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5편 (5/60)
그는 팔과 다리를 전혀 쓰지 않고서도 순식간에 모용준 앞까지 왔다. "내 무공을 한번 볼테냐?" 석초수가 소리를 내지르며 모용준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중얼중얼 혼자말을 흘렸다. "우리 삼형제는 사부님의 계승자들이지. 하지만 내가 큰형이나 둘째 형보다는 더 지독한 악인이란 점을 명심하라구!" 그러자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제갈정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받아 쳤다. "뭐라고! 네가 나보다 더 악하다구? 난 지난번 석우촌(石半村)에서 한번에 사내 서른일곱 놈과 계집 넷을 죽였단 말이다. 흐흐, 물론 계집들은 그냥 죽인 것은 아니지. 그래도 나보다 더 악인이라 말할 수 있느냐?" 그 말에 석초수가 잠시 공격을 멈추더니 싱긋 웃었다. "그게 뭘 대단하우? 난 일전에 그 소의촌(小依村)에서 계집을 꾀어 내어 그 에미 앞에서 실컷 가지고 놀았소이다. 또 나중에는 에미를 그 계집 앞에서 똑같이 주무르기도 했었지. 흐흐흐!" 속문성이라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는 더욱 요상한 소리로 웃어대더니 말을 꺼냈다. "힛힛, 두 사람 모두 나보다는 악하다 할 수 없소. 난 평양지(平凉地)에서 백여 사람이 물을 길어 마시는 우물에다 독약을 넣어 그 촌의 사람들을 몽땅 죽여 버렸소. 어떻소? 이만하면 악인 중에 악인이 아니겠소?" 이들 형제들은 모용준과의 싸움은 뒷전이라는 듯 자기들의 전과를 늘어놓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들 형제들의 묘한 말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악인으로 이름이 나 있는 자들이지만 이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떠벌릴 줄은 몰랐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흥이 나서 더 지독한 일들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한참 후에 제일 큰형인 제갈정이 일침을 놓았다. "그럼 좋다. 우리 세 형제가 왕중양 이 놈을 괴롭히는 시합을 하면 되겠군. 저 놈이 죽자고 해도 그럴 수 없고 또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사람에게 두 사람이 머리를 숙이는 시합이다!" 그의 말에 속문성과 석초수가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주위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조차 알고 있지를 못했다. 이들의 눈에는 강호객들이나 왕중양 이나 모두 자기 내키는 대로 죽여 버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만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제3장 검으로 얻은 미인 해볼개가 넌지시 사자우에게 청했다. "사 선배님, 난 당신께 은자를 드렸으니 여인을 주셔야지요!" 그러자 옆에 있는 자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사자우가 간사하게 웃어댔다. "헤헤헤, 이처럼 아리따운 미인을 그대에게 내준다면 난 바보가 되는 셈인데? 머리칼도 이처럼 아름답고 부드러운 미인을 우둔한 너에게 준다는 것은 섭섭한 노릇이지." 주위를 짧게 돌아보던 해불개가 사자우에게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소. 그렇게만 해준다면 훗날 꼭 오만 냥을 더 내리다." 사자우의 눈빛이 순간 의미있게 반짝였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해불개를 잠시 쳐다보았다. 사자우는 혀를 끌끌 차더니 자지의 손목을 끌어다 해불개에게 넘겨주었다. 갑자기 환호성이 터졌다. 미녀가 자기들 손에 넘겨지자 해불개의 수하 사람들이 한시름 놓고 환호를 지른 것이었다. 해불개가 그윽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자지 소저, 날 따라가면 끝없는 부귀를 누리게 될 것이오." 기쁨에 취해 있던 사내 중 하나가 아직 여인이 알몸인 것을 보고는 얼른 옷을 입혀 주려고 했다. 그러자 해불개가 제지했다. "만지지 마! 내가 입힐 것이다." 달빛 아래에 드러난 여인의 알몸을 능글맞게 들여다보며 해불개가 천천히 옷을 입혔다. 옷을 입은 자지는 더욱 절색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얌전을 빼는 듯 입을 확 다물고 있었다. 여인마저 빼앗긴 모용준은 화를 누를 수 없었다. "않돼! 그렇다면 내 보물을 돌려줘!" 여인을 손에 넣을 수 없다면 보물은 다시 건네 받아야 도리였다. 그러나 사자우는 코방귀를 뀌며 고개를 흔들었다. "흥, 그대가 내게 구슬 꾸러미와 반지를 예물로 바치는 것을 모두 지켜 봤는데 이제 와서 무슨 어거지야?" 결과적으로 모용준만 당한 꼴이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는 목줄기에 힘줄을 새겼다. "네 놈이 이 모용준을 업신여길 수 있다고 보느냐?" 모용준이 사숙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모용준은 팔방에서 비 내리는 '팔방래우(八方來雨)'초수를 썼다. '사숙이 살짝 모용준의 공격을 피했다. "헤헤, 내가 강호 사람들과 싸우게 되면 언제나 손해를 보았지. 그러나 네 놈과의 싸움에선 결코 손해가 없다고. 왜냐하면 우리는 둘 다 난쟁이이니까!" 그러면서 사자우도 자세를 취하더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정말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처럼 싸웠다. 한편 수세에 몰려 더는 빠져 나갈 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왕중양은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세 명의 사형제(師兄第)가 왕중양을 상대로 누가 더 악한인지를 가르는 시합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악인 중의 악인으로 소문이 나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역사 속의 인물 가운데 세 사람을 악인으로 숭배해 왔다. 한 사람은 폭군으로 알려진 진시황(素始皇)이었다. 진시황은 육국(六國)을 멸하고 사람들을 못살게 군 천하에서 으뜸가는 폭군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여인의 신분으로 황제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였다. 그녀는 진시황 못지않게 독한 면을 지닌 여인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금조(今朝)의 전임 재상이었던 진회(素檜)였다. 진회는 악인으로 줄곧 십삼도(十三道)의 금패(金牌)를 받은 자이기도 했다. 그는 황용부(黃龍府)의 악비(岳飛)를 해쳤으며 송실(宋室)의 금수강산을 절반이나 금나라에 넘겨준 장본인이다. 대악인인 이 세 사람을 숭배하는 그들은 노독물 신독행에게서 무공을 배웠다. 이들은 비록 노독물의 절세 절기인 봉황력(鳳凰力)과 합마공(蛤蝶功)은 익히지 못했지만 대단한 무공을 가진 자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제갈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장으로 가격하여 저 놈의 기(氣)를 헛돌게 만들 것이니 잘 지켜 보거라!" 왕중양은 피할 기력도 없었고 몸을 사린다고 해서 안전할 수도 없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제갈정의 장이 날라왔다. 왕중양은 가슴을 얻어맞고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심장이 터 질 것 같고 혼백마저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으으……." 왕중양이 신음을 토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장에 밀려난 왕중양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넘어지려는 그를 뒤에서 석초수가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의 시 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왕중양은 입과 귀로 붉은 선혈을 뿜어냈다. 그러나 치명타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왕중양을 통해 자신들의 악랄함만을 보이면 되었기에 섣불리 죽이지는 않았다. 다시 제갈정이 괴성을 지르며 왕중앙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왕중양은 뒤로 쓰러지지도 못한 채 그 장을 가슴으로 고스란히 받았다. "으윽!" 왕중양은 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는 더 이상 강호의 무림으로 남아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엔 속문성이 잘근잘근 말을 씹듯 내뱉으며 나섰다. "훌륭하오! 큰형님이 장력으로 놈의 공력을 없애 버렸으니 난 사내 구실을 못하게 만들겠소." 왕중양에게로 다가간 그는 거만한 태도로 앞이빨을 내보였다. "넌 천하의 악한 유운장 사람들을 애당초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이제 사내 구실조차 못하게 될 테니 앞으로는 절간에 들어가 살 궁리나 하라구." 그러자 석초수가 자기도 뒤질 수 없다는 듯 미리 다짐했다. "큰형님의 한 장에 놈의 내공이 달아났고 둘째 형님 덕분에 사내구실마저 못하게 될 테고, 그럼 난 한평생 놈이 약탕 속에서 살게 만들어 야겠소." 속문성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를 끌어 모으며 외쳤다. "좋다!" 그가 장을 뻗어 막 왕중양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릴 때였다. 사람들 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 왔다. "잠깐만!" 모두들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모두의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내가 틀림없는데 여인보다 더 깨끗한 용모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 공자는 그야말로 용모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전혀 때가 묻지 않은 듯 청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몸에는 소복 단장을 했는데 검은 머리칼과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머리칼은 달빛을 받아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그가 한 손에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감싸듯 하면서 사자우에게 읍을 했다. "사 선생, 당신들은 지금 이곳에서 반화(盤花) 모임을 갖고 있는 건지 아니면 살생의 잔치를 열고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그의 말에 사자우는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자기가 하는 일에 방해를 하고자 나선 인물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사자 우는 애써 속으로 뒤틀리는 심사를 억눌렀다. 지레 겁을 먹고는 기꺼이 구경꾼을 자청하고 있는 말은 사람들과는 달리 대단한 각오를 하고 있는 인물이란 생각에 은근히 경계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셈인가? 할말이 있거든 해 보아라!" 사자우가 불쾌한 기색을 털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묻자 공자는 약간 머리를 숙였다. 그는 매우 점잖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사자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유운장이 비록 천하의 으뜸가는 고장이긴 하나 무슨 일을 하든지 자체의 도리는 존재했다고 생각하오. 그런데 지금의 당신들은 이해할 수가 없소. 그저 내키는 대로 하는 것 같은데 유운장엔 남아 있는 법도가 없단 말이오?" 사자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공자를 주시했다. "넌 도대체 누군데 남의 일에 참견이더냐?" 공자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밝혔다. "전 임조영(林朝英)이라 합니다. 유운장 사람들의 처사가 공정하지 못해 이렇게 나선 것이오." 사자우가 헤죽거리며 임 공자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래,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어서 말해 봐?" 임조영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제게 청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디 왕 공자를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던 제갈정이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왜 저 놈을 놓아달란 말이냐? 한창 시합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판인데!" 임조영이 백옥 같은 이를 보이며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난 꽃을 사려고 합니다. 당신은 장사를 하고 싶지 않소? 유운장에서 이곳으로 올 때는 남과 싸우려는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닐 테지요?" 사자우는 잠시 눈을 감고 고심을 했다. '젠장, 내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는 꼴이로구나. 내가 여인들을 수도 없이 구해 왔는데 일이 잘못되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 장사고 뭐고 힘들겠지. 장사를 하고 나서 죽이든 살리든 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생각을 다진 그는 표정을 바꾸고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목청을 높여 말했다. "좋다. 반화 모임을 갖자는 데 어려울 건 없지. 꽃을 구경시키지 않고서야 강호의 대협객들을 불러다 무엇을 하겠는가?" 이렇게 사태의 수습책을 찾은 사자우가 기진맥진해 있는 왕중양을 슬쩍 밀쳤다. 왕중양이 맥없이 뒤로 풀썩 허물어졌다. 그는 쓰러진 채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흐릿한 시선 속으로 사람들의 모습 이 보일 듯 말 듯 잡혔다. '강호 사람들이 협의와 담력이 없다고 무시할 것만은 아니로구나, 이렇듯 유운장 사람들이 악랄하고 무공마저 뛰어나니 누가 감히 맞서겠다고 나서겠는가. 맞선다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이 나 마찬가지 결과일 테니까…….' 왕중양이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며 임조영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때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는 바로 낮에 회모루에서 보았던 그 공자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행여 그 역시 유운장 사람들의 술책에 말려들어 크게 화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왕중양이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그에게 한마디 던졌다. "임 공자, 당신은 절대 저 사람들과 대적하지 마시오. 유운장 사람들의 무공이 대단하오……." 그러나 임조영이 걱정 말라는 투로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소. 왕 공자님의 그같은 관심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왕중양의 눈에도 임조영의 용모가 매우 뛰어나 보였다. 더군다나 사자우와 제갈정 그리고 속문성 등 악인의 무리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상태라 더더욱 그 모습이 돋보였다. 사자우가 임조영에게 약간 고개를 숙였다. "공자께서 일깨워 줘서 고맙소. 그렇지 않았다면 대사를 망쳤을 지도 모르지. 이리 오너라!" 그가 소리치자 몇몇 여인들이 걸어 나왔다. 바로 값이 매겨지기를 기다리던 한 무리의 여인들이었다. 어떤 여인은 살갗이 백설처럼 희고 고왔지만 더러는 매우 여위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또 여유롭게 자태를 뽐내는 여인들도 몇 끼여 있었다. 사자우가 음흉스런 표정을 짓더니 조그마한 입을 벌름거렸다. "모두들 자지 처녀만 좋아하지만 이 아이들도 각기 지닌 맛은 있겠지." 그러더니 한 여인을 끌어안고는 희롱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손으로 여인의 여기저기를 쓰다듬고 주무르자 여인이 불가에 놓인 뱀처럼 온몸을 꼬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일부 사내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한마디씩 교성 같은 말들을 뱉었다. "아이고 죽겠네!" 그들은 갑자기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옴을 느끼곤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임조영이 보다못해 한마디했다. "사자우, 집어치시오. 당신이 데리고 온 여인들은 우리가 본 뒤 데려가면 될 텐데, 왜 하필이면 사람들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이시오?" 사자우의 웃음 소리가 터졌다. "우하하하! 이 계집을 잘 보란 말이오. 난 이 계집을 그대에게 팔 생각인데 우선 명심해야 할 거라구. 괜히 계집에게 넋을 빼앗겨 장작개비처럼 말라비틀어지지 말고." 그러나 임조영은 그의 말을 흘려 들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의 계집들은 쓸 만한 게 없소. 딱 한 계집만 빼고……. 그 계집을 팔 의향이 있소?" 사람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임조영 역시 자지 처녀를 손가락 끝으로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차례 피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예감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해불개가 발끈하며 나섰다. "임 공자, 그대는 이미 내가 저 계집을 샀다는 걸 잊었나?" 임조영이 해불개의 말을 무시했다. "당신 같은 추한 사내를 누가 좋다고 하겠소?" 이때 사자우가 요상하게 눈을 뜨며 임조영에게 물었다. "임 공자, 그렇다면 자네는 사내가 아니란 말인가? 어째 말하는 투가 계집 같구만. 그래, 이제 보니 이름도 여인네의 것이고……. 혹시 계집이 아닌가?" 임조영이 코방귀 소리를 내며 받아쳤다. "당신은 물건처럼 팔고 사는 여인이라고 업신여겨도 된다는 말이오?" 임조영은 격분을 삼키듯 입을 굳게 다물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임조영의 이런 행동에 새삼 감동을 받았다. 아마도 임 조영이 여인을 존중해 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임조영이 시선을 거두어 다시 해불개를 향했다. "해불개, 자지 처녀를 내게 넘겨주시오." 그러자 해불개가 팔뚝에 앉은 날벌레를 쫓듯 말을 툭 던졌다. "내가 이미 샀다니까 계속 귀찮게 굴 건가?" "그러지 말고 처녀를 내게 넘기시오. 유운장 사람들이 당신에게 받은 은자를 모두 돌려주겠소." 해불개가 피식 하고 비웃었다. 그는 순간 임조영을 풋내기로 여겼던 것이다. 사자우가 어떤 인물인데 한번 거머쥔 은자를 내놓는 단 말인가. 그가 만약 은자를 포기한다면 그게 어디 유운장 사람이겠는가. 자선당(慈善堂)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사자우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강호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임조영의 말을 들을 리 없다고 믿었다. "자지 처녀의 인물이 워낙 뛰어나 여기 모인 많은 사내들이 모두 탐을 내었지. 그러나 이 해불개가 차지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 여인이 필요하다면 여기서 마음껏 고르면 되지 않겠는가?" 해불개의 말이 임조영의 귀에 들어올 리가 얼었다. 임조영은 천천히 자지 앞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눈길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처녀 앞에서 걸음을 멈춘 임조영이 입을 열었다. "너는 정령 해불개를 따라갈 마음인가?" 그러자 자지가 임조영에게 눈길을 주며 담담하게 되물었다. "절더러 어찌란 말인가요?" 임조영이 자지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여인도 필시 사람일텐데……." 그러자 자지 처녀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서럽게 울었다. "나도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곳에서 누가 날 사람 취급이나 하던 가요? 사내들이 원망스러울 뿐이에요. 난 다시는 사내들과 가까이 하고 싶지가 않아요. 당신도 필요 없으니 내 앞에서 없어지란 말이에요!" 자지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듯 하염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임조영이 탄식하는 어조로 해불개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이 처녀를 꼭 사야겠소." 해불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코바람을 불어댔다. 그리곤 임조영 쪽으로 몇 걸음 내딛더니 가슴을 폈다. "네가 감히 나와 맞서겠다는 거냐?" 해불개가 입을 씰룩이며 다시 두어 걸음 더 임조영 쪽으로 내딛었다. 그가 남긴 발자국이 달빛에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땅이 움푹 파여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해불개는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해불개가 남기는 발자국을 보며 더욱 긴장했다. 곧 임조영과 해불개가 크게 한판 붙을 찰나였다. 사자우가 예의 웃음 소리를 내며 중간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혈전을 벌였을 것이다. 사자우는 훌쩍 몸을 날려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임 공자, 그대가 정 자지 처녀를 사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나. 그런데 은표를 내겠는가 아니면 주보(珠寶)를 내놓을 것인가?" 임조영이 막 대답을 하려는데 대신 해불개가 격분하여 사자우에게 따져 물었다. "사자우, 당신은 이 처녀를 이미 내게 팔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려는 거요. 당신이 이처럼 지조가 없는 줄은 내 미처 몰랐소이다!" 사자우가 손을 내저으며 해불개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서둘지 말게나. 자낸 처녀 하나에 백 사람이 청혼을 한다는 말도 못 들어 봤나? 우선 임 공자가 무엇을 얼마나 내는가를 지켜보자구." 해불개를 일단 잠재운 사자우는 임조영에게 의미 있는 눈빛을 보냈다. "자네가 은자를 얼마나 갖고 왔는지 어서 보이시지?" 그러나 해불개가 주먹을 움켜쥐며 나섰다. "집어치워! 누구든 내가 산 처녀를 건드렸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 말이 떨어지자 그의 곁에 있던 세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자세를 추스르기 시작했다. 한 사내는 쌍갈고리를 쓰고 또 한 사내는 장검을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내는 육각류성색(六角流星索)을 쓰면서 각각 임조영을 에워쌌다. 이들은 거의 동시에 임조영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임조영은 이들이 쓰는 병장기 사이를 드나들며 기회를 엿보았다. 임조영은 한 손에 검을 틀어쥐고 다른 손으로 장을 내뻗었다. "이크!" 사내들이 불현 공격을 멈추고는 놀라움에 떨었다. 한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마치 검으로 후려치는 것처럼 장이 날카롭게 자신들에게 날아오자 그들은 주춤했다. 임조영의 장의 위력으로 싸움이 중단되었다. 임조영은 때를 놓치지 않고 해불개에게로 다가가 몇 마디 말을 뱉었다. 그러자 해불개의 안색이 변하면서 손을 들어 명령했다. "모두 무기를 거두어라!" 세 명의 사내들은 무슨 영문이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해불개의 심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임조영에게서 들었기에 돌변했는지 사내들은 알아 낼 방법이 없었다. 해불개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어스름한 달빛을 받은 그의 안면은 시체의 그것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임조영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는 듯싶었다. "좋소, 나와 형제들은 임 공자의 말대로 하겠소. 자, 모두들 가자!" 해불개가 형제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자 사자우는 내심 흐뭇했다. "해불개, 그럼 은자는 돌려줄 수 없소이다!" 해불개의 축 처진 어깨를 향해 사자우가 소리쳤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자우는 임조영을 쳐다보며 눈을 꿈벅였다. 해불개의 성격으로 순순히 물러나는 게 의아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군! 자네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저토록 풀이 죽어 가는지 도통 모르겠어.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임조영은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다시 자지 처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저는 날 따라가겠는가?" 자지 처녀의 눈빛은 아직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임조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어서 말해 봐." 자지 처녀가 한참을 고심하던 끝에 비로소 입을 열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따라가겠어요." 임조영이 흡족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으려는데 제갈정과 석초수 그리고 속문성이 장벽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