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52편 (52/60)

2026-09-30 18:52:09 조회 22
"네 이 놈! 불쌍히 여겨 살려 두었더니 끝까지 골칫거리로 나서는구나!" "잔소리 말고 어서 난쟁이 독종과 거렁뱅이 중 누가 센지 겨뤄 보자꾸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맨손이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들은 계곡을 넘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경공을 써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모용준의 뒤에는 또 한 사내가 버티고 있었는데 얼굴이 삿갓에 가려져 있었다.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를 대뜸 알아 본 사람은 왕중양이었다. 삿갓을 쓰고 나타난 사내는 무심이었다. 무심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두 사람이 뒤따랐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무심의 뒤로 귀낭자와 창바의 모습이 드러났다. 뒤에 서 있는 창바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산맥을 뒤흔들었다. "왕중양 이 놈아! 우리 사부님께서 허락을 하셨다. 네 놈과 함께 술을 한 번만 마시라고 말이다!" 덩치에 걸맞게 상황 판단에 어두운 창바였다. 느닷없이 술타령을 늘어놓는 그를 외면한 왕중양은 무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종남산에 나타난 무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하는 눈빛이었다. "축하합니다!" 무심이 불쑥 이렇게 말을 꺼내더니 왕중양의 눈치를 살폈다. 왕중양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너스레를 떨어댔다. "왕중양님께서는 금나라와 맞서 싸웠지만 금나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지를 않는다더군요. 또 들리는 말로는 금나라의 납한(納罕) 태자가 그대의 전진교를 모두 금나라의 관할 밑에 두고자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어이가 없는 왕중양이 쓴웃음을 흘렸다. "달갑지 않은 소리군." "그 말을 거역했다가는 후일을 기약할 수 없을 텐데요? 오늘은 이처럼 거대한 창립을 이루었지만 내일은 강호에 전진교는 사라질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 얼마나 비참한 노릇이겠소? 하하하!" '이들의 행동거지를 보니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로구나. 모용준과 사자우를 앞세워 온 것만을 봐도 알겠다. 이젠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마음을 다진 왕중양이 무심을 쏘아보았다. "좋네, 오늘 내가 지면 난 약속한 대로 고분 속에 들어가 활사인 노릇을 하겠네. 허나 무심 공자가 진다면 어찌하겠는가?" 코웃음조차 치기 아까운 듯 무심이 빈정댔다. "그대와 분부를 따르겠소." "그럼 다시는 종남산 근처에는 걸음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나." 무심이 손뼉을 딱 쳤다. "좋아! 장부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으니……." 드디어 이들은 두 무리로 갈라졌다. 왕중양과 여러 호걸들의 마음가짐은 색달랐다. 금나라의 원한이 남아 있는 터라 오늘 무심을 기필코 꺾어야만 했다. 금나라의 뜻을 받들고 전진교를 해산시키려고 온 무심을 향해 살기의 눈빛들이 쏟아졌다. 이들은 5전 1승으로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무심 쪽에서 먼저 나선 자는 유명한 건달꾼이었다. 그는 우쭐거리며 왕중양에게 욕설부터 던졌다. "이 놈아, 네 놈이 무엇을 믿고 무심 공자님을 넘보는 게냐?" 이자로 말할 것 같으면 강남 땅에서 악명이 자자한 건달꾼 진옥(素玉)이었다. 악독한 짓거리를 골라 하는 이자에게 호감을 갖고 손을 뻗친 것은 무심이었다. 무심은 이자를 자기 문하에 넣어 오늘을 기다렸던 것이다. "네 놈이 대관절 무슨 재간이 있기에 그리도 날뛰는 게냐?" 왕중양 쪽에서도 한 사내가 나섰는데 바로 구처기였다. 그는 전진교 제자들 중 무공이 제일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성미마저 불 같아 진옥이 왕중양을 헐뜯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구처기는 곧장 검을 꼬나든 채 진옥을 향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쫓아갔다. 진옥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구처기의 검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그의 검은 구혼색(句魂索)이라는 무서운 병장기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이 구혼색이라는 검은 곧게 펴지기도 하고 때론 갈고리처럼 끝이 휘어지기도 했다. 이 검에 걸리기만 하면 상대의 병장기는 힘없이 손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진옥은 이 같은 구혼색의 위력을 주시하면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공공탈봉(共工奪蜂)'이라는 초수로 맞섰다. 진옥의 초수도 만만치가 않아 구처기는 쉽게 그의 장검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구처기가 아니었다. 그는 옆걸음질을 치며 기회를 노렸다. 진옥이 막장검을 들고 한 발 앞으로 전진하려고 할 때였다. 구처기가 진옥의 가슴을 검으로 연거푸 내질렀다. 흡 하고 놀란 진옥이 꽁무니를 사리고 달아났다. 갑자기 왕중양이 구처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왕중양을 돌아보던 구처기가 순간 몸을 웅크렸다. 도망을 치는 듯싶던 진옥의 몸에서 일순 몇십 개의 암기(暗器)들이 쏟아졌다. 이 암기들은 일제히 구처기에게로 뿌려졌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구처기는 천천히 선회하면서 암기들이 지나가 주기를 기다렸다. 다시 땅으로 내려온 구처기가 검을 움켜쥐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진옥이 웃어댔다. "하하하, 구처기 이 놈아! 넌 내 암기에 맞았다!" "허튼수작 말아라!" 모두들 진옥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왕중양과 홍칠만이 구처기를 근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구처기의 등짝에 호접표(蝴蝶票) 한 매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 귀낭자가 실록실록 가는 허리를 뽐내며 왕중양에게 말을 건넸다. "왕중양을 저승길까지 바래다줄 사람이 없나요? 그럼 제가 나서지요." 순간 왕중양은 마옥을 건너다보았다. 아무리 견주어 보아도 그가 귀낭자를 당해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응수를 하지 못하면 전진교의 위풍은 땅에 떨어질 게 분명했다. 마옥도 어두워지는 왕중양의 낯빛을 슬쩍 확인하고는 자신 있게 말했다. "사부님, 마음을 놓으십시오." 그는 느린 걸음으로 귀낭자 앞으로 걸어갔다. 이를 본 귀낭자의 입에서 냉소가 흘렀다. "마 서방님, 듣자하니 마 서방님의 아내가 참으로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만일 마 서방님께서 침대 위에서 계집을 다루는 솜씨가 괜찮다면야 왜 도사 노릇을 자청했겠어요? 제가 손불이와 함께 서방님을 모실랍니다. 사내하고 어떻게 살을 섞어야 하는지 내가 손불이에게 단단히 교육시켜 드리지요. 왕중양 같은 얼간이를 사부로 모시지 말고 두 부부가 나를 사부로 받들기만 하면 부귀영화는 보장될 것인데……" 귀낭자가 나불거리는 수작을 듣고 있던 마옥이 읍을 했다. "그럼 가르침을 달갑게 받겠소이다!" 자기의 계산과는 다르게 나오는 마옥을 보자 귀낭자는 내심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바탕 약을 올려 흔들리는 마옥을 칠려고 했었는데 예상과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귀서생(五鬼書生)의 아내였다. 그래서 그녀가 쓰는 병기에도 '귀동귀서(鬼東鬼西)'라는 괴상한 이름이 따라다녔다. 야릇한 미소를 보인 귀낭자가 다시금 마옥을 향해 입에 담기에 낯뜨거운 음담패설까지 퍼부으며 모욕감을 주려 했다. 그러나 마옥은 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마옥의 이마 위로 차가운 물체가 닿았다. 불현 하늘에서 가느다란 보슬비가 잔잔히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단비와도 같았고 목을 적실 수 있는 샘물처럼 달콤하기도 했다. 보슬비는 마옥의 눈에 더 없이 현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귀낭자의 그 유명한 귀동귀서의 효력이었다. 문득 눈앞에 서 있는 그녀가 꽃처럼 탐스럽고 어여쁘게 보인 것도 이 순간부터였다. 마옥은 눈앞에 씌워진 헛겁을 떨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귀낭자의 귀동귀서를 본 사람은 그리 많 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무릇 보고 난 사람은 거의 죽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옥은 순간 번쩍이는 섬광을 보았다. 그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며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마옥이 귀낭자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는 회오리바람이 이는 곳에서 붉은 점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깨부수겠다고 돌진한 것이다. 마옥의 눈에는 그 붉은 점이 귀낭자로 보였다. 사람들은 마옥이 왜 갑자기 해괴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귀낭자가 있는 쪽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마옥이 빨려 들어가고 있으니 모두들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 붉은 점의 정체는 귀동귀서가 만들어 낸 핏빛의 안개에 불과했다. 불길한 조짐을 감지해 낸 왕중양이 손을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실성한 사람의 울음 소리가 들리며 한 사내가 끼여들었다. 그는 귀낭자가 쳐놓은 마수의 그물에서 마옥을 위기일발로 끌어냈다. 마옥은 이미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도 풀려 있는 뒤였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의 운명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옥은 홍칠의 무릎 위에 축 늘어진 채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를 구해 준 사람은 바로 홍칠이었다. 사자우와 싸우던 홍칠이 이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수상한 기미를 눈치채고는 달려든 것이다. "왕중양, 이번에는 자네가 졌네!" 무심이 자만심에 빠진 말을 툭 왕중양 앞에게 던졌다. "그럼 다음 판을 보기로 하세!" 왕중양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남편을 죽이려고 한 무리들에 대한 보복으로 손불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탄력이 배어 있어 보기에도 시원했다. "그따위 귀신 놀음으로 우쭐대지 마라!" 귀낭자를 향해 한껏 비웃자 그녀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고, 난 또 누구신가 했지. 마 서방님의 부인이시구만요. 방금 알아보니 그집 서방님은 나와 한 침대에 올라 재미를 보는 걸 그닥 좋아하시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내 미련 없이 돌려보내 드렸지요. 서방님이 도사 노릇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가만 내버려두는 수밖에. 하지만 그대는 부득불 남편이 하는 대로 할 필요야 없잖아요? 전진교라? 계집과 사내가 한 봉당에서 뒹구는 게 무슨 전진교야. 전진교라기보다는 음굴구동(淫齋拘洞)이라고 하는 게 낫잖아요?" 귀낭자의 모욕적인 언동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학대통이 뛰쳐나왔다. 그런데 학대통을 가로막는 사내가 있었다.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그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명성과는 달리 병장기만 휘두르며 학대통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병장기는 무정자(無情剌)라는 것이었는데 창으로도 변할 수 있고 칼과 몽둥이로도 쓸 수 있는 거였다. 학대통은 일곱 제자들 중에서 무예가 결코 뒤지지 않는 편이었다. 마옥과 구처기 그리고 왕처일 다음으로 알아 준다는 실력파였다. 그는 검을 들고 지청과 맞섰다. "야압!" 검과 무정자가 굉음을 내며 공중에서 힘을 겨루었다. 그런데 무정자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옆으로 새로운 가지 하나를 세웠다. 그 가지가 곧추 학대통을 향해 날카로운 각을 꺾었다. 학대통이 뒤늦게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살을 파고들었다. 뼈를 들쑤시는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허리를 숙인 학대통이 반대로 몸을 돌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욱!" 그 주먹이 보기 좋게 지청의 면상에 떨어졌다. 치명적이지는 못했지만 지청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고 말았다. 홍칠이 소리쳤다. "이번은 비겼소이다!" 두 사내는 투덜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왕중양 쪽에서 다음 차례로 나온 것은 왕처일이었다. 두 다리를 어깨보다 넓게 벌린 채 버티고 선 그는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왕처일의 상대로 나선 것은 모용준이었다. 모용준이 거만하게 씨부렁댔다. "난 원래 큰형님과 겨뤄 보려고 했었네, 하지만 난 큰형님의 상대가 안되지. 그래서 만만한 왕처일과 대결하려는 게요." 왕처일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 사부님께서 네 놈을 박하게 대해 준 적이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배은망덕하게 구는 거냐? 악독한 짓거리만 골라 해놓고도 천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이냐?" 왕처일이 근엄하게 꾸짖자 모용준이 낄낄 웃어댔다. "헛헛헛, 네 놈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이냐? 모두 사부를 닮아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자기 사부를 욕하는 언동을 참아낼 위인은 없으리라. 피를 토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왕처일이 검으로 모용준을 찔렀다. 재주넘기로 훌쩍 물러선 모용준이 계속 떠벌렸다. "네가 왕중양의 제자라? 그럼 난 너의 사숙이 되는 셈이로군. 네 사부가 아직 일러주지 않은 모양인데 그럼 내가 버릇을 고쳐 놓아야겠구나!" 말을 마친 모용준이 손을 높이 들었다. 그의 소맷자락 속에는 단검이 감춰져 있었는데 그것을 쓸 생각이었다. 소맷자락 속에서 단검을 뽑아 낸 그가 왕처일을 향해 그어댔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왕처일이 급히 몸을 사렸다. "사숙님이 가르치는 걸 무서워 말라구." 모용준이 다시 지껄이며 단검을 이쪽저쪽 소맷자락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잔재주를 부렸다. '따지고 보면 오늘을 기약하기 위해 저 모용준이 나와 의형제를 맺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내가 저 자와 의형제를 맺은 이유는 모두 임조영과 가까워지려는 마음에서였는데…….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 놈에게 우롱당하게 된 꼴이니 한심하구나! ' 왕중양은 속으로 뒤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모용준은 더욱 사나운 기세로 왕처일을 몰아붙였다. 그가 소맷자락을 휘젓기만 하면 단검이 화살처럼 솟아 나와 왕처일의 눈앞에서 독사처럼 변했다. "그 재간으로 어찌 전진교의 제자라고 하겠느냐?" 한껏 비웃던 모용준이 회심의 일격을 왕처일의 가슴에 꽂았다. 왕처일은 모용준의 장을 얻어맞고는 뒤로 멀리 밀려 나갔다. 왕처일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다. 모용준이 왕중양을 보고 읍을 하며 이죽거렸다. "큰형님, 제자들을 엉터리로 가르쳤군요. 저 놈들에게는 뛰는 놈 위에 반드시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할 겁니다." 왕중양을 향해 던지는 도전적인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구처기와 유처현이 대노하여 모용준 앞으로 나왔다. "자네들이 졌어! 지고도 인정을 하지 않는다면 전진교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이렇게 그들의 나섬을 한마디로 제지한 것은 무심이었다. 드디어 왕중양이 일어섰다. "좋다. 내가 자네와 한판 겨루어 보겠네. 우리 전진교가 종남산에서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어디 시험해 보겠네." 무심은 왕중양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전진교가 살아 남을 거라 믿는가? 중원의 무림이 우리 금나라에 투항하지 않으면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자네가 우리 전진교를 없앤다고 쉽게 그렇게 될 줄 아나?" 무심이 무림 호걸들을 둘러보며 거들먹거렸다. "자네들이 무림에서 좀 행세하고 살려면 금에 투항해야만 해!" 이 소리에 모두 대노하여 들고 일어설 태세였다. 무심이 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왕중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먼저 손을 쓰시지." 일제히 사람들의 눈길이 왕중양에게로 쏠렸다. 왕중양이 천천히 손을 내밀더니 손가락 끝으로 무심을 겨누었다. 그러자 무심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내가 자네와 맞선다는 건 우리 금나라 주인의 신분을 욕되게 하는 거네. 그래도 사자우 선생과 자네가 맞붙는 게 낫지." 사자우가 슬슬 걸어 나왔다. 그가 병장기를 왕중양에게 뻗으며 싸움을 걸어 왔다. "왕중양, 넌 조만간 내 손에 황천객이 될 것이다. 전번에 내가 널 벼랑에서 떨어뜨렸는데 용케 살아났지만 이번엔 어림없다!" 사자우가 몸을 한차례 꿈틀대자 곧 병장기가 왕중양에게로 길게 뻗쳤다. 막 몸을 쓰려던 왕중양은 먼곳에서 움직이는 한 물체를 발견했다. 임조영이었다. 임조영이 와 주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그녀, 아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 그녀가 와 주다니…… 제32장 활사인 묘로 들어간 왕중양 왕중양과 사자우의 맞대결에서 누가 승자로 남을 것인가? 사자우는 오래 전부터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왕중양을 기필코 꺾어 보고 싶었다. 비록 왕중양이 무림의 맹주 자리에 다시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 명성은 매우 드높았기 때문이었다. 사자우의 병장기가 획획 바람을 가르며 왕중양에게로 내리꽂혔다. 그는 왕중양의 명문대혈(命門大穴)을 겨눈 채 조금도 숨돌릴 겨를을 주지 않았다. 그의 공격은 더욱 위력이 붙어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이를 지켜 보는 단지흥과 홍칠의 손바닥에 땀이 흠뻑 배였다. 왕중양이 차츰 불리하게 전개돼 갔다. 왕중양의 검은 처음엔 흐르는 물과 구름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사자우가 거세게 날뛰자 서서히 흐름을 잃어 갔다. "왕 형, 검에 좀더 힘을 주시오!" 단지흥이 안타깝다는 듯 소리를 지르자 홍칠도 거들었다. "저 난쟁이의 공격이 빨라지면 왕 공자의 검은 느려야 하고, 공격이 뜸해지면 검은 빨라져야 하지요." "아니오, 공격에 따라 검도 그 속도를 맞춰 가야 하오." 단지흥이 홍칠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홍칠은 단지흥을 슬쩍 돌아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허허허, 폐하께서 잘못 보셨소이다. 공격이 빠르면 검은 느려져야 하지요." 두 사람이 논쟁을 하니 옆에 있던 사대시위 중 주자류(朱子柳)라는 선비가 느끼는 바가 있어 의미 있는 눈빛을 지었다. 그는 네 사람의 시위 가운데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두사람이 나누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중양과 사자우가 한창 어우러져 불꽃을 튀기는데 갑자기 모용준이 끼여들었다. "셋째 동생, 그저 보고만 있지 말고 우리 둘도 한판 불어 보지 않겠나?" 그는 임조영을 향해 싸움을 걸어 왔다. "후회만 하지 않는다면!" 임조영이 쏘아 붙이자 모용준이 음흉스럽게 웃었다. "난 오늘 왕중양과 결판을 내야겠지만 셋째와도 그렇게 할 생각이다. 오늘부터 동생은 내 마누라가 될 준비나 하라구." 순식간에 모용준의 사대 가신들이 임조영에게 덮쳐 들었다. 이들은 임조영을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모용준이 아무리 회유를 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아예 없애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 중 주정과 목우는 임조영의 실력을 잘 알았다. 그래서 선뜻 달려들지 못하고 기회만 엿보았다. 반면에 임조영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지청과 허불잉은 단번에 제압하겠다고 날뛰었다. 그러나 임조영이 부리는 검날에 주춤 걸음을 세운 이들은 등줄기를 뒤흔드는 두려움에 잠시 몸을 떨었다. 지청은 갑자기 자신의 정수리가 싸늘해짐을 느꼈다. 임조영의 검이 그의 정수리에 있는 살가죽을 쓰윽 베어 버린 것이다. 처음엔 통증이 없어 몰랐으나 바람결이 벗겨진 살가죽 에 닿자 뼈를 가는 아픔이 엄습해 왔다. "으……." 지청이 이를 악물며 아픔을 참아냈다. 뒤에 있던 허불잉이 앞으로 나가며 장을 내갈겼다. 그런데 손을 내뻗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눈을 떠보니 어느 틈엔가 팔뚝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잘려 나간 팔에서 피가 샘솟듯 했다. "사, 사람 살려!" 허불잉은 자기 팔을 잡지도 못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악에 받친 허불잉은 몸을 돌리더니 남은 손으로 임조영의 젖가슴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임조영의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지청이 곧바로 칼을 보나들고 앞으로 나왔다. 임조영이 싸늘한 눈빛을 내쏘며 검으로 그의 칼을 내리쳤다. 뒤로 훌쩍 물러선 지청 때문에 쓰러졌던 허불잉은 임조영의 검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임조영은 놈들이 도망치려는 것을 알고는 몸을 날려 옥녀심경에 있는 '심냉신담(心冷神淡) '이라는 검법으로 주정을 힘껏 찔렀다. "아악!" 검에 찔린 주정도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너무 우쭐대지 마라!" 모용준이 임조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편 왕중양과 사자우는 벌써 백여 합을 넘게 싸웠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서로는 질긴 싸움에 서서히 상대에게 두려움을 품었다. 왕중양이 속으로 뇌까렸다. '과연 난쟁이들은 기인이야. 무공 역시 예측하기가 어려워……' 사자우는 원래 왕중양이란 인물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그도 적이 놀라고 있었다. 단지흥이나 홍칠보다도 세련된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쉽게 그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서로에게 두려움을 품은 두 사람의 동작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쾅!" 이때 난데없이 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뒤를 이어 종남산 기슭으로부터 고함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중원 무림의 역도들아! 도망칠 생각일랑 말아라!"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하여 허둥대기 시작했다. 무심이 앞으로 뛰어나와 호걸들에게 호통을 쳤다. "들었느냐? 산 아래는 이미 대군들이 물샐틈없이 너희들을 에워싸고 있다. 금나라에 투항하려는 자는 목숨을 살려 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모두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궁 앞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욕설을 퍼붓는 자가 있는가 하면 슬그머니 줄행랑을 치려는 이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멀리 달아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미 금군이 새카맣게 몰려들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돼 버렸다. 사자우가 싸움을 멈추며 왕중양에게 독기 어린 소리를 질렀다. "후에 다시 겨루기로 하자!" 호걸들은 후퇴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들처럼 계속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산기슭에서 울려 오던 말발굽 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고 금군의 외침 소리도 더욱 어지럽게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