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47편 (47/60)
왕중양은 편히 침대에 누워 원숭이가 잡아 오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 해치웠다. 그러던 중 며칠이 지나자 이젠 한 마리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한 마리 더 먹을 수 없겠소?" 왕중양이 좀 미안한 얼굴을 하자 원숭이가 눈동자를 사납게 굴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원숭이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왕중양은 포기하고 말았다. 밤새 횐 눈이 쏟아졌다. 새벽에 일어난 왕중양은 동굴 어귀에 쌓인 눈을 보고는 놀랐다. 옆을 보니 원숭이는 아직 잠자고 있었다. "원형, 어서 일어나시오. 새하얗게 눈이 왔소!" 동굴 밖으로 나가자 온통 은세계가 펼쳐져 있어 눈이 부셨다. 바위와 나무들까지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풍경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백설 때문에 더욱 푸르게 보이는 강줄기만 여전히 맑게 흐르고 있었다. 왕중양과 원숭이는 눈밭 위를 구르며 마음껏 뛰놀았다. 더없는 행복감에 싸인 왕중양은 기뻐서 눈물이 다 나왔다. 이 모두가 원숭이 때문이 아니던가. 생각할수록 왕중양은 원숭이에 대한 깊은 고마움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원형, 나를 살리느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이 은공을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원숭이가 고개를 한쪽으로 틀며 끽끽 나름대로 대꾸를 했다. 원숭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왕중양이 진심 어린 말을 건넸다. "원형, 내가 동굴에서 죽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거지요?" 원숭이가 말을 알아듣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원형은 얼마나 좋겠수. 우리야 기껏 백 년이면 이 세상과 하직하는게 원형들은 일천팔백 년은 족히 살아 낼 수 있지 않소?" 동굴로 들어온 왕중양은 들뜬 가슴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원형, 그런데 아직 동굴의 끝까지는 가보지 못했소. 말이 나온 김에 나를 데리고 가 주지 않겠소?" 원숭이가 기꺼이 앞장을 섰다. 왕중양의 생각으로는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인데 이왕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동굴은 들어갈수록 좁아져 나중에는 몸을 낮추고 기어가야만 했다. 한참을 기어가자 잠자기 눈앞이 환하게 트였다. 눈앞으로 훤하게 드러난 옷은 매우 큰 공간이었다. 깜짝 놀란 왕중양이 주위를 둘러보니 웬만한 불교 사원의 도장(道場)과도 맞먹을 규모였다. 바닥에는 마른 풀 포기 하나 없는 것을 보아 사람이 머물다 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계시오!" 혹시 몰라 왕중양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곳에도 옥으로 만든 의자가 있었는데 검으로 단번에 쳐 만든 것으로 짐작됐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검법의 소유자가 한 일일 것이다. 의자에 앉은 왕중양은 손을 들어 석벽을 만져 보았다. 그 역시 검으로 다듬은 것으로 유리알처럼 반들거리고 광채가 났다. 다른 쪽의 석벽으로 눈길을 옮겨 가던 왕중양이 멈칫했다. 그곳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구음진경은 천하에 복을 줄 수도 있고(丸陰眞經福天下) 천하에 화를 줄 수도 있노라(丸陰眞經禍天下).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든 왕중양은 유심히 그 글들을 음미했다. '구음진경?' 무림세계에 비밀리에 전해지는 그 무슨 책자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기에 천하 사람들에게 복과 화를 함께 내릴 수 있다는 것인가? 어쩌면 옛 성인들의 말일지도 모른다. 복과 화는 사람의 행실에 따라 받게 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구음진경'이라는 것도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호기심이 동한 왕중양은 옆으로 몇 걸음 옮겨 갔다. 커다란 석실로 통하는 입구가 있어 그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 작은 석실 하나가 보였다. 그곳으로 천천히 몸을 들이민 왕중양은 경악하며 뒤로 물러 나왔다. 웬 사람 하나가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은 그린 듯 정좌를 하고 있었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왕중양이 마음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다가섰다.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을 용서하시오!" 예를 올린 왕중양은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죽은 사람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접근한 왕중양은 더욱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이지만 살점 하나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을 뿐더러 얼굴 표정도 그대로였다. 옷모양새를 보니 신선이 아니면 도인이라 예상이 되었다. 앉아 있는 무릎 위에는 끝이 무뎌진 보검 한 자루가 놓여져 있고, 그 바로 앞 바닥에는 역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전진 도인은 평생을 즐거이 살다가 만년에 득도하여 신선이 되노라 구음진경은 복도 화도 줄 수 있으니 후세에 전하여 전진교를 빛낼지어다. 불현 왕중양의 가슴은 바람을 안은 강물처럼 커다란 기운으로 꿈틀대는 듯싶었다. 그는 반평생을 살아오다가 이제야 자신을 발견해 낸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도인의 '구음진경'을 이어받아 후세에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이겠는가!' 그는 꼭 그렇게 하리라 다짐하고는 도인 앞에 꿇어앉았다. "사부님으로 모시고 한평생 도가 전진이 되어 사부님의 '구음진경'을 천하에 전하겠나이다!" 그러나 문득 왕중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벗어날 수 없는 깊은 계곡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것이다. 이곳을 헤어나지 못하는 이상 어찌 '구음진경'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또 어떻게 도가 전진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 문득 그의 눈앞으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임조영이었다. 설사 이 협곡을 벗어날 수 있다 해도 그녀와는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는 이미 그녀도 늙은 후가 될 것이란 게 왕중양의 씁쓰레한 예감이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침울해 있는데 갑자기 도인의 시체가 쿵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면서 뒷벽에 새겨진 새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역시 '구음진경복천하, 구음진경화천하' 라는 글귀였는데 그 밑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왕중양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머뭇거리던 왕중양이 그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 꺼내 보았다. 네모 반듯한 상자였다. 상자 뚜껑을 열어 보니 두 권의 고서가 나왔다. 이것이 바로 상편과 하편으로 된 《구음진경》이라는 기서(奇書)였다. 그 책 겉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마음이 바른가 자문해 보라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이 책은 오히려 너를 해칠 것이고 마음이 바르다면 이 책은 너를 도우리라. 왕중양은 자못 흥분이 되어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았다. '어떤가? 왕중양, 네 마음이 바른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나 왕중양은 다른 것은 몰라도 마음 한 가지만은 똑바른 사람이다. 하늘을 우러러 떳떳이 말할 수 있다.' 그는 숨을 가다듬고 두 손으로 그 책을 들었다. 책 표지에는 '구음진경(丸陰眞經)'이라 씌어 있고 그 밑에 '황상(黃裳)'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마 그 책을 쓴 도학 스승의 존함인 모양이었다. 다시 꿇어앉은 왕중양은 쓰러진 도인에게 다시 절을 올리고 그 책을 조심스레 펼쳐 들었다. 그다지 두꺼운 책은 아니었다. 왕중양이 천천히 일어서며 원숭이를 돌아보았다. "원형, 사부님을 밖으로 모셔다가 고이 묻어 드려야겠소." 원숭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었다. "왜……?"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그 이유를 묻던 왕중양은 곧 원숭이의 뜻을 헤아리고는 도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 후일 다시 찾아와 뵙겠습니다." 다시 자신들이 머물던 곳으로 기어 나온 왕중양이 원숭이에게 물었다. "원형, 나를 제외하고는 아까 그 도인을 본 사람은 없소?"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중양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한숨을 쉬었다. 이 원숭이가 사람처럼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해서였다. 그렇다면 누가 자신을 이 협곡 아래로 떨어뜨렸는지도 알 수 있을텐데……. 왕중양은 사소한 일에는 무심하기도 하고 매우 너그러운 편이지만 나라의 운명이 달린 대사는 절대 외면하지 않는 사내였다. 그는 이 협곡을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그의 가슴을 조여 오는 일이 있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나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임조영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녀를 찾아내어 모용준을 믿을 만한 사내라고 주장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받고 싶었다. 모용준은 의군의 대업을 외면한 자요, 모든 백성의 뜻을 저버린 자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왕중양의 심기는 편하지가 않았다. 이미 《구음진경》의 깊은 뜻을 가슴에 새긴 뒤라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왕중양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구음진경》을 정독하는 일이었다. 복과 화를 줄 수 있는 이 기서에는 과연 어떤 속뜻이 숨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한 장 두 장 《구음진경》을 읽어 나갔다. 그렇게 시작한 《구음진경》의 정독은 나중에는 식음을 전폐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 낮에는 동굴 속으로 스며드는 햇빛 아래서 책을 읽었고 밤이면 달빛에 비추어 봤다. 원숭이는 왕중양이 자기가 잡아오는 물고기조차 먹지 않고 책읽기에만 몰두하자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왕중양이 용서를 빌었다. "미안하오. 내가 물고기를 먹지 않아 원형이 고생을 하는구려." 원숭이는 왕중양이 먹지 않고 내버려둔 물고기가 썩으면 다시 강으로 가 고기를 잡아 오곤 했다. 왕중양 곁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물고기가 수북하게 쌓여 갔다. 이런 왕중양의 노력은 곧 결실을 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통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제껏 세상에 떠도는 무림의 비적(祺籍)을 두루 보았지만 이 《구음진경》에 비하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사 푸줏간의 백정이라도 이 책만 읽으면 무림의 고수로 자리할 게 분명했다. 이 책을 쓴 '황상'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아무튼 책의 신묘함에 비추어 그 사람은 절세의 기재(奇才)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 었다. 도인의 시신이 있는 쪽을 향해 꿇어앉은 왕중양은 중얼거렸다. "사부님, 제자는 사부님의 뜻을 이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소이다. 허나 아무래도 어려운 듯싶습니다. 지금 제자는 그 옛날 사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험난한 골짜기에 떨어져 전혀 솟아날 가망이 없소이다. 그러니 무슨 수로 사부님의 이 《구음진경》을 빛내겠습니까? 또 무슨 수로 천하의 사람들에게 복을 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 제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굽어살펴 주소서!" 무릎이 시리도록 그는 반나절이나 꿇어앉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왕중양은 갈증이 난 사람이 물을 찾아 마시듯 정신없이 《구음진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어렵고 기이한 무공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흥분이 되는 자신을 느꼈다. 이 무공이 세상에 나가면 큰 변이 생길 것만 같아서였다. 의롭고 정직한 일에만 쓴다면 탈이 없겠지만 그 반대가 되면 백성은 어려워질 게 분명했다. 왕중양은 다시금 이 《구음진경》이 말하는 복과 화에 대해 음미했다. 천하 무림들 사이에 피를 보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천하 제일의 고수가 이 책을 지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무림의 세계는 피 바다를 이루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왕중양은 이 《구음진경》을 올바르게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했다. 이곳에 곤두박질칠 때 입었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는 그였지만 이대로 협곡에 갇혀 죽어 갈 수만은 없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조각난 뱃속의 창자로 인해 간헐적으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그는 이 육신의 아픔을 더는 것과 더 나아가 밝은 빛을 세상에 알리는 대업을 함께 생각해야 했다. 왕중양은 오직 그 길을 열기 위해서는 《구음진경》에 몰입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다시 《구음진경》에 몸과 마음을 쏟았다. 《구음진경》의 전편은 주로 기공을 익히는 기초적인 방법들을 기술하고 있었다. 기묘한 초수와 검법 그리고 장법과 내공운행법은 후편으로 갈수록 자세히 드러났다. '지금껏 많은 무공을 익혔었지만 그 원류를 몰랐었다. 사실 내가 아는 무공은 전부 이 《구음진경》속에서 나온 것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접해 보지 못했던 무공 역시 수없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지은 황상이야말로 이 왕중양의 더 큰 스승이다!' 모용준의 음모 때문에 잃게 된 왕중양의 무공, 그러나 왕중양은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천하 정통파 무공의 일인자로,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림의 대협객으로……. 석굴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왕중양은 가슴으로 도인을 불렀다. '제자 왕중양에게 신묘한 기공법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 기공법으로 협객을 벗어나 《구음진경》의 빛을 널리 전하리다!' 왕중양은 이제 《구음진경》을 자기 목숨보다 더 큰 의미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한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던 왕중양이 습관처럼 《구음진경》을 펼쳤다.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지 않고 한 행동이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장절은 〈요상편(療傷篇)〉이었다. 혹시 도인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 길을 열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왕중양은 그곳을 가슴에 하나하나 각인했다. 이런 말이 〈요상편〉에 담겨져 있었다. 막힌 물은 터져야 흐르고 흘러야 썩지 않나니 환자의 기를 기르고 운행시켜 그 막힘과 응어리를 소통시키고 터뜨려야 하느니라. 왕중양의 뒷머리로 섬광 같은 것이 들이쳤다. 기공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었다. 그때 산딸기와 물고기를 한아름 들고 들어오는 원숭이에게 왕중양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군. 정말 고맙소." 원숭이는 왕중양의 정중한 인사말에 좋은지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왕중양이 다시 원숭이에게 예를 갖추며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원형, 나는 앞으로 기공을 연마해야 하오. 그러니 청하건대 그동안만 나를 위해……." 벌써 알아차린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얼마든지 기공을 연마하라는 뜻이었다. 곧 왕중양은 기공 연마에 몰입했다.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앉아 기를 단전으로 끌어 모으며 허무지경(虛無之境)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왕중양은 한 줄기의 기류가 미려혈로부터 시작하여 등골을 타고 흐르다가 오장육부를 말끔히 씻어내는 느낌을 받았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가슴과 배에서 일더니 차차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났다. 왕중양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왈칵 무언가를 게워 냈다. 그것은 상처를 입은 내장에 응어리져 있던 핏덩어리였다. 이렇게 사나흘 기공을 하자 차츰 전신으로 힘이 전해지고 내력이 강물처럼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왕중양은 다시 태어난 기쁨에 주먹을 꽉 쥐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에 이제 엄청난 기력이 들어차게 된 것이다. 음지에 쌓였던 적설도 녹아 버리고 협곡은 푸르게 새옷으로 갈아 입기 시작했다. 세월이 덧없이 흐른 것에 왕중양은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의군을 일으켰던 강호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간교한 모용준은 지금도 의군의 대권을 틀어쥐고 대연을 복구하려고 날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세상이 변했으리라는 생각에 두려움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임조영의 소식이 궁금했다. 불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오르며 사무치게 그녀 가 그리워졌다. 왕중양은 이따금 무서운 꿈에 놀라 잠에서 깨곤 했다. 의군은 복멸되었고 요사스런 모용준이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는 꿈이었다. 왕중양은 금나라에 투항했으며 벌써부터 금과 내왕하던 사이였다고 모용준이 뇌까리는 장면도 보였다. 만약 그것이 꿈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왕중양은 생각만으로도 부르르 치가 떨렸다. 천하 대협, 아니 무림의 맹주 왕중양이 실종된 지도 일년이란 세월이 지나 버렸다. 강호의 호걸들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왕중양의 호령 아래 의군으로 뭉친 호걸들이 금나라와 대적하였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평양성 싸움에서 의군이 끝내 패하기는 했지만 그 기세만은 당당하였다고 이들은 서로를 위안했다. 모용준 역시 실종이 되었는데 왕중양처럼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홍칠의 말에 의하면 왕중양은 모용준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실을 사자우도 알고 있다는데 호걸들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막이 홍칠과 사자우의 입에서 흘러 나오지 않고 있는지라 호걸들은 더욱 애가 탈 뿐이었다. 그같은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는 바로 모용준인데 그도 실종이 된 지라 확실한 것을 알아내기란 힘이 들었다. 모용준이 자기 고향인 고소(姑蘇)로 돌아가 칩거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말이었다. 모용세가의 본은 고소 모용이요, 원래 선조 대대로 그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모용씨는 모용준의 부친 때부터 정강(靜江)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무슨 연유로 고소를 떠나 정강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소문을 듣고 호걸 중 누군가가 고소에 가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고사하고 그의 뒤를 따르던 사대 가신들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모용준이 미쳐 버린 나머지 가신들을 죽이고 자기도 자결했다는 풍문까지 나돌았다. 어쨌거나 모용준에 대한 소문은 차츰 뜸해 갔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강호는 종전과 다름없이 고태의연했다. 더군다나 왕중양과 모용준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자 바람이 멎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왕중양이 실종된 후 임조영은 거의 실의에 빠져 지냈다. 왕중양의 시신이라도 찾아 고인의 명복이라도 빌어 주고 싶었다. 사자우가 왕중양을 내버렸다는 그 벼랑까지 가 보았지만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천 길이 넘는 절벽을 무슨 수로 내려갈 수 있겠는가. 임조영은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 "왕 공자, 당신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처럼 시신도 남기지 못하는 몸이 되었나요?" 그녀는 왕중양을 집어삼킨 아득한 저 밑을 응시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도 왕중양은 서서히 잊혀져 가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왕중양은 전설의 인물이 되어 아직 사람들의 삶 속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전설을 들려주듯 술자리에서나 어디에서나 협객 왕중양의 무용담에 흠뻑 취해 지냈다. 왕중양이 천하 무림의 고수로 다시 태어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구음진경》을 독파한 후 무공을 더욱 견고하게 연마해 나갔다. 그러다가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 협곡이 가슴에 밟혀 침통해지곤 했다. 어떨 때는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원숭이와 한 평생 지내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 왕중양은 심신을 달랠 겸 원숭이와 강물에 뛰어들어 어린아이처럼 놀았다. 한참을 그러고 노는데 하늘에 닿을 듯한 저 계곡 위에서 병장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 왕중양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을 쳐댔다. 보이지도 않는 그곳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른 것은 그런 충동 때문이었다. "여보시오, 내 말이 들리시오!" 옆에 있던 원숭이는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왕중양은 계속 위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왕중양의 목소리가 협곡을 울리며 메아리쳤다. 벼랑 위에서 나던 병장기 소리가 뚝 멈추더니 무서운 정막이 흘렀다. 사실 왕중양의 외침 소리는 수면에 반사되어 위로 올라갈수록 기묘한 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위에 있던 사내들은 대협 왕중양이 죽은 자리라는 의미를 새기며 무공을 겨루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괴상한 소리가 들리자 싸움을 중단했다.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득한데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저건 왕중양의 혼백이 우는 소리일 거야. 아마도 우리가 서로 칼부림을 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 저러는가 봐. 어서들 급살맞기 전에 자리를 뜨자구." 이들은 허겁지겁 산을 내려갔다. 기진맥진해진 왕중양은 강기슭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소리를 듣고는 지금쯤 밧줄을 가지러 간 것으로 오해를 했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 주지를 않았다. "원형, 여기서 솟구쳐 오를 수만 있다면 정녕 두 번 태어난 셈이겠지?" 천진스런 눈으로 원숭이가 왕중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숭이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왕중양도 원숭이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한숨을 섞어 가며 다시 말했다. "원형, 아마도 원형이 살기에는 이곳이 제일이겠지. 허나 나는 인간이니만큼 이곳에서 살 수는 없소. 또한 나는 곧 사람들을 만나 해야 할 일도 있고…….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내가 이러는 걸 용서하오." 원숭이가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왕중양이 어깨를 들먹이는 원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