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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50편 (50/60)

2026-09-30 18:52:09 조회 22
"전 그동안 유명한 강호객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중 사자우의 온몸에서는 죄악스러운 여기(戾氣)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홍칠공에게서는 게으른 뇌의 (瀨意)가 흐르고 있었죠. 황약사는 오기(傲氣)가 흘러 넘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왕형의 온몸에는 조용한 정기(靜氣)가 스며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의 사람들이 지닌 어떠한 기보다 월등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큰일을 앞두고 정기가 있으면 늠름한 풍도를 갖출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왕중양은 단지흥에게서 깊은 성품을 읽을 수가 있었다. 단지흥이 다시 왕중양을 생각하는 말을 꺼냈다. "왕 형, 이 보배산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도록 해주십시오." "하하하, 원래 비었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오. 비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비었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단지홍도 크게 웃었다. "허허헛! 공(空)이 바로 불공(不空)이고 불공이 바로 공이라!" 말을 마친 단지흥이 손가락을 쳐들더니 왕중양을 향해 내질렀다. 이 지법(指法)은 기묘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불지점화(佛指拈花)인가 하면 그게 아니고 남인교직(南人巧織)인가 하면 역시 그도 아니었다. 팍!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손가락이 왕중양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흠칫 놀란 왕중양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단지흥의 손가락은 왕중양의 어느 곳도 다치게 하지를 않았다. 왕중양은 그 사실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완벽하게 힘을 주었는데도 손가락 끝으로 방 향과 힘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의 위력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왕중양이 새삼 읍을 하며 말을 계속했다. "일양지가천하에서 독보한다고 하지만 나의 선천신공을 이길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거요. 아니 그 우열은 아무도 말할 수가 없겠지요." 왕중양이 북두칠성이 그려진 것처럼 그 모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합을 넣어 양손을 앞으로 벌리더니 단지흥을 향해 뻗었다. 곧 돌풍에 버금가는 장이 왕중양의 손에서 뿜어졌다. 단지흥이 감탄을 했다. "과연 대단하군요!" 다시 단지흥이 손가락 하나를 펴 왕중양의 손바닥에 있는 합곡 (合谷)을 찔렀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보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10여 합이나 싸웠는데도 승부는 나지 않았다. 왕중양의 무공은 일사천리로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거침이 없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는 영양이 벼랑에 뿔을 걸고 숨어서 자듯이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흥의 무공 역시 하늘을 찌를 듯했다. 특히 그의 일양지는 바람결에 하느적거리는 버들가지처럼 자연스럽고 유연했지만 때론 절도 있고 빠른 속도가 숨겨져 있기도 했다. 물 속에서 빠르게 헤엄치는 뱀처럼 날쌘 동작이었다. "잠깐 손을 멈춥시다!" 싸움을 중단시킨 것은 단지흥이었다. "왕 형, 제가 뭇호걸들과 무공을 겨를 때는 이렇게 감복한 적이 없습니다. 왕형의 선천신공은 확실히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공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리에는 또 하나의 기이한 무공이 있습니다. 혹 '육맥신검(六脈神劍)'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전에 우리 문중에서 이 검법을 한 몸에 모아 익힌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 단씨의 조상인 단예(段譽)라는 분은 보기에는 아주 우둔한 것 같지만 실은 바람결보다 빠른 분이었죠. 바로 이 분이 육맥신검의 검도(劍道)를 몸 과 마음으로 깨닫고 터득했었습니다. 제가 오늘 우리 단씨의 육맥신검을 가지고 왕형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니 부디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왕중양도 들은 적은 있지만 한 번도 직접 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단지흥이 직접 그 검법을 쓰겠다니 왕중양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리의 육맥신검을 당해 낸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무공을 알리는 것일 텐데……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 이렇게 자신을 추스린 왕중양이 기꺼이 응수했다. "임금의 영(令)을 욕되지 않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단지흥의 몸가짐과 그 동작은 사뭇 달랐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든 감각기관들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듯했다. 그가 서서히 왕중양을 향해 손가락들을 펴 내밀었다. 단지흥의 손가락들은 하나의 검이었다. 처음에는 소충(少沖), 중충(中沖), 소택(少澤)을 차례로 썼다. 그리고 나중에는 육맥신검을 동시에 쓰기도 했다. 그는 손가락들로 날카로운 빛을 뿌리며 검날처럼 사용했다. 왕중양은 당황하고 말았다. 실로 단지흥의 무공은 대단했다. "검을 받으시오!" 단지흥이 소리치며 검기를 쏘자 왕중양도 맞받아 장을 날리려 했다. 그 순간 왕중양은 무학지도(武學之道)는 마음에 달렸다는 말을 상기하며 자신의 손에서 검기(劍氣)를 발했다. 그는 단지흥의 손가락들이 검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손가락 역시 하나의 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푹―하는 소리와 함께 왕중양의 손이 단지흥의 검기를 막아냈다. 흥이 오른 단지흥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호, 정말 훌륭한 솜씨로군!" 단지흥의 검기는 다섯 손가락 끝으로부터 각각 뿜어져 나왔다. 소택도 약하지 않았고 중충도 강하지 않아 검기가 합일하는 바람에 어느 것이 어느 맥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중양이 그동안 익혀 온 무공에 비할 수는 없었다. 서서히 왕중양은 《구음진경》안에 있는 이런 구절을 떠올렸다. 〈기가 허함은 허기(虛氣)라 부른다. 하지만 실(實)에 힘을 쓰면 허기가 사라진다. 허 (虛)는 바로 실 (實)이고 실 (實)은 곧 허 (虛)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고무상한 법이다!〉 이 구절의 참뜻을 터득해 낸 왕중양은 기뻤다. 단지흥의 검이 얼마나 기묘하든지 간에 오직 자신의 일변(一變)으로 그의 만변(萬變)에 대처하기로 했다. 왕중양이 하나의 기를 집중시켜 단지흥에게로 뿜었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검기가 교차하고 때론 사방으로 튀었다. 두 사람은 서로 거리를 두고는 멀리 떨어졌다. 왕중양이 먼저 웃자 단지홍도 따라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통쾌한 웃음을 웃고 난 두 사람은 다시 무릎을 맞대고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예로부터 지기(知己)는 만나기 어렵다고들 했다. 두 사람의 무공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지만 마음만은 서로 통했다. 단지흥은 속으로 왕중양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난 원래 남을 대단하게 보지 않는다. 그러나 왕중양만은 내가 존경해도 될 만한 인물이다.' 왕중양 역시 단지흥에 대한 속마음이 남달랐다. '원래 궁 안이나 관청에는 모두 천치 바보들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처럼 높은 인품을 지닌 사람도 있었다니, 과연 천하에서 손꼽아 줄 만한 인물이로다!' 서로에게서 받은 감격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중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후에 왕중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히려 제가 가르침을 받아야겠습니다." 단지흥이 흐뭇한 표정을 왕중양에게 주었다. "제가 보기에 왕 형은 두 가지 점에서 세속에 빠지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너무도 정에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람이 너무 정에 집착하다 보면 끝없는 번뇌의 심연에 들게 되는 법이지요. 그러니 왕 형은 될수록 정이란 심연에 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정에 집착을 한다구?' 왕중양은 잠시 자신을 집요하게 지배하고 있는 기억들을 더듬었다. 그러다 불현 눈앞으로 떠오른 얼굴이 하나 있었는데 뜻밖이었다. 바로 자신을 유혹하려고 애를 썼던 왕정아(王亭兒)였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왕중양의 이런 태도를 단지흥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왕중양이 정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마음고생을 더 해야겠다는 충고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의 일들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왕 형은 부귀를 누릴 팔자도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무공이나 닦으며 살지 그러십니까? 왕 형은 필시 《구음진경》의 힘을 얻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왕중양을 확인한 그가 말을 이었다. "왕형의 사부님이신 황상이란 분이 일심으로 그 경서를 만들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해도 그 경서에는 그분의 일생의 심혈이 스며 있을 겁니다. 그러한 공덕을 계승하도록 왕 형을 선택한 것은 하늘이 굽어본 것일 겁니다. 왕 형께서는 반갑지 않습니까? 동굴 속에서 다진 맹세는 다 거짓이었다는 말인가요?" "전 분명 동굴 속 사부님의 영령 앞에서 맹세를 하였습니다. 도가전진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이미 입 밖에 낸 것이니 주워담을 수야 없지요. 하지만 제게는 아직도 시름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강산은 금나라 오랑캐에게 짓밟히고 있는데 이렇게 숨어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야 어쩔 수가 없소이다. 지금 금나라는 한창세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허나 왕 형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왕 형에게 도가전진이 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힘을 더 길러 출병하는 것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왕중양이 엎드려 단지흥에게 절을 올렸다. "길을 잃고 헤매는 저에게 광명을 내려 주어 감사합니다." 왕중양은 부패해 가기만 하는 송나라를 부흥시키고 금나라 오랑캐를 중원 땅에서 몰아내는 것에 목숨을 바치기로 했다. 강호가 일시에 혼란에 빠져 다시 호걸들을 모아 출병한다는 것은 단지흥의 말대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일단 도가의 여러 파들을 단합하여 힘을 기르는 게 급선무였다. 이때 두 사람 사이로 불쑥 탄식 소리가 끼여들었다. 여인의 것이 분명했다. 왕중양의 가슴은 일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누군데 한숨을 짓는 거요?" 단지홍도 여인의 탄식임을 알아차리고는 소리를 질렀다. 교교한 달빛 아래에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십대 후반 안팎의 여인은 원숙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는데 선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 여인이 나타나자 왕중양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본 단지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분이 계시는 줄도 모르고 이 단지흥이 실례를 범했군요." 단지흥이 겸연쩍은 얼굴로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왕중양이 여인을 소개했다. 소개가 끝나자마자 임조영이 바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종남산은 워낙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어요. 그런데 한밤중에 나타나 허튼 소리만 일삼는 사람이 있으니 귀찮아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당신은 도가전진을 좋아한다는데 왜 집을 떠나 도사님이 되지 않으셨지요? 듣자하니 대리국엔 천룡사란 절이 있고, 당신네 단씨의 여러 황제 님들이 머리를 깎고 그 절에 들어가 중 노릇을 하였다는데 대관절 몇 분이나 되지요?" 단지흥은 임조영의 송곳 같은 말에 개의치 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협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요. 대리 단씨 문중에는 이 단지흥에 이르기까지 이미 다섯 분이나 되는 제왕님들이 출가를 하여 그 절에서 수도를 하였습니다." "중 노릇을 하는 일에 인이 박인 집안이로군요? 그래서 남에게도 출가를 하여 도사가 되라고 권유하고 다니시는 건가요? 당신은 절밥을 몇 년이나 드셨나요?" 적이 불쾌해진 단지흥은 보이지도 않는 먼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여인이 왜 버릇없이 구는지 그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혹시 옆에 있는 왕중양과 어떤 관계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조영은 왕중양에 대해 아직도 깊은 정을 갖고 있으며 홀로 지내다 보니 은근히 화가 나서 그러는 것일 게다. 단지흥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왜 왕중양에게 권유한 것이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했을까. 단지흥이 슬쩍 왕중양의 기색을 훔쳐보았다. 왕중양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이들 남녀간에는 풀지 못할 문젯거리가 있는 게로구나.' 단지흥은 짐짓 내심을 감추며 임조영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방금 전에 왕 형과 고금의 옛 야기들을 논하다가 서로 의기가 투합되니 말이 많아진 것 같소. 여협을 귀찮게 해 드렸다면 부디 용서를 하시오." 임조영은 그러나 그의 말에 더욱 심기가 뒤틀렸다. '네가 나를 아주 바보로 알고 있구나.' 임조영이 슬슬 단지흥의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소문에 의하면 대리국 단씨들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보고 싶어도 가볼 짬이 없었는데 오늘 참으로 좋은 기회가 온 것 같네요." 단지흥은 만동(蠻洞)에서 영고와 만났고 또 그녀 때문에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인들과는 처음부터 적수를 운운해 본 기억이 없는 그였다. 여인이 무공을 얼마나 부리겠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임조영이 단지흥에게 매서운 눈길을 꽂으며 중얼거렸다. '네 놈이 먼저 손만 써 보아라. 너의 신분이 어떻든 단단히 혼을 내줄 것이다.' 단지흥이 먼저 일어섰다. 그는 임조영이 어떤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녀가 모용준의 산장에 갇혀 있을 때 옥녀심경의 검법을 배웠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것을 익힌 임조영은 차가운 가슴을 갖게 되었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게 되었다. "내 검을 받아랏!" 임조영이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뻗었다. 섬광이 번뜩였다. 단지흥은 가볍게 손가락으로 임조영의 틈을 노려 몇 번 공격을 했다. 그러면서 임조영의 검끝을 부드러운 동작으로 피했다. 임조영은 검을 자기 코앞으로 치켜 들고는 단지흥을 노려보았다.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그녀의 보법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묻어 났다. 그녀는 거의 허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있어 단지흥은 몹시 당황했다. 처음엔 어느 정도인가 슬쩍 그녀의 솜씨를 떠볼 요량이었지만 사태가 심각하게 된 것이다. 임조영의 검이 번개같이 날아들었다. 이를 지켜 보고 있는 왕중양은 애가 탔다. 임조영의 태도를 보아 쉽게 물러설 것 같지가 않았다. 누구 한사람이라도 피를 봐야 싸움이 끝날 것 같았다. 이윽고 싸움은 살기마저 감돌았다. 단지흥이 서서히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흥이 임조영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을 곧추세웠다. 두 사람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얏!" 임조영의 기합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녀의 검이 단지흥의 옷자락을 찢었다. 땅으로 내린 단지흥이 그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임조영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 들었다. 단지흥이 겨우 그녀의 검을 피하며 손가락을 내뻗었다. 육맥신검이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왕중양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단지흥이 공격을 멈추더니 제자리에 목석처럼 서 버렸다. 임조영이 다시 검을 앞으로 내밀며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야앗!"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임조영의 검에 앞가슴을 베인 단지흥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죽었는지 단지흥은 다시 일어서지를 못했다. 왕중양의 얼굴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단지흥이 이토록 쉽게 쓰러지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임조영보다 못한 무공이 아니었기에 왕중양이 받은 충격은 컸다. 놀란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앞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단지흥을 보며 그녀는 손을 떨었다. "정말로 검을 쓰다니!" 왕중양이 임조영을 향해 처음으로 꾸짖었다. 임조영의 가슴엔 그것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래요. 당신과 저분은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죠." 임조영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왕중양이 당황하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훌쩍 몸을 날려 어디론가 가 버렸다. 왕중양이 달려갔을 때 단지흥의 앞가슴은 이미 선혈로 낭자했다. 왕중양이 옷자락을 찢어 단지흥의 가슴에 댔다. 허둥대는 왕중양을 올려다보며 단지흥이 입을 열었다. "괜찮소. 이 정도의 상처는 대수롭지가 않아요. 오히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하군요." 의연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왕중양이었다. 피가 쉽게 멈추지 않는 그의 상처를 보며 왕중양이 다급하게 부축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돌봐 드리겠습니다." 사실 단지홍도 자신이 입은 상처가 치명적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왕중양이 달려와 급하게 상처를 틀어막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임 여협은 그 죄악스러운 여기를 벗어 던져야만 하겠소이다. 그래야만 창생들에게 화가 덜 미치고 왕 형에게도 화가……." 단지흥이 내뱉는 말에 왕중양은 몸둘 바를 몰랐다. 왕중양은 또 한 번 단지흥의 높은 인품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자기가 검에 찔려 죽을지언정 임조영의 예기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의 정신을 따르고 싶었다. "죽지야 않겠지. 죽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임조영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렇게 연신 중얼거리며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단지흥의 상처는 겉으로 보기보다는 심각했다. 왕중양이 그를 치료하기 위해 부축해 앉혔다. 그의 몸은 이미 맥이 사라진 뒤였다. 왕중양이 얼른 그의 등뒤로 가 앉아 기를 불어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웬 사람 하나가 킬킬거리며 냉소를 퍼부어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한밤중에 부엉이가 불길하게 울어대는 소리처럼 소름이 확 돋을 정도였다.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사자우였다. 그는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 천천히 두 사람 앞에까지 와 섰다. "만일 내가 자네 둘을 못 보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사자우가 결코 좋은 심보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단지흥을 치료하느라 쩔쩔매는 것이 불쌍해서 살려 주었다고 후세 사람들은 입을 모으겠지. 한 놈은 거의 죽어 가고 있고 다른 놈 역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살려 달라고 하겠지." 혼자 중얼거리듯 비아냥대던 사자우가 갑자기 병장기를 들어 왕중양을 공격했다. 왕중양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딱! 하는 소리가 울렸다. 사자우는 필시 왕중양의 손마디가 으스러졌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왕중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단지흥의 상처를 치료하기에 몰두하지 않는가. 분명 병신이 되었어야 할 왕중양이 자기의 공격에 꿈쩍도 않고 있다니……. 사자우는 매우 놀랐다. 그가 알고 있는 왕중양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 아직 처음 보았던 반화대회 때의 그 섬약하기 그지없는 왕중양만을 떠올리고 있는 그로서는 충격이었다. 그의 병장기가 주공격이며 악인을 자청한 사자우였다. 그는 왕중양을 자신의 손으로 벼랑 밑으로 내던져 버렸지 않은가. 사자우는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한 손으로 내 공격을 막아내다니 대단하군! 그래서 너를 무림의 맹주로 추대를 한 모양이로구나?"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사자우가 다시 병장기를 휘두르며 왕중양을 죽이려 들었다. 왕중양은 미처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악인을 자처한 사자우가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할 리가 없었다. 그의 병장기가 크게 원을 그리며 왕중양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쨍!" 사자우의 공격이 옆으로 비껴 갔다. 왕중양은 무슨 일인가 했다. 분명 자신은 손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돌아보니 한 사내가 사자우의 옆에 서셔 육중한 무치 노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자우의 병장기는 그 무쇠로 만든 노에 막혔던 게 분명했다. "하하하! 입금 뒤에는 언제나 한 무리의 졸개들이 따라다니는 법이지. 고기 잡는 뱃놈, 땅 파는 농사꾼놈, 글 읽는 선비놈, 나무하는 나무꾼놈……." 그러자 도끼를 든 나무꾼 차림의 사내가 윽박질렀다. "이 놈! 잔말 말고 이 도끼나 받아랏!" 나무꾼이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 든 채 달려오는데도 사자우는 손을 쓰지 않았다. 이윽고 도끼가 그를 향해 무섭게 꽂혔다. 순간 그가 몸을 틀자 도끼는 돌연 왕중양을 향해 날아갔다. 단지흥의 어깨를 짚은 왕중양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도끼가 땅에 박혔다. 이 틈을 이용해 사자우의 병장기가 왕중양의 등짝에 일격을 가했다. 그런데 다시 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병장기가 공중에서 막혔다. 부채였다. 이 부채에는 '유봉래의(有鳳來儀) '라는 글 자가 씌어져 있었다. 사자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선비가 나왔으면 이번엔 마지막 한 놈도 있을텐데?" 사자우가 호통을 치자 호미를 든 농부가 달려왔다. "그래, 여기 있다!" 병장기와 호미가 공중에서 요란한 굉음을 터뜨리며 마주쳤다. 농부의 얼굴은 금세 사색이 되고 말았다. 호미를 쥔 손으로 전해지는 힘에 그는 온몸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사자우가 병장기 줄로 호미를 휘어감은 다음 멀리 내쳤다. 그러자 농부는 바람에 날리는 마른풀처럼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큰 충격을 받았는지 농부는 쉽게 일어나지를 못했다. 사자우가 히죽거리며 이번엔 옆에 있는 어부를 향해 후려갈겼다. 잠시 쓰러진 농부를 바라보고 있던 어부는 그만 국자에 허리를 맞고는 데굴데굴 굴렀다. "이걸 받아랏!" 선비였다. 그는 부채를 독수리의 날개처럼 후드득 놀리며 사자우에게로 날아왔다. 사자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선비의 부채가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