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59편 (59/60)
구양봉의 사장이 날아들었는데 손불이와 왕중양 어느 쪽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앞가슴을 얻어맞은 왕중양은 피를 토하며 다시 옆으로 쓰러졌다. "사부님을 보살펴라!" 마옥이 소리쳤다. 손불이는 자기 때문에 왕중양이 당한 것을 분해 했다. 그녀가 왕중양을 섬기는 마음은 각별했다. 그녀는 원래 무공이 좀 뒤떨어졌고 성미마저 급하여 왕중양이 평소 신경을 써주곤 했었다. 소맷자락이 없는 고루도포(館懼道檀)를 그녀에게 주어 인생의 도의(道義)를 깨닫게 해 주기도 했다. 그런 탓인지 그녀는 왕중양을 자기 어버이처럼 존경해 왔던 것이다. 그처럼 섬겨왔던 왕중양이 구양봉에게 당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앞서 손불이는 구양봉에게 걸려들고 말았다. 손불이의 검을 한 손으로 거머쥔 구양봉이 사정없이 비틀어 버렸다. 손불이의 검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구처기와 유처현의 검을 차례대로 막아낸 구양봉이 손불이를 잽싸게 품에 안았다. "마옥, 네가 이 계집을 버린다면 난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백타산장에 가두어 두었다가 심심할 때면 불러내 재미를 보련다!" 그는 손불이의 앞가슴을 방패삼아 검을 막아낼 속셈이었다. 전진교의 나머지 제자들은 구양봉을 완벽하게 포위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할말이 있다!" 이때 나선 것은 왕중양이었다. 왕중양이 나서자 모두들 동작을 멈추고는 그를 지켜 보았다. 홍칠과 황약사도 마찬가지였다. "난 《구음진경》을 가지고 있네. 이 책은 천하에 둘도 없는 기서지. 나는 원래부터 이 책을 혼자만 독차지할 생각은 없었네. 언제든지 이 책과 인연이 닿는 사람이 나타나면 넘겨주려고 생각해 왔네. 그런데 이렇게 모두 몰려들어 서로 빼앗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이니 어쩌란 말인가?" 구양봉이 입술을 옆으로 휙 틀며 비웃었다. "흐흐, 어쩌긴. 자네의 제자가 내 손에 있으니 알아서 하는 수밖에." 왕중양이 쓴웃음을 던졌다. "내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그 동굴 속 석벽에 유명한 말씀을 새겨놓으셨네. 자네는 그 두 가지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왕중양이 정색을 하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구음진경》은 세상에 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고 또한 화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렇게 적혀 있다네. 그런데 자네에게 이 책을 준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재화가 넘쳐나 사람들은 더이상 땅에 발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될 걸세." 구양봉이 한층 더 기고만장해져서 빈정댔다. "왕중양, 자넨 내 몽둥이에 맞았네. 죽지는 않겠지만 이미 속 깊이 골병이 들었단 말씀이지. 앞으론 내 상대가 될 수 없어. 그런 몸으로 나를 가르치겠다는 거냐?" "네 놈을 가르칠 어른은 여기에 계신다!" 뒤에서 이런 말이 들려 오자 구양봉이 흠칫 놀라며 돌아섰다. 황약사였다. 구양봉은 원래 황약사를 자기 발에 붙은 나뭇잎보다 못하게 여겨 왔던지라 대뜸 엄포를 놓았다. "황약사, 괜히 나서지 말게!" 황약사가 왕중양을 향해 진심인지 모를 동작을 취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는데 아무래도 그 속에는 그만이 아는 음모가 도사리고있는 듯했다. "왕 진인, 그 책을 내게 넘겨주시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왕중양이 대답했다. "안 되오. 당신의 인품이나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까닭이오." 평소 왕중양은 결코 거짓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황약사로서는 화가 나는 일이었다. "왕 진인, 자넨 이제 곧 죽을 목숨이 아닌가? 그리고 제자까지 남의 손에 잡혀 있는데 아직도 큰소리만 칠 셈인가?" 한숨을 내쉰 왕중양이 그를 노려보았다. "천하에 이 《구음진경》이 나오니 재화가 많구나. 내 손에 이 경서가 없었더라면 지금보다는 한결 태평했을텐데……." 품속에서 경서를 꺼낸 왕중양이 말을 계속했다. "구양봉, 네가 손불이를 놓아주면 이 경서를 태워 버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계속 고집을 피우면 난 이것을 가루로 만들 것이다!" 구양봉은 속으로 궁리를 해 보았다. '그것을 태울 수 있는 용기가 과연 네 놈에게 있을까? 흥, 믿을 수 없어.' 왕중양이 경서를 태울 수 없다고 판단한 구양봉이 자신 있게 호통을 쳤다. "경서를 태우기만 해 봐라. 난 네 제자를 죽여 버리겠다!" "천하의 무림이 네 놈의 손에 유린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양봉이 손불이의 팔을 더욱 세게 조이며 꼼짝못하게 만들었다. 황약사가 구양봉을 나무랐다. "이 독종아, 어서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아무래도 네가 놓아주는 편이 나을 거다. 여인을 인질로 잡아 놓고 있는 네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황약사,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독종아, 네 속이 밴뎅이처럼 좁아 터졌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넌 지금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느니라. 한번 어긋난 생각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법이지." "내가 후회할 게 뭐가 있느냐?" 구양봉은 조금도 자신을 깨달으려 하지 않았다. 황약사가 이번에는 눙치듯한 말로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저 《구음진경》을 손에 넣은 지 이미 오래이네. 말하자면 눈을 감고도 훤히 외울 수가 있다는 말이지. 그런데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왕중양이 경서를 태워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구. 이미 머리 속에 넣어 두고 있는 왕중양에게는 필요가 없으니까 너만 손해를 보는 셈이지." 황약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아니 황약사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으니까 왕중양이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경서를 태우겠다는 으름장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음, 그렇다면 내가 경서를 얻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도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네?" 이때 홍칠이가 황약사에게 말을 걸어 왔다. "황약사, 자네 오랜만에 근사한 말 한번 했네." 잠시 말을 중단한 홍칠이 이번엔 구양봉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독종아, 내가 보기에는 황약사의 말이 백번 옳은 것 같아." 홍칠이 일조를 해 주자 황약사가 빙그레 웃었다. 더욱 신명이 난 황약사가 다시금 구양봉을 녹이려 들었다. "구양봉, 자넨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네. 해야 할 일이란 별게 아니야. 지금 당장 왕중양에게 이렇게 말을 하게나, 만일 대답하지 않으면 세 가지 일을 하겠다고 말이야. 그러면 왕중양이 대답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지." 구양봉의 마음은 괜시리 조급해져서 앞뒤를 가릴 겨를이 없었다. 경서만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면 손쉽게 왕중양의 품속에 든 경서를 빼앗을 수 있을까만 골몰하던 그에게 황약사의 말은 달콤하기만 했다. 고심을 하고있던 판에 황약사가 던져 준 방법은 정말 반갑기 그지없었다. "황약사, 내가 만약 저 경서를 차지하게 되면 자네에게도 기꺼이 보여 주겠네."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을 해놓고 구양봉은 후회를 했다. 경서를 차지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결정해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혼자 독점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괜히 입맛이 썼다. 구양봉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약사는 빙그레 웃으며 알았다는 뜻을 보였다. "구양봉, 자네는 먼저 전진교를 도륙해야 하네. 전진교의 제자들의 씨를 말려 놓으면 왕중양도 용빼는 재주야 부리겠나?" 황약사가 이처럼 자세한 방법까지 일러줄 줄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 고분 안에 들어가 임조영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이다!" "정말 대단해. 아니 천하에 둘도 없는 훌륭한 계략이로군!" 구양봉은 박수까지 치며 황약사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황약사는 구양봉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쉬지 않고 설명해 나갔다. "세 번째의 일은 자네가 왕중양으로 가장하여 강호에서 살벌한 싸움을 일으키는 걸세. 그리하여 일곱 문파들이 서로 살육전을 벌이게 해야만 하네, 사람들이 모두 왕중양을 저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지. 죽어서도 마음이 편치 못하도록 철저하게 일처리를 매듭지어야 함을 명심하게나." 왕중양 역시도 황약사의 발언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황약사를 둘러싸고 있는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도 더러 있었지만 이토록 악인의 탈을 뒤집어쓴 인물일 줄은 몰랐다. 황약사의 뱃속에는 온갖 악독한 궁리들만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닌지 옆에 있는 구양봉이 무색할 정도였다. "황약사, 왜 나를 해치지 못해 안달을 하는 건가?" 왕중양이 황약사에게 근엄한 자세로 물었다. "왕 진인, 자네가 천하의 기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게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네. 내가 만약 그 책을 미리 보았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지. 그 책에 내가 원하는 것이 들어 있지 않다면 난 누구도 해칠 마음을 먹지 않았을 테니까……." 한층 기세가 드높아진 구양봉이 지껄였다. "왕중양, 황약사의 말을 잘 들었겠지? 그 경서를 내게 던져라, 그럼 이 제자를 살려 준다." "주면 안 되오! 이 거렁뱅이도 경서를 차지하고 싶다. 차라리 내게 주는 한이 있어도 저 두 망나니들 손에 들어가서는 절대 안 된다!" 홍칠이 달려와 왕중양 앞을 자기 몸으로 막았다. 황약사는 홍칠의 속내를 훤히 읽고 있는 터라 여유 있게 비웃었다. "이 거렁뱅이 놈아, 나와 싸움을 하다 말고 어디를 가느냐?" 왕중양이 발버둥을 치고 있는 손불이에게 안타까운 눈길을 주었다. "너를 구할 수 없어 미안하구나!" 왕중양은 경서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고 경서 역시 생명을 다한 것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구양봉이 제아무리 날뛴다 해도 경서를 넘겨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왕중양이 《구음진경》을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력으로 단번에 태워 버리려고 할 때였다 "나무아미타불!" 난데없이 염불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어찌나 맑고 쟁쟁하게 울리던지 왕중양의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메아리로 남았다. 한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보이며 여러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예를 올렸다. "여기는 정말 흥성흥성해서 좋군요. 단지흥 인사를 올립니다." 공손하게 예를 올리는 단지흥을 보는 구양봉의 가슴은 싸늘해졌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단지흥까지 나타났으니 경서는 더더욱 차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 아닌가. 씁쓰레한 입맛이 감돌자 구양봉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멀고도 먼 대리국의 임금께서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소이까? 남의 경서를 빼앗으려고 온 거는 아니겠지요?" 다분히 비꼬는 말투였지만 단지흥은 짐짓 모르는 체했다. "난 이곳이 하도 떠들썩하기에 흥미가 끌려 찾아온 길이오. 자네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중이기에 이토록 아수라장인가? 아귀다툼을 하는 것을 보니 무슨 금은보화라도 감춰 둔 것인가?" "단지흥, 혀 짧은 소리 집어치워라! 네가 그렇게 빙빙 말을 돌린다고 내 모를 줄 아느냐? 너 역시 《구음진경》때문에 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구양봉이 턱을 치켜 들며 으르렁대자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하하핫! 여보시오, 왕 형. 그 《구음진경》이야 왕 형이 예전에 내게 준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오?" 갈수록 태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단지흥의 입가에 채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미소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분명 다른 속뜻이 숨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왕중양이 얼른 대꾸했다. "물론이었소. 그래서 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잘되었소." 단지흥과 왕중양이 나눈 이 한마디는 일대의 돌풍이었다. 모두들 혼백을 도둑맞은 사람들처럼 멍한 상태가 돼 버렸다. 단지흥이 매우 유유작작한 동작으로 사람들을 크게 둘러보며 말했다. "《구음진경》은 천하의 기서요. 왕 형이 이런 귀중한 경서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게 넘겨준다면 자네들은 아무렇지도 않겠는가?" 기다렸다는 듯이 구양봉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아? 네가 우리보다 어디가 잘났다고 기고만장한지 모르겠다. 네게 일양지가 있으면 내게는 합마공이 있다!" 황약사도 경박하지 않게 그러나 말속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자네가 그 경서를 갖는다는 것에 반대를 하네." 홍칠도 빠질 수가 없었다. "이 거렁뱅이가 한평생 살아오면서 감복을 한 사람은 왕중양 하나뿐이네. 하지만 단지흥, 그대 역시도 왕중양과 대등한 인품을 가졌소." 그윽하게 한차례 웃음을 보인 단지흥이 대답했다. "저 경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탐을 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걸세.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테지." '왕중양은 지금 경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 기회에 빼앗지 않으면 영영 내 눈앞에서 경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내가 설사 전진교의 제자들을 몰살시킨다 해도 경서를 차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만 하나……?' 남모르게 궁리를 해대느라 구양봉의 심기는 복잡하기만 했다. "구양봉, 자넨 예전에는 말과 행동이 곧고 정직한 사내였네. 물로 일부 사람들이 비난은 했지만 자네는 언제나 솔직한 점이 더 많았지, 그런데 오늘 보니까 자넨 그때의 구양봉과는 달라. 남의 경서를 가로채려면 떳떳하게 본인에게 손을 쓸 것이지 왜 제자를 인질로 잡고 괴롭히는 건가? 그건 구양봉답지 못한 행동이지." 단지흥의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말에 구양봉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얼른 그런 기운들을 훌훌 벗어 던지며 악한 구양봉의 모습을 되찾았다. "내가 이 계집을 괴롭힌다고? 내 산장엔 어여쁜 계집이 가득하다. 이따위 낡아빠진 계집을 두고 내가 군침을 삼킬 거라 보는가?" 이를 뿌드득 갈던 구양봉이 손불이를 앞으로 힘껏 밀었다. 중심을 잃고 거의 구르다시피 한 손불이는 왕중양 앞까지 밀려갔다. 구양봉이 노린 절호의 기회란 바로 이때였다. 중심을 잃고 달려오는 소불이를 왕중양이 잡으려는 순간 몸을 날려 경서를 가로채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흥이 이런 얄팍한 구양봉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단지흥은 재빨리 손가락을 곧추 펴 손불이를 향해 내력을 발사했다. 손불이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며 왕중양의 옆으로 옮겨지더니 순 간 멈칫 서 버렸다. 전진교의 수많은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도 이때였다. 이들은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고 중양궁 밖에서 잠시 대기를 했다. 이를 안 왕중양이 마옥에게 넌지시 명령을 내렸다. "다들 물러서라고 하게. 다 모인다해도 소용이 없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여러 사람이 다칠 뿐이네." 왕중양의 뜻이 전달되자 전진교의 제자들은 뒷짐을 지고는 자기 자리를 지켰다. 찾아온 강호객들과 막 싸움을 벌이려던 찰나였다.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왕중양이 제의했다. "이렇게 우리 종남산에 찾아들 왔으니 모두 나의 손님들이오. 다들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합시다!"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구양봉만 여전히 가슴에 불씨를 남겨 두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홍칠은 또 품속에서 꺼낸 닭을 소리를 내 가며 뜯기 시작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게 수척해진 왕중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약사의 눈빛은 이들과 달랐다. 보아하니 왕중양은 강호에서 수군대는 소문처럼 박정한 사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왕중양의 초췌해진 얼굴에서 임조영에 대한 식지 않은 애정을 어렴풋이 읽었다. 사실 황약사도 왕중양을 두고 떠도는 소문 때문에 화가 났었다. 그런데 막상 왕중양과 직접 대면하고 보니 처음 품었던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여러 강호객들을 둘러보다가 말문을 연 것은 단지흥이었다. "왕 진인, 나의 소견으로는 당신은 너무 비감에 잠길 필요는 없다고 보오. 사람이 살고 죽고 하는 것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오……." 뇌리에 깊숙이 박힌 임조영 때문에 왕중양은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난 임조영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혼자 전전긍긍 고통만을 안고 살아왔었소. 뒤늦게나마 알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에 더 깊은 상처만을 남겨 준 꼴이 되고 말았소. 난 《구음진경》이 행여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끝내 거들떠보지도 않은 모양이오. 그래서 그 사람은 세상을……." 말을 못 잇고 한 줄기의 뜨겁고도 애절한 눈물을 흘리자 왕중양의 눈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구양봉마저 입을 다문 채 멋쩍은 듯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나도 모용쟁이 죽은 뒤 한동안 잠을 이를 수가 없었지. 그런데 왕중양은 나보다 더 여인에 대한 정이 깊은 사내로군. 한 번도 살을 섞은 적이 없다고 하던데 무엇 때문에 저리 슬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왕중양이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난 《구음진경》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내게는 일곱 명의 제자가 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이 경서를 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손에 남겨지면 그 다음날로 아니 그날로 당장 누군가에 의해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제자들은 이런 내 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양봉이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황약사는 혼자만의 꿍심에 취해 있었다. '내 제자들에게 넘겨준다면 천하의 드문 명수들이 될 수 있을텐데……. 그중 수제자인 진현풍과 둘째 매초풍은 아마 경서만 독파하면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학대가로 성장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왕중양의 제자들보다 나의 제자들이 월등하다는 말인가.' 홍칠은 왕중양이 어떤 말들을 이어 나갈까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왕중양이 만약 경서를 넘겨준다면 단지흥이 가장 제격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해 보기도 했다. 그것이 세상을 평온하게 만드는 첩경일 것이다. 홍칠의 눈에는 구양봉은 물론 황약사까지도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황약사는 언제나 희노무상(喜怒無常)하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도 뜨거웠다 차가웠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왕 진인, 그 경서를 단지흥에게 넘겨주겠다고 혹 마음에 두고 있다면 옳게 판단한 것이오. 그렇게 결정된다면 난 이의가 없소!" 홍칠의 말에 사색이 된 구양봉은 슬쩍 황약사의 얼굴빛을 훔쳐보았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고 있는 기색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약사는 속으로 또 자기만의 속셈을 펼쳐 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서를 왕중양이 주고 싶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왕중양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 보도록 해야겠다.' 머리를 숙인 왕중양은 막상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수가 없어 괴로운 심정이었다. 과연 누구에게 《구음진경》을 넘겨준다는 말인가? 어서 대상을 물색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물론 전진칠자들마저도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전진교를 우습게 볼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난 지금 몹시 혼란스럽소. 여러분들은 이 중양궁에서 하룻밤만 머물며 나에게 시간을 주시오. 내일 신중히 고심한 끝에 그 결과를 말씀드리리다." "좋소. 모두들 지친 모양인데 그럼 내일 다시 의논해 봅시다!" 먼저 흔쾌히 동의하고 나선 것은 의외로 황약사였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양봉은 어서 단박에 결정을 하라며 왕중양을 채근했다. 홍칠이 또 구양봉을 가로막고 나섰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끝에 이들은 왕중양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곳 주인인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자는 말이 나오자 어쩔 수가 없었다. 모두들 제각기 쉴 곳을 찾아 자리를 떴다. 왕중양은 조용히 앉아 자신의 발자취를 곰곰 되짚어 보았다.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또 헤어지며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는 상념에 빠져든 왕중양.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여인 임조영,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던 모용준과 비참한 최후를 마친 자지 처녀……. 그중 유독 머리 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모습이 있었다. 어쩌면 임조영만큼이나 절실하게 자신의 가슴을 지배해 왔던 존재, 바로 벼랑 아래에서 만났던 원숭이였다. 원형(猿兄)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지금 그 원형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왕중양은 자신을 만나면 눈물을 흘리며 좋아할 원형을 그려 보았다. 왕중양의 상념은 또다시 임조영에게로 옮아갔다. 꿈속에서라도 한 번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왕중양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더욱 커다란 무게는 바로 《구음진경》이었다. 과연 누구에게 넘겨주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 혼자 오랜 시간 고심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다가왔다. "사부님, 제 소견으로는 《구음진경》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구처기가 허리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그래, 마옥의 생각은 어떤가?" 마옥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밝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세상에는 5대의 호수(好手)가 있습니다. 남쪽에는 남제(南帝), 북쪽에는 북개(北琴), 동쪽에는 동사(東邪), 그리고 서쪽에 있는 서독(西毒)이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그 한복판에 있는 분이 사부님입니다. 사부님께서 예전처럼 자신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다고 봅니다. 허나 사부님께서 자신을 잃으신다면 저희들은 전진교를 이어 나갈 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