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23편 (23/60)

2026-09-30 18:55:31 조회 13
해불개가 질풍처럼 돌진해 오자 왕중양은 가볍게 훌쩍 몸을 띄웠다. 해불개의 머리 위로 치솟은 왕중양이 아래로 내리기 전 얼른 그의 등짝을 발로 찼다. 왕중양의 발차기에 해불개가 저만큼 허겁지겁 밀려가다가 섰다. 왕중양은 사뿐히 땅에 내려앉은 후였다. 해불개가 급히 몸을 돌렸는데 잔뜩 기가 죽은 표정이었다. "자, 받아랏!" 해불개가 죽기살기로 다시 왕중양을 향해 칼을 뻗으며 달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몸을 날린 왕중양은 해불개의 머리 위에서 마음껏 무공을 펼쳤다. 이번에는 뒷발로 해불개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해불개가 앞으로 풀썩 엎어졌다. 칼끝으로 몸을 지탱하며 겨우 일어선 해불개의 눈가엔 불꽃이 튀었다. 그는 지금 참을 수 없는 치욕에 이를 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강남 흑도의 우두머리라고 떠벌이고 다니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처지였다. 만약 해불개 자신이 전의를 상실한 채 칼을 떨어뜨린다면 강남 흑도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게 불 보듯 뻔했다. "이아아!" 칼을 앞으로 모아 쥔 해불개가 다시 왕중양을 향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갔다. 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왕중양은 아예 멀찌감치 몸을 날려 해불개와 제법 떨어진 곳에 내렸다. 마구 칼을 휘두르던 해불개가 사라진 왕중양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두리번거렸다. 이쯤하면 무릎을 꿇고는 용서를 빌 것이라 생각한 왕중양이 다시 몸을 새처럼 띄워 해불개에게로 날아들었다. 해불개가 쓰는 도법은 같은 무리들이 부리는 초수와는 달리 사악하고 무자비한 살기를 띠고 있었으므로 왕중양은 한편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해불개 바로 앞으로 소리 없이 내린 왕중양이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직 해불개의 공격은 끝이 난 게 아니었다. 때를 기다려 해불개가 칼로 왕중양을 내리쳤다. 그는 왕중양이 이미 손가락 하나를 곧추 펴 높이 쳐드는 것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쨍! 하는 쇠붙이 소리가 나며 해불개의 칼이 허공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정말 멋진 솜씨군!" 구레나룻을 기른 챵바가 외쳤다. 그 옆에서 함께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는 무심 역시도 감탄을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해불개, 어서 칼을 내려놓으시지?" 챵바가 왕중양 대신 해불개의 가슴을 들쑤셔 댔다. 그러나 해불개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곧 하얗게 질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곤혹스런 낯빛으로 아직까지 높이 쳐든 상태로 있는 자신의 칼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물러선다면 강남 흑도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마지막이다. 기필코 너의 목을 치고 말리라!" 해불개가 결사적으로 칼을 휘둘러댔다. 왕중양이 기묘한 보법(步法)으로 공격을 피하자 또 챵바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저건 또 무슨 보법이지?" 그말에 무심도 왕중양의 걸음에 눈길을 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종의 성진보법(星陳步法)같기도 한데 모르겠어. 말만 들었지 아직 보지를 못했거든." 무심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왕중양의 걸음걸이를 살피기에 바빴다. 사실 왕중양 자신도 지금의 이 보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아니 어떤 특정한 보법이라는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자연스럽게 발을 옮겨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바로 선천신공의 절기가 몸에 들어오면서 생겨난 새로운 보법이었다. 한순간도 왕중양의 동작을 놓치지 않고 있던 무심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인형(仁兄)은 무공이 실로 대단하시군요. 정말 탄복하였소이다." 무심이 나서자 해불개는 기회라도 만난듯 한쪽으로 얼른 물러섰다. "그런데 그 무공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다시 무심이 물어오자 왕중양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선천신공이라 하지요." 이말에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선천신공을 연마하려면 물 안에서만이 가능하다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언제인가 소소라는 대협이 우연한 기회에 수정궁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비로소 그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는 사실도. 선천신공은 매우 신기한 무공으로 무궁무진한 힘을 갖게 하는데 소소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익힌 사람이 없었다. 해불개의 안색도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이거 덕분에 견식을 넓히게 되어 고맙군요." 무심이 탁탁 박수까지 쳐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챵바가 무심에게 물었다. "그럼 저 선천신공인가 하는 것도 사대 기이한 무공 속에 드는가?" "물론이지. 사대 천하기공에는 그밖에도 유운장의 합마공 대리 단씨의 일양지, 동해 도화도의 탄지신공 등이 있다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이 선천신공을 천하 사대 기이한 무공 속에 넣기를 싫어한다는 거야. 그 연유는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봐도 좀체 익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무심이 설명을 해주자 챵바가 화를 버럭 내며 따져 물었다. "거짓말! 선천신공이 익히기 힘든 무공이라면 어째서 저 사람은 능숙하게 하는 거요?" 어이가 없어진 무심이 입을 헤 하고 벌리자 챵바의 주먹이 대뜸 날아들었다. "어쿠!" 옆으로 몇 걸음 밀려가던 무심이 몸을 세우며 챵바에게 따끔한 충고를 했다.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리고 그 주먹 좀 잘 다스리라고!" 그런데 난데없이 해불개가 무심의 말을 걸고 넘어졌다. "공자께서도 이 일에 간섭할 의양이라면 좀 공평하게 처신을 하시오." 해불개의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윽박지르며 나설 것이 분명했으나 때가 때인 만큼 그도 조심을 하는 눈치였다. 무심이 해불개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몽골의 대군이 이미 변경을 들이치고 있는데 당신들 송나라 임금은 임안에서 향락에만 젖어 있으니 이를 두고 망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그런데 그런 송나라를 위해 목숨들을 바치려고 하니 이 또한 한심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오?" "그게 무슨 소리요?" 하며 무심에게 따지듯 나선 사람은 십팔검객 중 성미가 고약하게 생겨먹은 한 사내였다. "다른 뜻은 없소. 준마는 영웅에게 바치고 미인은 지기에게 준다는 말도 있기에…… 당신들만 좋다면 내가 추천하여 당신들에게 몽골국의 큰 벼슬을 내리게 해주겠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슬쩍 해불개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해불개의 눈동자가 요리조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해불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한 무심이 다시 덧붙였다. "해불개 총타주님께서 몽골 대군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시겠다고만 하면 저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도록 내 도와줄 수도 있소. 사실 나 혼자서라도 문제는 없지만 말이요." 무심이 내민 손가락 끝에는 왕중양을 비롯해 반벽산장의 사람들이 걸려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해불개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나왔다. "뭐라고! 나더러 몽골놈들의 개노릇이나 하라고? 이놈아, 이 해불개를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이냐? 나 해불개는 지금까지 떳떳한 대장부였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람 같지 않은 놈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그래도 대장부야. 내가 남의 집 대문 앞을 기웃거리며 문전걸식은 할지언정 몽골 놈들에게 빌붙는 짓은 못한다!" "어허, 이거 감히 누구를 욕하는 거야?" "바로 네 놈을 두고 하는 욕이다!" 무심의 으름장에도 해불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해불개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오히려 흐뭇하게 이들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되겠다. 먼저 저 놈의 모가지부터 비틀어야겠다!" 느닷없이 긴 팔을 쑥 내민 무심이 해불개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원공삼격(猿公三擊)이다!"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바로 얼굴을 가린 여협의 외침이었다. 왕중양은 원공삼격에 대해 알 수는 없었으나 워낙 여인의 외침이 다급하여 대단한 무공일 거라 추측했다. 무심은 여협이 말한 그 무공을 앞세우고는 해불개를 덮쳐 들었다. "받아랏!" 무심의 공격은 무서웠다. 돌풍이 인듯 그의 손놀림에 흙먼지가 풀풀 일었다. 해불개는 그의 공격을 두어 번 피하더니 곧 옷 앞자락을 찢기고 말았다. 가슴팍이 서늘해진 해불개가 뒷걸음질 쳤다. "타인은 유심(有心)이지만 이 공자는 무심(無心)이다!" 이렇게 주문을 외우듯 지껄인 무심은 틈을 주지 않고 해불개에게로 달려갔다. "윽!" 그의 장에 해불개는 그만 어깨를 들이쳤다. 어깨가 으스러지는 아픔과 함께 해불개가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났다. 부서진 어깨를 부여잡고는 해불개가 부르짖었다. "죽어도 난 몽골놈들의 개노릇은 안 하련다!" 무심이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고 하는데 왕중양과 여협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심 앞에 먼저 당도해 그를 막아 선 것은 챵바였다. "너까지 나를 막을 셈이냐? 넌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걸 잊었어?" 챵바를 노려보는 무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건 나도 알지. 사부님께서 공자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으니까. 하지만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방관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소. 우리에게 투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일 수는 없어. 그건 대장부로서 할 짓이 못되오." "집어치워. 투항하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야 해!" 슬쩍 왕중양과 여협을 확인한 무심이 챵바를 슬쩍 떠보았다. "이봐, 저 왕중양이란 사람이 바로 대장부가 아니라고. 저 여인 역시 마찬가지지. 그러니 자네가 한 번 겨루어보는 게 어때?" "대장부가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인까지는 너무 하잖아?" 챵바가 떫떠름한 얼굴을 그쪽으로 돌렸다. 무심은 챵바를 부추겨 이들을 치려는 속셈이었다. "그럼 저 사내와 먼저 붙어보지?" 챵바 역시 왕중양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던 차라 은연중 한 번 겨뤄보고 싶었다. 왕중양에게로 다가간 챵바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왕중양이 부동의 자세로 고개를 슬쩍 돌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대단한 기로군!" 왕중양이 비꼬는 투로 빈정대자 챵바가 열을 올렸다. "내 주먹을 피하다니?" 초원에 있을 때 큰 황소를 때려눕힌 적도 있는 챵바였다. 그런데 왕중양은 눈썹 하나 까닥 하지 않고 자신의 주먹을 옆으로 흘려보냈던 것이다. 챵바가 다시 주먹을 끌어쥐고는 왕중양에게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왕중양은 두 다리가 땅에 붙박힌 듯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들의 싸움에서 시선을 뗀 무심이 여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여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왕중양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과연 누구일까. 손에 든 장검을 봐서는 무술 역시 만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가려진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는 다른 일은 몰라도 여인의 관해서는 무심코 지나쳐본 적이 없었다. 미인을 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고야마는 성미이기도 했다. 무심으로서는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과 싸운다면 기회를 봐서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 품었다. 그런데 여인은 좀체 앞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무심이 왕중양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여협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무심이 인사드립니다." 무심이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인을 고르는 것은 준마를 선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색깔과 용모 그리고 재간과 목소리 심지어는 걸음걸이는 물론 잠든 모습에 이르기까지 무려 열 가지나 되는 기분에 적합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눈엔 웬만한 여인은 들어차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 여협에게서는 부드럽고도 진정한 여인의 품성이 느껴졌다. 비록 면사포에 얼굴이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대는 저 왕중양과는 구면인가요?" 무심이 묻자 여인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의 마음속에는 괜한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단순히 구면이라고만 했는데도 마치 그들이 연인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더욱이 왕중양을 적수로 생각하고 있기에 그 질투심은 더욱 사납게 일었다. "왜 얼굴을 가리고 계시지요? 강호에 다니시기에 불편함이 많이 따를텐데……. 또한 그대의 용모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소?" 무심의 말투는 제법 차분했으며 여인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 번은 마음에 드는 여인을 방에 가두어 놓고 사흘 낮밤을 설득한 적도 있는 그였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마음을 닫아두고 있던 그녀 역시 나중에는 스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반년도 못 되어 무심은 그녀를 차 버렸다. 그런 재주를 지니고 있는 무심이였기에 여협이 꼭 제 손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하리라 자신을 했다. 그런데 어떤 달콤한 말로도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잠시 여 인의 동태를 살피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왕중양은 사람은 좋은데 한 가지 아깝게도……." 슬쩍 말꼬리를 흐리자 여협이 물어왔다. "아깝다니요? 무슨 말이죠?" 무심의 입꼬리로 회심의 미소가 짙게 떠올랐다. 슬슬 자기의 계략에 넘어가고 있다고 판단한 그가 여협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대도 상술(相術)에 대해 알고 있겠지요? 관상을 보는 것 말입니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압니다만 내 보기엔 저 공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아깝게도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할 운명이지요." "그래요?" 여협의 반응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분명 왕중양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게 확실했다. 계속 헛손질을 하며 왕중양 앞에서 허둥대고 있는 챵바를 무심코 돌아보던 그가 다시 입을 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왕중양은 나중에 자신의 신세 또한 비참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인과의 정 또한 품을 수 없게 되는 건 물론 폐인으로 남을 뿐이지요." "당신의 말이 맞다면……." 여협의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졌다. 무심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대도 제게 관상을 좀 보시지 않으시겠소? 그대가 얼굴을 잠시 내보인다면 앞날에 대해 훤히 꿰뚫어 드리리다." 그녀가 무심의 말에 잠시 손을 들어 면사포를 들추려다 불현 멈추었다. "아니오. 내 관상은 필요없소." 무심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다는 격으로 괜한 심술까지 생겨나 열이 받쳤다. 무심이 속마음을 숨기고 다시 여협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반벽산장 사람들은 들어라! 어서 몽골에 투항하여 충설을 맹세하여라. 만일 내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산장 전체가 살육잔치를 이룰 것이며 강은 피로 물들게 될 것이다!" 바로 귀낭자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십팔검객들 속에서 누군가 비웃었다. "그런 엄포가 통할 것 같은가? 구원군이 온다면 몰라도 너희들로서는 어림도 없다." 이번엔 십도객 무리에서 이렇게 받아쳤다. "구원군이 바로 여기 있다!"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십도객들이 다시 칼을 들고 반벽산장 사람들을 노리고 있지를 않은가. "어서 몽골에 투항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반벽산장의 이름은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아라!" 십도객들이 다시 목청을 돋구었다. 반벽산장 사람들은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덤빌 테면 어서 나서라!" 반벽산장 사람들 중 한 노인이 이렇게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지르며 나서자 십도객들이 내심 놀랬다. 노인의 몸으로 거침없이 나서는 것을 보자 은근히 두려웠던 것이다. 귀도 허재가 앞으로 나서며 노인을 향해 칼날을 그어댔다. "윽!" 비록 자신을 굽히지 않았던 노인이었지만 힘이 있을 리 만무였다. 노인은 허재의 칼날에 목이 잘린 채 널브러졌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더욱 치를 떨었다. "이 잡놈들아!" 반벽산장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주먹질과 몽둥이질을 십도객들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맨주먹으로는 십도객의 칼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십도객들은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마구 칼을 휘둘러 피를 뿌렸다. 반벽산장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 넘어갔다. 여기저기서 나는 아우성과 사지가 찢겨나가는 비명이 한데 어우러져 일대의 피바다를 이루었다. 반벽산장 사람들은 서넛이 떼를 지어 십도객 한 사람과 맞붙었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미친 듯 허공을 그어대는 칼날 앞에서는 떨어지는 낙엽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드디어 십팔검객이 나서게 되었다.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 검과 칼이 내뿜는 ㅂ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십도객 중 한 사내가 반벽산장의 사람의 몸뚱이를 두 동강 내자 심팔검객이 달려들었다. "이 개백정 같은 놈아!" 십도객에게로 검들이 날아갔다. 십팔검객은 그의 숨통을 향해 일제히 검을 찔러댔다. 그러자 놈이 재주넘기를 하며 옆으로 피해 달아났다. "차라리 그 검으로 반벽산장 놈들의 밑구멍이나 쑤시거라!" 놈이 이죽거리며 놀려댔다. 그러면서 자기에게로 떠밀려온 반벽산장 사람의 목을 쳐 날려버렸다. 직검 마옥과 그의 아내인 손불이도 합세를 했다.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고 그에 따라 죽어 가는 사람의 수도 늘어났다. 발에 밟히는 것은 잘려 나간 사람들의 목과 사지였고 보이는 것은 하늘로 치솟는 핏덩어리였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왕중양! 어서 여기를 보거라!" 그 목소리는 무심의 말이었는데 왕중양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그는 어느 틈엔가 유기의 딸인 유일민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곧 죽일 듯한 기세였다. "싸움을 그만두고 어서 우리 몽골에 투항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계집의 목은 날아갈 것이다!" 유일민은 눈을 감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어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미처 손을 쓸 여유가 없었던 왕중양은 이 일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그런데 다시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유일민을 끌어안고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있는 무심 뒤로 휙 하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무심이 자기 뒤쪽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더욱 유일민의 목을 졸랐다. "한 발짝만 움직이면 이 계집의 목숨은 끝이다!" 그러면서 뒤를 짧게 돌아보던 무심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그곳에는 여협이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여협은 유일민의 생사가 달린 일이라 조심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대가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준다면 이 계집을 놓아줄 수도 있소." 무심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껄였다. "무엇으로 당신의 말을 믿소?" 여협의 말에 무심이 탁한 웃음을 토했다. "하하핫! 날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겠다는 거요?" 살육전도 이미 멈춘 상태였다. 싸움을 중단한 이들이 모두 무심의 행동에 관심을 보였다. "이봐, 자넨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아는가?" 무심이 왕중양을 향해 불쑥 물었다. 왕중양이 여협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마음에 품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가 알고 있는 알고 있는 여인이라고는 오로지 임조영과 결의형제를 맺을 때 옆에 있었던 자지(紫枝) 뿐이었다. 그러나 이 여협이 자지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난 모르오." 왕중양이 고개를 내젓자 무심이 콧바람을 불었다. "흥, 모른다고? 하지만 이 여인은 너를 알고 있다. 이 여인의 눈을 보고 난 알았지." 모심공자가 휙 고개를 돌려 여협을 협박했다. "이 계집을 살리겠다면 어서 얼굴을 내보이시오!" "필요없소. 난 그 애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오. 만약 그 애가 죽는다면 다만 그 원수를 향해 일침은 가할 수 있소." 여협의 태도는 부드러우면서도 완강했다. 무심이 뱀눈을 만들었다. "내가 그대의 손에 죽는다고? 허허." 그는 손아귀에 있는 유일민을 당장 죽일까 생각했지만 망설여졌다. "무신, 넌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고 있는 거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왕중양이 꾸짖으며 한 발 내딛었다. 무심이 고개를 젖혀 웃는 시늉을 하더니 곧 순금으로 만들어진 부채를 펼쳐 들었다. 중간에는 누공(鏤空)으로 새겨진 불조도겁도가 있는 부채였다. 그 황금 부채를 유일민의 눈앞으로 들이민 그가 잘근잘근 씹어 뱉었다. "자, 이 부채를 보렴. 여기 그려져 있는 이 화상이 바로 부처님이란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이 누구지? 부처님이지?" 유일민이 바들바들 떨며 겨우 대답했다. "그…… 그래요." 무심이 히죽 웃더니 부채를 흔들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이 지금 무얼 하고 있더냐?" 자세히 부채에 새겨진 그림을 보던 유일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몰라요." 유일민이 고개를 돌리며 뿌리치려 하자 무심이 가로막았다. "어서 똑똑히 보란 말이다. 부처님도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그가 유일민의 백옥같은 볼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내와 한 번도 살을 섞지 않은 여인에게서는 늘 특별한 향기가 나거든……." 마치 암내를 맡은 수캐처럼 무심은 유일민의 몸 여기저기에 코를 대고는 벌름거렸다. 유일민은 그때마다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제14장 유일민의 사랑 왕중양은 무심이 하는 짓거리를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어린 유일민이 몸부림을 치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자 왕중양의 심기가 몹시 뒤틀렸다. 의협심이 강한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가슴 한편으로 옥총의 칼을 맞고 죽어가며 유기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