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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26편 (26/60)

2026-09-30 18:55:31 조회 14
앞에서 쓰러졌던 놈 중 하나가 떨어뜨린 칼을 번개같이 집어든 왕중양이 보기 좋게 놈의 목을 날렸다. 유일민의 표정이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심하게 일그러졌다. 임조영은 그녀 옆에서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낸 뒤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매 주는 등 바쁘게 손을 놀렸다. "어서욧!" 젊은 사람이 다시 다그치듯 왕중양에게 뛰어내릴 것을 종용했다. 왕중양은 얼른 임조영의 시선을 찾았다. 그녀 역시 왕중양을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교감이 교차되었는지 왕중양이 몸을 돌려 젊은 사람이 있는 배로 몸을 날렸다. 왕중양의 경공으로 배는 조금도 기우뚱거리지 않았다. "남쪽 기슭으로 배를 몰아라!" 젊은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많은 배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앞으로 물살을 헤쳐 나갔다. 구름떼로 몰려든 기병들은 차츰 멀어져 가는 배를 지켜보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 한참 후 숨을 돌린 젊은이가 자신의 이름은 구처기(丘處機)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는 문포(文浦)이며 이 강 연안의 호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또한 금나라를 반대하며, 그 금나라를 등에 업고 호기를 부리려는 몽골군들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지만 몽골군보다 금나라 군대가 더 큰 적이요. 우리 송나라 금수강산을 짓밟고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이놈들 때문에 나라는 더욱 쇠약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왕중양이 말하자 구처기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왕중양에 대해 호감을 품고 있었다. 무공이나 인품이 모두 뛰어난 사람일 거라 믿었다. 그는 가능하다면 왕중양을 스승으로 삼고 싶었다. 기슭에 무사히 오른 왕중양은 가장 먼저 배가 있는 쪽을 향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여협과 유일민의 생사가 염려되어 가슴 한쪽이 휑하니 떨어져 나가는 아픔이 몰려왔다. 왜 그들을 두고 혼자 이곳까지 왔는지 불현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때 그녀가 보여 주었던 눈빛에 대해 왕중양은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았다. 왕중양은 그녀의 눈빛에서 읽어낸 뜻이 어쩌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자신이 유일민을 돌볼 테니 걱정 말고 먼저 몸을 피하라 는……. 정말 그런 의도였을까? 왕중양은 상황이 급박한 나머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던 게 아닌가 싶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했다. 도저히 혼자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왕중양은 곧 구처기 일행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뒤 두 여인을 찾기 위해 다시 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배 위에 남겨졌던 임조영과 유일민은 큰 곤혹을 치르게 되었다. 몽골군 기병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사태가 긴박해지자 임조영이 나즈막하게 유일민에게 속삭였다. "안 되겠어. 어서 이곳을 피하고 보자." 그러나 유일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공자님도 없는데 어떻게……." 그녀는 상처를 싸맨 천을 한 번 보더니 아찔한 생각이 들었는지 얼른 눈을 감았다. 그리곤 살며시 눈을 떠 그만큼 찢겨져 있는 임조영의 옷자락에 눈길을 주었다. "그 분은 나름대로 방법을 찾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임조영이 재촉을 하며 유일민을 부축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조영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길게 뽑더니 눈을 크게 떴다. 왕중양이었다. 그는 막 임조영이 있는 배로 오르려는 몽골군 서넛을 때려눕혔다. 그러나 몽골군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불붙은 배에서 뛰어내린 그들은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왕중양이 사라진 것을 보고는 다시 나타난 모양이었다. 왕중양이 드디어 검을 뽑아들었다. 검날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두 놈의 목이 공중으로 솟았다. 놈들이 공격이 주춤했다. 섣불리 왕중양에게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한 가지 묘안을 짜내었다. 둘씩 짝을 이루어 사방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여섯 명씩 나누어진 이들이 조금씩 왕중양을 향해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그중 왕중양의 왼쪽에 있던 둘이 칼을 꼰아쥐며 달려들었다. "얏!" 왕중양의 검이 허공에서 울음을 토했다. 때를 같이하여 오른쪽과 등뒤에 있던 두 무리가 한꺼번에 덮쳤다. 다시 검이 허공을 날카롭게 그어 댔다. 이번엔 나머지 무리들이 괴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날아간 놈들의 목이 강속으로 쳐박히기도 전에 이들의 목 역시 날아갔다.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 놈들의 목이 강으로 떨어졌다. 자세를 풀지 않고 검을 틀어쥐고 있는 왕중양의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그의 검날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 다. "배 위에 있는 자는 듣거라! 당장 이리로 내려와 무릎을 꿇어라!" 가까이 다가온 몽골군의 기병 중 누군가 소리쳤다. 왕중양은 급히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임조영에게 그랬듯이 눈빛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렸다. 다행히 임조영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곧 배를 저어 유일민과 그곳을 떠나갔다. 임조영과 유일만은 잠시 후 왕중양과 기병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벗어나게 되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들은 이곳 남쪽 기슭에 배를 대고는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몸을 숨기고 잠시 쉴 만한 곳이 있나 찾아보았다. 임조영이 마침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는 지쳐 있는 유일민을 편히 눕혔다. 그리고 마른 삭정이와 잡풀들을 모아 불을 피웠다.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이들의 옷은 흠뻑 젖어있는 상태였다. 임조영이 먼저 옷을 벗어 불 가까이 대고는 말렸다. 그러자 유일민도 몸을 일으키더니 옷을 벗었다. 이들은 얇은 속옷만을 걸친 채 춥고 지친 몸을 녹이기 위해 불쪽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런데 문득 푸른 연기를 띄우며 타오르는 불꽃을 주시하던 임조영의 눈빛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녀는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등뒤로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필시 사람의 발소리가 틀림없었다. "누구얏!" 그녀가 몸을 옆으로 날리며 검을 잡았다. "헤헤헤, 당신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람이 찾아왔지." 임조영의 입꼬리가 위로 사납게 올라갔다. 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질기고도 대책 없는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임조영은 그를 보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다. 무심은 여전히 이빨을 드러내며 징그럽게 웃어댔다. "히힛, 두 사람 꼴이 말이 아니군. 꼭 비맞은 수탉 같잖아. 아니 암탉이라고 해야 맞나? 하하하!" 헤죽헤죽 뭐가 좋은지 혼자 즐거워하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갔다. 그는 두 여인의 굴곡진 몸매를 눈으로 어루만지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잘 익은 과일을 앞에 두고 군침을 삼키듯 그는 탐욕스런 시선을 두 사람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임조영이 급히 옷으로 몸을 가리며 화를 냈다. "당장 꺼지지 못하겠어!" 그러나 그는 임조영의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여인들은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들 하지. 그런데 그대들은 그런 모습과 다를 게 없어. 온몸이 젖어 매끌매끌 윤기가 감도는 것 같아. 그런데 이 깊은 수림 속에서 그것을 보아줄 사내들이 없으니 이거 비단옷 입고 밤길에 나선 것 같겠구먼. 헤헤, 그럴 줄 알고 내가 이렇게 와 준 것이오." 약이 머리 끝까지 올랐으나 임조영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와 싸움을 벌이다가 혹시 몽골군이나 금군이 소리를 듣고 나타난다면 더욱 낭패스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애써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임조영이 의외로 열적은 태도를 보이자 무심은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는 날뛰기 시작했다. "여인의 몸에는 불이 있고 또 얼음이 있소. 이것들이 잘 화합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여인으로 태어나는 것이오. 그런데 사내가 여인의 몸에 있는 서른여섯 군데의 지점을 만져 주고 눌러 주고 해야지만 가능하다 하더군. 바로 내가 그대들을 완벽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려고 왔다는 뜻이지. 헤헤헤!" 더는 참지 못하고 임조영이 검을 뽑아 들었다. 무심이 손사래를 치며 이죽거렸다. "어허, 왜 이러시나. 난 평소 세가지를 싫어하는데 그 한 가지는 여인에게 손을 대는 것이오. 여인에게 손을 대면 그 일을 할 때나 가능한 것이지 아무 때나 대서는 안되지요. 둘째는 남이 내 말을 막고 나서는 것이지. 나머지 하나는 여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내요. 여인은 물과 같아서 한 번 쓰고 나면 흐려지곤 하지요. 그러나 한 번 흐려졌다고 버릴 수는 없는 법. 난 그래서 여인을 고인 물처럼 한 번 쓰고는 버리는 사내들을 경멸하는 것이지." 무심의 입에서는 음탕한 말들이 거침없이 새어 나왔다. 그는 또 입을 열어 두 사람에 대한 칭송을 늘어 놓았다. "그대 둘은 모두 뛰어난 미인이오. 저 어린 아가씨는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 같은 수녀(秀女)이고 당신은 절색이요. 이 무심 공자가 두 여인을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난 삼 년 동안 다른 여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겠소이다. 또한 그대들은 모두 사내들을 살살 녹일 수 있는 육감적인 몸을 갖고 있어 난 더없는 기대에 빠져 있소." 들을수록 화가 나는 일이었다. 임조영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 자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내심 애가 탔다. 그러나 더 이상 주위를 의식하며 이 자가 내뱉는 음란한 말들을 뒤집어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각오해라!" 임조영이 검을 단단히 쥐고는 몸을 날렸다. 단번에 상대를 절명시키는 초수 '파화향천(把火向天)'이었다. 그러나 무심이 그냥 당할 자가 아니었다. 재주넘기를 하며 한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정색을 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황금으로 된 부채였다. "어허, 이거 참! 그대에게 어울리는 사내가 되겠다는데도 이 앙탈이니 어찌 쓰겠나? 나중에 침대 위에서라면 몰라도 벌써부터 강짜 타령이면 정말 곤란하다구." 그의 입은 여전히 술술 비온 뒤 물레방아 돌듯 쉬지 않고 돌아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임조영이 검을 힘껏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채로 탁탁 소리를 내가며 그녀의 검을 막아냈다. 임조영이 검을 앞으로 내밀 때마다 두 번씩이나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의 검은 단 한 번의 힘으로 내리쳐도 늘 두 번의 단계를 거쳐 상대에게 이르렀던 것이다. 도중에 상대를 현혹시키기 위해 아주 짧은 순간 멈칫하는 검술이었다. 그런데도 무심은 우연인지 아닌 지 척척 막아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내가 무림에 나가면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도 틀리나 보군. 사내도 아닌 여인과 몇 합도 겨뤄 보지 않고서 벌써 어깨가 뻐근한걸. 정말 그대의 힘은 알아주어야겠어. 난 오직 그대와 침대에 오르기만을 기다릴 테니 힘 좀 아껴 두라구!" 임조영은 대꾸하지 않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자를 오늘 죽이지 못하면 임조영이란 이름도 쓰지 않으리라.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탁탁탁! 허공에서 검과 부채가 맞부딪치며 금속성의 굉음을 토했다. 한차례 엇갈렸다가 서로 멀찌감치 물러선 두 사람의 호흡이 매우 거칠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의 입놀림은 쉬지 않았다. "내 보기엔 그대는 왕중양인가 하는 작자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인데 마음대로 될까?" 차라리 귀를 틀어막았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가 입을 열어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소름이 확 돋고 속이 메슥거렸다. 유일민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그가 계속 씨부렁거렸다. "그런데 저 어린 아가씨도 왕중양을 흠모하는 것 같던데? 정 그대가 왕중양을 독차지하고 싶다면 내가 저 어린 계집을 죽여 드리리다. 어떻소?" 그가 말만 그럴 뿐이지 실제로 행동에 옮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그는 어느새 유일민에게로 병아리 채는 매처럼 덮쳐 드는 그를 보며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임조영의 몸이 움직였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닥을 긁어 몸을 던져 간발의 차로 그자보다 먼저 유일민 앞에 이르렀다. 무심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다시 간죽거렸다. "사람이 살면서 한평생 아무 일에나 무심히 지내는 것이 가장 행복한 법이거늘 그대는 애써 어려움을 택하는군. 그러나 오늘은 저 어린 아가씨를 구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누구의 손에 단단히 걸리게 될 것이오." 임조영은 이제 그의 말이라면 오뉴월 담장 밑에서 거품을 무는 미친개의 앓는 소리로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이 귀에 거슬리오? 하지만 그대는 나를 따라가야 할 것이오. 왕중양은 저 계집에게 던져주고 나와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립시다." 눈앞이 아찔하고 귀가 먹먹한 게 아무래도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말소리가 온몸의 혈도와 심지어는 땀구멍까지 막아대는 통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단박에 검 끝으로 그의 염통에 바람구멍을 내놓고 싶었으나 다른 날과는 달리 초수도 제대로 통하지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흥분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있었지만 마음대로 조절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이곳에서 하루 아니 일순간이라도 더 마주했다가는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들었다. 멀리서 들려온 웬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임조영은 정녕 혼이 나간 여인처럼 머리를 풀고 강호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꽤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부터 들려 오고는 있었지만 내공이 센 사람의 것인지 그 소리가 드세게 전해졌다. 웅웅 하며 수림을 뒤흔드는 소리만 들어도 그가 무림의 고수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차츰 그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얼핏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옷부터 입으시오." 무심도 은근히 그 소리가 신경 쓰였는지 여인들에게 턱짓을 했다. 처음으로 정상적인 말을 하는가 싶었다. 그때서야 두 여인들은 옷을 챙겨 입으며 주위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 사람이 이들 앞으로 모습을 보였다. 맨 앞에 앞장선 사람은 멀리서 보았을 땐 어린아이라고만 여겼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니었다. 그는 다름아닌 모용세가의 공자 모용준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못쓸 인간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의형제 중 하나인 모용준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임조영은 이 뜻밖의 만남보다는 현재의 상황 때문에 더욱 침통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여겼다. 그 역시도 왕중양처럼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헤헤, 난 또 큰 적수라도 오는가 했더니만 기껏 난쟁이를 두고 괜히 긴장했잖아!" 무심이 여전히 빈정거렸다. 두 사람은 일기충천 지청과 절금수 허불잉이었다. 모용준의 눈길은 금세 불처럼 뜨거워졌다. 처음 이곳에 다다라서 임조영과 유일민에게 시선을 던질 때만 해도 별다른 기미는 없었다. 그런데 무심과 얼굴을 맞대고 또 그같은 실없는 소리를 듣게 되자 심기가 영 뒤틀렸다. "당신은 누구요?" 모용준이 약간 노기를 띤 채 물었다. 무심이 고개를 곧추 치켜들고는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부터 말해 보시오?" 모용준의 예사스럽지 않은 눈초리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다는 투로 모용준이 자신을 밝혔다. "난 강남 모용세가의 공자 모용준이라 하오." "강남의 세가? 강남의 세가라면 모두 흐리멍텅한 족속들인데 모용세가라고 예외는 아니겠지?" 그의 걸쭉하고도 천박하기 그지없는 입담이 터졌다. "그래도 예전의 모용세가는 그나마 사람들의 형태는 온전하게 갖추고 세상으로 나왔는데……, 이젠 아예 난쟁이를 만들어내는 모양이로군! 하하하핫!" 말을 마친 무심이 박장대소를 하며 모용준을 모욕하려 했다. 그런데 의외로 모용준은 무심의 거친 태도를 묵살하고는 임조영과 유일민 쪽을 향했다. "두 분께서 몹시 놀라셨겠군요?" 임조영은 모용준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두 사내를 확인했다. 이 두 사람은 낯익은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왜 같이 오지 않은 걸까? 주정과 목우를 두고 하는 생각이었다. 임조영은 모용준 역시 코앞에 있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가 임조영의 행색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무심에게 따끔한 일침을 쏘았다. "보아하니 네 놈은 금나라 졸개가 확실한 것 같은데 살아남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또한 이 여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죄값도 톡톡히 받게 될 것이다!" "뭐? 날 죽이겠다고?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보라구!" 무심이 자기 가슴을 푹푹 손바닥으로 쳐 가며 모용준의 약을 올렸다. 두어 걸음 그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연신 가슴을 쳐댈 때였다. 후두둑, 마치 큰 날개를 가진 새가 비상을 하듯 공중으로 뛰어오른 모용준이 높이 달려 있던 나뭇가지를 차며 무심에게로 꽂혔다. "야아 !" 모용준이 날쌘 동작으로 내리꽂히자 무심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모용준이 땅에 내리자 발로 찼던 나뭇가지가 우지직 부러지면서 그 옆으로 떨어졌다. 위에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꽤 굵은 가지였다. 무심이 흠칫 놀라며 얼른 접어 두었던 황금부채를 꺼내 펼쳤다. "난쟁이치고는 제법이군!" 이번엔 무심이 모용준을 흉내내듯 똑같은 동작을 부리며 치솟았다가 내려왔다. 때를 기다려 모용준이 무심과 엇갈리며 공중으로 올랐다. 이들은 서로 몸을 날리며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기도 하고 때론 탁! 퍽! 하는 소리를 내며 손과 부채를 맞부딪치기도 했다. 아래로 내린 무심이 부채를 접더니 모용준에게로 어슬렁대며 접근해 왔다. 접은 부채를 한쪽 손바닥에 탁탁 치며 그가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그런데 말이야, 어디를 쳐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작아서." 그가 부채를 들어 모용준의 어깨를 내리치려 했다. 이상한 점은 미리 예고를 하고 있었는데 어딘가 계략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예감이 적중했다. 그는 모용준의 오른쪽 어깨를 치는 척하다가 얼은 방향을 바꿔 앞가슴에 있는 대혈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부채 끝은 강한 물체에 막힌 듯 튀겨져 나왔다. 모용준이 어느새 손바닥으로 부채를 막아낸 것이다. "욱!" 그러면서 무심의 심장을 향해 펼친 손바닥을 안쪽으로 오무려 주먹을 내질렀다. 투투투. 썩은 잡초와 삭정이들을 밟으며 무심이 뒤로 미끄러졌다. 그것이 오히려 모용준에게는 호기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싶은 모용준이 장을 뻗었다. 무서운 돌풍이 무심의 정면을 향해 날아갔다. 막 부채를 펼치려던 무심이 장에 밀려 아름드리 나무에 등을 박았다. "으……." 그의 입에서 뻘건 피가 한 줄기 흘렀다. "공자님, 제가 저 놈의 나머지 살점과 피를 모두 거두겠습니다!" 그때 일기충천 지청이 나섰다. "치사한 놈들!" 나무에 기댄 채 무심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재빨리 몸을 돌려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중간쯤 오른 그는 다른 나무로 훌쩍 뛰더니 원숭이처럼 이 가지 저가지 옮겨 다녔다. 그러더니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임조영과 유일민에게로 다가온 모용준이 공손한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두 분께서 대단히 놀라셨겠습니다. 저희는 큰형님과 셋째 동생을 찾으러 나섰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두 분께서는 어디로 가는 길이온지 제가 사람을 붙여 그곳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임조영은 바로 이렇게 예의바르고 사내다운 기백이 흘러넘치는 것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이었음을 떠올렸다. "우리는 정강으로 가던 길이지요." 임조영의 대꾸에 모용준이 반색했다. "그거 참 잘 되었군요. 제 집도 그곳에 있는데 누구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까?" "강남 정강에 가서 무림에서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모용세가를 찾아볼까 하던 참이었소." 빙그레 미소짓는 임조영을 유심히 보던 모용준이 다시 허리까지 굽히며 반기는 자세를 보였다. "대환영입니다. 내가 그곳 공자 모용준올시다. 우리 모용세가를 방문하려던 길이라니 이런 기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서둘러 지청과 허불잉을 불러 이들에게 인사를 올리게 했다. 모용준은 강호의 예법을 충실히 이행하려 했다. 임조영에 대해 함부로 이름과 정체를 묻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얼굴을 가린 사람에게는 결례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용세가로 돌아온 모용준은 비녀들에게 분부했다. "여기 두 분을 후원 자지 아씨에게로 모셔 가거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일러 후원 출입을 조심하라고 다짐해 두거라!" 유일민은 일단 비녀들을 따라 다른 곳으로 일단 갔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모용준은 비녀들에게 그녀의 상처를 돌보라고 당부했다. 한편 비녀들의 안내로 후원으로 간 임조영은 곧 자지를 만나게 되었다. 이윽고 둘만이 남게 되자 임조영이 입을 열었다. "나를 못 알아 모겠나?"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껌벅이던 자지가 곧 그녀를 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랬다. "아니, 당신은……? 정말 제 눈이 틀림없다면?" "그래." "어디에 계셨었어요?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데." 자지는 기쁜 마음에 임조영의 목을 끌어안고는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두 사람은 내실로 들어가 오랫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지는 모용준과 약왕문 무리들에게 당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임조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는 언니, 아니 조심을 해야하니까 그저 공자님이라고 부르겠어요. 모용준 공자님은 공자님이 여인이란 사실을 모르고 의형제를 맺었지만 이젠 사실을 알게 되면 기뻐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