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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32편 (32/60)

2026-09-30 18:55:31 조회 12
우리 모두 힘을 모아 금나라 오랑캐를 물리칩시다!" "왕 공자의 말이 옳소!" "백번 천번 지당한 말이요!" 왕중양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곧 와와 하는 함성으로 무림대회의 꽃을 피우려고 할 때였다.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일제히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금나라 기병들이 뿌우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역적 놈들을 한 놈도 놓쳐선 안 된다!" 무리의 맨 앞에서 달리고 있던 한 사내가 이렇게 외치자 곧 넓은 대열로 벌어졌다. 그러더니 물샐틈없이 포위망을 좁혀 왔다. "개방의 형제들이여! 어서 저 놈들을 막아냅시다!" 홍칠이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개방 사람들은 저마다 타구봉을 머리 위로 휘두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개방 사람들이 움직이자 금나라 기병 쪽에서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활을 쏘아랏!" 핑 핑 핑…… 빗발치듯 화살이 개방 사람들을 향해 쏟아졌다. "욱!" "악!" 화살에 벌써 개방 사람 몇몇이 고꾸라졌다. "개방의 형제들이여! 저 금나라 오랑캐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 중원 사람들은 끝장이다. 우리는 싸우다 죽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개방의 장로인 노옥기(魯玉基)가 사람들을 향해 다짐했다. 이 노옥기가 선두에 서서 돌진해나가자 개방 사람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타구봉을 휘둘러댔다. 와아 하는 함성이 영주 벌판을 뒤흔들어 놓았다. 다시 장대비 같은 수많은 화살들이 쏟아졌다. 개방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섭게 돌진했다. 그러나 그만 선봉에 서서 타구봉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막던 노옥기가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뒤에서 그를 따르던 개방 사람들이 얼른 쓰러진 노옥기를 뒤쪽으로 옮겨 놓았다. 화살은 정확히 그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지나갔다. 누군가 다가와 화살을 뽑으려 하는데 홍칠이 막았다. "화살을 뽑는 즉시 장로는 죽게 돼!" 노 장로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홍칠을 찾았다. "방주님, 저 개만도 못한 금나라 놈들에게 절대로 굴복해선 안 되오." "염려마시오. 우린 하나가 남고 그 하나가 목숨을 다하는 순간까지 싸울 것이오." 홍칠이 새롭게 의지를 다지자 개방 사람들이 하나로 입을 모았다. "우리들도 최후의 하나가 될 때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습니다!" 노 장로가 손을 허공으로 내저으며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홍칠골, 내 아들에게…… 내 아들에게 금나라 놈들과 싸우다 죽었으니 꼭 원수를……." 노 장로는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노 장로가 말한 아들이란 개방의 사대 제자인 노유각(魯有脚)을 말한 것이다. 홍칠은 벌개진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끈 쥐어진 그의 주먹에는 어느 때보다 강한 기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개방 사람들은 계속 화살에 하나 둘 넘어갔다. 금나라 기병들은 조금 거리를 둔 상태로 화살만 퍼부어 대고 있었기에 개방 쪽이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왕중양 앞으로 온 모용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큰형님!" 왕중양도 모용준의 목소리에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를 절감했다. 굳게 다문 입을 약간 움찔거리던 왕중양이 화살에 쓰러져 가는 개방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래, 저 금나라 오랑캐들을 어떻게 쳐없앨 수 있겠는가?" 모용준이 격분한 가슴을 주체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장수로 보이는 놈을 먼저 쳐야 나머지들이 물러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보다 앞서 누군가 금나라 기병들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게 아닌가. "야앗!"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어느새 공중으로 튀어오른 한 물체가 쉬지 않고 회전을 하며 그쪽으로 날아갔다. "나를 막는 놈들부터 목을 따줄 것이다!" 드높은 공중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대단한 내공이었다. 그 물체가 바닥으로 막 내려앉을 때였다.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다시 치솟은 그는 가까이 있던 금군 중 한 놈의 머리를 단칼에 날렸다. 놈의 머리는 바위처럼 데굴데굴 굴러 저 멀리 달아났다. 그가 비로소 땅에 사뿐히 내려앉자 왕중양의 눈빛이 빛났다. 얼굴을 가린 여협이었다. 반벽산장에서 만난 무공이 뛰어난 복면의 여인, 그러나 왕중양은 그 이상은 알지를 못했다. 왕중양은 여협의 무공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놀라움에 넋을 놓고 있던 금나라 장수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활을 더 쏴라! 어서!" 이번엔 복면을 한 여협, 즉 임조영에게로 화살이 쏟아졌다. 임조영이 얼른 몸을 피하긴 했지만 차츰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화살과 창을 피하기 위해 공중으로 뛰어오른 임조영은 곧 지쳤다. 그녀는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자 검으로 자신을 겨우 가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또 한차례 하늘을 덮을 듯한 화살들이 임조영에게로 발사되었다. 그녀는 검을 회전시키며 화살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그중 화살이 한 개가 득달같이 날아와 다리에 푹 박혔다. 그녀가 한쪽으로 막 쓰러지려고 할 때였다. "간다!" 왕중양이 뛰어들었다. 그가 쓰는 경공은 실로 놀라운 경지에 이른 절기였다. 이미 그는 선천신공에 익숙해진 몸이라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경공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 그는 임조영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고는 즉시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하지만 왕중양이 향하고 있는 곳은 금군의 장수 막아발(莫兒勃)이 있는 쪽이었다. 막아발은 중원 무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극도로 거만한 작자였다. 그는 엉뚱하게도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는 왕중양을 보자 깜짝 놀랐다. 다급해진 그가 부하들에게 화살로 방어하라는 말을 외치려는데 번쩍하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치듯 엄청난 기운이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으로 내리꽂히는 게 아닌가. 그 괴력이 떨어진 곳을 보니 한 길은 족히 파여 있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요행히 비껴 갔기에 망정이지 머리에 맞았더라면 살아 남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사지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뒤늦게 그는 왕중양이 내뿜은 장력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정신을 못 차렸다. 그는 주위를 얼른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기 앞으로 날아오던 왕중양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어서 활을 가져와랏!" 곧 곁에 있던 친병(親兵)이 무지막지하게 생긴 활을 대령했다. 이 활은 대여섯의 장성들이 힘을 모아 당겨도 끄덕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대단한 활이었다. 활을 건네 받은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 왕중양을 찾았다. 왕중양은 엉뚱하게도 벌써 반대쪽에 내려 유유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왕중양 곁에는 다리에 화살이 박힌 채로 비스듬히 엎드려 있는 임조영도 보였다. "네이놈! 어디 이 살에 저승 구경이나 하거라!" 활에 걸린 화살 역시 보통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겨냥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로 서둘러 그 화살을 날렸다. 이 막아발의 활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있는 실력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도 날아가는 매를 쏘아 떨어뜨린다는 금군의 신궁수(神弓手)였다. 모두들 화살이 날아가는 쪽을 주시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막 왕중양의 가슴에 꽂힐 찰나였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왕중양은 화살촉이 가슴에 박히려는 순간 가볍게 한 손으로 툭 내쳤다. 더욱 놀라운 일은 방향을 튼 그 화살이 왕중양의 무공에 감탄해 입을 벌리고 서 있던 한 금나라 군사의 입 속에 박힌 것이다. 놈은 졸지에 당한 일이라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자신의 화살이 헛물만 켜자 대노한 막아발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가 너를 맞히지 못하면 네 놈의 아들이다!" 다시 화살을 뽑아든 그가 시위에 천천히 올려 놓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살기에 젖어 이글이글 불길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니!" 그 불길이 일순 사그라들었다. 눈앞에 버티고 서있던 왕중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화살에 맞아 고통을 참고 있는 임조영만 있을 뿐 왕중양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막아발이 막 고개를 들려는데 다시 청천벽력같은 굉장한 소리가 귀청을 뚫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그의 왼쪽 어깨를 스쳐 땅에 꽂히긴 했지만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막아발은 그 충격으로 저도 모르게 방향 없이 시위를 놓았다. 피웅 하며 화살이 하늘 높이 솟았다. 하지만 구름에 닿을 듯 치솟은 왕중양이 내려오면서 검으로 그 화살을 반으로 보기좋게 반으로 갈랐다. 촉이 달려 있는 쪽은 땅에 떨어져 깊숙히 박혔고, 다른 한 쪽은 어디론가 까마득히 날아가 찾을 길이 없었다. 이윽고 땅에 소리 없이 내려앉은 왕중양이 검으로 닥치는 대로 금군의 머리를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금군의 머리가 피를 뿌리며 사방으로 떨어져 굴렀다. 왕중양의 검은 보이지 않았고, 휙 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만 들려 왔다. 그때마다 영락없이 금군의 머리가 떨어져나갔다. 금군들은 곧 전의를 잃고는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르렀다. 말을 타고 있던 기병들과 그 뒤를 따르던 군사들 할 것 없이 우왕좌왕하며 제 살길을 찾기에 바빴다. 때를 기다려 홍칠이 소리쳤다. "추격이다! 저놈들의 목을 남김없이 쳐라!" 금군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있던 무림 호걸들은 신명이 나 앞으로 돌진해갔다. 이들은 각기 손에 들고 있던 병장기를 휘둘러 금군의 목을 잘랐다. 대열에서 물러나 있던 막아발이 눈을 부라리며 왕중양을 향해 비황대우(飛惶大羽)를 한 발 쏘았다. 왕중양은 무려 여섯 명의 금군을 상대로 도륙에 정신이 팔려 있어 미처 그 화살을 발견하지 못했다. 화살은 왕중양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얏!" 비황대우 화살은 왕중양의 몸에 닿기 직전에 툭 힘없이 떨어졌다. 다리에 박힌 화살을 뽑고 번개같이 달려온 임조영이 막아낸 것이다. "고맙소!" 왕중양의 말에 사실 임조영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가 못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 그런 것이었지만 생면부지의 남에게 감사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막아발은 매번 쏜 화살이 허탕을 치자 고삐를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렇지만 어쩐 일인지 말이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지를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기이한 일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던 막아발의 눈이 휘둥그러졌다. 체구가 우람한 한 사내가 말꼬리를 잡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한 막아발은 약이 올라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꼼짝을 하지 않았다. "내빼긴 어딜 내빼려고 그래?" 노완동이었다. 더욱 애가 탄 막아발이 힘껏 말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히히힝! 말이 별안간 앞발을 들더니 발버둥을 쳤다. 말은 뒷발이 땅에 박혀 있는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막아발의 눈이 더욱 튀어나올듯 커지고 만 것은 이때였다. 자세히 보니 말 뒷다리에 예리한 비수가 꽂혀 있는 게 아닌가. 말은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버둥거렸던 것이다. 노완동이 잡고 있는 말꼬리는 말에게 더욱 고통을 주려는 속셈이었다. "이 치사한 놈아! 그래 내 말에 칼을 꼽고도 무사할 것 같더냐?" 막아발이 악에 바쳐 낭아봉(狼牙棒)을 노완동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려고 높이 쳐들었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에 온 정신을 쏟고 있던 노완동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낭아봉이 노완동의 정수리에 내리꽂히기 직전이었다. 임조영에게 한 번 도움을 받은 왕중양이 똑같이 몸을 던져 이번엔 노완동을 구했다. ㅉ 굉음을 내며 막아발의 낭아봉이 왕중양의 검에 걸렸다. 자기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놀란 노완동이 엉겹결에 잡고 있던 말꼬리를 놓쳤다. 그러자 말이 사납게 날뛰며 사정없이 발길질을 했다. 히히잉! 히잉!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말이 방향 없이 날뛰자 타고 있던 막아발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어, 어!" 막아발은 한동안 미친 듯 날 뛰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허공으로 한차례 솟구치더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 품속에 있던 비수를 꺼내든 노완동이 그를 향해 비수를 던졌다. 비수는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휘젓던 막아발의 명치에 그대로 박혔다. "으……." 막아발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러자 기세가 꺾인 금군은 서둘러 후퇴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전사자만을 남기고 멀리 물러가는 금군을 바라보던 홍칠이 입을 열었다. "왕 공자님, 왕 공자님의 무공은 천하의 으뜸입니다. 우리 중원이 금나라를 막아내는 일에 공자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나 왕중양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손을 저었다. "아니요. 그런 말 마십시오. 나는 덕도 없고 능력 또한 부족하여 그런 대사를 이끌 수가 없소이다. 제 생각으로는 개방에서 영도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곁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웅성웅성 저마다 풀리지 않는 의구심으로 한마디씩 걸고 넘어졌다. 이들은 아직 무심이 남기고 간 말 때문에 홍칠에 대한 의문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가뜩이나 세력이 비대해진 개방이 주도를 한다면 천하 제일의 무리가 될 것 같아 미심쩍은 태도를 비쳤다. 그중 한 사내가 왕중양을 향해 정중히 권고했다. "금나라 오랑캐를 물리치는 공자님을 보면서 저희 결심했소이다. 두말 마시고 맹주가 되어 오랑캐 무리를 전멸하는데 앞장을 서 주시오!" 그러자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왕중양이 맹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홍칠이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전음입밀공을 써 왕중양에게 전했다. "왕 공자님이 사양하신다면 이번 대회는 무산돼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중원 사람들 뿐만 아니라 조상에 대한 죄를 짓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왕중양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과연 그럴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가 망설여졌다. 왕중양도 홍칠에게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허나 과연 내가 중원 무림의 맹주가 될 자격이 있겠소이까?" "우리 36만의 개방이 왕 공자님의 뒤를 받치고 있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소? 그리고 공자님의 무공을 크게 떨치지 않고 그대로 썩힐 생각입니까?" 왕중양이 한동안 두 눈을 지긋이 감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는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대의를 생각한다면 기꺼이 맹주가 되어 오랑캐 무리를 쳐부수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왕중양이 이윽고 눈을 떴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왕중양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좋소!" 비로소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옆에 있던 홍칠도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중양이 우리 천하 무림의 맹주이다! 왕중양을 옹호하자!" 한 사내가 외치자 모두들 한뜻으로 왕중양을 향해 예를 올렸다. 왕중양은 이들과 삼혈지맹(三血之盟)을 맺고 다 함께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향해 맹세를 했다. "왕중양을 비롯한 중원의 모든 사람들은 중원의 금수강산이 금나라의 마수에 하루하루 썩어 들어가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금일 영주 들판에서 이 맹세를 하나이다. 우리는 종남산 사람 왕중양을 맹주로 삼고 일심으로 금나라 오랑캐를 쳐 물리치며 우리 대송 강산을 지키고 수복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하늘은 가차없이 천벌을 내려 엄히 다스려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나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는 환성을 내질렀다. 차츰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는 왕중양이 단 위로 뛰어올라 손을 들었다. "우리 금수강산이 금나라에 유린당하고 있는 이때, 나 왕중양은 이제부터 여러분과 더불어 한 뜻으로 금나라 오랑캐를 쳐없애겠소이다. 만약 오랑캐들을 치지 못하면 나 왕중양은 스스로 활사인 묘에 들어가 영원히 빛을 보지 않겠소이다!" 이같은 왕중양의 결의에 찬 외침에 사람들은 모두 격정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러나 임조영은 왕중양의 결심에 긴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이미 금나라가 대송의 심장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독을 내리고 있는 처지인데 과연 이 무리를 이끌고 대의를 성사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은……!" 왕중양의 안색이 묘하게 변해 갔다. 우연히 임조영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살에 맞고 또 자신을 구하려고 몸을 날리는 가운데 임조영을 감추고 있던 면사포가 벗겨 버렸던 것이다. 임조영 역시 경황이 없어서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저 여협이…… 나의 셋째 동생이란 말인가!' 왕중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굳은 상태로 서 있었다. 제19장 독사와의 사투 임조영의 정체를 알게 된 왕중양의 안색이 더욱 상기되어 갔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와 의형제를 맺은 임조영이 여인이었구나! 셋째 동생이 사내가 아닌 여인? 그것도 천하 절색,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니!' 남장을 하고 있었을 때의 임조영과는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왕중양은 남장을 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임조영도 자신을 바라보는 왕중양의 시선이 따가워 주위를 살피다가 그만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면사포가 벗겨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녀도 하는 수 없이 왕중양에게 다가갔다. "왕 공자님!"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형님으로 부르리라 속으로 다짐했었지만 엉뚱하게도 이같은 말이 새어 나ㅇ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판단한 왕중양이 임조영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셋째, 유일민을 묻어야겠소. 그러니 나를 좀 도와주시오." "알겠어요." 두 사람은 중원 사람들과 훗날을 기약하고는 작별을 나누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유일민의 시신을 안고서 발길을 재촉했다. 이들은 곧 영주 벌판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어왔다. 볕 좋고 바람이 잘 드는 양지를 골라 유일민을 묻어주었다. 그리곤 칼로 '유문여 일민지묘(劉門女 一珉之墓)'라고 새긴 작은 묘비도 세웠다. 제를 올리고 두 사람이 돌아서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휘익 휘익 하는 휘파람 소리가 나더니 수풀을 헤치며 수많은 뱀들이 두 사람을 향해 기어오는 게 아닌가. 왕중양이 급히 임조영의 팔을 잡고는 다른 쪽으로 뛰었다. 이미 사방은 뱀 천지였다. 낮게 엎드려 기어오는 뱀은 마치 흙탕물이 넘실대는 것처럼 보였다. 흰 무늬가 있는 까만 뱀이었는데 크기도 보통의 것들보다 엄청타게 컸다. 뱀들은 대가리를 꼿꼿이 쳐들고는 붉은 혀를 냄름거렸다. 쉭쉭 소리를 내며 뱀들이 더욱 집요하게 이들에게로 몰려들었다. "저기를 봐요!" 임조영이 가리킨 곳에서 한 사내가 실실 웃으며 걸어왔다. 그 사내는 뱀을 부리는 사소(蛇嘯)라 일컫는 작은 퉁소를 불고 있었다. 그 소리 때문인지 뱀들은 포악하게 대가리를 쳐든 채 몰려들었다. 흔들흔들 춤을 추는가 싶더니 뱀들이 서로 엉키어 두 사람 앞에까지 이르렀다. 역한 뱀의 비린내 때문에 고개가 돌아갔다. "어서 죽여 버려요!" 임조영이 징그러운지 얼굴을 찌푸리며 왕중양에게 외쳤다. 왕중양이 뱀을 향해 장을 날렸다. 그러자 서로 엉켜 있던 여러 마리의 뱀이 순식간에 피를 뿌리며 산산조각이 났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지?" 사소를 불던 사내가 어느새 나무 위로 올라앉아 태연하게 아래를 보며 지껄여댔다. "그런 너는 누구냐? 누군데 사악한 뱀으로 사람을 해치려 드느냐?" 왕중양이 나무 밑둥이 뒤척일 만한 큰소리로 되물었다. 사내가 껄껄 웃어대더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거만을 떨었다. "나? 난 영주에서 뱀을 부리는 사람으로 통하지. 이름은 사가자(蛇 子)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시원치 않은 것 같은데, 그 주제에 무슨 천하 무림의 맹주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냐? 오늘 이 사가자가 단단히 버릇을 고쳐 주겠다!" 왕중양이 쓴웃음을 지으며 읍을 했다. "나 왕중양은 스스로가 무림의 맹주가 된 것은 아니오. 난 사람들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던 거요." "하하하! 금나라고 송나라고 난 흥미없어. 난 그저 저 뱀들을 데리고 놀면 그뿐이라고. 그대도 제 코나 닦으면서 놀 것이지 왜 나서는 거야?" 임조영이 가소롭다는 투로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는 사가자를 향해 한마디 쏘아댔다. "그럼 당신이 천하 무림의 맹주라도 되겠다는 거요?" "히히히, 난 그런 생각은 절대 안해. 그런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임조영이 다시 위에다 대고 물었다. "그게 누구요? 천하 무림의 맹주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요?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기꺼이 맹주로 받들겠소!" "자격이야 저 왕중양이 없겠지. 그 분을 따라올라면 아직 멀었지." "그 사람도 무림대회에 그도 참가했나요?" "허허, 그분이 그런 시시한 대회나 기웃거리는 소인인 줄 알아? 그분은 사실 맹주 자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아. 다만 막중한 소임이 있어 그것을 이루려고 보니 당분간 필요할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