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30편 (30/60)
챵바가 위를 올려다보는 찰나 눈앞으로 검은 물체가 쏟아졌다. "욱!" 챵바의 면상으로 왕중양의 발바닥이 내리꽂혔다. 땅으로 박힐 듯 주저앉은 챵바가 벌떡 일어서며 자세를 다졌다. 그는 기를 모으더니 왕중양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챵바는 몽골에서 알아주는 장사였다. 왕중양은 그리고도 몇 번을 더 치명타라고 여길 만한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그는 끄덕하지 않았다. "왕 공자, 내가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이 아이는 내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난 원래 이런 겁많고 경험 없는 여인은 질색이거든. 그래서 네 놈에게 던져 줄 마음인데 어떤가?" 무심이 떠벌리는 말에 왕중양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유일민이 다급하게 외쳤다. "공자님, 이 사람 말을 듣지 마세요!" 유일민의 말 속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예상이 되었지만 왕중양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유일민을 되찾고 나서 뒷일에 대해 처신할 생각이었다. "좋다. 네 놈 말을 따르겠다." "헌데 한 가지 조건이 있소이다." "조건이라니?" "간단해. 이번 무림대회 때 우리에게 접근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야 한다. 알겠나?" 무심의 야심을 알아버린 왕중양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들은 무림대회에 참가하여 중원 무림의 패권을 거머쥐려고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왕중양을 비롯해 고수들이 이에 대해 반기를 들고 나설 거라 판단하고 먼저 손을 쓰려는 속셈이었다. 왕중양은 일단 내친 일이라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좋소. 그렇게 하리다." 그런데 무심은 간괴한 수를 쓰려 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지금 넘겨주지는 않겠소이다. 나중에 그대가 딴 마음을 먹으면 어찌하겠소? 행여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무심이 갑자기 화살 하나를 쥐고는 작신 반으로 부러뜨렸다. "이렇게 될 것이다!" 무심이 신호를 보내자 다시 수레가 사라졌다. 무림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영주 벌판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히 대단한 대회임을 입증해 주고도 남았다. 수 천을 헤아리는 무림 사람들이 앉아서 개회를 기다렸다. 흙으로 쌓아올린 단상 위로 한 젊은이가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고는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전 개방의 홍칠이라는 사람올시다. 우리 무림 사람들이 이렇게 오늘 모이게 된 것도 인연인가 합니다. 여러분들을 이곳에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나라에 대한 방책을 의논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무림의 인사들은 대부분 중원 사람들이 아닙니까? 금나라 오랑캐들이 우리 강산을 마음대로 짓밞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지당한 말이오!" "그말에 대찬성이오!" 홍칠의 말에 여기저기서 뜻을 모으려는 함성 소리가 터졌다. 약간 흥분을 듯한 홍칠이 사람들을 넓게 둘러보았다. 그는 강한 내력을 지니고 있어 보통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그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우리 개방은 여러분들과 마음과 힘을 합쳐 금나라를 쳐부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잃었던 대송(大宋) 강산을 수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다시 사람들의 피끓는 절규가 영주 벌판을 메아리쳤다. "금나라 오랑캐를 내몰자!" "잃어버린 강산을 다시 찾자!" "아예 놈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 홍칠과 사람들의 힘있는 외침을 보고 있는 왕중양의 가슴도 서서히 불이 붙어 갔다. '나 왕중양만 뜨거운 피를 갖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오늘 보니 저 홍칠의 가슴은 더욱 뜨거운 피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무공만이 뛰어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우국지심도 대단해. 홍칠이 말대로 무림 인사들이 모두 항금(抗金)의 깃발 아래 하나로 묶어진다면 금나라쯤은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는 사기를 다지는데 갑자기 껄껄껄 대는 냉소가 터졌다. 그 소리는 보통의 웃음과는 달리 몹시 귀에 거슬렸고 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누구얏! 어느 놈이 비웃고 나서겠다는 거야?" 누군가 소리치자 웃음 소리가 뚝 멈췄다. 그리곤 한 사내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더니 빠른 속도로 수천이나 되는 큰 무리의 주변을 서너 바퀴 쯤 돌고 나서 홍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 무공은 실로 기이한 것이라 사람들의 눈은 찢어질듯 커졌다. 빠른 속도로 무리의 주변을 돌던 그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면서 홍칠 앞으로 어느 틈엔가 당도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같은 경공을 처음 보기 때문에 그가 모르긴 해도 대단한 고수일 거라 추측들을 하는 눈치였 다. 그가 홍칠이 서있는 곳으로 훌쩍 몸을 날려 올랐다. 체구가 우람한 것이 홍칠보다 머리 하나는 모자란 난쟁이, 다름아닌 사자우였다. "너희들이 모두 중원 사람들이 맞는가? 중원이고 나발이고 자기 일들이나 할 것이지 대송이 어떻고 금나라가 어떻고 웬 말들이 이리도 많으냐!" 사자우는 무림대회를 무산시키려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수근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 왔다. "사자우 이놈아! 그럼 넌 어버이의 일에도 고개를 돌리겠다는 말이더냐?" 누군가 이렇게 받아치자 우와와 하는 폭소가 뒤를 이었다. 화끈 달아오른 사자우가 가슴을 부풀렸다. "어느 놈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사자우가 목줄기로 툭툭 힘줄을 새기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시 그가 으르릉거렸다. "어느 놈이든 또 아가리를 놀려댔다가는 확 찢어 버릴 것이다!" 창끝 같은 눈초리로 사자우가 욱박지르자 코앞에 있던 몇몇은 기가 죽어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래, 어디 한 번 찢어보시지." 누군가 이렇게 반발을 했지만 자신이 없는지 들릴락말락한 작은 소리로 겨우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구. 아 제 먹고 살길 찾으면 그만이지, 송나라가 어떻고 금나라가 어떻고 왜 이다지도 말들이 많아? 어느 나라가 세워지든 백성은 백성이라고. 백성들은 그저 배부르게 먹여주면 그만이야.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금나라가 더 좋은 세상일지도 모르지." 사자우가 제 멋에 빠져서 혼자 뇌까리고 있는데 누군가 찬물을 확 끼얹졌다. "이 더러운 놈아! 냉큼 내려오지 못하겠어?" 이렇게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른 것은 산서(山西) 연풍표국(連風표局)의 국주인 연천성(連天城)이었다. 연씨네 쌍필(雙筆)의 계승자이기도 한 그는 붓자루 두개로 백여 명을 물리친다는 유명한 고수에 속했다. 사자우의 안면 근육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연천성과 한동안 눈싸움을 벌이던 사자우가 몸을 훌쩍 날리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사람들의 머리를 마치 돌다리인 양 밟으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작은 체구인데다가 날렵하기 그지없어 그의 동작은 수면을 스치는 새 같았다. 머리를 밟힌 사람들이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연천성이 막 사자우의 돌진을 막아 서려고 할 때였다. "우욱!" 어느새 날렸는지 연천성은 사자우의 장을 맞고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 부, 분하다……." 치명타였다. 연천성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사자우의 일격에 그만 숨통이 끊어졌다. 그의 제자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수습을 하려 했지만 이미 절명을 한 뒤였다. 그의 아들인 연성(連城)이 연설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 역시도 연천성 못지않게 붓을 잘 쓰는 고수였다. "이 난쟁아! 우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쓰러진 연천성 곁에 있던 두 명의 제자들이 쌍필을 꺼내 들며 합세했다. 사자우가 코웃음을 쳤다. "흠, 이 미련한 놈들아, 내가 그만큼 살아갈 이치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이냐?" 왕중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천하의 악인이 되려고 자청한 사자우를 응시했다. '그의 무예 역시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연씨네 세 사람의 목숨도 바람 앞에 등불의 신세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 사자우의 악랄함에 사람들의 피해가 늘어날 테니까…….' 왕중양이 막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허, 왕 공자께서는 어디를 가시려나?" 무심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유유작작한 품으로 왕중양을 노려보았다. 그의 곁에는 유일민의 모습도 보였기에 왕중양은 그만 주춤하고 말았다. 연단 위에서는 사자우와 연씨네 세 사람이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연단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사람들이 연씨네를 향해 기필코 물리치라는 말을 던지며 응원을 했다. "간다!" 연성이 두 개의 붓을 나누어 쥔 채로 사자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사자우의 눈과 사타구니를 겨냥해 붓을 찔렀다. 연천성의 제자들도 각각 붓을 세우고는 사자우의 측면을 노렸다. 이같은 싸움은 사실 무림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하지만 사자우가 보인 태도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은 오히려 열이 아니라 백이라도 나서 그를 굴복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자우의 무공은 생김새와는 딴판이었다. 연성과 제자들의 붓끝은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강력한 장벽에 부딪쳤다. 연성이 있는 힘을 다해 붓 끝에 기를 모았지만 더는 들어가지가 않았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사자우가 양손을 내저으며 이들의 붓을 옆으로 쳐냈다. 그런데 느닷없이 홍칠의 손이 불쑥 사자우에게로 날아들었다. "넌 또 뭐냐?" 홍칠의 손에서 엄청난 기를 감지한 사자우가 내심 놀라 옆으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홍칠의 손이 몸에 닿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릴 것이라 판단한 사자우는 어쩔 도리가 없는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연씨네 세 사람은 홍칠의 출현으로 일단 목숨은 구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엉뚱하게도 자신들을 겁내는 줄로만 안 모양이었다. "사자우, 도망치는 꼴이 우습구나?" 기고만장해진 이들이 사자우에게로 덮쳐 들려고 하자 재빨리 홍칠이 가로막았다. "복수는 일단 회의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저 사자우란 작자는 아주 도망치지는 않을 위인이니 그때까지 기다리시지요?" 잠시 앞뒤를 재보던 연성이 황급히 연단 아래를 향해 사람들에게 따져 물었다. "이게 무슨 무림대회요? 내 아버님이 악인의 손에 죽어 갔는데도 당신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소. 당신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을 수 없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홍칠의 덕분으로 목숨을 구한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연성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 사태를 얼른 수습하려는 의도로 홍칠이 사자우를 향해 큰소리로 경고했다. "사자우, 사람을 죽이고도 살아 남을 생각은 못할 것이다. 넌 오늘 이곳에 모인 천하의 영웅들 앞에서 네 죄를 빌게 될 것이다!" 그러자 사자우의 콧에서 무서운 바람이 뿜어졌다. 어찌나 콧바람이 센지 발밑의 땅이 움푹 파일 정도였다. "흥,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진 백성이라 자부하는 것 같은데 흰소리 말아라! 저기에 있는 연씨네만 해도 양민들의 땅을 빼앗고 약탈을 놀이삼았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제는 우리 가문에 대해 도전을 하겠다는 거냐?" 연성이 이를 부득 갈며 사자우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흐흐, 넌 사람들의 피를 뽑아 주둥이만 살찌운 모양이구나. 여기 모인 사람들도 잘 들어라. 자신이 죄가 없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어디 있으면 나에게 덤벼봐라!" 그러나 사자우를 향해 선뜻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연단 위로 날아들며 소리쳤다. "하하핫! 그렇다면 내가 과연 무슨 죄를 지었는지 한 번 말해 보시지?" 그는 유생 차림에 자색 옷을 걸친 선비였다. 사람들은 이 선비가 자신들의 틈을 비집고 연단을 향해 빠르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입을 떠억 벌렸다. 괴상한 보법이었는데 사자우가 부린 것과는 또 다른 아주 날쌘 동작이었다. 사자우는 그러나 이 사람을 쉽게 알아보았다. 그의 눈매가 심하게 떨렸다. "황약사(黃藥師)……!" 그러자 연단 아래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차츰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도화도 도주 황약사란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황약사, 내가 너 따위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정당한 이유를 댈 줄 알아야 하는 법!" "훈계를 하려거든 네 놈의 제자들 앞에서나 씨부려라." "어허, 네 놈이 제법이로구나!" 이들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서로를 노려보다가 곧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 걸음을 막 내딛은 황약사가 얼른 장을 날렸다. 낙영빈분(落英빈紛)이란 초수였다. 이 황약사의 무공은 모두 동해 도화도에서 스스로가 개발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황약사는 한 가지 풍류적인 것을 좋아해 그의 초수들은 내력은 강하면서도 겉으로는 매끄러운 멋도 지녔다. 어찌보면 천상의 선녀가 내려와 소맷자락을 나풀대며 우아한 춤이라도 추는 것과도 흡사했다. 그러나 그렇게 부드러운 초수 속에는 예리한 기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사자우는 잘 알고 있었다. 사자우의 동작도 다른 때와는 달리 더욱 날렵해졌다. 연거푸 장을 날리며 돌진해 들어오는 황약사를 피해 공중으로 솟구친 사자우가 비웃음을 흩뿌리며 사뿐히 내려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기가 맴돌았다. 사람들은 숨을 죽여가며 이들의 초수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이놈, 네 놈은 지금껏 사람을 해치지 않았단 말이더냐? 대력(大力) 허패(許覇)도 네가 붙잡아갔지 않았느냐? 말도 못 하게 혀를 잘라버리고 도화도로 잡아간 것이 네 놈이 아니면 누구였느냐?"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자우의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일시에 굳어졌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대력 허패를 기억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였을 뿐 아무도 그 행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동정호 기슭에서도 그를 찾아볼 수가 없었고 남경성 밖에서도 그를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사자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약사가 잡아갔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막상 황약사의 표정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렇다. 네 말대로 그는 지금 도화도에 있지. 난 앞으로 어떤 놈이든 허패와 같이 악한 짓을 일삼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혀를 잘라버리고 도화도로 끌고 갈 생각이다. 한 가지 네 놈에게 알려줄 말이 있다. 그 허패는 지금 도화도에서 매일 꽃밭이나 가꾸며 편하게 지내고 있다. 하하핫!" 황약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입으로는 항상 정의로운 소리를 떠들지만 속에는 온통 망나니 근성이 들어 있는 놈들은 내 말을 잘 듣거라! 너희들도 어느 날 갑자기 강호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도화도에 끌려가 나무를 심고 섬을 지키며 한평생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감히 황약사를 향해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끝까지 황약사와 대적하고 나선 것은 사자우였다.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너 또한 사람을 해쳤거늘 감히 누구를 향해 꾸짖는단 말이냐?" "글쎄, 우하하핫!" 웃음이 채 멎기도 전에 사자우의 손이 날아왔다. 타탁!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손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이들은 싸움닭이 상대를 향해 날갯짓을 하듯 서로의 몸을 날렵하게 던졌다. "황약사, 나하고 경공(輕功)을 겨뤄보지 않겠나?" 순식간에 몇십 합을 대결하고 나서 갑자기 사자우가 실실 웃어가며 황약사에게 제의를 해왔다. 그 표정에는 감히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조소가 깃들어 있었다. "네 놈이 산꼭대기로 오른다 해도 난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 사자우가 먼저 해라도 만질듯 높이 몸을 높이 공중으로 띄웠다. 그러자 황약사도 소맷자락을 나비의 날개처럼 퍼득이며 그의 뒤를 쫓아 올랐다. 이들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갔다. 이들이 차츰 하나의 점으로 사라지자 홍칠이 시선을 거두며 사람들을 향해 섰다. 그리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게 한 후 입을 떼었다. "자, 이젠 우리의 대사를 위해 다시 의견들을 나눕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탄성이 끊이질 않았다. 크게 나누어 두 종류의 탄식이었는데 하나는 사자우와 황약사의 싸움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아쉬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무공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을 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 때문에 그같은 우쭐거림이 일시에 허물어졌다는 허탈함이었다. 그래서였는지 홍칠이 다시 무림대회의 열기를 북돋우려고 하는데도 모두들 열적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홍칠이 연단에 서서 계속 사람들의 술렁임을 바로 잡고 회의를 진행하려 하자 누군가 시비를 걸어 왔다. "너 홍칠은 개방의 방주 노릇도 못하면서 천하 무림의 맹주로 나서겠다는 거냐?" 둘러보니 차림새를 보아서는 황약사 못지않은 풍류남아로 비쳤는데 어딘가 위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심 공자……, 무심 공자다!" 그를 알아본 사람이 외쳐댔다. 무심은 어깨가 으쓱해져서 거만한 걸음으로 사람들의 사이를 헤쳐 나갔다. 곧 연단 위로 올라와 홍칠 앞에 선 그가 건성으로 읍하며 말을 건넸다. "홍방주님, 나도 이 위에 올라서 보니 누구 못지않은 대장부처럼 여겨지는데 그래. 나를 꺾을 자신이 있소?" 무심이 거들먹거리며 홍칠과 아래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개방은 맹주가 되려는 마음으로 이 무림대회를 연 것은 아니오. 무림대회를 통해 우리를 이끌 수 있을 만한 분을 세워 놓고 금나라를 치자는 것이오." "건방진 소리. 너 홍칠은 전임 방주 소씨 거렁뱅이보다 공을 더 세워 그 자리에 오른 치사한 놈이 아니더냐?" 소씨거렁뱅이로 말하자면 홍칠의 사부인데 어찌 그를 넘볼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행여 어떤 근거가 있으니 저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품었다. 아무리 침착한 홍칠이라도 무심의 이같은 망발에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네 놈의 눈알에는 내가 사부님을 해치는 사람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느냐?" "글쎄, 그런 일은 나보다는 네 놈이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러나 한 가지만은 명백하다. 네가 이번 무림대회를 소집한 목적이 무림의 맹주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자 함이 아니더냐?" 유들유들 기름칠을 한 듯한 무심의 말재간에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그와 언쟁을 하는 것은 괜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한 홍칠이 자세를 낮추며 기를 모으려고 하자 무심이 사람들을 향해 지껄여 댔다. "저 보시오. 내가 저놈의 비밀을 까발기려 하자 날 죽이려는 게 틀림없지 않소? 그러나 저놈이 날 죽이면 자기의 죄를 만천하에 대고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 난 두렵지 않소!" 사실 무심의 술수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게 홍칠의 속마음이었다. 괜한 일을 벌여 사람들에게 나쁜 인식을 심어 주게 된다면 앞으로 있을 대사에도 지장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다. 그럼 네 놈이 밝히겠다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어서 말해 보아라?" 홍칠이 자신의 계산대로 쉽게 꼬리를 내리자 무심의 배포는 두둑해졌다. "네 놈이 저지를 죄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도 넌 계속 시치미를 뗄 셈이냐?" 그런데 무심은 상세하게 밝히지는 않고 이렇듯 모호한 말로 질질 끌어가려 했다. 그러나 아직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의혹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무심은 그런 궁중심리를 십분 이용하려는 심보였는지 다시 입을 놀려댔다. "나 역시 죄를 짓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보다는 네 놈이 더 독하고 살떨리는 짓거리를 많이 저질렀을 게다." 그는 계속 양팔을 어지럽게 휘저으며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18장 무림의 맹주 무심이 얼마나 열심히 혀를 놀려댔는지 차츰 사람들의 의심은 짙어만 갔다. 처음 몇몇 정도만이 홍칠을 의심하는 눈치였는데 이젠 거의가 그런 쪽으로 몰리는 형국이었다. '아무래도 홍칠이가 이 무림대회를 소집한 이유에는 남모를 야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 무심의 이같은 생각은 집요하게 혀끝으로 옮겨졌다. "난 네가 꿈을 꾸면 그 해몽까지 하는 사람이다. 네가 한 짓에 대해서도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처럼 훤히 알고 있지만 네 놈의 꿍꿍이속도 이미 알고 있다. 네 놈은 지금 겉으로는 우국지사의 탈을 쓰고 있지만 어림도 없다. 천하의 영웅들을 속이기가 그리 쉬운 줄 알았더냐?" "네이놈! 네 놈이 몽골족의 앞장이라는 사실은 어린 동자들도 아는 사실이다. 요사스런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힐 생각 말고 어서 꺼져 버려라! 이 무림대회를 망쳐 종국에는 금나라 오랑캐 놈들을 돕자는 짓이 아니겠느냐?" 홍칠도 무심의 음모를 파헤쳐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려 했다. "금나라를 위해 무심 공자가 나서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 일이란 말이냐?" 말뚝에 매어 둔 소처럼 우둔하게 생겨먹은 챵바가 느닷없이 나섰다. 무심을 옹호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도움은커녕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만 제공한 셈이었다. 여기저기서 우와 하는 웃음 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챵바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자기 말에 웃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챵바를 향해 홍칠이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