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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48편 (48/60)

2026-09-30 18:52:09 조회 16
"정말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원숭이가 갑자기 벼랑을 향해 껑충 뛰어오른 것은 이때였다. 원숭이는 한 길이 조금 넘는 곳에 발톱을 박고는 고개를 돌려 왕중양을 내려다보았다. "낑낑낑……." 이런 소리를 내며 원숭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왕중양은 무슨 영문인지 얼른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미간을 찡그린 원숭이가 다시 훌쩍 땅으로 내려오더니 왕중양의 팔을 잡아 끌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원숭이는 계속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왕중양을 어디론가 이끄는 것이었다. 원숭이가 먼저 절벽 위로 뛰어오르더니 돌에 난 틈을 부여잡고는 왕중양을 내려다보았다. 왕중양은 그제야 원숭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기 몸을 발판으로 삼아 한 층 한 층 오르라는 거였다. 왕중양은 그만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메어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가슴속에서만 회오리칠 뿐이었다. 왕중양이 몸을 날려 원숭이의 어깨 위로 올라섰다. 그도 원숭이처럼 적당한 틈을 잡고는 두 발로 바위 하나를 넘었다. 다시 원숭이가 몸을 솟구치더니 이번엔 조금 더 높은 옷에 몸을 찰싹 붙였다. 왕중양도 원숭이처럼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뛰어올랐다. 왕중양을 떠받치고 있는 원숭이의 힘은 대단했다. 그러나 도중에 만에 하나라도 힘이 빠져 왕중양을 지탱해 주지 못하면 끝장이었다. 어느새 왕중양은 절벽의 중간까지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그는 원숭이가 지쳐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짐승이 지쳤을 때 내는 소리는 처절했다.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참고 있는 듯했다. "원형, 나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군."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마움에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원숭이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몸을 어렵게 위로 올렸다. 이러기를 수십 차례 이제 몇 번만 더 반복하면 위에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왕중양과 원숭이는 지칠 대로 지쳐 손가락조차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왕중양은 속으로 가늠을 해 보았다. 조금 쉬었다가 힘을 쓴다면 한 번 정도는 몸을 위로 올릴 수 있으리라. 그 이상은 원숭이도 자신도 무리였다. 원숭이도 그런 왕중양의 마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때 원숭이를 쳐다보고 있던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금 상태는 왕중양이 원숭이보다 한 걸음 정도 위로 올라와 있는 위치였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지금까지 해온 방법과는 조금 다른 방법인데 성공할 수 있을는지 는 의문이었다. 또한 얼마나 원숭이가 자신의 의도를 간파해 낼는지도 알 수 없었다. "원형, 내가 힘껏 원형의 팔을 당길 테니 가능하면 높게 뛰어오르시오. 그리고 쉬지 말고 반동을 이용해 다시 나를 당기는 거요. 그러면 나는 저 위에 나 있는 뾰족한 바위를 잡을 수가 있소. 바로 그곳이 정상이오. 내가 위로 오른 후 한 번만 더 힘을 준다면 원형도 무사히 오를 수가 있을 거요." 원숭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왕중양은 자신의 말을 충분히 알아 들었을 거라 믿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왕중양이 있는 힘을 다해 원숭이를 위로 올렸다. 번쩍 들어올려진 원숭이는 한층 더 높이를 확보하기 위해 왕중양의 어깨를 발로 짚으며 몸을 솟구쳤다. 원숭이가 바위 틈에 손을 넣으며 이번엔 왕중양을 끌어 올렸다. 한 번의 기회뿐이었다. 공중으로 튀어오른 왕중양은 결사적으로 그 바위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차가운 물체가 닿는 것과 동시에 왕중양 은 그것을 움켜쥐었다. 정확하게 그 바위를 잡은 것이다. 다른 손에는 원숭이가 매달려 있었다. 그만 힘이 빠졌는지 원숭이는 다른 한 손으로 잡고 있던 바위틈을 놓치고 말았다. 이제 원숭이는 왕중양에게만 의지한 채 매달려 있는 형편이었다. 한 손으로 자신과 원숭이까지 들어올리기에는 무리였다. 왕중양이 내려다보니 원숭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자기를 그만 놓으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인지 모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얏!" 왕중양이 온몸의 기를 한 손에 모은 채로 힘을 가했다. 그러면서 원숭이를 잡고 있는 손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기적적인 일이었다. 원숭이가 먼저 무사히 위로 오른 것이다. 왕중양이 원숭이를 먼저 던져 놓고 자유로워진 다른 손을 이용해 자신도 올라왔다. 왕중양과 원숭이는 정상에 서서 오랫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있었다. 이제 둘은 작별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체취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했다. 왕중양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형, 이렇게 원형을 두고 가지만 꼭 다시 찾아오리다." 그러나 원숭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찾아와 이곳에서 소리를 지를 테니 원형이 올라오시오. 혼자서는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올 수 있을 거요."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왕중양이 원숭이에게 정중히 읍을 하며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원형, 내가 찾아올 때까지 몸조심 잘 하시오." 원숭이도 왕중양이 하는 대로 양손을 맞잡고는 허리를 약간 숙였다. 왕중양의 눈에서도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왕중양이 몸을 돌렸다. 뒤를 돌아다보면 더욱 걸음이 떼어지지 않을 것 같아 왕중양은 뛰다시피 원숭이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왕중양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원숭이가 석양을 등진 채 이쪽을 향해 손을 들어 주었다. 왕중양도 손을 흔들었다. 제29장 강호에 부는 낯선 바람 종남산 기슭에는 한 여인이 자그마한 초막을 짓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날마다 종남산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 검술을 익혔다. 그런데 여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수심이 가득했다. 하루는 이 초막을 향해 낯선 가마가 천천히 다가왔다. 여인의 눈에 비친 가마꾼들은 모두 신출내기는 아니었다. 가마는 조금의 흔들림도 얼이 아주 평온하게 여인의 발치 앞에까지 이르더니 멈춰섰다. 가마가 땅에 닿자마자 뒤를 따라오던 계집애가 쪼르르 앞으로 나오더니 문발을 거두었다. "다 왔사옵니다." 계집이 이렇게 아뢰자 가마 안에서 한 절세 미인이 나왔다. 그녀는 초막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보고는 인사부터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언니가 보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어요." 초막 앞에 서 있던 여인은 임조영이었고 가마를 파고 온 여인은 자지였다. 임조영은 가마에서 내린 여인을 보자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미친 놈하고는 아직도 살고 있느냐?" 그 말에 자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임조영 앞에서 할말이 없었다. 한동안 말끄러미 임조영을 바라보던 자지가 입을 열었다. "언니, 두꺼비에게 시집을 가면 두꺼비를 따라야 하고, 개에게 시집을 가면 개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나를 두고 한 말이지 뭐예요." 임조영이 자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여쁜 얼굴은 여전했으나 그 위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모용준과 지내는 그녀가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을 거라는 게 충분히 짐작되었다. "그런데 여긴 왜 찾아왔지?" 임조영이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었는지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자지가 좌우에 둘러 있는 사람들을 슬쩍 보며 대답했다. "언니와 회포를 나누려고 찾아왔지요. 너희들은 저리로 가 있거라!" 그러자 가마문과 계집들이 뒤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언니, 풍문에 의하면 왕 공자님이 강호에 나타났다고 하던데 ……" 임조영의 귓전은 큰 종이 한 번 울린 후처럼 먹먹해졌다. 임조영으로서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람이 강호에 나타났다구?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믿을 수 없어……. 그 사람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내가 거짓말을 꾸며 내겠어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왕 공자님은 지금 중주(中州) 어딘가에 계시대요." 중주를 향해 걷고 있는 왕중양은 어느 때보다 평온한 마음이었다. 비록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원숭이가 눈에 밟혀 가슴이 아팠지만 언젠가는 다시 찾아갈 날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로에 들어선 그는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황야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이 스치는 마른 풀숲에서 스르륵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잔뜩 세우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왕중양은 그것이 누군가가 검을 뽑아 드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아니나다를까,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풀숲에서 사내 셋이 튀어 나왔다. 한 사내는 칼을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다른 사내는 손에 붓을 들고는 왕중양을 공격했다. 또 나머지 하나는 청강검(靑鋼創)을 번뜩이며 그의 등뒤로 몸을 옮기며 다가왔다. 왕중양은 거목처럼 우뚝 서서 그들의 움직임만 주시했다. 낯선 사내들은 왕중양을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선회했다. 〈움직일 때는 나는 매와 같아야 하고 가만히 있을 때는 날개를 펴고 유영하는 독수리 같아야 한다.〉 왕중양은 속으로 《구음진경》의 한 구절을 되뇌었다. 뜻을 풀이하면 상대가 움직일 때는 가만히 있다가 상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아 손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건방진 놈이로군!" 검을 든 사내가 왕중양에게로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 들었다. 왕중양은 그 검끝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순간 몸을 피하자 그의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이어서 한 쌍의 붓이 끝을 세우고는 왕중양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역시 왕중양의 몸에 닿지는 못했다. "제법이군!" 붓을 들고 있던 사내가 콧소리를 내더니 다시 공격해 왔다. 붓끝이 명치에 닿으려고 할 때였다. 왕중양이 손바닥으로 붓을 툭 내리쳤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검날이 획 머리를 향해 차갑게 날아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사내는 그 검날에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붓을 든 사내의 등에 식은 땀이 솟았다. 잠시 거리를 둔 왕중양은 이 싱겁고도 명분 없는 싸움을 어서 끝내고 싶었다. 서서히 손을 들어올린 그는 앞으로 내뻗은 채 가볍게 휘젓기 시작했다. 세 명의 사내는 왕중양의 동작을 지켜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중 붓을 들고 있던 사내가 지껄였다. "손을 보니 어디서 붓이나 잡던 놈 같은데 괜한 수작 부리지 마라!" 왕중양의 희고 가는 손이 그에게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놈의 눈은 곧 늘란 토끼처럼 변해 버렸다. 왕중양의 손동작이 차츰 속도를 더하며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사내가 왕중양에게로 붓을 내밀었다. 왕중양의 손짓 한가운데로 불쑥 들어간 붓은 멀리 튕겨져 나갔고 사내는 힘없이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다른 사내들은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검을 든 사내가 나섰다. 그는 '망월거서(望鳶巨雇)'라는 검법을 쓰며 왕중양에게로 접근해 왔다. 사내는 있는 힘을 다해 검끝으로 왕중양의 가슴을 내리쳤다. "얏!" 왕중양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로 날아드는 검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에 막힌 검은 위잉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높이 솟구쳤다. 사내가위를 보고 있는데 검이 무서운 속도로 아래를 향해 내려왔다. 사내가 몸을 피하자 검이 땅에 꽂히며 반으로 접힐 듯 휘청거렸다. 이제 남은 것은 칼잡이였다. 그는 동료 둘이 모닥불 앞의 낙엽처럼 맥없이 당하자 화가 났다. 약간 두렵기는 했지만 동료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칼을 머리 위로 치켜 든 그가 멧돼지처럼 크릉대며 달려 들었다. 막 왕중양의 정수리를 향해 칼을 내리찍을 때였다. 위잉! 구름을 뚫을 듯 칼이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땅에 푹 꽂혔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대들은 낙양삼걸이 틀림없겠지? 칼과 검 그리고 붓으로 온갖 재간을 다 부린다는 낙양삼걸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소. 그런데 왜 내게 싸움을 거는 것이오?" 아직 자기 자세 그대로를 고수한 채 왕중양이 물었다. 그러나 쌍붓잡이가 잡아먹지 못해 분하다는 투로 받아쳤다. "왕중양, 이 놈아! 점잖은 체하지 말어. 네가 한 짓을 아직 모르겠느냐? 죽었다고 사람들을 믿게 한 다음 이렇게 활보를 하다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가? 그대들의 눈에는 내가 악인으로 보이는가?" "왕중양, 넌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겠다고 또한 송나라 강산을 지키겠다고 얼마나 떠벌려 댔느냐? 그래서 네 말을 믿고 숱한 무림의 영웅호걸들이 몰려 들었는데 어째서 혼자 살아 돌아왔느냐?" "나 역시 의군이 어떻게 패했는지 모르고 있소. 세 사람이 알고 있다면 나에게 알려 주시오!" 검잡이가 노기를 띠며 비웃었다. "흥, 의군의 통수 노릇을 했던 네 놈이 의군이 패한 원안도 모른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 칼잡이의 검날이 눈앞으로 획 지나갔다. 왕중양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손을 들었다. "정녕 나는 모르고 있소." "둘째 동생, 셋째 동생, 이 놈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네. 이 놈이 금군과 결탁한 게 분명해. 그랬으니 의군이 패한 것이라고. 어서 이 놈을 죽여 억울하게 희생된 형제들의 넋이나 위로하자구." 맏이인 칼잡이가 울분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검잡이가 다시 왕중양을 향해 소리쳤다. "왕중양, 넌 만 명도 더 되는 인명을 해쳤다. 그러고도 변명이나 일삼으려 하다니, 어서 내 검을 받아랏!" 검잡이의 신호가 떨어지자 모두들 한꺼번에 땅을 박차고 날아들었다. 몸을 높이 띄운 왕중양은 저 멀리로 날아가 일단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바위 위로 올라선 왕중양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사실 그 계곡을 떠나 온 뒤 제일 먼저 가 본 곳은 의군의 대영이 있던 장소였다. 그러나 바위 몇 개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 바윗돌은 막사가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귀퉁이를 눌러 두었던 것이었다. 세 명의 사내들이 어느새 왕중양이 있는 곳까지 와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연마해 온 '천지동수(天地同壽)'라는 초수를 쓰고 있었다. 이 초수는 위력이 대단해 당할 자가 드물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왕중양이 손을 쓰자 그 검은 심하게 요동을 치며 옆으로 비껴 나갔다. 다시 '평산출유(平山出岫)'라는 초수로 바꾼 검잡이가 사납게 달려 들었다. 등뒤로는 역시 칼과 붓을 들고 다른 사내들이 접근해 왔다. 공중으로 몸을 솟구친 왕중양은 그 저 피하기만 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세 사내의 병장기가 한곳에서 맞부딪쳤다. 이미 왕중양이 자기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얼른 자리를 피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왕중양이 빙그레 웃으며 먼저 몸을 돌리는 게 아닌가. 이들은 천천히 걸어가는 왕중양의 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왕중양, 네 놈은 강호의 숱한 사람들을 해쳤다. 다시 기회가 생기면 네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중주에 도착한 왕중양은 어느 객주집에 묵었다. 피곤한 몸을 뉘이고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잠결에 주위가 시끄러워 눈을 뜬 것이다. 객주집 마당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 객주집을 뒤져라. 그 놈을 놓치면 안 된다!". 마당에는 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는데 한결같이 병장기를 들고 있는 것이 강호 사람들 같았다. 왕중양이 천천히 일어나 문밖으로 나서려는데 한 사내가 소리쳤다. "저 놈이 바로 왕중양이다!" 이들 속에는 왕중양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호랑이를 만난 사람들처럼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때 검을 쥔 한 젊은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질렀다. "왕중양, 네 놈은 네가 지은 죄를 알고 있느냐?" 젊은 사내를 유심히 훑어보던 왕중양이 점잖게 대꾸했다. "이 왕중양이 죄를 지었다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그렇다면 내 말해 주지. 나는 무당파(武當派) 옥생(玉生)이고, 내 사부님은 바로 운심도장이시다!" 무당파의 원로이자 강호에서 가장 신망이 높은 운심도장을 들먹이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들은 일제히 왕중양을 꾸짖으며 옥생의 편에 서려 했다. "왕중양, 내가 네 놈의 죄상을 까발기면 할말이 없을 것이다." 실눈으로 왕중양을 노려보던 옥생이 다시 다그쳤다. "넌 명색이 의군의 수령이 아니었더냐? 의군들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는데 네 놈은 살아 남아 아직도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있다는 말이냐?" 왕중양은 난감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그런 오해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겪은 기이한 사연들을 일일이 설명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이 왕중양을 어찌할 생각들이오?" 왕중양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너 때문에 많은 강호객들이 죽었다. 그러니 먼저 간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네 놈도 죽어야겠다!" 그러나 왕중양은 내심 새롭게 일고 있는 기운을 감지해 냈다. '운심도장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속에는 무슨 다른 속뜻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내가 빙긋이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왕중양, 네가 무림의 맹주 노릇을 할 때 맹세를 한 적이 있지 않느냐? 금나라 군사들을 중원에서 몰아내지 못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맹세였다. 왕중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하하, 그런데 그대는 이 중주의 거리마다 우글대는 금군들을 보지 못했단 말이냐?" 왕중양이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왕중양, 넌 왜 맹세를 저버리려고 하느냐?" "스스로 자결을 하라구!" "네가 죽으면 우리들은 강호의 탑에 따라 너를 무림의 맹주로서 장례를 치러 주겠다. 하하하!" 이렇게 왕중양을 향해 냉소의 화살들을 쏘아댔다. 그러자 뒤쪽에서 그럴 수는 없다며 누군가 단호하게 외쳐 댔다. "그건 안 돼! 내 손으로 직접 저 놈의 목을 따야 속이 풀리겠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왕중양은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불렀다. "제 장로님이 아니시오? 그동안 안녕하셨소?" 왕중양이 존경하고 있는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그런데 제 장로는 대답 대신 서슬이 퍼런 눈으로 왕중양을 쏘아보았다. "일년 동안 몸을 숨기고 다녔겠지만 강호의 법도는 피할 수가 없소!" "나는 지난 일년 동안 죽은 목숨이었소. 몸을 숨겼다는 것은 오해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어도 다 설명하기가 어렵소." 제 장로의 냉소는 매우 차갑고 단호했다. "그런데 그대는 어제 낙양삼걸을 만난 적이 있소?" 왕중양이 그렇다고 하자 제 장로가 죄인을 신문하듯 계속 캐물었다. "그대가 그들에게 무공을 썼소?" 역시 틀린 말이 아닌지라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에 모인 많은 사내들이 폭풍을 만난 바다처럼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장로가 손짓을 하자 몇몇 거렁뱅이가 손수레를 하나씩 끌고 들어 섰다. 수레는 모두 셋이었는데 그 위에는 시체 세 구가 누워 있다. 바로 낙양삼걸이었다. 큰형인 절명도(絶命刀) 진호(陳浩)는 칼에 앞가슴을 난도질당해 시뻘건 살점들아 마구 파헤쳐진 상태였다. 수레가 멎자 상처에서 다시 검붉은 피가 솟았다. 둘째인 쾌삼검(快三劍) 서성(徐聲)은 칼끝에 목을 찔려 죽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상처를 발견하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검으로 가볍게 목을 찔러 피를 뽑아 낸 무서운 실력이었다. 그리고 셋째인 쌍붓잡이 이쟁(耳錚)의 가슴팍에는 자신의 붓 두 자루가 꽂힌 채였다. 이들의 모습만 봐도 싸움이 얼마나 잔인했고 끔찍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왕중양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분명 자기와 싸우다가 그들은 그냥 물러가지 않았던가. 제 장로가 다시 왕중양을 향해 분노에 가득 찬 소리로 외쳤다. "왕중양, 그대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바이오. 세상에서 낙양삼걸을 이렇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그대 밖에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소." 제 장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사내가 선동을 하며 칼을 쳐들었다. "왕중양을 죽입시다!" 그러자 모두들 그 말에 찬동하는 몸짓을 했다. 사내가 왕중양을 향해 이를 갈았다. "모용준이란 놈도 함께 죽여야 할텐데. 왕중양! 네 놈은 모용준이 숨어 있는 곳을 알겠지?" "난 모르오." "거짓말 말아라! 우리 강호객들치고 네 놈과 모용준이 의형제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 왕중양은 그것마저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자 묵인한 것으로 여긴 사내가 더욱 의기양양해져 대들었다. "그렇다면 왜 모용준의 행방을 모른다는 거냐?" 제 장로가 더욱 왕중양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틈을 주지 않고 합세했다. "그대는 낙양삼걸을 죽인 데 대한 이유를 무림의 영웅들 앞에서 밝혀야 하오.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 이유를 듣고 싶을 것이오. 난 이미 개방에 생사령(生沈令)을 내렸소. 그대가 그냥 얼버무린다면 천하에는 낙양삼걸을 죽인 자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될 것이오." "제 장로도 처음엔 의군에 계시지 않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