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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28편 (28/60)

2026-09-30 18:55:31 조회 12
일의 다급함으로 따지자면 자지의 납치가 우선이 되겠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임조영도 일단은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부터 거론해 볼 생각이었다. "다른 곳에서 급한 대로 빌리는 수밖에는 없겠는데요." "그렇지?" 모용준은 비로소 결심을 굳혔다는 의도로 자금영전(紫金令箭)을 사람들에게 내주며 분부했다. "하남으로 당장 가서 수재를 당한 사람들을 도울 자금이니 한 10만 냥만 꾸어 달라고 하거라. 방법은 너희들이 한두 번 하는 일이 아니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서 다녀와 그 결과를 알리거라!" 하인 둘이 물러 나와 빠른 말을 타고는 하남으로 달려갔다. 이때서야 모용준은 한시름 덜었는지 눈빛이 조금 전보다는 평온해졌다. 임조영은 그가 사라진 자지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먼저 그 문제를 꺼내지는 못했다. 모용준 자신이 나름대로 마련해 둔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다. 한편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유일민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 그녀는 이만 자리를 뜨려고 했다. 비녀들이 유일민의 상처를 봐준 뒤 한 번 만나 보기는 했지만 어린아이라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먼저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난 지금 유일민이란 처녀애를 찾아가 볼 생각인데 어떤가? 그녀에게 이곳 일을 좀 맡길 요량도 있는데 함께 가 주지 않겠는가?" 임조영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유일민에게 적당한 일감을 준다는 말에 더없이 반가웠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시름도 한결 덜어질 것 같았다. "누구세요?" 모용준이 문을 두드리자 곧 안에서 유일민이 나왔다. 그녀는 모용준을 반기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그를 속으로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라 임조영은 여겼다. 그녀는 혼자 사반(沙盤) 위에 나뭇가지를 놓고 무언가를 하던 참이었다. "그것이 뭐요?" 모용준이 묻자 그녀가 살짝 귓볼을 붉히며 설명했다. "왕중양 공자님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점을 쳐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왕중양 공자님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라면서 모두들 다른 생각들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혹시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차츰 격해지던 유일민은 모용준과 임조영을 책망하는 투로 말을 끝냈다. "아직 모르고 있소." 모용준이 고개를 저었다. "모용세가도 좋지만 전 왕중양 공자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저는 그분을 찾아갈 생각이예요. 그분과 같이 강호를 떠돌면서 지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어린 처녀였지만 뜨거운 정을 품고 있는 유일민에 대해 모용준은 감격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 혼신의 힘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여인이 있을까? "정말 그분이 왜 혼자 떨어지셨는지 모르세요?" 유일민이 다시 모용준을 졸라댔다. 그는 난처한 입장에 빠져 허우적댔다. "큰형님과 여기 이 셋째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어 서로 헤어진 모양이요." 그가 견디다 못해 한마디 흘리자 유일민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서로 다투기라도 했나요? 알겠어요. 서로 의형제라고는 하지만 왕중양 공자님이 저기 임조영이란 여인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던 모양이죠?" 모용준이 대꾸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재잘거렸다. "아니면 반대로 당신이 공자님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던 것은 아닌가요?" 임조영을 응시하고 있는 유일민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서 공자님이 저를 안고 있는 것을 보자 그렇게 안색이 파스름하게 변해 버렸던 거였군요?" "큰형님이 아가씨를 안고 있었다니 금시초문인데?" 모용준이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굴리며 중간에 끼여들었다. 유일민은 망설일 것 없다는 투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그에게 털어놓았다. 유일민의 말을 모두 듣고 난 모용준이 뒷짐을 진 채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같은 자리를 배회하던 그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나와 큰형님 그리고 여기에 있는 셋째 임조영과 의형제를 맺자고 한 것은 나였소. 내가 볼 때 두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호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지. 또한 처음부터 셋째가 사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사실이었소. 그래서 그랬는지 셋째는 순순히 내 뜻을 따르겠다고 하지는 않았지. 어쩌면 셋째의 가슴속에는 큰형님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또한 큰형님의 마음속엔 아가씨가 들어차기 시작했는지도 몰라." 그말에 유일민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자신이 바라고 있는 염원에 대해 모용준이 대신 확인해 주자 그녀는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비록 모용준은 자신의 추측만을 열거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이미 기정 사실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난 이제 어떻게 처신해야 하죠?" 유일민이 한껏 부푼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물어 오자 모용준은 더욱 난감해졌다. "글쎄, 그거야 두 사람간의 연분이 얼마나 절실하고 깊은가에 달려 있지. 하지만 내 보기엔 큰형님은 점잖고 또 아가씨는 아직 때묻지 않은 처녀이니 더 이상 좋은 인연은 없으리라 보는데……." 말끝을 슬쩍 흐린 모용준은 임조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임조영을 한쪽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유일만을 부추겼다. 임조영은 되도록 감정을 숨기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난 공자님을 찾아 떠나겠어요. 난 그분과 함께 있어야만 해요." 거의 목놓아 울부짖을 듯한 소리로 유일민이 격하게 손짓을 해댔다. "아가씨의 소원이 정 그렇다는데 누가 말리겠소? 행여 큰형님을 만나거든 내게 기별이나 해 주시오. 나 역시 그분의 일이 근심되어 밤잠도 설치고 있는 몸이니까." 모용준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을 임조영이 옆에서 지켜보았다. 유일민이 당장이라도 떠나겠다고 나서자 모용준이 너그럽게 양팔을 벌려 다독이며 만류했다. "그것만은 안 되오. 아가씨의 딱한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하루 더 쉬었다가 내일 길을 떠난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유일민의 고집은 대단했다. 모용준은 그럼 정한 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혼자 강호에 나서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모용준이 애써 사람 몇을 불러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용준 앞으로 불려온 가신들에게 모용준이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자네들에게 극히 중요한 소임을 맡기려고 한다. 이 아가씨를 모시고 나의 큰형님을 찾는 일에 몸을 아끼지 말거라. 이 아가씨를 나를 대하듯 해야 한다는 것도 명심하렷다!" 가신들이 허리를 굽혀 그렇게 하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이들은 곧 노자를 받아들고는 서둘러 유일민과 함께 밤길을 떠났다. 자기 방에 돌아온 모용준이 난데없이 훌쩍이며 작은 몸을 더욱 작게 움츠렸다. 뒤에 서 있던 임조영은 훌쩍이며 우는 모용준의 모습이 애처러워 그를 위로했다. 이제서야 납치된 자지 처녀의 일이 걱정이 되어 그러는가 싶어서였다. "아무래도 나와 자지는 인연이 아닌가 싶네. 약왕문에서 그같은 실수를 범하고는 괴로워하다가 다시 그녀의 진정한 마음을 얻게 되었는데 혼례를 앞두고 이같은 일이 벌어지다니……." 어린아이같은 체구의 그였지만 엄연한 사내가 아니던가. 그것도 모용세가의 공자인 그가 눈물을 보이자 임조영의 마음은 한층 무거워졌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꼭 자지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장강에 빠진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운 노릇일 텐데……." 이렇게 한쪽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다른 한쪽은 위로의 말을 하다보니 밤이 훨씬 깊어졌다. "그대와 나 그리고 큰형님은 수족 같은 사이일세. 그런데 큰형님에 대해서는 행방조차 알 수 없으니 속이 타는군. 지금 이곳에 모두 모여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의 말에 문득 임조영은 가슴으로 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왕중양.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몽골 대군 기병들과의 싸움에서 혹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사실 그동안 그의 안부에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었던가? 임종영은 자기 생각에 빠지자 더 이상 모용준의 탄식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애써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가슴을 들쑤셔 놓고 있는 일 ㄸ문에 그녀는 우울해졌다. 왕중양을 찾겠다고 떠난 유일민 때문이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왕중양과 어떤 모종의 약속이 오고 갔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처녀의 몸으로 왕중양을 찾겠다고 무작 정 길을 떠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유일민을 품속에 안은 채 앉아 있던 왕중양의 모습도 임조영의 심사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만약에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약조가 오고 갔다면 더 이상은 관여하지 않으리라. 임조영은 어느새 여기까지 상념을 끌고 온 것에 흡 하고 놀랐다. "그대는 이곳을 떠날 마음은 없을 테지?" 아직 스스로 파놓은 상념의 골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모용준이 그녀를 상념의 늪에서 빼내기라도 하듯 물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잘 듣지 못해 눈으로 되물었다.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거냐고 물었네." "예, 저도 어서 드넓은 강호로 나가 마음껏 활개를 치고 싶은 마음이예요." 그런데 갑자기 모용준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미끄러지더니 벽에 부딪쳐 박살이 났다. "뭣이라고? 이젠 큰형님도 싫고 또 나 역시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모용준은 거의 절규하다시피 했다. 그런 모용준이 갑자기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예요. 전 다만 답답하니 바람이라도 쐬고 싶다는 말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이곳을 떠난다 해도 또 만날 기약을 늘 두는 것이기에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는 마세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유일민이 큰형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너무 상심 말게. 강호에서 누가 옥녀검(玉女劍) 임조영의 진가를 외면하겠어? 그정도의 미모라면 사내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모용준의 시선이 뜨거워졌다. 임조영은 여인의 육감으로 그 시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금세 깨달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임조영이 자기 처소로 돌아간 후 모용준은 혼자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 미처 끝내지를 못한 것처럼 공연히 애만 태우는 답답함이 이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침대에 달려있는 걸쇠를 천천히 들었다. 그러자 소리 없이 침대가 지하로 내려갔다. 바닥에 이른 그는 지하 통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걸으면서 그는 석벽에 새겨져 있는 초상들을 유심히 살폈다. 세월의 더께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 않았지만, 분명 그들은 연나라의 황제이거나 후에 평민으로 있었던 선조들이었다. 초상들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다시 연나라 역대 황제들이 공성약지(攻城略地)한 무훈들이 새겨져 있었다. 지하통로가 끝나는 곳까지 들어간 모용준은 그곳에서 얇은 깁천만을 걸친 궁녀 두 명과 만나게 되었다. 그녀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찧을 듯 조아리고는 입을 모았다. "폐하, 옷을 갈아입으셔야지요?" 그녀들이 곧 모용준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고는 새옷으로 갈아입혔다. 솟옷부터 정성껏 갈아입히는 그녀들의 부드러운 손끝이 모용준의 살갗 위로 스쳤다. 물결을 간지럽히는 미풍처럼, 용의까지 입고 난 모용준은 다시 황제로 탈바꿈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위풍당당하게 대청 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황제폐하께서 만조(晩朝)를 납신다!" 누군가 이렇게 아뢰자 한동안 사르락사르락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 왔다. 궁녀들이 한곳에 모여 몸단장을 하느라 부산을 떠는 소리였다. 이윽고 북소리가 둥둥둥 세 번 울리자 궁녀들이 열을 지어 안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곤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모용준에게 모두들 머리를 조아려 삼궤구고(三 九叩)를 올렸다. 이는 한 번에 세 번씩 절을 하는 것을 뜻한다. 궁녀들도 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상공구경(三公九卿)이 모두 한곳에 있는 듯했다. 삼궤구고가 끝나자 직전관(直殿官)이 목을 길게 뽑았다. "일이 있으면 나와 아뢰고 일이 없으면 돌아들 가시오!" 그러자 태위(太尉)차림의 한 궁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폐하, 강남의 그 구재금 은자를 다시 찾아왔나이다. 이 은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폐하께서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모용준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치뤄야하는 구재금이다 어쩌구다 하는 통에 짐도 이젠 넌덜머리가 난다. 이번엔 나도 모르겠다. 어디 짐의 백성들이 굶어 죽겠어? 송나라 백성들이 굶어 죽겠지." 모용준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자 궁녀들이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렸다. "강남 무림대회는 언제 열리는지 알아보았느냐?" 모용준이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묻자 다시 한 궁녀가 앞으로 나왔다. "듣기로는 스무날 뒤에 영주(永州)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어떤 대책이 있으신지요?" "우리 모용세가는 이렇게 강호에 숨어 지내면서 기회를 노린 지 오래다. 그러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궁중에 있는 인마를 모두 동원해서라도 이 기회를 노려야겠다. 그리하여 천하 영웅들을 우리에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송나라 강산도 어렵지 않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궁녀들이 지당한 말이라며 다시 한 번 머리 조아렸다. 더욱 의기가 충천해진 모용준이 말을 이어 갔다. "인마의 준비도 철저히 하겠거니와 진주 보석과 은자 금괴도 충분히 가져 가야겠다. 그래서 인심을 얻어 강호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이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여라!" "예 잇!" 궁녀들의 안색은 더없이 밝아졌다. 지하 궁전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녀들이라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하게 되니 날개라도 단 기분들이었다. "낭랑은 지금 어떠한가?" 갑자기 소리르 죽인 모용준이 나즈막이 물었다. 그러자 구경(九卿) 중에 태상경(太常卿) 차림을 하고 있던 궁녀가 나와 허리를 숙였다. "폐하께 이뢰옵니다. 서궁낭랑께서는 여전히 식음을 전페하고 있는 줄 아옵니다. 다행히 난옥(暖玉)이 하나 있어 낭랑께서 주무실 때 몰래 품에 넣어 두곤 하여 혈기를 보존하고 있는 형편이옵니다. 하나 이렇게 계속되다가는 낭랑의 생명이 위태로울 줄……." 한동안 말이 없던 모용준이 몸을 세웠다. "어디 짐이 한 번 가보겠노라!" 자지가 누워있는 침대는 매우 큰 용상이었다. 한 번에 대여섯 명은 족히 누울 수 있는 이 용상 위에는 금수황단(錦銹黃緞)의 비단이불이 깔려있으며 베개 역시도 소상원앙침(瀟湘鴛鴦枕)으로 불리우는 귀한 것이었다. 그 속에 초췌해진 몰골로 자지가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모용준을 바라보는 자지의 눈에는 노여움과 설움이 뒤섞여 있었다. "병세가 좀 어떻소?" 모용준이 태연한 기색으로 물어 오자 자지가 코웃음을 쳤다. 모용준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뭐라도 들어야지, 계속 고집을 피우면 몸만 상해요. 자, 이거라도 좀 드시오 황비." 궁녀에게서 연와죽을 받아든 모용준이 직접 자지에게 떠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자지는 입을 굳게 다물고는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난 황비가 나이예요." "황비가 아니라니? 여기에 대연의 황제가 있는데 그건 또 무슨 해괴한 말이요?" "공자님, 제가 보기에 공자님은 몹쓸 병에 걸리신 게 틀림없어요. 연아라가 없어진 지 몇백년도 더 넘는다는 사실을 왜 모르시나요? 당신은 모용세가의 공자님일 뿐이예요." "여기가 어딘지 아직 모르겠소? 자, 그렇다면 이것을 한 번 보시오." 하며 모용준이 탁자 위에 장식품으로 놓아두었던 벽옥(璧玉)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런 벽옥은 황궁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오. 그리고 또 이거……." 그러면서 내보인 것은 서궁낭랑 신표인 옥새(玉璽)였다. "기건 황비의 옥새요. 서궁낭랑 옥새란 말이오. 보오, 수궁고적(守宮固積)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지 않소? 이것을 지녀야만 황비가 되는 것이오. 이것을 지니면 황궁에서 일호백응(一呼百應)은 문제가 없기도 하오. 비록 동궁낭랑으로 임조영을 책봉한다 해도 경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낭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나 자지의 귀에는 모용준의 말이 잠꼬대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무덤과도 같은 이런 지하궁전을 만들어 놓고 황제로 군림하려는 그가 한심스러워 보였다. 어느 누가 그를 황제로 인정한단 말인가. 곧 허물어질 사상누각에 불과한 짓이 분명한데……. "공자님, 한 가지 청이 있어요." "뭔가?" 갑자기 달라진 태도를 보이자 모용준이 반색하며 자지의 손을 잡았다. "저 궁녀들을 모두 돌려보내세요. 저들도 귀한 집 여인들일 텐데 어서 자기들의 인생을 찾게 보내 주세요." "모르는 말씀. 내가 저 여인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되겠소? 이 궁의 비밀이 밖으로 나가게 된다는 말이요." 모용준이 궁녀를 향해 서릿발 어린 눈빛을 띠자 모두들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공자님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공자님의 뜻을 따르지 않겠어요." 자지는 계속 모용준의 어리석음을 돌려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도 모용준의 아집은 더해만 갔다. "오호, 그대는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섭섭한 모양인데 당장이라도 치릅시다." 모용준이 정말 궁녀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신방을 치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모용준이 자지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당부했다. "난 잠깐 나갔다 오겠소. 내가 돌아오거들랑 우리 화촉을 밝히도록 합시다." 자지는 하도 어이가 없어 멀뚱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용준이 나가자 알몸의 궁녀 여섯이 큰 목욕통을 들고는 자지 앞으로 왔다. "황비낭랑, 목욕을 새롭게 하시고 신방에 드실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그녀들이 자지를 안아들고는 목욕통 속에 앉혔다. "황비낭랑의 몸매는 황제께서 아주 좋아하시게 생겼네요." 한 궁녀가 이렇게 지껄이자 모두들 킥킥 웃어댔다. 이제껏 이들이 주는 음식은 모두 마다해 온 자지라 손을 들어 뿌리칠 기력조차 없었다. 그런데 궁녀들의 손길이 온몸을 어루만지고 밀어 주고 하면서 이상하게도 기운이 피어 오르는 게 아닌가. 아마도 자지의 몸에 있는 혈도들을 눌러 기를 살려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목욕이 끝나자 여섯 명의 궁녀들은 자지를 다시 조심스레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곤 속옷부터 시작하여 모두 열여섯 가지나 되는 의복을 차례대로 입혀 주었다. 마치 잠자리의 날개를 단 것처럼 그 옷들은 매우 가벼웠고 몸에 잘 맞았다. "어머, 참 이쁘다." 저희들끼리 소근대던 궁녀들은 곧 대형 구리거울을 대령했다. 궁녀들이 거울을 들어 전신이 보일 수 있도록 자지를 비추었다. 거울 속에는 봉황을 쌍으로 새긴 황후의 의복에 싸인 한 여인이 보였다. 자지 자신도 그 모습에 놀랬다. 이윽고 기악이 울렸다. 손에 생황(笙篁) 퉁소 젓대 등 악기들을 든 궁녀 여섯이 들어오더니 경쾌한 곡조를 연주했다. "황비낭랑, 성지를 받으시오!" 궁녀 하나가 이렇게 선창하자 모두 자지를 꿇어앉게 한 후 황제의 성지를 받게 준비했다. "납길(納吉)이오!" 다시 그 궁녀가 선창을 하자 자지를 부축하고 있던 다른 궁녀들이 대신 응수했다. "납채(納采) 하시오!" 곧 한 궁녀가 자지 앞으로 다가와 기러기 한 마리를 내려놓았다. "이름을 말하시오!" 다른 궁녀가 재차 물었다. "황비낭랑의 이름이 자지이시죠?" 그러나 자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같은 의식은 반나절이나 걸려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이른바 육례(六禮)가 끝난 셈이었다. 악대와 다른 궁녀들은 탁자에 붉은 길첩(吉帖)을 놓고 또한 바닥에는 기러기 한 마리를 놓고는 모두 물러갔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다시 한 무리의 궁녀들이 몰려들었다. 그녀들은 자지의 이마에 난 솜털을 다듬고 머리를 얹어 주며 한동안 법석을 떨었다. 자지는 이들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이젠 황비낭랑께서 대청으로 나가시어 폐하와 완혼을 하여 주십시오." 누군가 들어와 이렇게 아뢰었다. 궁녀 몇이 자지를 옹위하여 동방(洞房)을 나와 대청으로 갔다. 이곳은 모용준이 평소 이 궁녀들과 소위 국사를 의논한다는 장소였다. 용의에 앉아 있던 모용준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원래 모두 강호의 악인들이었는데 오늘 우리의 혼례의 중매인으로 삼기 위해 청해온 이들이오." 자지가 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겁에 질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마저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는 꼴들이었다. 모용준이 밖에서 강제로 잡아다 세워둔 사람이 분명했다. "옥필쌍준(玉筆쌍준) 나세재(羅世才)와 나세기(羅世奇)!" 한 궁녀가 호명을 하자 두 사내가 허리를 곧추 펴지도 못한 자세로 걸어 나왔다. "자네들 둘이 폐하의 혼사에 중매를 서야 하네." 궁녀가 이들에게 이르자 그저 "예 예." 하는 대답만 흘릴 뿐이었다. 다시 궁녀가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꾸부정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기련산(기連山) 음마(陰魔) 영운(靈運)은 어디 있느냐?" 노기를 가득 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