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53편 (53/60)
왕중양이 전진교의 제자들을 한곳에 모이도록 했다. 홍칠도 자신이 데리고 온 개방의 여러 제자들을 모았다. 단지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둘러 대책을 강구했다. 이윽고 금군의 무리가 나타났다. 진두에 나선 포악스럽게 생긴 한 장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두 팔로 쌀가마니 천식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마력수(馬力首)였다. 그가 손을 내뻗으며 벽력같은 호령을 했다. "왕중양은 어서 앞으로 나와라!" 왕중양이 기풍당당하게 나섰다. "네가 금나라의 장수인가? 할말이 있으면 하라!" 마력수는 거만한 눈으로 왕중양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타고 있는 말이 성을 내며 앞발을 치켜 들었다. "네가 왕중양이냐? 그럼 잘 들어라. 납한 태자님께서 영을 내리셨다. 전진교를 해산시키라는 분부시다!" "너희 태자가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였느냐?" 왕중양은 죽더라도 비굴함은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이런 왕중양을 말리며 나선 것은 모용준이었다. "큰형님!" 왕중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소.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야겠소. 영주 들판에서 우리가 모였을 때 한 맹세는 잊지 않았겠지요? 금군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천하의 대사에는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 활사인이 되겠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용준이 그 말을 새삼 들추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심이 모용준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대뜸 한마디했다.. "당신이 떳떳한 사내 대장부라면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하오.!" "아무렴, 사내 대장부가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면 끝장이지." 왕중양이 선뜻 이렇게 받아치자 모용준이 실눈을 떴다. "무심 공자, 우리 큰형님을 어떻게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오? 우리 큰형님은 천하 무림의 맹주가 아니오. 필부의 말도 일언이 중천금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영응호걸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회피하겠소이까? 만일 자기가 한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야 전진교의 교주 노릇은 어찌하겠소?" 왕중양은 그 말들이 자신을 올가미에 질어 넣으려고 하는 수작임을 모르지 않았다. "모용준이 놈! 허튼수작 집어치워라!" 왕중양이 피를 토할 듯 울부짖자 모용준과 무심이 마주 쳐다보며 킬킬댔다. 무심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왕중양, 우리 금나라의 태자님께서는 네가 전진교를 만드느라고 애를 쓴 것은 높이 사고 계신다. 그래서 네가 활사인이 되기를 자청한다면 수많은 강호객들은 살려 주신다고 하셨다." 강호객들 중에는 그 인품이 뒤떨어지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자들은 금나라와 그다지 큰 원한이 없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송이든 금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알량한 영웅심으로 우리들까지 죽이려 하지 마시오!"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소리치는 자도 있었다.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사태를 수습하고자 나선 것은 홍칠이었다. 홍칠이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숨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모두 중원 사람들이 아닌가? 금나라 놈들과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할 자네들이 아닌가?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났다면 언제가는 죽는 법, 무엇이 두렵다는 말인가?" 여러 호걸들이 홍칠의 말에 수긍을 했지만 일부는 여전히 반기를 들었다. "금나라 사람들과 싸우는 건 왕중양의 일이지 우리와는 하등 상관이 없소!" 무심이 크게 팔을 휘저으며 목청을 높였다. "다들 보아라! 금나라는 병마가 강하고 백발백중의 궁수들로 가득하다. 만일 자네들이 불복한다면 고슴도치 꼴이 되어 죽을 것이다!"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과 골짜기에는 금나라 군사들이 피어난 풀꽃들처럼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또한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고 있는 궁수들 때문에 더욱 긴장감이 맴돌았다. 홍칠이 단지흥에게 속삭였다. "산 아래로 어서 내려갑시다!" 그러나 단지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대를 했다. "그건 안 돼. 물론 나나 자네는 별 근심이 없겠지만 무림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화살에 목숨을 잃게 될 걸세." 단지흥의 말은 당연한 것이라 홍칠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마옥이 왕중양에게 비장한 목소리를 건넸다. "사부님, 오늘 금나라 군사들이 들이닥친 것은 우리 전진교를 없애고자 함입니다. 더군다나 그 물결을 밀어 중원의 무림도 일망타진할 속셈인 것 같은데 최후의 결전까지 싸워야 합니다!"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는 금나라 군사들을 풀러보던 왕중양은 고심했다. 중원 무림이 금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해도 좋은 결과가 있을 수는 없었다. 중원 무림의 여러 영웅호걸들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단합된 금군을 이기기란 쉽지 않으리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온 왕중양이 무심을 향해 물었다. "무심 공자, 어쩔 생각이오? 어서 말을 하시오!" 무심과 모용준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무심이 입을 열었다. "우리들도 중원 무림의 여러분들과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오. 그저 왕중양의 대답을 받고자 왔을 뿐이었소. 이전에 왕중양은 자기가 금나라를 이기지 못하면 활사인이 ,되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소. 우리들은 바로 그 약속을 지키라고 찾아온 것이오." 사람들 속에서 다시 소란이 일었다. 어떤 자들은 왕중양에게 빨리 대답하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또 어떤 자는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며 금군과 맞싸울 것을 다짐했다. 왕중양이 손을 흔들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난 확실히 그 맹세를 한적이 있다. 나에게 활사인이 되라고 하는 그 물음에 대답을 하겠다. 하지만 난 어떻게 활사인이 되는지를 모른다!" 히죽 웃으며 무심이 모용준을 쳐다보았다. "모용 공자님에게 훌륭한 생각이 있었지. 내게만 말하지 말고 어서 왕중양에게도 알려 주도록 하게나." 무심이 다시 왕중양에게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왕중양, 자네의 동생 모용준에게 좋은 생각이 있네. 그 생각이 곧 내 뜻이니 잘 새겨듣도록 하게나." 사람들은 이윽고 난쟁이 모용준이 걸어 나오는 것을 지켜 보았다. 사람들은 모용준이 난쟁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눈에 모용준이 난쟁이로 보이지가 않았다. 모용준이 보여 준 큰 위력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두들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겁먹고 있는 눈치였다. 모용준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고는 그가 예전에 보여 주었던 미소와는 다르게 냉기가 스며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왕중양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모두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을 주었다. "큰형님, 이 동생이 형님 때문에 인심을 제법 써 왔다는 것을 형님은 모를 것이오. 이번에도 형님을 위해 여러모로 궁리를 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소. 형님은 졌으니 순리대로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야 할 것이오. 금나라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는 말이오. 허나 그곳은 날씨가 몹시 춥고 땅이 거칠어서 고생이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이 동생의 마음도 즐겁지마는 않을 거요. 또한 형님이 지닌 무공은 다시 사라지고 무림의 일에는 두 번 다시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 동생은 원하지를 않아요. 한때는 형제간으로 지내던 우리가 이처럼 원수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모용준은 자신의 속셈이라도 털어놓듯 감정에 치우쳐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은 모용준의 간괴한 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모습에 역겨움을 느꼈다. "모용준, 도대체 어쩌겠다는 것이냐? 왕중양을 네 집으로 모셔다가 잘 공대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누군가 모용준을 비꼬았다. 모용준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더니 다시 왕중양을 쳐다보았다. "큰형님, 생각 끝에 나는 큰형님에게 이런 말씀을 드릴 것을 결정했소. 이 뒷산에 있는 굴을 활사인 묘로 정해……" 모용준의 말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사람들은 모두 모용준이 말한 뒷산으로 향했다. 이들은 종남산에 이런 굴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이곳에서 제법 오래 머물고 있었던 임조영마저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게 무심이 이곳에 굴을 하나 파놓은 것인데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굴 어귀에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안을 들여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모용준이 비웃음을 띤 채 말했다. "큰형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맹세를 해 보시오. 지킬 수 없는 맹세라면 아예 꺼내지도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왕중양은 무거운 한숨만 내될 따름이었다. "난 형님을 위해 몇 달 동안이나 명당자리를 찾아 헤매었소. 여러 곳을 둘러보았으나 그래도 종남산이 가장 명당이더군요. 게다가 하늘이 도왔는지 찾으려고 애를 썼던 고분도 하나 만났지 뭐요. 그 안에는 방들이 가득하고 웬만한 살림도구들도 갖추어져 있어요. 무심 공자님은 워낙 인심이 후한 분이라 형님을 위해 그 많은 물건들을 장만해 주신 것이오. 큰형님은 이곳에 들어가 다시는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만사대길일 것이오!" 이제야 모용준이 오래 전부터 꾸며 온 거미줄에 걸린 것을 알고는 사람들은 분노를 씹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전진교의 제자들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자기가 세운 중양궁도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모든 것이 지척에 있는 이 현실이 더욱 왕중양에게는 괴로움이었다. 이런 고통까지도 모용준은 계산에 넣었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치가 떨렸다. 무덤 속에 갇혀 버린 왕중양은 곧 미쳐서 죽고 말 게 분명했다. 모용준의 미소가 일순간 사라져 버린 것은 이때였다. 뜻밖에도 왕중양은 굴 안을 들여다보며 호탕하게 웃는 게 아닌가? "수고 많았네, 정말 고마워!" 왕중양이 치하를 하며 대뜸 굴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왕중양의 거동을 본 모용준은 망연해졌다. 왕중양의 말뜻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군은 망했고 임조영과도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고맙다니……. 왕중양은 무심에게도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이 안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면 군사들을 물리겠소?" 눈을 크게 뜨던 무심이 얼른 얼굴색을 고치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 여부가 있겠소. 헌데 그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하니 말이야. 한데 나는 오합지졸의 무리보다는 자네 한사람이 더 중요하지. 자네가 만일 이 굴 속에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내 그 약속은 지키겠네," 왕중양이 사람들과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자신이 그대로 강호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눈길도 더러 보았다. 특히 단지흥과 홍칠은 더더욱……. 왕중양은 문득 지금의 송나라를 되짚어 보았다. 절반밖에 남지 않는 강산은 뒷전이고 주색잡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황제와 신하들……. 이러한 판국에 왕중양 혼자서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들었다. 사람들 뒤에 서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한 여인 임조영. 왕중양은 고개를 옆으로 틀며 그녀를 찾았다. 왕중양 가슴에 가장 큰 미련으로 자리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지금껏 그 어떠한 마음을 전한 적도 없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 본 일도 없는 여인이지만 대협 왕중양의 가슴에 깊이 각인된 사람이었다. 자신을 향해 엎드려 있는 일곱 제자들을 둘러보던 왕중양은 그만 울컥 눈물을 쏟을 뻔했다. 모두 자신만을 믿고 충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아닌가. 마옥이 엎드린 채 침통한 목소리로 만류했다. "사부님, 그곳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전진교가 일어서려면 사부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내가 이곳에 들어간다 해도 전진교는 여전히 발전할 걸세.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전진교는 무너지는 거네. 전진교의 수제자라는 네가 이만한 이치도 분별하지 못한단 말이냐?" 짐짓 화를 내는 왕중양의 가슴은 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마옥은 왕중양의 옷자락을 거머쥐고는 놓지 않았다. 구처기와 유처현도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왕중양이 이들에게 조용히 당부의 말을 주었다. "마옥, 오늘부터 네가 교내의 대사들을 맡아서 처리하거라. 모든 일들은 내 뜻을 따르게 하여 교내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소림사의 방장(方丈)인 지심(智心) 법사가 왕중양에게 합장을 해 보였다. "왕 진인께서는 그야말로 지조가 높으시고 고귀한 분이로군요. '이 굴이 있으면 내가 곧 굴이요, 굴이 내 속에 있으면 굴이 아니다.'소승이 왕 진인께 이런 말씀을 선사하고 싶소만……. 왕 진인께서는 내가 한 이 말을 믿으시는지요?" 왕중양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이미 이 말속에 든 참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살을 해 버렸지 굴속에 들어가겠다고 자청을 했겠는가? 지심 법사를 향해 왕중양이 덤덤한 어조로 내뱉었다. "내가 굴속에 들어가면 굴이요, 네가 굴속에 들어가는 것과 한가지라네. 물이 있어야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한 가지가 이루어지네." "하하하핫!" 지심 법사가 크게 웃어젖혔다. 그리곤 마옥을 향해 이렇게 일렀다. "왕 진인께 축복을 드리게나. 굴속에 들어가도 편안하게 복을 받을 테니까." 지심 법사가 왕중양이 굴속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동천복지(洞天福地)에 들어가기라도 하듯 여기니 마옥은 도통 그 영문을 몰랐다. "자네들은 더는 비통해 하지 말게나. 왕 진인께서 굴속에 들어가시는 것을 붙잡아서는 안 돼." 지심 법사가 다시 여러 제자들에게 일침을 놓듯 힘주어 말했다. 왕중양은 다시금 고개를 들어 임조영을 찾았다. 그녀의 심정을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여러 사람들 틈에 묻혀 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왕중양이 천천히 굴속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사람들은 굴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며 끝없는 슬픔에 잠겼다. 지조와 덕성에 있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천하 협객의 운명이 이렇게 끝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왕중양이 굴안으로 들어간 지 며칠이 지났다. 강호의 호걸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굴 어귀에 지켜 서서 왕중양이 행여 굴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일곱제자들은 하루나 이틀 건너씩 굴속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그렇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이렇게 다시 여러 날이 흘렀다. 왕중양의 말대로 전진교는 오히려 흥성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왕중양이 굴속으로 들어간 소식을 듣고는 탄복하여 일부러 찾아와 전진교에 가담했다. 그리하여 전진교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모여들었고 강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고분 속에 들어간 왕중양은 우선 그 안을 살펴보았다. 모용준의 말은 또 한 번 거짓임이 드러났다. 그의 말처럼 무심이 사람들을 시켜 고분 안을 손본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이름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고분을 발견하고는 왕중양을 가둘 속셈으로 꾸민 말이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왕중양은 그중 하나를 침실로 정하고 다른 한 곳은 무공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았다. 다른 방들은 별로 쓸모가 없어 보였다. 제일 아래층에 가 보니 돌로 만든 석관 몇 개가 놓여져 있었는데 매우 견고하고도 거대한 것이었다. '이곳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군. 죽을 때 남들을 부르지 않아도 되겠어. 이 돌관속에 누우면 그만일 테니까……' 별로 할일이 없어진 그는 맡은 시간을 무공을 연마하는 일에 전념했다. 잠을 잘 때는 불현듯 원숭이가 떠올라 마음이 허전해지기도 했다. '원형, 꼭 다시 찾아가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사정이 이렇게 되었소. 내 마음만은 형을 그리고 있으니 너무 야속하게 생각 마오.' 한편 그는 이따금 찾아오는 마옥과 구처기 등에게 무예를 전수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일곱 제자들의 내공심법(內功心法)과 무공은 날로 늘어만 갔다. 어느 날, 왕중양이 무덤 안에서 한가로이 앉아 있는데 홀연 어디선가 사람의 외침이 들려 왔다. 굴 어귀까지 나가 본 왕중양은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준과 무심이 찾아왔던 것이다. 이들이 타고 온 듯싶은 가마도 그 뒤로 보였다. "형님, 나와 무심 공자는 함께 임안에 다녀왔소. 거기서 아주 재미있게 놀았지요. 임안의 사루라고 불리는 회모루, 유작루, 청고루 그리고 대백루는 정말 일품이었소!" 모용준이 침까지 튀기며 열을 올렸으나 왕중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제 할말이 없으면 난 그만 굴속으로 들어가겠네. 왕중양이 막 몸을 돌리려고 했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소. 그 회모루에 취아(翠兒)라고 부르는 계집이 하나 있었는데 자꾸만 형님의 이름을 부르더군요. 청루의 여인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있는 걸 보면 형님도 재미를 많이 보신 모양이군요?" 왕중양은 모용준이 취아라는 이름을 들먹이자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어느새 그의 표정의 변화를 읽은 모용준이 속으로 궁리했다. '왕중양은 대단한 인물이다. 그가 무공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 누구도 만만하게 보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은 무공이 더욱 견고해졌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 무심은 조심을 해야 한다.' 애당초 모용준과 무심은 왕중양을 협박하여 강호의 일에서 손을 떼게 만들 요량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자우를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자우의 역할은 이제 끝이 났다. 모용준은 그에게 후한 은자들을 주어 떠나게 했다. 또한 꿈이 이루어지면 꼭 대연제국의 중요한 소임을 맡게 해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모용준으로서도 더는 계략을 꾸밀 수가 없었다. 만일 더 심한 압력을 가한다면 그의 일곱 제자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왕중양을 이 굴안에 집어넣는 것에는 성공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 따져 보니 계산착오를 범한 게 분명했다. 오히려 왕중양에게 시간을 벌어 준 결과가 아닌가. 모용준은 얼른 다른 수작을 펼치려고 왕중양의 심중을 슬쩍 떠 보았다. "나와 무심 공자는 납한 태자님에게 찾아가서 형님의 행적들을 말씀드렸소. 태자님께서는 형님에 대해 매우 탄복하셨소. 그래서 꼭 형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겠소. 만일 형님도 만나 뵐 의향이 있으시다면 내가 그렇게 태자님께 여쭈어 드리리다." "이제는 이 굴속의 생활이 몸에 배어 낯선 사람은 만나기도 싫다." 왕중양이 단숨에 거절을 하자 모용준이 다른 사람을 들먹였다. "형님, 이 한사람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형님이 보시기만 하면 단번에 알아볼 것이오." 이들이 타고 온 가마 안에서 한사람이 걸어 나왔다. 여인이었는데 걸음걸이가 매우 이상했다. 여인을 보는 순간 왕중양은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바로 왕정아였던 것이다. 태호에 있을 때 잠깐 인연을 가졌던, 육욕에 눈이 멀어 사내의 품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을까? 왕중양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을 찾아왔다가 모용준에게 걸려든 것은 아닌지. 왕중양은 여러모로 추측을 해 보았다. 왕정아가 비틀거리며 왕중양이 있는 어귀까지 와서는 목을 놓아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이곳에 계시나요?" 오라버니라는 말에 왕중양의 가슴을 쓰라렸다. 불현 애틋한 정감이 이는 것 같아 그는 감동하고 말았다. 그저 육욕을 찾던 왕정아가 아닌 그의 회복을 위해 밤새 간호를 아끼지 않던 여인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왕중양의 회복을 애썼고 밤을 새우기도 했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왕정아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어렸다. "오라버니가 이곳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안 보이죠? 오라버니는 이름이 드높은 협객이 아니랍니다. 그런 오라버니는 이런 굴속에서는 살 수가 없어요. 혹시 나를 속이려는 게 아닌가요?" "속이긴 누가 속아!" 모용준이 자기 뒤쪽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침을 뱉듯 한 마디 던졌다. 드디어 왕정아가 어둠 속에 가려져 잠시 보이지 않던 왕중양을 발견했다. 오매불망 그리던 왕중양을 본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그동안 별고 없으셨나요?" 왕중양은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 서 있는 모용준이 신경에 거슬렸다. "어서 물러서지 못해욧!" 그녀 역시도 왕중양의 눈빛을 읽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쏘아붙였다. "난 힘들게 오라버니를 만났어요. 오라버니와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썩 물러나세요!" 왕정아의 얼굴은 몹시 초췌해 보였다. 그녀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전 그 사내를 버렸답니다. 오라버니가 떠난 뒤 이내 헤어지고 말았어요. 전 지금까지 홀로 지내면서 자나깨나 오라버니 생각만 했어요." 왕중양이 묵묵히 팔짱을 끼고 서 있자 그녀가 다시 애원을 하듯 매달렸다. "오라버니, 제가 왔으니 이제부터는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은…… 전 오랫동안 사내의 품을 떠나 있었어요. 너무 오랫동안……." 그녀는 그동안 참았던 온갖 애교와 교태를 한꺼번에 늘어놓을 심사였다. 왕중양의 머리 속에서는 낯설지 않은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왕정아가 보이는 행동은 모두 그 배 위에서 했던 말이나 몸짓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