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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4편 (4/60)

2026-09-30 18:59:59 조회 20
왕중양이 여인의 시선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데 사자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남의 행운을 막지 말아야 해. 모용준이 신방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해불개가 신방에 들어가는가 하는 건 아직 모르거든." 모용준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젠 육만 삼천 냥이란 말이오. 자지 처녀는 날 따라갈 수밖에 없소." 난처한 지경에 빠지고 만 것은 오로지 해불개였다. 그는 난데없이 왕중양이 나서 모용준을 돕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이 자식은 하늘이 높은지 땅이 높은지도 모르는 아주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그러니 이 해불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틈을 봐서 이 놈을 죽여 버려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내 이 원 통함을 지을 길이 없다.' 해불개의 얼굴은 곧 터질 것 같은 노여움으로 변해 갔다. 얼굴의 근육들이 실록실록하니 험상궂게 보였다. 그는 일단 사태에 따라 처신할 생각이었다. "좋다. 나도 방법이 없으니까……." 이렇게 말한 해불개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일에 말려들기 싫은지 얼른 시선을 돌린 채 해불개의 눈치만을 살피기에 바빴다. 해불개가 누군가를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유 장주, 그래 당신은 형제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도와줄 마음이 없는 거요?" 반벽산장의 유기(劉器)는 해불개가 자기를 지목하자 속으로 꿈틀 놀랐다. '이젠 끝장이로구나. 이 해불개가 날 벼랑 끝으로 몰고 가려는 속셈이야.' 유기는 모용준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모용준은 그 가문에서 가장 이름난 사람으로. 자신이 받은 일에 대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보복을 하는 성미였다. 그런 이유에서 강호 사람들은 평소에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런데 해불개가 자신을 지목한 것은 모용준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예고하는 결과였다. 유기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해불개 총타주님, 당신께 은자를 드리리다. 암 드려야지요." 해불개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졌다. "좋소. 유 장주의 성의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그런데 유기가 갑자기 허둥대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은표 만 냥을 나눠 오천 냥씩 두 사람에 게 꿔주겠다는 말이오." 두 사람이라 함은 곧 모용준도 포함된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유기의 얄팍한 꾀에 혀를 내둘렀다. 유기는 두 사람에게 모두 미움을 사는 것을 피해 보려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두 사람의 원성만 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유기가 오천 냥씩 내놓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용준이 자기 가슴을 짚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난 강남 모용세가의 사람이오. 그 증거가 바로 이 옥벽이지. 누구든지 옥벽을 가지게 되면 강호 사람들을 위해 대사를 이를 수가 있소. 다만 협의(俠義)를 중히 여기는 내 뜻과 어긋나지만 않으면 되오. 이 옥벽을 내놓을 테니 오만 냥만 빌려 주시오." 모용준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재산을 저당잡히겠다고 나왔다. 일단 옥벽을 잡고 있으면 자신의 신변은 보호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곧 그 반응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서로가 옥벽을 차지하 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아우성을 헤치고 한 건장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난 북방 성원표국(猩猿 局)의 국주(局主)외다. 내가 오만 냥의 은자를 내고 모용 공자의 신물(信物)을 갖겠소." 곧 그는 품속에서 은표 뭉치를 꺼내 사자우에게 내밀었다. 사자 우가 은표를 집으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껄껄 하며 괴상한 웃음 소리를 냈다. 그는 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마치 마귀를 연상하게 하는 형색이었다. 그가 빠르게 달려오더니 성원 표국의 국주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내가 이 옥벽을 받지 않으려는데 누가 감히 받는다는 말이냐?" 그는 들고 있던 죽장으로 은표 뭉치를 공중으로 날렸다. 은표들은 공중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때를 맞춰 그가 몸을 공중으로 띄우더니 세 바퀴를 선회하며 그 은표들을 모두 걷어들였다. 은표는 한 장도 남김없이 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내 은표를 누가 빼앗을 속셈이냐?" 국주가 이렇게 외치면서 주먹으로 난발을 한 사내의 가슴을 향해 세 번 연거푸 공격했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전혀 요동도 하지 않은 채 말짱했다. 다시 국주가 주먹을 날리자 그는 하나, 둘, 셋! 하며 숫자까지 세는 여유를 부렸다. "네 놈이 날 세 번이나 주먹으로 때렸겠다. 내가 누구라고 감히 주먹질이냐? 하지만 내 오늘은 그냥 참겠다." 성원표국의 국주는 큰 수치를 당하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사자우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운장 사람들은 저 놈이 내 은자를 빼앗는 걸 보고도 관계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자 사자우가 유유작작한 태도로 대꾸했다. "난 어차피 장사만 끝내면 되니까, 장사만 방해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환영한다구." 국주의 노기는 밤하늘을 환하게 밝힐 정도로 커졌다.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얼굴을 돌려 마귀의 모습을 한 사내를 노려보았다. "내가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다시 주먹질을 하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마귀 같은 괴한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내리며 그의 주먹을 모두 피했다. 사람들은 벌써 결과를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귀를 닮은 그가 일침을 쏘았다. "원 국주, 난 그대의 은표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에 참는 거요. 하지만 계속 귀찮게 군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다시 국주가 공격할 태세를 갖추자 마귀를 닮은 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손으로 살짝 국주를 건드리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국주를 두 사람이 나와 부축해 가지고 나갔다. 마귀 같은 자가 음흉한 웃음을 남기며 자리를 뜨려고 하자 사자우가 가로막았다. "그만 가려는가?" "난 모용 공자를 낙심하게 만들 수도 없고 해불개도 성나게 할 수 없는 입장이오. 그리고 난 이 은표를 그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줄 마음도 없소. 난 이 은표를 가지고 임안에 가 한바탕 즐길 생각 뿐이오." 사자우가 미소지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그런데 자낸 한 가지를 잊었군." 마귀를 닮은 자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뭘 잊었단 말이오?" "내가 똑똑히 말해 주었을텐데. 나도 은표를 아주 좋아한다구." 그자가 수중에 넣은 은표를 모두 빼앗으려는 속셈이었다. 사자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세 사람이 마귀를 닮은 자에게 덤벼들었다. 유운장 사람들은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공력 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의 무공은 특히 출중하여 모두들 경계를 해온 터였다. 한 사람은 제갈정(諸葛征)이었는데 타락한 선비의 옷차림에 파묻힌 꼴이었다. 그는 가냘픈 손으로 마귀 같은 자의 목덜미에 있는 힘줄을 뽑아 버리려고 했다. 두 번째 사내는 속문성(續文成) 으로 주로 하체를 노렸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석초수(石楚秀)라 불리는 사내였는데 기분 나쁜 웃음을 얼굴 가득 띄 우고는 그의 등뒤를 노렸다. 바로 이들이 북방의 악패인 노독물 신 독행의 제자들이었다. 마귀를 닳은 자는 갑작스런 이들의 공격에 매우 당황했다. 방금 전에 치렀던 국주와의 싸움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흐흐, 유운장 네 놈들이 은자를 빼앗겠다는 속셈이군." 마귀를 닮은 자가 이들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은표를 먼저 강탈한 것은 마귀를 닮은 자였기 때문이었다. "당장 싸움을 그만두지 못할까!" 어디선가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이들 네 사람이 막 맞붙으려고 할 때였다. 사람들은 감히 유운장의 일에 나서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목소리에서 대단한 내력을 읽어 낼 수 있었기에 모두들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자 급히 시선을 돌렸다. 부드러운 달빛과 반짝이는 등불을 온몸으로 받으며 우뚝 서 있는 사내는 이제 스무 살 남짓해 보이는 영준한 사내였다. 사자우가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누구인지 얼른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 두려움이 생겼다. 그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누군데 남의 일에 참견을 하는 건가?" 그러자 영준한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며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을 알렸다. "난 이곳에서 반화대회(盤花大會)가 있다기에 우연히 찾아온 길이오. 그런데 이 무슨 알량한 짓거리들이오. 당신들이 여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일인데 은자를 놓고 싸움질까지 하다니 정의라고는 정말 찾아볼 수가 없소." 사자우가 불쾌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잠깐, 도대체 누군데 내게 훈시를 하는 거야?" "아까도 한차례 밝혔듯이 난 종남산 사람으로 왕중양이라고 하오." 사자우가 가소롭다는 듯이 입을 놀렸다. "그래, 그대는 자기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지? 대리(大理)의 남조(南詔)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와 대적할 만하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동해(東海) 도화도(桃花島)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와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하하하!" 그런데 사람들 중에서 왕중양의 담력에 감탄한 사람이 나서 한마디했다. "유운장은 천하에서 가장 큰 부락이오. 당신들한테 도전한 사람이 있는데 싸울 생각은 않고 빈말만 늘어놔서야 되겠소?" 그렇지 않아도 사자우는 느닷없이 자기 일에 시비를 걸고 나선 사내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사람은 체격도 늘씬한 것이 약골은 아닐 것 같다. 천하의 무림 중에서 어느 놈이 유운장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덤비는 어리석음을 범한단 말인가. 그런데 저자가 나선 것을 보면 필시 대단한 무공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잠시 앞뒤를 재보단 사자우가 앞으로 나서며 왕중양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좋다. 그대가 정 나와 싸우고 싶다면 하는 수 없지." 사자우가 훌쩍 몸을 날리더니 매처럼 왕중양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의 공격은 매우 집요하고 오밀조밀했다. 이번엔 다시 굶주린 호랑이가 되어 사정없이 왕중양을 몰아붙였다. "얏!" 사자우는 주먹으로 치명타를 입힐 만한 곳을 공격했다. 그러나 왕중양은 공격은 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피하기만 했다. 그는 사실 자신이 검을 뽑아 들거나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여러 사람이 도와줄 거라 믿었다. 왕중양이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그가 무공이 딸리기 때문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걸음을 떼려 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속으로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여기 모인 사람들이 여인을 노리개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괜한 싸움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사람들의 힘을 빌려 더 확실하게 정의를 보여 주려던 왕중양은 비로소 검을 뽑아 들었다. "좋다! 어디 이 검 끝에 달린 정의의 외침을 들어 보아라!" 왕중양이 무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검날이 살기를 뿌려댔다. 그야말로 명가(名家)의 검법을 방불케 하는 솜씨였다. 그러나 내력이 부족한 탓인지 매번 우세를 점하면서도 결정적 인 기회는 얻지 못했다. 한시름 놓고 있는 것은 사자우였다. 처음 검을 뽑아 들 땐 어느 정도 두려움도 없지 않았으나 왕중양이 차츰 내력이 쇠잔해지는 것 같자 여유를 되찾았다. 사자우는 왕중양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의 위신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이더라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강호 사람들이 이 일로 강한 공포심을 갖게 만들어야겠다는 게 그의 속셈이었다. 여유를 되찾은 그가 공격의 속도를 약간 늦추었다. "네 놈이 그까짓 재간으로 날 넘보려고 하다니, 단단히 각오해 랏!" 다시 사자우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왕중양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왕중양이 공격을 피하면서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역시 밤하늘만 요란스럽게 가를 뿐이었다. 땅에 사뿐히 내려앉은 사자우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왕중양이 소리쳤다. "네 놈의 유운장은 대단할 것도 없다. 난 네 놈과 싸워 공도(公道)를 수호할 생각이다!" 사자우가 비웃듯 웃어젖혔다. "하하하! 천하에서 으뜸가는 악인과 공도를 논하다니, 네 놈의 머리가 돈 것은 아니냐?" 그러면서 사자우가 다시 주먹질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먹은 그의 몸 뒤로 도는가 싶더니 순간 왕중양의 가슴을 향해 날아 들었다. "이크!" 왕중양이 급히 몸을 피하느라 옆에 있던 모용준 앞에까지 물러섰다. 모용준이 손을 내밀어 입으로 피를 흘리는 왕중양을 부축했다. "선생, 당신의 용기에는 탄복하는 바이오. 하지만 단지 용기만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오." 모용준의 눈빛에는 감동의 빛이 어렸다. 왕중양은 모용준의 말속에 기회를 엿봐 자리를 피하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모용준은 왕중양이 사자우에게 큰 화를 입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진심 으로 걱정해 주었다. 왕중양이 입가로 흘러내린 피를 훔치며 예를 갖췄다. "강남의 모용 가문에 대해 고마움을 드립니다." 자세를 다시 추스린 왕중양이 사자우에게 달려갔다. 사자우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해 갔다. 그는 간단하게 왕중양을 물리쳤다면 더욱 천하 무림의 호걸들 앞에서 위신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괜한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아 이쯤에서 끝내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더욱이 왕중양이 검을 세워 든 채 비장한 기운으로 다시 공격해 올 줄은 몰랐었다. "받아랏!" 왕중양의 공격을 피하면서 사자우는 얼른 손을 써 검을 작신 부러뜨렸다. 그러나 왕중양은 몸을 한차례 움찔거리더니 곧 공격을 가해 왔다. 다급해진 사자우가 얼른 잔꾀를 부렸다. "제갈정! 내가 저 놈과 싸운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러니 그대가 대신 요절을 내게나." 제갈정은 몇몇 유운장의 제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자에 속했다. 그는 꼬마 사숙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았다. 또한 그는 교활한 자여서 왕중양을 때려눕혀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 다. 왕중양 앞으로 나온 그가 허연 이빨을 내보였다. "너의 버릇은 내가 고쳐 주마!" 잠시 살기 어린 눈초리로 왕중양을 노려보던 그가 갑자기 점잖은 태도를 취했다. 그는 무인(武士)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문사(文士)인 듯 행동하려 했다. "창생이 가련해도 나는 애닯게 여기지 않고 인간이 목숨을 살리려 해야 나는 가련히 여기노라!" 그는 시구를 읊조리듯 하더니 곧 야윈 손을 왕중양을 향해 내뻗었다. "자, 받아랏!" 왕중양이 다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겨우 세 합도 넘기지 못해 왕중양은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제갈정은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해왔다.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급기야 왕중양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난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대협인 척하는 것을 가장 미워하지. 바로 너 같은 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뒤로 물러난 왕중양을 향해 주먹을 던졌다. "윽!" 역시 왕중양은 공격을 피하지 못한 채 가슴을 얻어맞고는 더 멀리 뒤로 휘청거리며 밀려나고 말았다. 왕중양의 얼굴은 피로 얼룩 졌다. 이미 가슴에서 참기 힘든 동통(疼痛)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갈정을 쏘아보는 눈초리만은 여전히 매서웠다. 강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왕중양을 본 제갈정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진정한 대협의 기백을 갖추고 있는 사람일지 모른 다는 생각에 제갈정이 의미로운 눈빛을 지었다. 그가 보기엔 왕중양이 무공을 조금 더 연마한다면 곧 강호에서 제일가는 고수가 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제갈정은 한 가지 속으로 다짐했다. 만약 왕중양이 강호의 고수가 된다면 후환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그를 없애버리는 게 나을 거란 계산을 했다. 그는 자기의 '제갈무후십팔변(諸葛武侯十八變)'초수로 끝장을 내려고 했다. "각오해라!" 제갈정이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은 왕중양에게로 날아가다가 갑자기 돌변을 했다. 왕중양이 용케 주먹을 피하는 것을 느낀 그는 얼른 장(掌)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우욱!" 영락없이 그의 장은 왕중양의 가슴을 강타했다. 울컥하고 왕중양의 입에서부터 피가 토해졌다. 그것은 입에서 난 것이 아니라 속으로부터 올라온 시커먼 피였다. 왕중양은 전력을 다해 또다시 공 격해 들어오는 그와 장을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장이 팔꿈치로 바뀌어 왕중양을 가격했다. 왕중양이 또 피를 쏟았다. 왕중양은 기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종남산 밑에서 열심히 무예를 닦았었다. 그런데 이처럼 보잘것없는 꼴로 휘청거리다니. 그는 속으로 매우 원통해 했다. "이젠 마지막이다!" 제갈정이 회심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기를 모았다. 사자우가 낄낄거리며 한마디했다. "히히, 왕중양. 자네가 살고 싶으면 이 자리에서 큰소리로 말해 보게. '좋은 사람 노릇을 하면 손해를 보게 되니 천하에서 가장 큰 악인이 되는 게 낫다'고 말일세." 그러나 왕중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제갈정에게 죽는 한이 있어도 그 따위 말은 입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갈정이 화를 버럭 내며 왕중양을 다그쳤다. "사숙님이 네 놈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셨다. 어서 그대로 외치란 말이야!" 왕중양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자 그는 다시 장을 날렸다. "아악!" 왕중양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라 멀리 날아갔다. 제갈정이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 다시 왕중양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래도 따라 하지 않을 것이냐?" 왕중양이 숨을 몰아쉬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그럴 수는 없다!" 사람들은 서서히 왕중양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어느 누구도 유운장 사람들에게 맞서 나서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올 재난을 먼저 염두에 두는 듯싶었다. 이때까지 싸움을 안타깝게 지켜 보던 모용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갈 선생, 당신은 우리 가문의 안면을 봐서라도 그를 풀어 주는 게 어떻겠소." "강남의 모용씨라? 이전에는 강호에 그같은 이름이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모두 깡그리 죽어 버렸는데 무슨 소리!" 제갈정은 물러설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모용준은 그가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하는 말이란 것을 알았다. 모용준은 속으로 조만간 강남 모용 가문의 사람들을 동원해 유운장을 물리칠 것을 다짐했다. 모용준은 제갈정의 말에 분노가 치솟았으나 억지로 삭이면서 미소 지었다. "제갈 선생, 당신은 비록 북방에서 제일 큰 부락인 유운장 사람이지만 우리 강남 모용씨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소? 그런데 왜 우리 가문을 모욕하는 것이오?" 그러자 옆에 있던 속문성이 대신 대꾸하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 모용세가가 무엇이 대단하단 말이냐? 떨어진 낙엽이요 거리에 구르는 개똥보다 못한 세력을 갖고서!" 모용준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하하하! 천하의 무림인 우리 가문을 너희 놈들이 감히 넘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그러면서 모용준이 고개를 돌려 여러 호걸들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속문성과 나눈 말 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을 자극시켰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제갈정의 웃음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헛헛헛! 모용준, 지금의 너희 가문은 작파한 지 오래라는 것을 알아 두라구! 또한 한 사람이 더 그 가문을 볼품없게 만들고 있기도 하지." "뭐라구?" "왜, 내 말이 틀렸냐? 코끼리가 돼지를 낳고 돼지가 고양이를 낳더니 종국에는 개새끼 한 마리가 태어난 꼴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 모용세가 사람들은 비록 무능하기는 해도 생김새야 그만하면 됐지. 그런데 어째서 개보다 못한 너 같은 놈이 태어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하하!" 사람들은 어렴풋이 유운장 사람들의 속셈을 간파해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순히 은자를 강탈하기 위해 지금까지 싸움을 걸고 또 부추기고 한 것이 아니었다. 유운장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누군가를 치려는 목적이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무공이 약한 왕 중양을 죽이고서야 어디 유운장의 체면이 서겠는가. 그래서 모용준에게로 그 살기 어린 시선을 돌리려는 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방해를 하고 나선다면 유운장과는 원수가 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 었다. 사람들은 내심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쉽게 일어설 생각은 하지 못했다. 모용준이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왕중양을 돌아보았다. "왕 공자, 나의 이 옥벽을 그대가 가져 가시오. 조만간 쓸모가 있게 될 것이니." 다시 고개를 돌린 모용준이 이번엔 제갈정에게 일렀다. "제갈정, 네 놈의 사숙 사자우와 사생결단을 낼 것이다!" 모용준이 으름장을 놓자 석초수가 히히덕거리더니 가슴을 활짝 폈다. "헤헤헤, 네 놈이 그까짓 재간을 믿고 감히 사숙님께 도전을 하겠단 말이냐? 죽고 싶어서 발광을 하는구나. 그러지 말고 나와 한 판 붙어 보는 게 어떠냐? 내가 네 놈을 죽여 버리면 천하가 다 태 평해질 텐데, 어때?" 석초수가 곧 몸을 용수철처럼 오무렸다 펴더니 모용준에게로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