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3편 (3/60)
강남 모용씨 가문의 귀공자들은 저마다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점잖고 풍류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가문에 반기를 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유일한 사람이 모용준이었다. 그의 키는 남의 허리 춤밖에는 닿지 않았으며 얼굴도 두번 다시 보기 싫을 정도로 추물에 속했다. 비록 소문에 의하면 모용씨의 가문에서 가장 유능하고 백년이 지나도 이런 인재는 찾아볼 수 없다고들 하지만 못난이라는 소리를 면 하기는 힘들었다. 이젠 점잖고 풍류스러운 모용세가(募容世家)의 공자는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해불개가 모용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는 내 성미를 잘 알고 있을텐데?" 그러자 모용준 역시 해불개를 쏘아보며 받아쳤다. "당신이 살 수 있는 걸 내가 왜 못 사겠는가?" 해불개가 흐흐 웃으며 말을 뱉었다. "난 한번 내뱉은 말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이름도 무엇 때문에 고치겠냐는 의미로 해불개가 아니겠어." 갑자기 말을 끝낸 해불개가 검을 뽑아 들고는 모용준을 향해 일곱 번을 찔러댔다. 첫번째로 찌른 것은 '천흉착두(穿陶破 )' 초식이었고 두 번째는 '고사수장(苦思,愁腸)'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도단고량(桃斷膏梁)' 초식이며 네 번째가 '쌍용탈주( 龍奪珠)', 또한 다섯 번째는 '일지월광(一地月光)'이었다. 이어서 '차도제초(借道齋楚)'와 '몽침황량(夢枕黃梁)'초식이 각각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에 해당되었다. 해불개는 이 일곱 가지 초식을 번개같이 부리며 모용준을 검으로 공격했다. 그는 모용준이 일찍이 가문으로부터 절기의 기공을 전수받아 천하의 모든 병장기들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습적인 공격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용준은 몇 차례 몸을 움직여 해불개의 일곱 차례나 되는 검공격을 쉽게 피해 버렸다. 모용준이 가소롭다는 듯이 한쪽으로 물러서며 외쳤다. "허허, 천하의 우리 가문에 도전하는 자가 있는 줄 내 미처 몰랐구나. 네 놈이 죽고 싶어 몸살이 나는 모양이로구나!" 그리곤 모용준이 몸을 가볍게 날리며 바닥에서부터 통통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정말 볼품딸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해불개의 허리춤밖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얕잡아 볼 수만은 없는 실력이었다. 곧 해불개도 자세를 가다듬으며 그와 맞서기 시작했다. "난 저 처녀가 마음에 들었단 말이다. 우리 어머니가 지금의 처녀애들은 모두가 소용이 없는 가짜들이라고 하셨지. 마치 너희들 강호의 가짜 협객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난 다행히도 진정한 처녀애를 찾은 것이다. 어머니를 위해 저 처녀를 사겠다는 게 잘못이라도 된다는 것이냐?" 모용준의 말에 해불개가 씩씩거렸다. "남이 그 계집을 아주 귀중하게 다루겠다고 하는데 너는 어째서 늙은 어미의 몸종으로 삼겠다는 말이더냐? 그렇게 계집을 헛되이 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사람들이 해불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한마디씩 했다. 그러자 모용준이 다시 목에 힘을 주었다. "네 놈이 해불개지만 생각을 고쳐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불개는 여전히 얼굴 가득 비웃음을 담은 채 모용준을 노려볼 뿐이었다. "어서 고쳐 먹지 못하겠느냐!" 모용준이 다시 해불개에게 다짐하듯 소리치고는 몸을 날려 세 번이나 초식을 바꿔 가며 공격을 가했다. "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용준의 발에 채인 해불개가 공중에서 한바퀴 돌더니 뒤로 나가떨어졌다. 제2장 생사를 건 강탈 비명을 내지르며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나가떨어진 해불개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모용준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아픔을 참으며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더는 모용준에게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용준이 보일 듯 말듯 웃음을 지었다. "난 저 처녀를 사다가 어머니의 몸종으로 드리련다. 어때, 내 말을 또 거역하겠느냐?" 해불개는 말발굽에 채인 강아지처럼 끙끙거릴 뿐이었다. 다시 모용준이 입을 열었다. "좋다. 네가 정 심보를 고쳐 먹지 않겠다면 죽음을 각오하는 수 밖에……." 이렇게 뇌까린 모용준이 살기를 띠며 해불개에게로 다가갔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이 모용준을 가로막고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강남 모용 가문의 사람들은 마음대로 살인을 해도 된단 말인가?" 누군가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뽑아 들고 모용준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바로 난쟁이 사자우였다.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그의 무예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그 고함소리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모두들 작은 체구에서 그 처럼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주위는 더욱 숙연해졌다. 사자우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북방 유운장 사람이다. 그대들이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유운장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일은 바로 천하의 대악인이 되는 거야. 그대들 중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은자를 내고 저 계집을 사갈 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함부로 덤볐다가는 내가 가만 두지 않을테다!" 모용준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좋아, 이 모용 공자가 그렇게 하지. 그런데 누가 나와 맞서 흥정놀이를 할 것인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마치 강력한 풀이라도 한 숟가락씩 입에 문 듯 조용해졌다. 돈을 주고 계집은 살 수 있지만 강남 흑도의 총 두목인 해불개를 노여워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모용준을 노하게 만든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계집 하나를 얻기 위해 해씨와 모용씨를 건드린다는 것은 결코 이득되는 일이 아니었다. 사자우가 다시 모두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대들 두 사람 중에 은자를 많이 내는 사람이 이 계집을 차지 할 수 있네. 해불개가 사겠다면 우린 계집을 집에까지 데려다 줄 수도 있지. 공자 역시 마찬가지야. 돈만 두둑하게 낸다면 얼마든 지 그렇게 해 주겠네." 그러면서 사자우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강호객들을 일일이 눈여겨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천하에 능인(能人)이 있다 하더라도 북방 유운장 사람들과 세력 다툼을 할 만한 자는 많지 않을 것이야." 사자우의 말을 자르며 해불개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내가 오만 냥을 내겠소!" 모용준이라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난 오만 일천 냥을 기꺼이 내리다." 해불개가 고개를 돌려 살피자 그의 뒤에 앉아 있던 두 형제가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사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이젠 모용준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해불개가 조롱박을 잡더니 꿀꺽꿀꺽 술 몇 모금을 들이켰다. 그가 모용준을 노려보며 냉소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네 놈의 모용세가가 부자라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난 네 놈과 끝까지 도박을 할 셈이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모두들 해불개의 다음 행동에 시선을 모았다. 가슴을 잔뜩 부풀렸던 해불개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목젖이 출렁일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칠만 냥!"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 왔다. 도박이든 싸움이든 어쨌든 오늘 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을 거란 예감에 모두들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자우가 웃음을 입꼬리에 처바르며 시선을 끌어 모았다. "헤헤, 잠깐 기다리게. 그대들 두 사람은 값만 불러야지 손을 써서는 안 되네. 모용 공자, 꼭 돈으로 승부를 가름해야 하네." 그러면서 사자우는 여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좇았다. 그는 여인 앞에 우뚝 걸음을 세우더니 손가락 끝으로 여인의 국부에 난 거웃을 살살 만지며 수작을 부렸다. "이 계집은 정말 괜찮아. 아직 누구도 건드려 보지 않았으니, 흐흐……." "함부로 만지지 마라!" 모용준이 기분 나쁜 듯 소리쳤다. 그러자 사자우가 깔깔거리며 모용준에게 충고를 던졌다. "모용 공자, 이 자지(紫枝) 처녀는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란 것 을 알아 두라구." 자지 처녀라는 말에 매우 놀란 사람은 바로 왕중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필시 회모루의 기생임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머지 십여 명도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모용준이 준엄하게 말했다. "내가 요구하는 것도 저 계집의 티없이 맑은 순결이오. 만일 저 계집이 더럽혀진다면 난 당신을 죽일테다!" "좋아, 모용 공자가 정말 흥미를 갖고 있는 모양인데 내 건드리지 않으리다. 그런데 어째 노모를 위한다는 말은 거짓처럼 들리는데?" 사자우의 말에 모용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여인은 모용준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용준이 어색함을 만회하려는 듯 해불개를 향해 웃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해불개, 그대는 나와 동향이 아니던가. 그러니 나와 옥신각신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청하건대 계집을 내게 양보하기를 바라네." 그러나 순순히 모용준의 말을 들어줄 해불개가 아니었다. "개떡 같은 소리 집어치워! 네 놈 집안과는 앙숙이란 것을 잊었느냐? 이 어른이 죽어도 양보를 못하겠다면 어쩔 테냐!" 태연한 기색으로 해불개의 반응을 주시하던 모용준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저 처녀를 너 같은 무지막지한 놈에게 줄 수는 없지. 자, 팔만 냥이오!" "뭐라고! 좋다. 네 놈의 가문은 우리 강남 흑도를 업신여긴 지 오래지만 난 참을 만큼 참아 왔다. 그러나 이젠 어림도 없다. 난 구만 냥이다!" 만만하지 않은 해불개의 태도에 모용준이 잠시 상념에 빠졌다. 그때 사자우가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거 시간만 끄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하지. 어차피 갖고 있는 돈이 누가 많은가에 따라 승부가 날 것 같은데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는 게 어때?" 해불개가 손짓을 하자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품속에서 묵직한 은표(銀票)를 꺼내 사자우 앞으로 가져왔다. 사자우가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훌륭해, 정말 훌륭하군. 난 원래 이처럼 값진 은표를 좋아한다구. 난 사형처럼 나무에 매달려 무공만을 닦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아." 모두들 사자우의 반응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의 사형은 구사독옹(九邪毒翁)의 문하 사람인데 노독물(老毒物) 신독행(愼獨行)이라 불렀다. 그는 북방에서 으뜸가는 마귀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사문공법(邪門功法)을 연마하기에 나무에 매달린다는 말인가? 은표를 세어 보던 사자우가 해불개에게로 요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봐, 그대의 은표는 육만 냥뿐이야? 아직 삼만 냥이 모자라는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모용준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사자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손가락에 끼었던 벽옥(碧玉) 반지를 빼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곤 다시 반월벽환(半月璧環)과 스물네 알의 용주(龍珠) 꾸러미도 함께 꺼냈다. 그런데 사자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대는 은자는 내놓지 않고 어째서 이따위 골동품을 내놓는 것인가? 내가 이따위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나?" "하하하!" 모용준이 느닷없이 웃어젖히자 옆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제의를 했다. "대안적(大眼賊)에게 값을 물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골동품을 잘 보는 눈을 가진 대안적 이었다.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자 그는 곧 사자우 앞으로 다가와 벽옥 반지를 건네 받았다. 유심히 그 반지를 살펴보던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대단하군! 이건 진품이야!" 그러자 모용준이 정색하며 으스대었다. "우리 가문에 어디 가짜가 있었단 말인가?" 대안적이 그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칼을 뽑아 들고는 공중을 향해 던지며 외쳤다. "그러나 자세히 봐야지!" 그가 벽옥 반지를 바닥으로 내던지자 공중으로 치솟았던 칼이 그곳으로 내리박혔다. 모두들 그 광경을 보고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반지가 부서졌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반지는 조금 도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제야 진품임을 알아보고는 모두들 박수를 쳤다. 대안적이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반지는 이만 냥 정도는 가겠는데." 그는 도적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자였다. 그는 계산이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만 냥이라 말한 순간부터 벽옥 반지의 값은 돌변할 수 없게 되는 셈이었다. 대안적이 덧붙였다. "이 반지는 한(漢)나라 장군 이광(李廣)의 반지인데 장군을 따라 대공을 세운 셈이지." 사람들은 왜 이 작은 반지가 그토록 값이 나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대안적은 이번엔 용주 꾸러미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대안적의 눈빛으로 몰렸다. 용주는 좌로 보나 우로 보나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한 빛을 뿌렸다. "이것 역시 좋은 구슬이군!" 대안적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 그가 값을 불러 주기를 기다렸으나 대안적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 기다리기가 갑갑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는데도 대안적은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대안적은 아직도 제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보배 구슬을 떠올리며 넋을 놓았다. 어떻게 이 같은 구슬들을 얻었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다 보니 얼른 값을 부를 여유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윽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 구슬들은 얻기 힘든 건데, 아무튼 이 구슬값은 자그만치 사만 냥은 족히 되오. 내가 예전에……." 말을 하려다 말고 그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자기가 저질렀던 한 사건이 급작스레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자신이 내뱉으려던 말들을 수습했다. "이런 구슬은 처음 보는 것이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으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구슬을 처음 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값을 매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그것을 따지려 드는 사람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반월벽환을 들여다보고 있는 대안적의 눈이 또다시 크게 빛났다. 모용준 쪽으로 얼굴을 돌린 그가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 제가 보건대 당신의 가문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이 바로 이 옥벽인데 왜 내놓으려고 하시오?" 대안적이 옥벽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에 흐뭇해진 모용준이 해불개 쪽을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소. 난 저자가 여인을 더럽히는 꼴을 도저히 볼 수가 없소이다." 대안적이 굳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모두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은 채 대안적의 거동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이 옥벽은 값이 얼마 되지 않소." 겨우 입을 연 대안적은 그러나 전혀 예상 밖의 말을 흘렸다. 사람들은 그가 장난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방금 두 보물에 대해 자신있게 값을 매기던 모습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모용 가문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이라고 제 입으로 확인시켜 둔 것을 감안한다면 일대의 파문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대안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옥벽은 은자 열 냥어치밖에는 되지 않소."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앞의 두 보물이 모두 만 냥을 넘어섰는데 아무리 대안적이 정신이 나갔다 해도 열 냥이라 함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그러나 대안적의 말에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쨌거나 모용준과 해불개는 각각 육만 냥씩을 여인의 몸값으로 내 놓고 있는 셈이었다. 모용준이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잠깐, 나의 이 옥벽값이 형편없다고는 하나 어쨌든 내가 해불개보다는 열 냥을 더 낸 게 아니겠소? 그러니 저 여인은 내가 데려 가야겠소." 말을 마친 모용준이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여인이 모용준이 자신의 주인이 된 것에 흡족한 듯 미소지었다. "이 여인도 지금 웃고 있지를 않은가, 우리 모용세가를 이만큼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있단 증거지. 그러니 자네 해불개는 어서 마음을 고쳐 먹게나." 그러나 해불개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기세였다. "잠깐만!" 그의 외침에 모용준이 고개를 돌렸다. "해불개, 그대는 아직 할말이 남았던가?" 그러자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한 해불개가 허둥대며 사람들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여러분, 제게 돈을 좀 꾸어 줄 사람 없소? 이 해불개를 도와 은자를 내주시면 정말 고맙겠소이다." 해불개가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읍을 하며 얼굴 가득 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의 얼굴은 매우 떫떠름하게 변해 갔다. 그들은 모용세가와 원수진 일도 없었기에 섣불리 해불개만을 도와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모용세가와 없었던 원한을 맺게 되는 결과인데 선뜻 해불개를 위해 은자를 던져 줄 것 같지는 않았다. 해불개는 애가 타서 사람들 앞으로 가 연신 읍을 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쳤다. 그윽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왕중양의 눈가에는 예사롭지 않 은 기운이 서서히 번져 나갔다. '내가 술집에서 저자가 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을 땐 그저 보통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자가 바로 강남 흑도의 총 두목인 해불개였구나. 저자가 저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봐서는 모용준과 목숨이라도 걸고 죽기 살기로 대적할 조짐이 역력하다.' 모용준은 이제 승부가 났다고 여겼는지 여인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 그리고 해불개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은자를 얻기 위해 두 손이 닿도록 읍을 해대었다. 이즈음 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용준을 소리 높여 불렀다. "모용 공자, 난 옥총(玉聰)이라 부르오. 난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소. 하지만 난 해불개 총타주와는 인연이 깊소. 예전에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어 지금 갚지 않을 수가 없구려." 옥총이 은표를 사자우 앞에 한 장 한 장 내놓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가장 기뻐한 것은 역시 해불개였다. 사자우가 옥총의 은표를 넙죽넙죽 받더니 만족스러운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모용준, 그대가 졌네. 해불개는 육만 이천 오백 냥을 낸 셈이 되었네." 그러자 모용준이 반월벽환을 집어 들고는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건 강남 모용세가에서 대물림으로 전해지고 있는 보배인데 어째서 값이 열 냥밖에는 되지 않는단 말이오? 모용세가에서 이 보물을 중히 여기는 건 국보이기 때문이오. 옛날 대연국(大燕國)의 보물로 이것 하나만이 남았을 뿐이오!" 모용준의 온몸엔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모용준은 가슴 깊이 일기 시작하는 참기 어려운 슬픔을 느꼈다. 이전에 그의 선조로 모용복(幕容覆)이란 공자가 있었는데 일심으로 연나라를 회복시키려 다가 끝내 미쳐 죽고 말았다. 그 후 모용준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대연국을 부흥시키려는 꿈은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 대송 강산은 이미 절반밖에는 남지 않았고 그런 대송과 싸우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잊어버린 지 오래 된 대연을 운운한다는 것 이 너무 한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조차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도 못하는 대연국을 지금에 와서 떠올린다는 것에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모용준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슬픈 기색을 비쳤다. 그러나 모용준을 옹호하며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왕중양은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이 자지 처녀를 회모루로 데리고 갈 방법은 없단 말인가! 왜 이들은 모용 공자가 처녀를 데리고 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아 서려는 것인가. 차라리 모용 공자가 데리고 가면 좋으련만 ……. 다시 회모루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왕중양은 자신이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모두 알아듣게 목청을 높였다. "모용 공자, 내가 은자 삼천 냥으로 당신의 옥벽을 사겠소!" 사람들은 계속되는 놀라움에 넋을 아예 놓고 있었다. 모용 공자가 보기 좋게 패배할 것이라 예상했던 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용준에게 새로운 빛이 비치는 대역전이기도 했다. 사실 모용준은 거의 포기상태에 빠져 있었다. 해불개에게 여인을 빼앗기는구나 하며 침통해 있었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자청한 사람을 보자 너무 반가웠다. 모용준이 왕중양에게 정중히 예를 올리며 물었다. "정함을 어떻게 쓰시는지요?" 왕중양이 곧 자신을 밝혔다. "저는 종남산 사람으로 왕중양이라 부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왕중양을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를 않았다. 그는 강호의 평범한 무객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모용준이 크게 가슴을 펴며 왕중양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시했다. "오늘부터 난 당신과 형제로 지내고 싶은데 어떻소?" 왕중양이 미소로 답했다. 이들을 지켜 보는 사람들 중에는 뒤늦게 후회를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모용준과 왕중양이 이처럼 하나로 묶여지는 판에 어째서 미리 모용준과 형제의 의를 맺지 못했던 가 하는 후회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그같은 섭섭함을 벗어 던졌다. 만약 모용준과 가까워지면 반대로 흑도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는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인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낀 왕중양은 생각했다. '이 처녀는 실로 천하절색이로구나. 그렇지 않았던들 어찌 모용준과 해불개의 눈에 들 수 있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