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25편 (25/60)
유일민의 이마에 코를 댄 왕중양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활짝 핀 꽃에서 나는 달고 은은한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그는 곁에 웬 그림자 가 다가서고 있는 것도 모른 체 유일민의 향기에 차츰 취해갔다. 왕중양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임조영이었다. 임조영의 눈빛이 매우 반짝였다. 그토록 염려하던 왕중양을 만나자 반가움과 기쁨에 그녀는 말문을 잃었다. 그녀는 한동안 못박인 듯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왕중양은 미처 그녀가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앞에 모습을 먼저 보인 것은 심팔검객의 맏이였다. "오, 그대가 어떻게 여기를 알고 오셨소?" 왕중양은 그러나 유일민이 행여 깨어날까 봐 말소리를 죽이며 맏이를 바라보았다. "수상한 배 한 척이 있길래 와본 것이었소." 임조영이 비로소 왕중양 앞으로 나왔다. "여협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임조영은 아직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왕중양이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깊이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유일민을 슬쩍 훔쳐보았다. "이젠 모두들 돌아가시오. 난 이곳에 남아 왕 공자와 함께 강남에 가겠소." 임조영이 맏이와 오일척에게 그런 의사를 밝히자 놀란 것은 왕중양이었다. "아니 그대는 어떻게 내가 강남에 간다는 걸 알고 있소?" "짐작이지요. 그리고 난 정강까지 가는데 길이 같다면 동행을 해도 괜찮겠지요?" 오히려 임조영이 정강이란 말까지 비치자 왕중양으로서는 별 수 없었다. 정말 우연이라 여겼던 것이다. "정강? 그곳에는 무슨 일로 가는 길이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지요."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한편 여협과 동행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아무래도 유일민과 단 둘이서만 길을 간다는 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차츰 어린 소녀가 아닌 여인으로 비쳐지는 유일민의 모습에서 왕중양은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좋도록 합시다." 여러모로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 거라 판단한 왕중양이 기꺼이 임조영의 말을 받아들였다. "난 싫어요!" 그런데 자는 줄로만 알았던 유일민이 고개를 들더니 앙칼진 소리를 냈다. 유일민의 시선은 임조영에게로 곧장 날아들었다. "언제 깼지?" 왕중양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계속 임조영만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나와 함께 가면 되지, 왜 저 사람까지 데리고 가려는 거죠?" 심기가 불편해진 임조영은 오기가 났는지 오일척을 향해 어서 돌아가라고 다그쳤다. "자, 모두들 이제 돌아가시오." 오일척이 윗입술을 살며시 깨무면서 대답했다. "그럼 우린 가요." 십팔검객 맏이와 오일척이 임조영에게 인사를 하곤 돌아갔다. 이들이 배에서 완전히 떠나자 왕중양은 잠시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서였다. 왜 여협이 강남에는 가는 것인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그는 여협이 바로 임조영이라는 것도, 또 그녀가 그곳 모용세가에서 큰 위기를 당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왕중양을 걱정하여 동행하겠다고 나선 그녀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임조영을 얼굴을 가린 여협으로만 알고 있는 왕중양으로서는 여간 의심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왕 공자님은 정강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임조영이 슬쩍 말을 건네왔다. 그러자 왕중양은 내심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맺은 의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셋째인 임조영이 한 쳐녀와 혼례를 치를지도 모른다고요?" 임조영이 놀라는 기색을 하며 물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미 혼례준비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오."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무작정 찾아간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군요." "그 일 때문만은 아니오. 사실 우리 형제들 중 내 무공이 가장 뒤떨어지기 때문에 동생들은 걱정을 무척 하고 있을 게 틀림없소. 나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또 그들의 안부도 알고 싶기에……." "말인즉, 동생들이 보고싶어 간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셋째 뿐만 아니라 둘째도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는 무척 기뻐할 것이오." "……." 왕중양은 기억을 더듬는 표정으로 한동안 벅찬 감격에 빠져들었다. 그의 이같은 거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임조영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왕 공자의 추측대로 셋째가 정말 자지라는 처녀와 혼례를 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무슨 근거라도……." "물론이지요. 둘째가 하는 말이……." 그러다가 왕중양이 말을 끊었다. 둘째 모용준의 근황이 궁금해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왜 말을 하다말고 한숨을 쉬시지요?" "둘째는 영웅호걸인데 그 밑에 있는 몹쓸 사람들이 동생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말았죠. 내 둘째를 만나면 꼭 그 두 사람의 행실을 귀띔해 버릇을 고쳐 놓게 해야겠소." 그녀도 왕중양이 말하려고 하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감을 잡았다. 자신을 죽이려던 목우와 주정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오히려 둘째 동생이란 사람의 행실이 나쁘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러자 왕중양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임조영을 노려보았다. "모르는 말씀. 우리 둘째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은 모를 것이요. 둘째는 모용세가의 유일한 계승자요. 그런 사람이 그릇된 품성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소!" 왕중양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는 지금도 모용준에 대해 좋은 기억만을 품고 있는 처지였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를 찾아 가려는 길이 아니던가. "천길 물속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요. 더군다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가름해보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임조영이 계속 모용준에 대해 헐뜯는 말을 늘어놓자 왕중양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해 갔다. "아니, 당신은 우리 형제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리 모함을 하는 것이오?" 임조영이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데 불쑥 유일민이 사이에 끼여들었다. "세상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지요. 말로는 남을 도와주는 것같지만 실은 딴 속셈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사람이 많다구요." 임조영을 대고 비꼬는 말투였다. 임조영이 잠시 할말을 잊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유일민이 한술 더 떠서 임조영에게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따라다니려고 하죠? 진짜 이유가 뭐예요?" 유일민이 쌀쌀맞게 따져 묻자 임조영이 싱긋 웃어 주었다. 그리곤 결코 편안하지 않은 심기를 억누르는 기색으로 설명했다. "난 그대들의 뒤를 따르자는 게 아니오. 나는 지금껏 남이 간 길을 따라가 본 적이 없소." 유일민이 괜한 소리 말라는 뜻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임조영은 어린 유일민과 말싸움을 계속하고 싶지가 않았다. 세 사람의 입장만 난처해질 뿐이었기에 그녀는 가급적 유일민과 상대하지 않으려고 다시 왕중양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셋째 동생은 어떤 사람이지요?" 그때서야 왕중양의 태도도 한층 누그러져 임조영의 질문에 반색을 했다. "기꺼이 말해드리리다." 그는 그윽한 눈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어갔다. 셋째인 임조영을 만나게 된 동기와 자지 처녀와의 일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셋째인 임조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임조영은 속으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임조영과 왕중양이 적의를 거둔 채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을 본 유일민이 또 사이에 끼여들었다. "반벽산장에서 저를 구해주시려고 했던 일 정말 고마워요." 유일민이 뒤늦은 예를 올리며 왕중양에게서 임조영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당신은 미인일 것 같아요. 그때 무심 공자가 넋을 잃었는데 저에게도 보여줄 수 없나요?" 임조영이 몹시 당황하며 황망히 고개를 흔들었다. 유일민이 더 난처하게 만들려는 의도인지 갑자기 울먹이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 이미 부모님을 잃은 가엾은 아이랍니다. 그런데 저를 구해주려 했던 사람의 얼굴을 모른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어요. 저의 청이니 꼭 들어주세요." 남의 속도 모르고 왕중양이 유일민을 거들며 나섰다. "이 아이의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러니 어렵지 않다면 청을 들어주시구려. 내가 마음에 걸린다면 돌아앉아 있으리다." 하며 왕중양이 몸을 돌렸다. 하는 수 없었다. 임조영이 유일민에게 보이도록 슬며시 면사포를 쳐들었다. 유일민 역시 무심과 마찬가지로 크게 탄복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미인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는 입술과 가을바람에 다듬어진 솔잎 같은 눈썹 그리고 새벽 호수를 닮은 눈동자…… 모두가 자기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유일민은 고개를 숙인 채 심한 열패감에 시달렸다. 자 신의 미모에 오히려 여협이 감탄을 할 것이라 계산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미인이예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유일민이 왕중양에게로 천천히 다가가며 우물거렸다. 그말에 왕중양은 고개를 돌려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임조영은 얼굴을 가리고 난 뒤였다. 다시 면사포를 내리는 것을 보던 유일민이 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토록 아름다운 외모를 숨기려 하나요?" "글쎄……." 임조영은 유일민의 호기심을 일축했다. 유일민은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뾰로통해졌다. 유일민이 과시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왕중양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보기에 민망하구나. 이곳엔 세 사람의 남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보다못한 임조영이 유일민을 꾸짖었다. 유일민은 입을 더 불쑥 내밀고는 왕중양의 반응을 살폈다. "오해 마시오. 이 애는 지금 나를 의지하고 있을 뿐이요. 또한 이 애의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부탁도 받았고……." 왕중양이 난처한 몸짓을 보이며 변명하려 했다. "물론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그 애 역시 어엿한 여인의 몸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그 사람이 죽으면서 장래까지 책임지라고 하셨나요?" 그녀의 질문에 왕중양은 묵묵부답이었다. "당신이 의협심에 불타는 사내라는 것은 저도 인정하죠. 하지만 지나친 행동은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고?' 왕중양은 그 말에 대해 곰곰 되씹어 보았다. 과연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얼른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 한들 저 여협이 무슨 이유로 상관을 한다는 말인가?' 왕중양은 그런 여협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협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일민이 자꾸 자신에게 지나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자제시켜야 한다는 것은 깨달았다. 왕중양이 슬쩍 유일민을 떼어놓으려 했다. 왕중양의 의도를 벌써 눈치챈 그녀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나는 당신이 사내 중의 사내라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아주 속이 좁은 형편없는 사람이었군요!" 유일민의 태도에 모두들 경악했다. 어찌 어린 계집의 입에서 이같은 말들이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세상을 오래 살아보고 또 숱한 사내들을 겪어본 성숙한 여인 정도가 되어야 속으로 품을 수 있는 말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유일민은 끊임없이 나이에 걸맞지 않는 말들을 퍼부어 댔다. "우리 아버님께서는 왕 공자님이 기인(寄人)이라 여기셨어요. 그래서 돌아가시면서 저를 왕 공자님에게 부탁을 하신 거예요. 공자님은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 행동하시는 것이겠지만 만약 내키지 않으시다면 저 역시도 더는 남아 있지 않겠어요. 아니 난 스스로 죽어버리는 길을 택하겠어요!" 이미 유일민의 순진한 소녀의 티는 말끔히 벗어 던진 뒤였다. 무엇이 이토록 유일민을 변하게 만들었는지 왕중양으로서도 난감할 뿐이었다. 임조영도 선뜻 대답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리둥절해 있는데 다시 유일민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공자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오. 내가 싫으신가요? 그렇다면 전 당장 공자님 앞에서 사라지겠어요." "누가 너를 싫다고 했더냐?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보렴." "관두겠어요. 당신들은 모두 나를 부모도 없는 고아라고 업신여기고 있는 게 분명해요." 유일민이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임조영이 그녀를 달래려고 했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 그리고 난 너와 왕 공자님 사이에서 어떤 의미로도 나서지 않을 테니 염려 말아라."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왕중양 쪽이었다. 유일민의 어리광 때문에 괜히 서로의 사이만 곤란해진 것같아 임조영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데 낄낄대는 요란한 웃음 소리가 터졌다. "힛힛힛, 한 사내를 두고 두 여인이 차마 못할 마음고생을 하고 있군 그려? 그렇바에야 둘 다 내게로 오는 것은 어떤가?" 모두 등줄기로 확 돋는 긴장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두 다리를 떠억 벌린 채 서서 징그럽게 웃어대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여협 임조영을 따라다니겠다고 한 무심이었다. "난 아가씨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오. 오호, 여기 또 하나의 여인이 있는데 어쩌면 난 두 가지의 복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군!" 유일민이 얼른 왕중양의 팔에 매달리며 작게 움츠렸다. 임조영이 무심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그렇다면 네 놈은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말이더냐?" 무심이 넉살좋게 히죽거리며 임조영의 말을 묵살하려 했다. "아가씨가 얼굴을 감춘다면 나같은 사람은 쉬지 않고 생겨날 것이외다. 왜 '홍안화수(紅顔禍水)'라는 말도 있지 않소? 미인은 화근이 된다는 뜻인데 그대가 강호에 얼굴을 내보인다면 온갖 사내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게 될 것이오. 그러니 얼마나 큰 화근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헤헤, 하지만 내게 온다면 그같은 성화는 없을 테니 걱정 마시오." 타탁탁탁! 요란하게 발소리를 내며 달려간 임조영이 검을 뽑아 한차례 찔렀다. 그러나 무심은 용케 피하며 계속 떠벌렸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을 아시오? 임금이 나라까지 망치게 한 뛰어난 미모를 일컫는 말인데 난 믿지를 않았소. 하지만 오늘에서야 그말의 참뜻을 알 것 같으니 그대야말로 내 학식의 원천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하하하!" 그는 연신 되지도 않는 말을 내뱉으며 임조영의 검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임조영이 애를 먹는 것을 본 왕중양이 막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임조영이 만류했다. "공자님은 나서지 마세오.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요절을 낼 수 있으니까." 그러자 다시 무심이 기분 나쁜 웃음이 터뜨렸다. "헤헤헤! 나를 어쩌겠다고? 그러기 전에 그대는 내 품에 안겨 별구경 달구경에 정신을 못 차릴텐데?" "닥쳐라!" 임조영이 후다닥 무심에게로 덮쳐들며 검을 두어 번 그어 댔다. "이크!" 그러나 흥분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녀의 검끝은 그닥 예리하지가 못했다. 매번 무심이 여유를 갖고 피할 수 있는 공격으로 끝나는 게 고작이었다. "그대는 지금 엉뚱한 곳에 힘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요. 그러지 말고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나와 대몽골 군영에 다서 즐거움을 나누는데 투자하는 게 어떠시요?" 그러면서 자신에게로 임조영의 검끝이 득달같이 날아오자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그의 걸음은 어지럽고 일정한 보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좁은 배 안을 자유자재로 누비고 다녔다. 왕중양의 눈에도 임조영의 검이 제 실력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야비하게 여인을 상대로 상스러운 말을 떠벌리는 무심 때문에 그녀는 지금 대단히 흥분해 있어 격한 동작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임조영과 무심의 어린아이 놀이와도 같은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데 소리 없이 낯선 배 한 척이 다가왔다. 곧 그 배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희들은 누구인데 싸움을 하느냐!" 자세히 보니 몽골 대군들이었다. 이를 호가인한 무심이 더욱 기세를 높이며 임조영에게 협박을 했다. "어때, 이제는 내 말을 듣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을 거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순순히 나를 따르시오!" 이윽고 몽골 대군이 타고 있는 배가 쿵 하고 닿는 소리가 들렸다. 유일민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오들오들 떨어댔다. "들으시오! 난 몽골 좌군장전(左軍帳前) 지휘부사(指揮副使) 적로온(赤老溫) 휘하의 사람이오!" 무심이 그 배를 향해 소리치는 게 보였다. 몽골군들은 자기 편 사람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 대꾸해 왔다. "알겠소. 곧 그리로 갈테니 기다리시오!" "그럴 것 없이 아예 물러섰다가 이 배를 부셔 버리시오!" 이렇게 목청을 돋운 무심이 매섭게 왕중양을 향해 눈을 치켜 떴다. 사태를 얼른 간파해낸 왕중양이 고함을 내지르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아무리 발재간이 남다른 무심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불과 몇 합을 겨뤄보지 않고서 불리함을 깨달은 그가 몸을 돌리며 다시 허연 이빨을 내보였다. "아가씨, 부탁이니 어디를 가더라도 날 잊지 마시오! 내 꼭 다시 찾아가리다!" 그리곤 텀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누가 강으로 뛰어든 것인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몽골 대군 쪽에서 누군가 이렇게 외쳐 댔다. "활을 쏴라! 어서 활을 쏴!" 곧 몽골군의 배 위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무심에게로 쏟아졌다. 물 밖으로 머리를 막 내밀려던 무심이 이를 보고는 흠칫 놀라 다시 물 속으로 몸을 처넣었다. 겨우 이들의 배 쪽으로 헤엄쳐 간 무심이 다시 고개를 내밀고는 위에 대고 고함을 쳤다. "이봐, 나라구! 적로온 휘하의 사람이라니까!" 무심을 알아본 몽골군들이 화살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화살 끝이 왕중양 일행에게로 돌려졌다. 곧 무수한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우리도 어서 강물로 뛰어들어요!" 임조영이 다급하게 외치자 왕중양이 유일민을 끌어안았다. "난 걱정말고 어서 그대나 먼저 뛰어드시오. 난 이 애를 보살펴야겠소!" 핑! 핑!……. 수십 개도 넘을 듯한 화살이 임조영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녀는 검을 휘두르며 화살들을 모두 막아냈다. 그러나 화살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들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어려웠다. 몽골군은 임조영 뿐만 아니라 왕중양에게도 마구 화살을 쏘아댔다. 왕중양도 유일민을 한 팔로 안은 채 몸을 날리며 화살을 피했다. 그러나 역부족임은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날아든 화살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중 하나가 유일민의 어깨에 박혔다. "악!" 유일민이 풀썩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어깨에선 어느새 시뻘건 선혈이 쏟아졌다. "한놈도 놓치지 말고 목을 따라!" 느닷없이 어디선가 이런 외침이 들려 왔다. 왕중양이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언제 나타났는지 주위에는 여러 척의 배가 횃불을 밝혀 든 채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배들은 왕중양 일행이 탄 배와 같은 작은 규모였는데 사람들이 병장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이 배들이 차츰 몽골 대군이 탄 배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곧 몽골 대군 배를 향해 횃불들이 날아갔다. 여기저기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몽골군의 배는 순식간에 화염에 덮이면서 강 전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몽골군들이 하나둘씩 강으로 뛰어드는 소리와 함께 더욱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어 작은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몽골 대군 배로 줄지어 올랐다. 남아 있는 몽골군들도 곧 전멸을 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왕중양은 어디서 이처럼 용감무쌍한 사람들이 나타났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옆에서 유일민의 상처를 돌보던 임조영도 이들의 싸움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제15장 정체를 밝힌 임조영 강으로 뛰어든 몽골군 중 몇이 왕중양이 타고 있는 배로 기어올랐다. 이들은 자신들이 죽을 힘을 다해 오른 곳이 엉뚱하게도 왕중양이 있는 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잠시 허둥댔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판사판이라는 듯 왕중양에게로 덤벼들었다. "아악!" 눈깜짝할 사이에 몽골군 둘이 나가떨어졌다. 뒤에 남아 있던 서너 명이 주춤하며 자기들끼리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몽골군이 온다! 어서 피하자!" 아마도 작은 배를 타고 나타난 사람들 중 하나가 내는 소리인 것 같았다. 정말 강변 쪽에서 몽골군 기병들이 아우성을 치며 새카맣게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어서 이곳을 떠라! 지체했다가는 큰 일을 당한다!" 다시 처음 소리를 질렀던 사내가 다그쳤다. 언뜻 보기에 젊은 사람 같았는데 그의 말에는 제법 위풍이 담겨져 있었고 권위도 적당히 들어차 있어 보였다. 불길에 휩싸인 채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몽골군의 배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이들은 곧 자기들 배로 올라간 후 노를 젓기 시작했다. "공자님도 어서 이곳을 피하시오!" 젊은 사람이 왕중양을 향해서도 한마디 던졌다. 왕중양은 아직 남아 있은 몽골군과 대처하고 있던 참이었다. 젊은 사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들 중 하나가 양팔을 벌리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