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54편 (54/60)
조금 전 느꼈던 다감한 감정은 사라지고 또다시 육욕에 눈이 먼 한 탕부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가들며 왕중양의 손을 잡으려 했다. 왕중양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더듬더듬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난…… 난 도사의 몸이오……." "그럼 나도 도사가 되면 되겠지요? 낮에는 도사 노릇을 하고 밤이면 오라버니의 따뜻한 이불이 되어 드리겠어요. 도사들에게는 원래 좋은 이부자리가 없는 법, 밤이면 얼마나 한기를 느끼겠어요?" 그녀는 마치 꿈을 꾸듯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왕중양이 그저 목석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더욱 노골적으로 매달렸다. "오라버니가 싫다면 어쩔 수야 없겠지만…… 하지만 저를 한 번만 보기라도 해 주세요. 제 살결이 어때요? 희지요? 얼굴은 또 어떠세요?" 이처럼 곤혹스런 순간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왕중양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가 또다시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려 하자 모용준이 불쑥 끼여들었다. "형님, 원래 저는 형님을 도우려 했었소이다. 형님을 대신해서 사내에게 굶주린 이 여인의 욕망을 채워 주고자 했지요. 허나 죽어도 싫다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오로지 형님만을 만나겠다는 게 아니겠어요? 그 정을 봐서라도 매몰차게 뿌리치지는 못할 겁니다." 이제는 모용준까지 합세하여 왕중양을 밑둥에서부터 마구 뒤흔들어 놓을 작정이었다. 왕중양이 줄곧 부처님인 양 눈을 감은 채 가슴을 닫아 버리자 모용준은 집요하다 못해 발악을 해댔다. "형님, 형님은 아마도 굴속에서 나오는 게 나을 겁니다. 납한 태자님을 만나 뵈면 형님은 태자님의 상빈으로 대접받을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이 여인과의 혼사도 원만하게 치를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가장 기뻐 날뛴 것은 왕정아였다. "오라버니는 이 굴속이 그리도 좋다는 말이에요?" "정아, 어서 여기를 떠나 주오." 드디어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침통한 목소리였다. "이 굴속에서 난 나만을 위해 목숨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니오." "오라버니가 정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들어갈 수도 있잖아요?" "정아, 제발 여기를 떠나주오.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만이 나를 위하는 길이오. 난 정아를 돌볼 겨를이 없소. 난 전진교의 교주……."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더 이상 애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왕중양의 굳은 뜻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왕중양이 무슨 일이 있어도 굴속에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는 훌륭한 사내예요. 오라버니가 떠난 후 난 매일 밤마다 꿈을 꾸었답니다. 난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았어요. 후에 소문을 들으니 한 사내가 금나라 놈들에 저항하며 싸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중원 땅에서 으뜸가는 사내 대장부라고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그의 이름이 왕중양이라는 말을 듣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그분이 내 오라버니라고 자랑했더니 모두들 믿어 주지를 않았어요……." 왕정아의 서러움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녀는 눈가를 훔치며 돌연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어요. 이것으로 우리는 영원히 이별을 해야 하는 건가요.? 저승에서나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고개를 돌린 그녀가 모용준에게 공손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당신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지만 헛수고만 한 셈이네요. 그러나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몸을 획 한쪽으로 돌리더니 나는 듯 달려갔다. 왕중양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강한 빛을 냈다. 그녀가 돌문에 자기의 머리를 박고 만 것이다. 머리가 부서 졌는지 그녀의 머리에서는 피가 계속 쏟아졌다. 그녀는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다. 왕정아는 겨우 머리를 들고는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난 마지막으로 오라버니를 보고 싶어요, 오라버니, 그…… 그 눈 언저리가 아……직도 젖어 있지 않나요?" 왕중양은 안개가 긴 듯 흐릿한 시선 속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죽어 가는 그녀를 향해 어떤 말을 해줄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이미……이미 죽었다. 왕중양은 잠시 손을 들어 무언가를 잡으려는지 허우적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손은 맥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형님의 인품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저에게는 왜 이토록 진심으로 대해 주려는 계집이 없는지……." 모용준의 탄식 소리를 들으며 왕중양은 더 무거운 숨을 쉬었다. 문득 모용준만 아니었다면 정아 역시도 이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주먹이 저절로 모아졌다. "모용준이 놈! 난 네 놈을 꼭 죽이고 말 것이다!" 모용준이 깜짝 놀라며 왕중양을 설득하려 했다. "형님, 한낱 계집에 불과한 목숨인데 뭘 그러시우. 이런 말도 있지 않소. 형제는 수족과 같고 마누라는 옷과 같다고 말이오. 수족은 바꿀 수 없어도 옷이야 얼마든지……." "네 놈을 언젠가는 죽이고 말테다!" 왕중양의 독기 어린 눈빛에 모용준은 은근히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철창에 갇힌 호랑이일 뿐이란 사실을 상기하며 얼른 자세를 가다듬었다. "형님, 난 아직도 형님의 동생이 아니오? 동생들에게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마시오. 그러니 셋째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는 게 아니겠소? 난 날마다 형님이 얼마나 고독해 할까 걱정이 돼서 잠이 다 오지 않는단 말이오." 가슴이 쓰리고 입 안으로 쓴맛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더는 가증스런 모용준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왕중양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도적놈은 제 발이 저린 법이지." "그 말씀이 맞소. 그리고 난 오랫동안 궁리를 했었소. 형님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말이오. 오늘 내가 그걸 형님에게 드릴려고 가져왔소이다." 또 무슨 얄팍한 수로 원성을 쌓으려고 하는지 왕중양은 내심 부아가 치밀었다. 모용준이 뒤에 있던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하들이 다른 가마를 들고 다가왔는데 그들의 동작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건 내가 형님에게 드리는 선물이오. 어서 받으시지요." 다시 모용준의 신호에 따라 가마 안에서 한 여인이 가볍게 걸어 나왔다. "아니, 저 여인은!" 여기서 자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놀라움을 추스리기도 전에 모용준이 다시 입을 놀려댔다. "형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두 계집이었소. 하나는 임조영이었지만 소유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을 뿐이오. 허나 자지는 얻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니겠소. 하하, 한 가지 궁금할 것이오. 처음부터 자지가 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소. 내가 손을 썼지요." 왕중양은 뜻하지 않게 이어진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모두가 모용준이 꾸민 짓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치가 떨렸다. "형님, 왜 후회를 하고 계십니까요? 원래 형님의 몫이었던 옷을 내가 입은 셈이지요. 막상 옷을 빼앗아 입고 나니 차츰 후회가 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형님의 옷을 돌려드리려 합니다. 형님께서는 꼭 받으셔야 합니다. 이 굴속의 밥은 몹시 추울 테니까요." "자지, 어서 말을 해 봐라!" 모용준은 대답 없는 왕중양 대신 자지를 채근했다. "큰공자님……." 자지는 왕중양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과연 부럽소이다. 모든 여인들이 형님에게는 마음을 쉽게 열어주니 또 한 번 감탄하고 또 내 자신이 미워지는군요." 모용준이 혼자서 탄식을 했다. 자지가 이때 왕중양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왕중양의 눈에는 오히려 자지의 좋지 않은 안색이 염려되었다. 아무래도 무슨 시름에 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혹시, 나쁜 독에 중독된 것은 아닌가?" 왕중양도 목소리를 죽여 묻자 자지가 더욱 슬피 울며 어깨를 들먹였다. "저자가 독약을 먹였어요. 미약이라 하는데 독성이 강하고……, 또 내가 발작을 할 때면 저자는 나에게 임조영이라 자칭하라며 못살게 굴기도 해요. 흑……" 왕중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정도로 그는 주먹을 틀어쥐며 이를 갈았다. 자지의 눈물은 왕중양의 가슴에 불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왕중양이 모용준에게 말 하나하나를 짓씹듯 물었다. "모용준, 네가 자지를 내게 주겠다고 했지?" "그럼요. 형님께서 굴에 들어가도록 허락만 하시면 이내 드리리다." 말을 끝낸 모용준이 무심과 눈을 맞추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왕중양은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왕중양이 여인을 굴속으로 불러들인다면 그의 명성은 더러워질 게 뻔했다. 한편 들여 놓지를 않는다면 왕중양이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는 소문으로 떠돌게 될 것이다. 왕중양이 갈등을 겪으며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모용준이 소매 안에서 단검을 꺼내 자지를 위협했다. "자지, 어서 빌어라. 만약 너를 구해 주지 않으면 난 너를 죽여 버릴테다!" 단검을 빙빙 돌리며 모용준은 자지를 더욱 매섭게 위협했다. 그를 주시하고 있는 왕중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왕중양이 화기를 가라 앉히며 어렵게 입을 때었다. "좋다. 네 말대로 할 테니, 어서 이 안으로 들여보내라." 제33장 모용준의 최후 왕중양의 태도에 모두들 놀라고 말았다. 왕중양이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방금 전 왕정아가 찾아왔을 때도 그녀를 굴 안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었는데…… 그랬더라면 그녀의 목숨은 구했을 것 아닌가? 혹시 자지도 그녀처럼 돌에 머리를 찧어 죽을까 봐 그런 것인가? 모용준은 속으로 온갖 잡생각을 다해 보았지만 얼른 하나를 집어 낼 수는 없었다. 자지의 눈에는 왕중양이 몹시 초조해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자기 때문에 그가 불안에 떨고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졌다. "큰공자님, 전…… 전 들어가지 않겠어요." 그녀는 앞으로 닥칠 일들이 모두 불길할 거라 예감하고는 몸까지 떨어댔다. 죽는 한이 있어도 굴속으로는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왕중양이 애써 미소를 보이며 설득하려고 했다. "자지, 그 임안의 치모루에 나와 임조영이 그대를 찾아갔었던 걸 아는가? 우리는 그대를 구해 내려고 했었소." "알고 있어요." 자지의 눈가엔 다시금 눈물이 비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그때 몇몇 여인들은 구해 내지를 못했지.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오." 말을 중단한 왕중양이 긴 한숨을 쉬었다. "쯔쯧, 우리 형님은 언제 봐도 저렇게 정이 많다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굴속에 갇혀 있으니 형님의 귀중한 세월들이 다 흘러가 버리는구나." 무심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만 미인이 굴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자네 형님도 이제부터는 살맛이 날 게 아닌가? 그리고 자네는 동생으로서의 처신을 다한 게 되지 않겠어?" 두 사람은 마음이 잘 맞는지 이렇게 떠벌리고는 낄낄 웃어댔다. "자지 처녀, 굴속으로 어서 들어와." 왕중양이 다시 권유를 하자 자지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왕중양은 첫사랑이었다. 반화대회 때 그녀는 첫눈에 왕중양을 진정한 사내로 마음에 접어 두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용준의 마수에 걸려들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알겠어요." 그녀가 굴속으로 들어갔다. 자지가 굴속으로 들어가자 왕중양에게 거듭 예를 올린 모용준이 한마디했다. "내가 입었던 옷이라고 꺼림칙하게 생각 마시오. 아무쪼록 즐겁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지가 발작을 하게 되면 형님은 땀깨나 뿌려야 할 것이오. 헤헤헤." 모용준은 자신의 계략대로 일이 진행돼 가고 있어 매우 흡족해 했다. 초막 안에 앉아 있는 임조영, 그녀는 아직 뱀독이 가시지 않은 몸이라 거동이 불편했다. 커다란 돌침대 위에 앉아서 천년한담(千年寒痰)에서 주워 온 옥돌로 뱀독을 뽑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한참 뱀독을 뽑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그녀의 사화꾼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터졌다. "냉큼 물러가요! 천하의 사내 놈들은 다 나쁜 놈이야! 순순히 가라고 할 때 가지 못하겠어?" 뒤를 이어 모용준의 간사스런 음성도 들려 왔다. "쥐방울만한 계집의 입이 어찌 그리 더럽더냐? 사내를 그렇게 욕하는 네 년도 언젠가는 사내 앞에서 다리 벌리고 달달 떨 때가 올 것이다!" 그 말에 사화꾼 계집은 화가 치민 모양이었다. "이 검을 받아랏!" 임조영은 움직이지 않고 치료에만 전렴했다. 곧 무심의 웃음 소리도 이어졌다. "너희 집 아가씨가 집안에 사내를 숨겨 둔 것은 아니냐? 사람이 오는 걸 이렇게 경계하는 걸 보니 수상해!" "허튼 소리 마시오! 우리 사부님께서는 지금 치료에 전렴하시고 계신다. 방해하지 마시오!" "한창 치료중인데 우리가 들어서면 두 가지 나쁜 짓을 범하게 되겠네?" 모용준의 너스레 뒤로 무심의 웃음소리가 또 들렸다. "두 가지 나쁜 짓이라니 ? 다른 한 가지는 뭐지?" "우리가 들어서면 미인의 빙옥 같은 몸을 보게 되지 않소?" 이렇게 나불거리던 모용준이 큰소리로 임조영을 불렀다. "셋째 동생, 내가 왔소!" 그의 목소리에는 다분히 장난기가 들어 있었다. 임조영을 노리갯감 정도로 여기고 있음을 단면으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더욱 울상이 된 사화뿐 계집이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검이 두 사람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녀의 검은 곧 모용준의 발길에 채여 먼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무심이 계집의 손목을 잡아끌면서 모용준과 함께 초막 안으로 들어섰다. 못박인 듯 앉아 있는 임조영의 정수리에서는 흰 안개 같은 기운이 조용히 피어 올랐다. 이 광경을 본 모용준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떨렸다. 모용세가에 있는 기이한 기공이었는데 그렇다면 임조영 역시도 그것을 연마했다는 뜻이리라. 이 기공을 기경공부(寄經功夫)라고 하는데 깨끗한 여인들만이 연마해 낼 수가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보아하니 임조영은 이미 몸에 익숙해 있어 자유자재로 부리고 있는 듯싶었다. 모용준이 짐짓 목에 힘을 주어 인사를 건넸다. "셋째 동생, 대단한 기공을 연마한 것을 축하하네. 허나 그저 깨끗한 여인의 몸으로 늙기에는 너무 아까워. 고집부리지 말고 내게 오라구. 그대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국모가 될 테니까……." 임조영은 두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를 않았다. 멋쩍어진 모용준이 무심에게 얼굴을 주었다. "무심 공자, 다들 군자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내가 군자다운가?" "자넨 군자가 아니네." 문심이 대뜸 면박을 주자 모용준이 박수를 딱 하고 쳤다. "그래, 그래 ! 난 군자가 아니지. 군자가 아닌 내가 괜히 군자인 척할 필요가 있나! 우리 셋째 동생의 몸에 나를 강제로 쑤셔 넣으면 문제는 해결이 되겠지. 이미 엎질러진 물일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자네가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내가 하겠어. 그러면 이 무심의 마누라가 되는 셈이지." 모용준이 임조영에게로 바싹 다가들며 말을 건넸다. "셋째, 내가 동생을 못살게 구는 게 아니야. 만일 내가 동생을 차지하지 못하면 저 무심이 손을 쓰게 돼. 난 동생을 무심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거든." 모용준이 양팔을 벌리더니 임조영을 끌어안았다. 그는 임조영이 단전을 하고 있는 중이라 손을 쓰지 못한다는 것도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가 임조영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돌침대 위에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처음으로 잡아 보는 그녀의 손목이라 모용준은 날듯이 기뻤다. 그토록 원하던 임조영을 손 안에 넣었다고 생각한 모용준은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가 무심을 향해 말했다. "무심 공자는 그만 물러가게나." 이때였다. 이렇게 지껄이던 모용준의 입이 갑자기 옆으로 틀어 지면서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입을 실룩거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슴에서 둔탁한 아픔이 일었다. 어느 틈엔가 임조영이 소맷자락에 숨겨 두었던 단검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자신의 가슴과 임조영을 번갈아 보던 모용준의 두 눈이 사납게 돌변했다. "네가 나를…… 나를 죽이면 우리 가문의 대가 끊어진다! 내 아들을 낳아주고 나서 나를 죽여라!" 모용준이 고통을 참아 가며 무심을 행해 고개를 돌렸다. "이 계집이 나를 죽이려 하네. 자네도 아는가? 옥녀심경을……." 무심이 옆에 있던 사화군 계집의 혈도를 눌러 놓고는 대꾸했다. "자넨 이만하고 가보게. 임조영은 이제 내 것이니까. 그리고 자네가 말한 옥녀심경은 매우 차가운 검법이지. 그것을 오래 연마하다 보면 자연히 사람도 검도 다 무정해지고 속세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욕망조차 사라져 버리지. 이제 자넨 끝장이겠군!" "아냐, 난 죽지 않아!" 단발마의 외침이 모용준의 작은 입에서 솟구쳤다. 그는 음욕로 물들어 가는 무심의 얼굴을 쏘아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넌 임조영을 가질 수 없다. 임조영은 내……." 모용준의 목소리가 차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모용준의 가슴은 피로 낭자했다. 그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임조영의 분노는 식지를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모용준은 원수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왕중양과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왕중양의 대사까지 망쳐 놓은 인물이라 죽이고 싶었다. 임조영이 다시 모용준의 가슴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윽!" 모용준이 고개를 꺾었다. 무심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훌륭하오! 정말 강호에 이름을 떨친 여협답소이다! " "당신도 이자를 죽일 마음이었소?" 임조영의 물음에 무심이 대답을 피했다. 그는 가물가물 숨결을 이어 가고 있는 모용준을 힐끔 쳐다보더니 한참후에야 입을 열었다. "날마다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는 자를 어느 누가 곁에 두고 싶어하겠나?" 무심만이 아니라 태자 납한도 모용준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언젠가는 버릇을 고쳐 놓으리라 이미 작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으……." 모용준은 급기야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절명하는 모용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무심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를 이렇게 죽이기까지 하는 너를 용서할 수는 없다!" 무심이 밖에 대고 소리치자 사내 몇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임조영과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내들이었다. 지청과 목우와 계수수였다. 지청이 간죽거렸다. "원래 우리는 모용세가의 사람들이었지. 무심 공자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말이야. 무심 공자께서 우리에게 하신 한 말씀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지." 그는 임조영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손짓을 해 가며 설명을 했다. 계수수가 말을 받았다. "무심 공자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그 말씀이 뭔지 알고 싶은가?" 임조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계수수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일러주었다. "무심 공자께서는 이렇게 허락하셨지. 궁 안의 여인들을 마음대로 하라고 말이야. 헤헤헤." 무심이 몇 걸음 임조영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임 소저, 난 임 소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꼭 내 손에 넣기로 다짐했었소. 그래서 아주 거대한 계략을 만들었었지. 첫번째로 왕중양을 무너뜨리고 두 번째로는 모용준을 제거하는 것이었소. 하하하, 그런데 그 모두가 생각처럼 되었으니 이 무심이야말로 대단한 인물이 아니겠소?" 모용준보다 더 음험하고 악독한 자가 아닐 수 없었다. 평소에는 모용준의 뒤에 서서 어리숙하게 행동했던 것도 모두가 이런 일을 이루기 위한 계산 속이었던 것이다. 임조영은 모용준의 죽음으로 가라앉으려 하던 분노가 다시금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사실 임 소저에게 한 가지 알려 줄 것이 있어서였소." 임조영은 이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막 깨어난 사화꾼 계집이 몸을 비틀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지청의 손에 잡혀 젖가슴을 내맡기고 있는 꼴이었다. 지청이 그녀의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며 눈을 까뒤집었다. "그 애에게서 손을 떼면 들어주겠다!" 임조영이 이들의 요구에 순응하려 하자 계집이 손을 내저었다. "사부님, 전 이 놈들 손에 죽어도 괜찮아요. 다만 제 원수를 갚아 주세요!" 입맛이 쓰다는 투로 계집을 노려보던 무심이 뇌까렸다. "네 년의 말이 쉬울 것 같으냐? 네 년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실컷 가지고 놀 테다!" 무심의 말이 떨어지자 사내들의 눈길이 득달같이 계집의 젖가슴과 허리 쪽으로 달려 들었다. 계수수가 징그러운 웃음을 앞세웠다. "흐흐흐, 이 홍분전두가 첫 맛을 봐야겠다. 너희들은 좀 비켜라!" 계수수는 임조영이 보는 앞에서 계집을 강제로 욕보이려 했다. "네 놈들이 그 아이 몸에 손을 댔다가는 이 검으로 염통을 꿰어 놓을 것이다!" 임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살기 어린 눈빛을 사내들을 향해 쏘았다. 무심이 사내들의 행동을 중지시키고는 임조영에게 제의했다. "난 임 소저에게 한 가지 일만 말하고 싶소. 임 소저가 들어주겠다면 이 애는 놓아줄 것이오." "들을 테니 어서 말해 봐라!" 무심이 손짓을하자 계수수가 계집의 가랑이 속으로 집어넣었던 손을 빼며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