유기는 화주로 해불개를 쓰러뜨리지 못하자 후닥닥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해불개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라 고스란히 당하게 되었다. "윽!" 더군다나 두 사람이 한데 엉키다 보니 칼을 쓸 틈도 생기지가 않았다. 해불개가 양손으로 유기의 팔을 움켜쥐며 목울대가 흔들릴 정도로 외쳤다. "이 필부(匹夫)야, 그래 이 해불개를 만만하게 보았단 말이냐. 난 죽인다면 꼭 죽이는 사람이다. 불개라는 이름이 괜히 생긴 줄 알았느냐!" 곧 해불개가 '불개' 라는 말을 세 번 연거푸 소리치며 연주포식 공격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기는 워낙 노련한 자라 해불개의 초수와 초식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읽어 냈다. 그는 해불개의 세 가지 초수와 여섯 가지 초식을 잘 피해 갔다. 이윽고 유기에게서 풀려난 해불개가 매섭게 눈을 치켜 떴다. "네 놈이 감히 나의 강남 흑도 혹령기(黑令旗)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 놈의 온 가족을 찢어 죽이고 너의 반벽산장도 불 태워 버리겠다!" 유기가 태연자약한 기색으로 받아쳤다.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지. 하지만 먼저 네 놈의 낯짝에 피칠갑을 하여 까마귀때가 떠나지 않게 만들어 주겠다!" 유기의 부하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해불개의 부하들은 처음부터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차츰 싸움이 무르익어 가자 해불개 부하들의 사기가 높아지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유기의 부하 중 두 사람이 겁을 먹고는 막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우욱!" 그러나 그만 날아든 칼에 몸뚱이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반벽산장 사람들의 사기가 더욱 떨어졌다. 유기가 강호객의 자세를 되찾으며 소리를 질렀다. "결사적으로 싸워라!" 그러자 반벽산장 사람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꼭 유기의 외침 때문만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는 사태였기에 그들도 작심을 한 것이었다. 절간 안은 온통 피와 떨어져 나간 살점들로 얼룩졌다. 불상에도 핏덩어리가 튀어 아래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 "해불개, 네 놈의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네 놈을 병신으로 만들어 놓고 말겠다!" 한 사내가 싸우다 말고 이 소리를 듣고는 대신 대답했다. "네 놈이 우리 해불개 형님께 끝까지 반항하려는구나!"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양쪽 모두 칼에 쓰러져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다시 전의를 가다들었던 반벽산장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지자 더 이상의 살상은 모두에게 마지막이 될 거라는 생각에 유기가 서둘러 싸움을 중단시켰다. "그만둡시다! 우리가 졌소! 해불개, 우리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다면 내 한 목숨 기꺼이 내놓으리다!" 해불개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뇌까렸다. "흐흐, 넌 정말 명석한 머리를 가졌어.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차례 유기를 노려보던 해불개가 다시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죽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쓸어 버려라!"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던 유기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미 많은 숫자를 잃은 반벽산장 사람들은 계속 몰리기만 했다. 잠시 아수라장에서 물러 나온 유기가 해불개에게 조금 나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다시 한 번 청하겠소. 저 사람들까지 죽일 필요가 있겠소?" 해불개가 여유스럽게 팔짱을 끼며 지껄였다. "유기, 네 놈은 곧 죽게 될 운명인데 무슨 할말이 그리 많더냐? 너희 반벽산장은 이제 끝장이다!" 그때 절간을 향해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해불개가 짧게 눈빛을 번뜩였다. 누군가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서며 외쳐 댔다. "해불개 형님, 제 말 좀 들어 보시오!" 그는 몹시 격양된 얼굴로 서둘러 말을 이었다. "형님, 싸움을 멈추십시오. 이들과는 대화로 풀어 가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은 유기였다. 반화대회 때 해불개에게 은자를 빌려 주었던 옥총이었다. 유기가 그를 바라보며 창백해진 낯빛을 지었다. "옥총, 해불개가 우릴 쓸어 버리려고 하고 있으니 소용없을 거요. 저 놈은 우리의 원수로 남겠다고 작정한 놈이오." "그래, 내가 네 놈들의 불구대천의 원수다! 어쩔 셈이냐?" 해불개의 말에 옥총이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불개 형, 내 얼굴을 봐서라도 유기 형을 용서하시오. 나와 유기 형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런가? 나와는 원수지간인데 그대와는 친구라고? 이거 정말 낭패인걸……." 옥총의 얼굴색이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깊게 가슴으로 숨을 들이쉰 그가 마음을 어느 정도 가다듬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불개 형의 너그러운 도량에 대하여 찬사를 보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 있는 흑토의 사람들만 형님께 복종을 하겠습니까?" 한편 해불개는 유기만을 감싸려는 옥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옥총의 청을 들어주고는 싶지만 입맛이 영 떫떠름해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해불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좋다. 내가 저 놈의 따귀를 열 대 때리는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지으련다!" "고맙소이다. 역시 큰형님의 아량에는 멀리서 나는 새들마저 듣고는 고개 숙일 것이오. 그런데……." "그런데 또 뭐냐?" "형님은 끝까지 분풀이를 하려는 뜻인가 본데 정 그렇다면 저를 때리시는 게 어떨지요?" 그러자 해불개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면서 얼굴에 화기가 가득 돌았다. "뭐야?" "형님, 달리 생각하지 마시오. 나와 형님이 우애를 나누는 것처럼 유 형과도 떨어질 수 없는 형제일 따름이오. 난 형님들 두 사람 이 서로 싸운다는 걸 원치 않을 뿐이란 뜻이오." 해불개가 호탕하게 웃으며 상체를 심하게 흔들었다. "허허허, 좋다!" 유기가 달려오더니 옥총의 팔을 잡았다. "옥총 동생!" 옥총이 웃으며 유기를 바라보았다. "유 형, 내 보기엔 불개 형이 나를 아프게 때릴 것 같지는 않으니 너무 상심 마오." 두 사람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던 해불개가 미소를 지을 듯 말 듯한 얼굴로 다가서며 말했다. "도리대로 한다면 내가 그대를 때려서는 안 되지, 하지만 내가 때리는 매는 그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유기를 향한 것이라 생각하게." 사실 해불개는 속으로 대단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옥총의 등장으로 유기는 물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기회만 있다면 유기의 앞이빨 몇 개는 작신 부러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천히 해불개가 옥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따악!" 한차례 해불개의 손이 옥총의 뺨을 향해 날아갔다. 옥총은 뒤로 휘청 물러서며 얼른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귀에서는 위잉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정신이 모두 빠져 버린 듯했다. 주먹으로 내리치는 것만 큼이나 강한 힘이라 모두들 입을 크게 벌린 채 말이 없었다. 제5장 죽음 앞에 선 왕중양 왕중양은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왕중양은 얼굴을 문 쪽으로 길게 내밀었다. "열려 있으니 들어오시게." 그는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 중 하나일 거라 짐작했다. 왕중양의 예상이 맞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은 바로 모용준이었다. 그는 긴요하게 할 말이 있어 들어온 사람처럼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왕중양이 그의 심중을 꿰뚫어 보았다. "둘째 동생, 할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서 말해 보게." 모용준이 방안을 슬쩍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큰형님,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동생과 나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어서 털어놓게 나." 모용준이 결심을 한 듯 얼굴에 힘을 모으더니 말을 이었다. "큰형님, 나와 셋째 동생은 강호를 돌아다닐 생각이 있지만 사실 형님 때문에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끝을 흐리는 모용준의 태도에 왕중양은 긴장했다. 어떤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지 여간 궁금하지가 않았다. "동생, 그만 애태우고 어서 속시원히 말해 보라니까." "알겠습니다. 형님께서 부상을 입어 무척 걱정이 됩니다.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숱한 패거리들과 본의 아닌 싸움도 벌여야 하는데 형님 때문에 곤란을 받을까 염려가 되는군요." 왕중양이 잠시 눈을 감고는 상념에 빠졌다. 사실 모용준의 말이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입장이 바뀌었더라도 그같은 기우는 변함이 없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 점이라면 너무 염려를 말게. 그렇지 않아도 난 가 볼 데가 있다네." 왕중양은 지금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 모용준이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형님께 말씀을 드릴 참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형님께서 저의 모용세가에 한동안 머물러 있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만 어떠신지요? 저와 셋째가 자주 찾아 뵙고 형님의 쾌유만을 기다리겠습니다." 왕중양은 모용준의 말에 크게 감동했다. 두 동생들을 따라다니며 짐이 되는 것보다는 혼자 남아 상처를 치유하고 무예도 더 연마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와 셋째의 무예로 형님을 모시고 다니는 데는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모용준이었다. 그는 왕중양의 기색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셋째가 자지 처녀와 인연을 두는 바람에……." 놀란 왕중양은 모용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변명을 위해 꾸며낸 말 같지는 않았다. 황중양은 비로소 임조영과 자지 처녀가 그런 사이라는 것에 서운한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모용준의 말이 사실이고 임조영이 자지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더 이상 강호를 떠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되면 모용준 혼자만이 외로운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단 셋째에게 속마음을 타진해 보고 난 뒤 결정을 하도록 하세." 왕중양이 수습책을 꺼내자 모용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셋째 역시도 형님을 혼자 남겨 두고 싶어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는 없네. 나를 데리고 가자면 힘이 몇 배 더 들텐데." "생각 같아서는 셋째에게 자지 처녀를 한곳에 정착시키도록 종용하고 싶지만 말을 들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자지 처녀는 셋째와 함께 있어야 해. 만약에 두 사람이 이미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면 말이야. 내가 떠나는 게 좋겠어. 아니 지금 당장 일어서야겠네. 셋째에게는 동생이 잘 말해 주게나." 그러자 모용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수하 두 사람을 급히 불렀다. 그중 하나는 손에 구리망치를 들고 있는 아주 건장한 사내 였는데 곱슬곱슬한 턱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마치 목숨을 바쳐 은혜에 보답했다는 개백정 주해(朱亥)의 모습과 흡사했다. 다른 한 사내는 아주 여윈 키다리였는데 어딘가 간사해 보이는 구석이 엿보였다. 흰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아 더욱 그렇게 보였다. 모용준이 설명했다. "이 두 사람은 나와 형제처럼 지내고 있는데 한 사람은 주정(朱亭)이라 부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목우(程雨)입니다. 이들이 형님을 모용세가로 모셔 갈 겁니다." 곧 주정과 목우가 왕중양에게 예를 올렸다. 모용준이 두 사람에게 일렀다. "이분은 나의 큰형님이시다. 그러니 두 사람은 모용세가까지 잘 모시도록." 왕중양은 이들과 함께 객점을 떠나게 되었다. 왕중양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무공이 사라진 자신이 두 동생들에게 괜한 짐으로 맡겨질까 봐 내심 걱정되던 차였다. 그렇기에 모용준의 말대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다음 대사를 도모하는 게 나을 듯 싶었다. 세 사람은 말을 달려 임안을 벗어났다. 그들은 강남 한복판을 가로질러 며칠 후 태호(太湖)에 당도하게 되었다. 어느새 다시 날이 어두워 하늘에는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중양은 의미로운 눈길로 거대한 태호의 물결을 응시했다. 그는 갑자기 기분이 유쾌해져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 태호는 정말 좋은 곳이오. 우리 배를 타고 마음껏 즐깁시다." 두 사람이 깍듯이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공자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지요." 이들은 곧 배를 한 척 빌려 몸을 싣고는 호수 안쪽으로 노를 저어 나갔다. 호수를 바라보는 왕중양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빛이 났다. 배가 이윽고 호수 한복판에 이르자 주정과 목우가 술과 요리를 꺼냈다. 주정이 말했다. "공자님, 월색도 좋은데 한잔 하시지 않겠습니까?" "임자들이나 드시오. 난 호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취흥이 나는구려." 그러자 주정이 약간 못마땅한 기색을 나타냈다. "우린 공자님이라 받들고 있는데 공자님은 우릴 무시하고 있군요." 그 말에 왕중양이 긴장을 하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허허, 주 형, 난 모용준과 의형제를 맺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