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57편 (57/60)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다는 것인가. 읍을 한 왕중양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대보다 못하오. 내가 졌소. 오늘 저녁에 고분에서 나오도록 하겠소." 이렇게 승부가 끝이 나자 강호객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리고 왕중양도 약속대로 고분에서 나왔다. 왕중양 대신 무덤 속에 들어간 임조영은 은근히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왕중양은 그녀를 찾아와 주지를 않았다. 중양궁으로 돌아온 왕중양은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들에 매달려 바쁜 일정을 보냈다. 마옥이 전진교의 일을 대신 맡아볼 때는 감히 대사는 염두에 두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왕중양이 돌아온 뒤부터는 교문 안의 분위기가 일신되어 활기가 넘쳐났다.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급한 일들을 처리해 냈다. 이날은 마침 보름이라 하늘에는 탐스러운 달이 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임조영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고분에서 어떻게 지내고있는지 궁금했으며 찾아가 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오랜 세월 임조영과 지낸 탓인지 사화꾼 계집은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가 임조영을 위로했다. "조금 있으면 왕 진인께서 오실 거예요." 임조영이 쌀쌀맞은 어투로 신경질을 부렸다. "그 사람이 오든 안 오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계집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왜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왕중양이 오기만 하면 임조영의 얼굴에 화색이 돋아나고 기쁨의 눈물까지 흘릴 게 분명한데……. 왕중양을 기다린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임조영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할일이 많아 그럴 거라 임조영은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했다. 임조영은 별수없었다. 자신도 고분 속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을 수밖에…… 그것으로 왕중양의 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이런 다짐을 속으로 하고 있는데 누군가 돌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어서 밝혀라!" 계집이 소리를 치자 밖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달도 밝고 공기도 시원한데 이야기나 나누지 않겠소?" 왕중양이었다. 임조영의 눈빛이 금방 달라졌다 "우리 사부님은 주무시고 계세요." 계집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후일 다시 오겠소이다." 왕중양은 임조영이 들을 수 있게 짐짓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계집이 돌문을 열어 젖히더니 밖으로 나가 왕중양을 대뜸 불러 세웠다. "우리 사부님께서 만나기 싫어하는 걸 알면서 왜 찾아오셨어요? 천하의 사내들이란 모두 똑같아요. 모두 나쁜 놈들이라구요. 당신이라고 다를 바 없어요." 왕중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계집을 바라보기만 했다. "허허, 이 왕중양이 나쁜 놈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인데 굳이 입으로 떠벌릴 건 또 뭔가?" 그렇다고 수그러들 계집이 아니었다. "알고 있다면 양심이라도 있어야지요. 자기 대신 남을 으시시한 고분 속에 처박아 넣고는 희희낙락 달구경이나 하고 있어요?" 계집은 제풀에 격해져 마음대로 지껄였다. "난 당신이 미워요. 우리 사부님께서도 당신을 미워하니까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왕중양이 임조영과 몇 마디의 말을 나누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 얽힌 매듭을 풀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왕중양은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뒤돌아서고 말았다. '임조영과 나는 완전하게 마음을 합일시켜 본 적이 없구나. 또한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번번이 짐작해 낼 수조차 없었다. 아마 우리 둘 사이에는 확실한 연분이 없나 보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녀와 함께 있고만 싶을까…….' 그는 마음이 괴로웠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심드렁하게만 비쳐졌다. 모두 그녀 임조영 때문이었다. 그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 맥이 없어 보였다. 왕중양의 목소리가 들려 올 때마다 임조영은 그에게로 뛰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왕중양이 돌아설 때까지 자는 척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싫었고 또 계집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제 왕중양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에 그녀는 가슴 한켠이 휑하니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계집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온 것은 이때였다. 등을 돌린 채 누워있던 임조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울긴 왜 울어!" 계집은 계속 흐느끼기만 했다. "제가 왕 진인을 쫓다시피 했어요. 좋은 말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는데……." "내가 평소 어떻게 일렀느냐? 모든 일에 후회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계집이 임조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천하의 사내들은 모두 더럽고 나쁜 놈들이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래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겠느냐?" "전 죽을 때까지 그 말을 잊지 않을 겁니다."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임조영이 계집에게 일렀다. "가서 붓을 가져오너라!" 제35장 임조영의 죽음 계집이 붓을 대령하자 임조영은 종이 위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주 숙달된 솜씨로 윤곽을 그려 냈다. 마음속으로 이미 수천 수만 번이나 그려 보았던 것처럼 그녀는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곧 종이 위로 도포를 걸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직은 윤곽뿐이었지만 이 사내가 왕중양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붓으로 좀더 다듬자 종이 위로 나타난 사내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사람처럼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인품마저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왕중양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임조영이 계집에게 불쑥 물었다. "넌 내가 주워다 기른 아이다. 넌 그걸 알고 있느냐?"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이리라 짐작한 계집이 얼른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저는 한평생 사부님만을 따르겠습니다." 차가운 웃음으로 바꾼 임조영이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네가 모시지 않아도 난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난 네게 한 사람을 보여 주겠다. 내가 그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느냐?"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이 아닙니까?" "그렇다. 이 사람이 전진교를 만든 사람이다. 사내다운 사내이지. 예전에 나는 이 사람만은 착한 사내라 믿었었다. 그런데 역시 양심도 없는 사내였다. 그 전진교 때문에 이 임조영을 잊은 몰인정한 사내일 뿐이다." 임조영이 이렇게 입 밖으로 왕중양을 원망하는 것을 처음 본 계집은 긴장했다. 증오로 변해 가는 임조영의 눈빛을 보며 계집은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왜 또 우느냐? 기억해 두거라. 앞으론 절대 세상의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우리 고분파(古墳派)는 원래 눈물과는 인연이 없다. 눈물을 흘리면 빨리 늙고, 또한 빨리 죽게 된다!" '고분파, 고분파…… 우리는 고분파다!' 속으로 여러 번 되뇌이던 계집은 임조영을 올려다보았다. 임조영도 극도의 비통함 속에서 부대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화상을 저기 복판에다 걸어라." 임조영의 말대로 계집이 화상을 걸었다. 늠름하게 서 있는 왕중양의 화상을 보며 계집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사부님은 말씀하시는 것과 행동하시는 것이 전혀 달라. 왕중양을 그토록 저주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미련을 두고 있는 게 분명해. 화상을 가장 눈에 잘 띄는 한복판에 걸어 두었으니 시시각각으로 마주할 수가 있지 않은가.' 한숨을 길게 내쉰 임조영이 이런 명령을 했다. "됐다. 그럼 네가 저 화상에다 침을 뱉어라!"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계집이 망설이자 임조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가 먹었느냐?" "그게 아니라……." 계집은 황망히 달려가 왕중양의 화상에 침을 탁 뱉었다. 그녀는 자기 사부를 괴롭히는 왕중양을 미워해야만 했다. "됐다. 넌 내 뜻을 몰랐더냐?" "아닙니다. 사내들은 모두 더럽고 치사한 놈들이에요." 얼굴이 창백해진 임조영은 돌침대에 기대어 계집에게 다시 느리게 말했다. "내 몸엔 사자우의 뱀독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이제 얼마 살지를 못할 것 같다." 계집은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임조영 곁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바닥에 엎드린 그녀가 울먹였다. "사부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세요."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다." 이 말에 계집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실망만을 안고 있는 임조영이 안타깝기만 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네게 가르쳐 준 것은 모두 우리 고분파의 무공이다. 우리 고분파에 다시 제자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분파의 제자는 반드시 여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고분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되지. 한평생 사내와 멀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사내가 달갑게 우리 고분파의 여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할 때는 문제가 다르지만……. 하지만 세상에 어디 그런 사내가 있겠느냐? 절대로 있을 수 없단 말이다. 왕중양 같은 사내마저 여인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 들지를 않아. 그러니 이세상에 여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는 사내는 없다!" 한탄에 빠진 그녀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너는 고분파의 제자다. 그러니 잘 기억해야 한다. 우리와 왕중양의 전진교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자들은 앞산에 우리는 뒷산에 있으니 서로 왕래를 끊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계집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조영이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세상의 사내들은 모두가 나쁜 놈들이야. 고분파의 여인들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부터 절대 사내들과 인연을 가져서는 안 된다." 계집이 다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조영의 숨결은 점점 미약해졌다. 그녀는 혼자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누운 채로 계집에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나는 이 고분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 그래도 왕중양에게 감사를 해야겠어. 이처럼 훌륭한 곳을 넘겨주었으니……. 난 여기서 편안히 죽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계집의 부축을 받으며 지하에 있는 석실로 내려갔다. 네 개의 석관이 놓여져 있는 곳이었다. "난 임종시에는 꼭 여기에 와서 누울 것이다. 두 눈을 감으면 더는 근심과 걱정이 없을 테니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우리 고분파에서는 제자를 더 받을 수는 있어. 하지만 반드시 무덤 속에서 한평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결심이 없으면 아예 받아들이지도 말거라." 쓸쓸하게 웃고 있는 임조영의 눈가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천천히 석관 속으로 들어가 편히 누웠다. "사람이란 비로소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인생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는 법이지……." 계집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무정한 왕중양에 대한 저주의 화살을 마음속으로 쏘았다. 임조영이 잠이 들자 계집은 조용히 일어나 앉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산 아래로 내려가 필요한 물건들을 구해 오겠다고 말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앞산의 중양궁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왕중양을 죽여 사부의 원한을 풀어 줄 마음에서였다. 조심스럽게 고분을 빠져 나온 그녀는 앞산으로 향했다. 경계가 삼엄했지만 그녀는 걸음에 신경을 쓰며 중양궁 안으로 조심조심 기어 들어갔다. 이곳저곳을 헤맨 끝에 그녀는 방석에 앉아 두 눈을 감고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왕중양을 발견하게 되었다. '왕중양이 놈아! 바로 네 놈이 우리 사부님을 사경에 빠지게 했다. 난 네 놈 역시 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네 놈을 죽여 사부님의 한을 풀어 드릴 것이다!' 비장한 결심을 한 그녀는 숨을 한껏 들이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소리 없이 접근한 그녀가 검을 들어 왕중양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검은 왕중양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어느새 손을 든 왕중양은 검을 한 손으로 집어 위로 끌어올리며 자신도 일어섰다. 그녀는 검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엄청난 힘이 검에 가해지고 있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검을 놓아라!" 계집이 소리를 치며 결사적으로 검을 빼내려고 했다. "난 오늘 네 놈을 죽여야 한다!" "네 사부도 왔느냐?" "사부님께서는 다시는 네 놈을 보지 않겠다고 하셨다. 다시 네놈을 만나는 날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하셨다. 네 놈이 우리 사부님을 망쳐 놓았어!" 욕설을 터뜨리던 계집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구처기와 유처현이 울음소리를 듣고는 달려 들어왔다. 이들이 계집을 끌어내려고 하자 왕중양이 제지했다. "그냥 두어 라!" 이들이 주춤하자 왕중양이 일렀다. "너희들은 물러가라. 이 계집과 내 할말이 있다." 두 사람이 물러가자 왕중양이 검을 계집에게 돌려주었다. "네 사부는 내게 은혜를 준 사람이다. 네가 그 사람을 대신하여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래, 그 검으로 나를 찔러라." 왕중양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서 날 죽여라!" 계집이 왕중양의 숨통을 겨누며 말했다. "그럼 좋다. 난 너를 죽이겠어. 너를 죽이면 이 세상에서 사내하나가 사라질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가득했지만 그녀는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얼굴을 감싸 쥔 그녀는 서럽게 울었다. "사부님, 손이 떨려서 죽일 수가 없어요!" 그녀는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울음을 쉽게 멈추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며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사부님을 잘 보살피거라." 말없이 몸을 돌린 그녀는 중양궁을 빠져 나왔다. 임조영을 생각하고 있는 왕중양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임조영이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토록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면서 왜 활사인 묘를 빼앗아 갔는가 하는 점이었다. 임조영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몸을 일으킨 왕중양은 뒷산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찬바람이 부는 한밤중이라 활사인 묘는 더욱 처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돌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계집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들려 왔다. "누구냐? 사내냐 계집이냐?" 쓴웃음을 지으며 왕중양이 대답했다. "왕중양이다." "……물러가세요. 사부님은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겁니다." "난 네 사부와 몇 마디만 나누고는 돌아가겠다." "다 이상 사부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왕중양은 가슴 한 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임조영과의 인연을 마감해야 하는가. 그동안 있었던 그녀와의 짧고도 길었던 만남에 대해 되새겨 보았다. 이렇게 끝을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간 활사인 묘에 뒷문이 하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무심이 그 뒷문으로 들어와 자신을 만나곤 했던 일이 뒷머리를 스쳤던 것이다. 왕중양은 고분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나 맨손으로 바위를 옮겨 놓을 수는 없었다. 난감해진 왕중양이 그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사부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옥이었다. 그 뒤로 왕처일의 모습도 보였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들은 이 바위만 옮겨 놓고는 돌아가게." 두 사람은 왕중양과 함께 바위를 한쪽으로 옮겨 놓았다. "자, 이제 돌아들 가게." 이렇게 말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마옥과 왕처일은 왕중양이 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 보았다. 이들은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굴 안으로 들어간 왕중양은 곧바로 석관이 놓여져 있는 방으로 향했다. 다시 굴 안으로 들어와 보니 더욱 음침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임조영이 지내고 있다는 생각에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중양은 천년 옥돌로 만든 침대 앞에 이르렀다. 그 위에 임조영이 움직임이 전혀 없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내가 왔소." 그녀가 왕중양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지만 불가능했다. 그녀는 속으로 왕중양이 바위를 옮겨 놓고 들어왔을 거라 짐작했다. 또한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우니 필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세요.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제가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속에 맺힌 수많은 말들을 틸어놓으려고 온 왕중양은 그만 온몸의 기운이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임조영은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 않은가. "임조영, 우리가 이렇게 서로의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지내 온 것도 십여 년이 지났소. 이제 그만 나하고 이곳을 나갑시다. 우리옛날처럼 강호를 떠돌며 인간 속세를 등지고 자유롭게 살도록 합시다." 만일 이런 말을 조금만 일찍 했더라면 임조영은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 허무하지 않는가. 임조영이 힘없이 눈을 껌뻑였다. "왕중양, 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줄 아셨나요?" "임조영, 그동안 많이 야위었군." 왕중양은 다른 말을 하면서 조금 전 자신이 느꼈던 서운함을 털어내고자 했다. 그런데 임조영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말씀드릴 게 있어요. 난 오늘 고분파를 만들었어요. 내 제자들은 모두 여인들이죠. 제자들은 이 고분을 나서서는 안되지요. 또 내가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게 했는지 아세요? 우리 고분파에 들어오면 저기에 있는 사람을 향해 침을 뱉어야 해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저주하는 사람이지요." 왕중양은 임조영이 말한 사람은 분명 모용준일 거라 믿었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한 왕중양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고개를 돌린 왕중양은 그녀를 한동안 주시했다. 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엄습해 오는 것처럼 싸늘하게 떨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전 이제 얼마 살지 못해요. 더 이상 당신과 옳고 그름에 대해서 논하고 싶지도 않아요." "난 《구음진경》을 얻었소, 이것만 있으면 당신을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소. 당신을 살리게 되면 내 무공은 사라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상관하지 않아." 왕중양이 품속에서 《구음진경》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나에겐 천 년이나 묵은 한옥(寒玉) 침대가 있어요. 이것만으로도 난 만족해요. 다시는 당신에게 도움받기 싫어요." "임조영, 제발 부탁이오. 내 말을 한 번만 들어주오." 임조영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 "당신은 누군가요? 천하의 으뜸가는 협객 왕중양이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장생패위를 모시고 있어요. 그것만 모시면 무슨 일을 하든 신심이 생긴다고 하더군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에게 빌었지 어디 당신이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빌어 본 적이 있나요? 나 같은 여인은 이제 꺼져 가는 촛불에 불과해요. 나 같은 사람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은 당신 체면에 손상이 가는 일이 아닌가요?" 왕중양으로서는 할말이 없었다. "이제는 좋은 세월이 다 지나갔어요. 나는 이제부터 죽을 날만 기다리겠어요. 당신의 제자들이 내 제자들을 귀찮게 하지만 않으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어요." 그러나 왕중양은 치료를 하자며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왕중양의 진심이었고 그녀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이었다. "당신의 그 경서가 나를 구할 수 있다고 해도 난 도움을 받지 않겠어요. 난 이제는 살기조차 지겨워요. 그저 죽을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고요." 왕중양은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왕중양의 눈에서도 한 줄기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껏 그의 눈물을 본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지금에서야 임조영과의 인연이 끝나 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이 음침한 석굴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임조영을 상상하니 더욱 가슴이 메었다. 임조영이 고개를 들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당신에게 드릴 선물이라고는 이 말밖에는 없네요." 왕중양이 고개를 떨구고는 뒤쪽에 있는 석실로 들어갔다. 이 석실은 원래 그가 무공을 연마하는 장소로 쓰던 곳이었다. 임조영도 이 방에서 무공을 닦을 게 틀림없었다. 왕중양은 이곳에다 《구음진경》의 경문을 새겨 놓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나중에 이것을 보고 스스로 몸을 추스릴 수 있게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믿었다. 그렇게 되면 임조영은 꼭 회복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의 매듭을 지은 왕중양은 저절로 힘이 나는 듯했다. 그는 검을 빼들고는 천장으로 뛰어올랐다. 천장에 박쥐처럼 매달린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경문을 정성껏 새기기 시작했다. 훗날 소룡녀(小龍女)와 양과(楊通)는 이 고분 속에서 《구음진경》의 경문을 얻어 절세의 무공을 몸에 익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왕중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흘 낮밤을 새워 가며 그는 이곳에 경문을 모두 새겼다. 팔의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키고 차츰 감각마저 잃어 갔다. 그러나 고통을 참으며 그는 결국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임조영이 이 천장만을 바라보아도 대단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 다음 그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고분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