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56편 (56/60)

2026-09-30 18:52:09 조회 18
두 사람이 마주서자 종남산 산자락에서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어왔다. 나지막이 들리는 두 사람의 한숨 소리만 한동안 자리했다. "왕중양, 듣자하니 당신은 기이한 무학경서를 얻어서 천하에 보기 드문 무공을 많이 익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도전을 한 거랍니다. 만일 당신이 이기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당신이 제게 지면 이 활사인 묘를 넘겨주셔야 해요. 제가 이곳에서 살 생각이에요." 임조영이 먼저 말문을 열자 왕중양이 탄식을 했다. "난 살아 있는 송장이나 다름이 없소. 그대가 이곳에서 살겠다는 건 무슨 의미요?" 말을 마친 왕중양은 다시 활사인 묘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임조영은 왕중양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 어떠한 제지도 못했다. 왕중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가 옆에 있던 계집에게 분부했다. "저기 저 돌을 주워 오너라. 내가 깔고 앉아 있을 것이다." 임조영의 태도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왕중양은 임조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임조영은 그 앞에 돌을 깔고 앉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광경들이 의아하게만 비쳐졌다. 사화꾼 계집도 이제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돌 위에 앉은 임조영은 조용히 왕중양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볼수록 이상해 옆사람과 귓속말을 나누기에 바빴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사화꾼 계집이 장작 더미를 안고 왔다. 임조영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태세였다. 이렇게 사흘이 지났다.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이 커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궁금증만 더해 갔다. 전진교 사람들이 왕중양에게 줄 음식들을 날라왔다. 그럴 때마다 임조영이 모두 빼앗아 한쪽으로 던져 버렸다. 전진교도 그 세력이 매우 강해져 있었지만 차마 임조영을 어쩌지는 못했다. 그녀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서 왕중양을 기다렸다. 무림의 사람들은 갈수록 호기심이 의문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임조영이 과연 노리는 것은 무엇 인지 분명 말못할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임조영이 계집을 시켜 석굴 입구에 가서 안에 대고 욕설을 퍼부으라고 했다. 계집은 '왕중양은 졸장부요, 겁쟁이!'라는 따위의 욕을 마구 퍼부었다. 한창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석굴 안에서 전진교 수제자인 마옥이 나왔다. "우리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소용이 없다고. 네 사부에게 돌아가 쉬라고 일러라." 계집이 임조영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숙이고는 꼼짝하지 않았다. 왕중양을 보지 않고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계집이 다시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 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저 계집의 위풍이 대단하군. 아마도 왕중양이 맞설 용기가 없나보지." "소문을 들으니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얻었다더군. 그래서 지금 세상에는 누구도 왕중양을 이기지 못한다더군. 이런 왕중양이 임조영 같은 계집을 무서워하다니 말도 안 돼." 누군가 반박을 하자 다시 한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넨 내막을 모르고 하는 소릴세. 사람들 사이에 정이 오가면 싸우더라도 너무 무정할 수는 없는 거네. 왕중양은 임조영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있다네. 말하자면 빚을 졌다는 말이지. 정이란 빚을. 그러니 어찌 임조영과 칼부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때 한 다른 한 사내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왕중양이 이처럼 응답하지 않고 있다가는 임조영이 기다리다 죽고 말지." 사람들이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고 있는데 저쪽에서 계집이 다시 걸쭉한 욕설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이번엔 전진교를 향한 욕설을 터뜨렸다. 전진교의 놈들은 모두 거북이처럼 대가리를 갑 속에 숨긴 채 눈치만 본다, 혹은 천하의 사내들이란 한결같이 더러운 놈이라는 등 별의별 욕을 다 해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전진교 제자들도 나중에는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워낙 불 같은 성미인 구처기가 참다못해 뛰쳐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임조영, 욕은 그만두고 나와 한판 겨루어 보자. 우리 전진교의 참맛을 보여 주마!" 그러자 마옥이 구처기의 옷자락을 잡았다. "사존(師尊)님의 말씀도 안 듣고 이게 뭐야? 넌 그래 우리 사문(師門)을 배반할 셈이냐?" 구처기가 주먹으로 땅을 치며 원통해 했다. 학대통이 구처기를 위로했다. "사형, 진정하시오. 이게 무슨 꼴이오?" 손불이도 임조영에게 독기가 서린 눈길을 보냈다. "만일 사부님을 괴롭힌다면 난 네 년과 사생결단을 내겠다. 네년의 손에 죽는 한이 있어도 꼭 그렇게 할 것이다!" 지금의 전진교는 강호에서 하나의 큰 교파를 이루고 있는 입장이었다. 소림을 제외하고는 아마 천하에서 전진교를 따라잡을 교파나 문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천하의 모든 강호객들이 모인 마당에 임조영이 이처럼 전진교를 업신여기니 이들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전진의 칠대 제자들이 일제히 대로하여 이를 갈기에 이르렀다. "북두칠성진(北斗七星陳)을 쳐라!" 마옥이 명을 내리자 이들은 몸을 솟구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학처럼 공중에서 유영을 하던 이들은 곧장 임조영 앞으로 내렸다. 이들은 왕중양에게 이 진을 치는 법을 전수받았는데 마치 북두칠성을 연상하게 했다. 마옥이 앉은 채로 임조영을 꾸짖었다. "임 여협님, 옛날부터 스승은 모욕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임 여협께서 우리 사존님을 모욕하고 전진교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려 합니다. 그러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우리 사존님을 대신하여 그대를 상대하려 하오." 그러나 마옥은 속으로 애를 태웠다. 사부인 왕중양과는 결코 멀지 않은 사이인 임조영이라 사실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는 싸우더라도 임조영에게 져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품고 있는 처지였다. 이런 마옥의 심정을 모르는 임조영은 차갑게 말을 내쏘았다. "자네들의 무공이 썩 월등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나와는 상대가 되지 못해. 난 자네들을 상대할 마음이 없으니 어서 사부를 데리고 와라!" 휘파람을 여유 있게 불던 구처기가 거들었다. "임 선배님, 이 후배가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뎁쇼?" 검을 뽑아 든 그가 임조영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구처기, 네 재주가 아무리 좋아도 내 상대로는 부족하다!" 말을 끝낸 임조영이 몸을 날려 높이 올랐다. 바위 위에 백년 묵은 노송처럼 묵묵히 앉아 있던 전진칠자들도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공중에서 이들은 방어태세를 취하며 임조영과 맞섰다. 이 괴상한 진법을 본 임조영은 몹시 당황했다. 이 진법은 얼마 전 서역의 제일인자로 떠오른 합마공과 봉황력을 전수받았다는 구양봉이 찾아와 방해를 할까 봐 왕중양이 고안해 낸 것이었다. 강호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많은 호수들이 《구음진경》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거였다. 그 중에서도 구양봉의 이름이 심심지 않게 거론되고 있어 왕중양은 조심스레 준비를 해 왔던 것이다. 언젠가는 그가 나타나 《구음진경》을 놓고 피를 뿌리게 될 거라 왕중양은 예감했었다. 그래서 마옥을 비롯한 이들은 전진교를 지켜 내는 천강북두대진 (天送北斗大陣)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자기 앞에 웅장하게 펼쳐진 북두대진을 보며 임조영은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범상치 않은 진법만 봐도 왕중양의 진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진을 격파하지 못하면 활사인 묘를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휘이― 임조영이 입으로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소리는 전진칠자들의 휘파람 소리와는 달랐다. 임조영의 공력이 전진칠자보다 더 세고 높았기에 그 소리는 산천을 진동시키고 사람들의 전신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왕중양이 만든 그 진법을 내가 한번 쳐 보겠다!" 임조영이 전진칠자를 향해 나아갔다. 마옥이 미소를 지으며 자만했다. "우리 사부님께서 만드신 이 진법은 함부로 깰 수가 없을 것이오!" 곧 임조영의 검이 검푸른 빛을 토하기 시작했다. 동서남북으로 검에서 뿜어지는 빛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를 보는 전진칠자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조영의 검에서 쟁강 하는 소리가 난 것은 이때였다. 허공으로 한 줄기의 섬광이 번뜩였다. 이 섬광은 곧 번개같이 구처기를 향해 뻗어 갔다. 구처기는 북두칠성 중 천권성이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이 위치에 있게 된 것은 무학에 대한 조예가 가장 깊었기 때문이었다. 천권성의 구처기가 공격을 받게 되자 천기성(天竣星)의위치에 선 왕처일과 천구성(天樞星) 위치에 있던 마옥은 모두 검으로 임조영의 대혈을 겨누기에 바빴다. 이 진법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호응하 면서 동시에 공격을 하기도 해 임조영은 도저히 기회를 노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진칠자들을 물리치려면 이 진법을 꼭 깨야만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럴수록 진법의 위력은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이미 그녀는 진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형편이라 위기감만 고조될 뿐이었다. 검을 치켜 든 그녀는 일곱 사람을 고루 겨루면서 달려 들었다. '창송영객(蒼松迎客)'이라는 검법이었다. 손불이를 먼저 공격하자 개양성(開陽星) 위치에 있던 학대통은 그녀가 위기에 처할까 봐 검을 휘두르며 막아섰다. 깊이 찌른 검을 거둔 임조영이 이번엔 옥형성(玉衛星) 위치에 있는 유처현을 내리쳤다. 유처현은 일곱 제자 중에 가장 침착한 사람이라 천천히 검을 들어 막아 냈다. 옆에서 갑자기 나타난 구처기가 검으로 임조영의 앞가슴을 내쳤다. 살짝 피하며 뒤로 물러선 임조영이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들이 부리고 있는 진법은 어느 정도 임조영을 막아낼 수는 있었지만 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모두의 검은 임조영의 옷깃조차도 건드리지도 못했다. 뒤로 일단 물러섰던 임조영이 재빠르게 검을 틀며 구처기를 향해 크게 그었다. "악!" 구처기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인상을 잔뜩 쓴 구처기가 검을 단단히 틀어쥐고는 임조영을 향해 공격을 하려 했다. 마옥의 휘파람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더니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낱아와 구처기의 검을 내리 눌렀다. "사형, 왜 이러시오?" 화가 난 구처기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일곱 사람 중 온 힘을 다해 임조영과 맞서고 있는 것은 자기와 손불이밖에는 없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보아하니 이들은 일부러 사력을 다해 공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임조영을 이긴다면 왕중양이 계속 활사인 묘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계산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임조영에게 져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진교 의 북두칠성진은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었다. 구처기는 고개를 돌려 손불이를 보았다. 그녀 역시도 이런 내막을 모르고 사력을 다해 임조영과 검술을 교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허공에서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혔다. 손불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아 검으로 전해진 충격에 시달리는 듯했다. 임조영의 검이 다시 높이 들리자 구처기가 달려가 막았다. 멀리 물러선 임조영이 옆에 있던 마옥에게 접근했다. 마옥은 임조영의 검법을 보고는 그녀가 매우 조급해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러나 임조영은 그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얼른 진 밖으로 빠져 나왔다. "우리가 어리석었군. 사부님의 진법이 욕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내가 굴 안으로 들어가 이런 사실을 사부님께 알릴 테니 모두들 여기서 임조영을 지키거라!" 마옥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굴 안으로 들어갔다. 왕중양 앞에 이른 마옥이 무릎을 꿇으며 침통한 얼굴을 했다. "사부님 저희들이 임 여협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왕중양은 등을 보인 채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왕중양이 조용히 물었다. "북두칠성진법을 썼느냐?" 마옥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중양은 이미 예상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사부님께 괴로움만을 안겨 드려서……." "그만하고 일어나거라." 왕중양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래 임조영이 어떻게 검을 쓰던가?" 마옥이 임조영이 쓴 검법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말을 다 듣고 난 왕중양이 길게 탄식을 했다. "나는 내가 이 굴 속에서 몇 년 지내 온 것이 아주 긴 세월로 생각하는 모양이로구나?" 마옥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나가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전진교나 강호의 무림의 숱한 대사들이 사부님께서 나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넌 나의 고충을 모른다." 그는 임조영을 자신이 오랜 세월 지내 왔던 이곳으로 불러 들일수가 없었다. 만약 임조영을 이긴다 해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평생 이곳에서 살겠다고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 사내로서는 차마 내키지가 않았다. 왕중양은 임조영과의 싸움을 피할 수도 그렇다고 원할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였다. 마옥 역시 이런 왕중양의 심기를 충분히 이해했다. 마옥은 수제자였기에 왕중양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강호객들의 말소리가 굴 안까지 울렸다. 몇몇 강호객들이 임조영의 편에 서서 의기양양하게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임 여협은 물론 사부님께서도 아무 것도 드시지를 않았습니다. 이러다가는 곧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 전진교를 생각하셔서 고집을 버리시는 게……." 왕중양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내가 임조영을 이겨야 할지 아니면……." 왕중양이 얼마나 심사숙고하고 있기에 이토록 괴로워하나 하는 생각에 마옥은 더욱 가슴이 쓰렸다. "제 생각으로는 사부님은 어느 쪽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왕중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왕중양의 말이 옳았다. 어느 쪽이든 승부가 나야만 했다. "아무래도 내가 나가 봐야 할 것 같다. 일단 임조영의 도전을 받아들여야겠어. 도중에 다른 묘안을 써 수습하는 일이 있어도 일단은……." 왕중양이 드디어 굴 밖으로 나왔다. 맞은편에 버티고 선 임조영에게 그가 읍을 했다. 왕중양을 본 그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난 굴속에서 세상의 일과 담을 쌓고 지냈지만 무공을 연마하는 것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소. 그러니 조심을 해야 할 것이오." "그럼 먼저 손을 써 보시지요." 왕중양은 내키지 않은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맞붙자 강호객들의 눈동자는 휘둥그래졌다. 두 사람이 부리는 무공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보라구. 왕중양의 무공은 전혀 빈틈이 없어. 저 정도에 이르자면 보통의 머리를 갖고서는 힘이 들지." 왕중양은 임조영과 비록 무공을 겨루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흐뭇했다. 그는 임조영의 무공에 박수를 보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예상과는 다르게 전력을 다한다 해도 임조영과는 우열을 가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훌륭하군!" 왕중양이 감탄사를 내자 임조영도 웃음으로 받아쳤다. "어때요? 제가 활사인 묘를 차지할 만한가요?" "그런데 난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세상에는 좋은 곳이 많을텐데 왜 하필이면 내 무덤을 빼앗으려는 거지?" "제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옥녀심경이지요. 그러니까 난 이 고분을 꼭 차지해야만 해요. 어때요, 제게 양보하지 않으시겠어요?" 왕중양은 그 말에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고분은 그때 당신이 무심의 무리들과 겨루어 패한 대가로 차지한 게 아닌가요? 그러나 오늘만큼은 당신은 져서는 안 돼요." 왕중양이 속으로 임조영의 심중을 헤아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그 마음을 알지. 그대가 이 고분을 한사코 빼앗자는 것은 나를 나오게 할 생각이라는 것을. 헌데 내가 이 고분에 남기 위해서는 그대를 이겨야 하니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인가.' 왕중양과 임조영은 지금 서로의 마음을 너무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짓이 종국에는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일이란 것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막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구경거리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비쳐질 게 분명했다. 수백여 합을 싸운 두 사람은 그러나 쉽게 승부를 내지 못했다. "잠깐 멈추시오. 내가 할말이 있소!" 왕중양이 손을 들자 임조영이 뒤로 물러섰다. "우리가 질리도록 무공을 견주어 보았으나 승부를 낼 수가 없소. 그러니 이제부터는 무공이 아니라 문장으로 승부를 걸어 보는 게 어떻소? 더군다나 그대는 곡기를 끊은 지 오래라 몹시 지쳐 있을거요." 왕중양은 끝까지 임조영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좋아요. 오늘은 서로가 지쳤을 테니, 그럼 내일 다시 보기로 하지요." 임조영이 트집을 잡지 않고 왕중양의 제의에 순순히 응했다. 이튿날 두 사람은 다시 석굴 어귀에서 마주했다. "오늘은 약속한 대로 문장으로 실력을 겨뤄 보는 거예요. 하지만 먼저 그 결과에 대한 조건을 정해 놓아야 하지 않겠어요?" 임조영이 먼저 말을 건네 왔다. "무슨 조건이오?" "제가 지면 이 자리에서 검으로 목을 잘라 자결을 할 것입니다. 영원히 당신과 만나지 못하게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기면 활사인 묘는 양보하셔야 합니다. 또한 평생 제 말을 따르되 절대로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도사가 되든지 중이 되든지 반드시 이 산 위에 전진교를 세우고 십 년 동안 저와 가까이 지내야 하는 것도 명심하세요." 이 말을 듣고 난 왕중양은 더욱 깊은 곤혹스러움에 빠져 버렸다. 만일 자신이 이기면 임조영을 죽이는 꼴이 되지를 않는가? 그렇게 되면 어찌 남은 생을 편한 마음으로 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한편 반대로 임조영에게 져 준다면 그녀의 뜻을 따라야 하니 이것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온갖 묘안을 떠올려 보았지만 선뜻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럼 문장 겨루기를 하도록 합시다." 왕중양이 오래 다물고 있던 입을 열자 임조영이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세요. 저 바위에다 글을 새기기로 하지요. 누가 더 잘 새기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왕중양은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선천신공과 《구음진경》을 동원한다 해도 만족하게 해낼 것 같지가 않았다. 맨손으로 어떻게 바위에 글을 새긴단 말인가? 임조영이 한껏 웃으며 말했다. "이건 손재주를 시험하는 거랍니다. 누가 더 깊게 새길 수 있나를 보자구요." 바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간 왕중양이 손으로 만져 보았다. 공교롭게도 무쇠보다도 더 단단한 청석(靑石)이었다. "신선도 아닌 내가 어떻게 맨손가락으로 이 바위에 글을 새길 수 있겠소?" 왕중양이 솔직히 털어놓자 임조영이 비웃듯 되물었다. "호호호, 신선도 아닌 당신을 그럼 왜 제자들이 장생패위 (長生牌位)로 모신답니까? 만일 제가 새긴다면 졌다고 손을 드시겠어요?" 왕중양으로서는 그 누구도 바위에 글을 새기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임조영도 죽지 않고 또 자신도 활사인 묘를 양보하지 않아도 되게 ……. "그대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면 내가 진 것은 불 보듯 하지. 그러나 그대 역시도 해낼 수 없다면 우리는 비기게 되겠지." 임조영의 눈에서 광채가 일었다. 그녀는 왕중양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깊은 속뜻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녀 생각으로는 왕중양은 자신이 죽는 것은 원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함께 살 마음은 없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종남산에서 저와 이웃해 사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녀가 글을 새기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왕중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끝을 주시했다. 임조영은 바위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글들을 새겨야 하나? 집을 버리고 강호에서 떠돈 사람들 속에서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사람은 장자방(張子房)이지. 잔혹하고 포악한 진시황에게 반항을 하고 명예도 사리도 탐내지 않은, 당신의 선배님이 되시는 분이에요." 그러더니 오른손 식지를 꼿꼿이 편 그녀는 바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서서히 돌가루들이 부스스 떨어지면서 바위 위에 한치 깊이나 되는 글자들이 새겨졌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왕중양이 놀란 눈길로 그녀가 새긴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자방은 진을 멸할 굳센 뜻을 품었건만 노옹이 떨어뜨린 초신을 세 번이나 다리 밑에 내려가 주워 왔네 좌한(佐漢)이 대사를 도모하니 그 이름 하늘에 닿을 만큼 우뚝 솟아 있네 적송(赤松)을 동무하여 거닐며 무공을 이룩한 후에 몸을 숨겨야 하리 이인(異人)과 이서(異書)는 하늘이 쉬이 내지 않는다네. 왕중양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붓으로 써 갈긴 듯한 또렷한 글자들은 필체 역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과연 어떻게 글자를 바위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단 말인가? 왕중양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비결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다가가 만져 보려 하자 임조영이 웃으며 앞을 막았다. "이제는 졌다는 걸 인정하시겠죠?" 그는 믿어지지 않아 직접 만져 보기로 했다. 청석을 만져 보니 역시 무쇠처럼 단단했다. 무공으로 따지면 임조영은 결코 자신보다 내력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