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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22편 (22/60)

2026-09-30 18:55:31 조회 13
그는 다시 뒤쪽으로 물러난 아홉의 도객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유기의 뒤에는 열여덟이나 되는 검객들이 서 있었는데 이들은 언제나 함께 다니며 싸우는 무리였다. 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나서자 대장관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앞으로 다섯 걸음씩 내딛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위치에 서 있었는데도 어느 틈엔가 같은 열을 이루어 도객들 앞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 동작의 능숙함만을 보고서라도 꽁무니를 뺄 이들도 적지 않을 성싶었다. 이들 중 맏이가 신호를 보냈다. "시작!" 이들이 다시 민첩한 동작으로 이상한 대열을 만들며 흩어졌다가 모이는 것을 반복했다. 그 동작은 매끈하고 절도가 있어 보는 사람들이 모두 입을 헤 하고 벌릴 정도였다. 허재가 비웃었다. "강호에는 칼이 있으면 검이 있어서는 안 되는 법. 오늘 칼이 강한가 검이 강한가를 겨뤄 보자!" 허재의 말에 용기를 얻은 도객들도 저마다 초수를 부리며 자세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십팔검객 중 맏이가 짧게 소리질렀다. "출검이다!" 허재가 칼을 마구 휘두르며 맏이에게로 달려갔다. "야압?" "받아랏!" 검과 칼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성의 소리를 내질렀다. 불꽃이 튀고 검이 가르는 바람 소리에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그런데 맏이는 쉽사리 검을 뽑아 들지를 않았다. 맏이는 등에 검을 메 고 있는 사람이었다. 등에 검을 멘다는 것은 인자한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게 떠도는 말이기도 했다. 손에서 비교적 먼 등에 검을 두고 있으니 매사에 조심스럽고 함부로 검을 뽑지 않기 때문일 거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한편 검술이 뛰어날수록 검을 등에 멘다고 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만큼 검이 손에서 멀어도 얼마든지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그럴 거라는 생각이었다. 바로 맏이 역시도 검을 등뒤에 메고 있었기에 허재가 섣불리 보고는 덤볐던 것이다. 허재가 칼로 내리치려는데 맏이가 잽싸게 몸을 돌리며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등에 메고 있는 검에는 손을 주지 않았다. 허재는 그 점이 이상하면서도 계속 틈을 주지 않으려고 공격해 들어왔다. 한쪽에 물끄러미 선 채로 맏이를 바라보고 있던 왕중양의 눈빛이 흔들렸다. '과연 이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강호에서 이름이 난 열 명의 도객들과 검을 쓰는 저 사내……. 그런데 왜 저자는 검을 뽑아 들지 않는 것일까?' 왕중양이 약간 근심 어린 눈으로 맏이를 주시했다. 그런데 맏이가 드디어 천천히 손을 들어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제14권에 계속- 제13장 여협과 무심 공자 검을 뽑아든 맏이의 눈엔 살기가 등등했다. 좀처럼 등에 메고 있는 검에 손을 대지 않으려 하던 그가 검을 높이 쳐들자 모두들 긴장했다. 귀도 허재의 공격을 그저 피하기만 하던 맏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쉽게 검에 손을 대지 않는 그를 두고 반신반의했었다. 자신이 없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막강한 실력의 소유자였기에 그럴 것이라고.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의 검날이 허공을 갈랐다. 허재의 도법(刀法)도 보잘것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맏이가 검을 그어대자 허재의 도법에도 빈틈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초수가 실력대로 발휘되지 않아 속도로 일정하지를 못했다. 허재가 자신의 약점을 무마시키려는 듯 맏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야압!" 허재의 칼이 맏이의 귀 옆을 스쳤다. 서로 엇갈려 몇 걸음 떨어졌던 이들은 다시 자세를 추스리고는 맞붙었다. "검을 받아랏!" 맏이의 검은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허재를 몰아붙였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맏이가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허재도 위로 솟구치며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쨍! 검과 칼이 공중에서 불꽃을 튀기며 작열했다. 한편 허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도객 중 맏이인 무도(無刀) 맹랑(孟浪)이 곧게 상체를 펴고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터억 땅을 구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리 같은 맏이끼리 한 번 붙어보는 게 어때? 그대가 허재와 싸운다면 체면이 서질 않지!" 이말에 십팔검객 맏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 맹랑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10여 년 전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맹랑이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술에 만취가 된 그는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며 비오는 거리를 헤매였다. 사람들이 이런 맹랑을 두고 한마디씩 던졌다. "저 사람 미쳐버린 거 아냐? 미친 게 틀림없어!" 그도 그럴 것이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거리를 비칠대며 걷고 있으니 사람들의 눈에는 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맹랑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엔 막연한 두려움도 생겨났다. 아무래도 무슨 큰 일을 치를 사람인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그는 다시는 칼을 잡지 않았는데 칼은 쓰지 않아도 손에 칼을 든 것과 마찬가지로 싸움에 임했다. 또한 사람들을 그때부터 그를 무도 맹랑이라 불렀다. 역시 맹랑의 손엔 칼이 들려 있지를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십팔검객 맏이가 넌지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무도 맹랑, 그댄 항상 마음속에 칼을 품고 다니는가?" 맹랑이 두어 번 고개를 저어댔다. "흠, 내 마음속에 칼이 있다고? 천만에, 단지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따름이지. 난 칼을 원하지 않아." "어디 그럼 시험을 해볼까?" 맏이가 아래로 떨어뜨렸던 검을 바로 잡으며 그를 겨냥했다. 맏이의 걸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초식 중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무리가 없는 것을 선택하려 했다. '횡도탈애(橫刀奪愛)'라는 초식이었다. 그는 이 맹랑의 도법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칼도 들지 않은 맹랑에게서 도법을 읽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맹랑이 맏이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맏이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그로서는 피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얏!" 곧 두 사람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높이 치솟은 두 사람이 엇갈리며 강한 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금속성의 물체가 서로 맞부딪칠 때 나는 소리와 빛이었다. 그렇다면 맹랑 역시도 칼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의 동작이 하도 빠르고 맹렬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맏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금속성의 물체에 막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봐서는 그도 칼을 쥐고 있는 게 분명했다. "훌륭한 도법이군!" 맏이가 검을 왼쪽 어깨 위로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맹랑 역시도 맏이의 실력을 인정했다. "훌륭한 검술이야." 그런데 갑자기 맹랑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과 귀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피를 본 십도객(十刀客)들이 발악을 하며 맏이에게로 달려들려고 했다. "가만있어!" 맹랑이 이들을 제지했다. 맹랑의 매서운 눈빛은 맏이를 응시한 채 조금도 흔들리지를 않았다. 십도객들이 맹랑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십팔검객 맏이가 서 있었는데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그의 낯빛은 맹랑보다 더욱 창백했는데 십도객들은 그 이유를 곧 알아차렸다. 맏이의 가슴엔 빗금을 그어댄 형상의 칼자국이 나 있었고 어깻죽지는 살점이 달아나버려 솟구친 피로 옷이 뻘겋게 변해버렸다. 이번엔 십팔검객들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이들은 아주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일명 십팔거사(十八居士) 노절천(怒折天)이라 불리는 울부짖음이었다. 강남에서 널리 알려진 외침소리로 웬만한 종소리보다 더한 울림으로 퍼졌다. 반벽산장을 뒤덮을 정도의 이 외침에 모두들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지었다. 십팔검객이 이처럼 힘을 내보이자 십도객들도 가만있지를 않았다. 이들 역시 동시에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더욱 우렁차 구중천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겉으로 봐서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유기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옆에 있던 딸 유일민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짐승들의 포효소리와도 같은 이들의 괴성에 딸이 두려움을 느낄까 봐 근심이 된 모양이었다. 한편 옥총은 얼굴색이 약간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그러나 왕중양은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고 가슴이 요동치는 기운에 몸이 한껏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도 목청을 높여 어떠한 소리라도 제압할 수 있는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쉽게 그런 충동에 자신을 내맡길 수가 없었다. 챵바가 무심에게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던졌다.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아는가? 늑대의 울음소리라도 흉내내려는 건가?" 무심이 씨익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들의 고함소리에 가장 경멸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귀낭자였다. 또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협은 오히려 관심이 없다는 투로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십팔검객들이 쥐고 있는 검은 모두 열여덟 개였다. 이 검들은 긴 것과 짧은 것 그리고 더러는 부러진 단검(斷劍)까지 다양했다. 또한 녹이 슨 수검(銹劍)과 연검(軟劍)이 눈에 띄는가 하면 중검(重劍)도 보였다. 이들은 각기 다양한 검을 움켜쥔 채 부동자세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반면에 십도객들은 열 자루의 칼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칼을 한데 모아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이라도 세워놓을 태세였다. 십도객 중 하나가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로 이렇게 주위를 일깨웠다. "십지도진(十地刀陳)이다!" 이 십지도진이란 대협 소소(簫嘯)가 만든 진법인데 공교롭게도 그는 한 번도 써본 일이 없었다. 이유는 그의 수하에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는 도객이 열이 채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소도 써보지 못했다는 이 십지도진이 십도객에게서 불리워지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십팔검객들이 사못 긴장하는 듯했다. "십지도진을 조심해라!" 맏이가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들에게 급히 일렀다. 그리곤 자신이 몸을 솟구쳐 십지도진을 이루고 있는 칼날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야아 !" 그러나 맏이는 십지도진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십지도진 안으로 채 들어가지도 못한 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뒤집히듯 날아와 버렸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이미 맏이의 몰골은 아까보다 더 형편없어졌다. 옷은 주린 맹수가 달려들었는지 갈기갈기 찢어져 너덜거렸고 상처가 몇 군데 더 깊이 나있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검을 높이 쳐들었다. "어서 검성직천(劍星織天)을 펼쳐라!" ]그러자 나머지 십팔검객들이 맏이를 따라 십지도진을 향해 와 하며 달려갔다. 이 검성직천이란 말 그대로 검빛이 별빛으로 되어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천라지망(天羅地罔)을 만드는 초수였다. 대개의 검객들은 각기 자기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검술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무리로 조화되기가 어려운 점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검성직천은 이 조화되기 어려운 각기의 검술들을 한데 모을 수 있게 하는 위력을 지닌 초수였던 것이다. 십지도진을 작파하기 위해 달려든 검성직천. 이십여 자루나 되는 검과 칼이 서로 엉키어 피를 튀는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결을 쭉 지켜 보던 유일민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갔다. 아직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고 있는 탓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보자 속까지 울렁거렸다. '이 사람들은 왜 목숨까지 내걸고는 싸우려 하는 것일까? 강호란 이토록 서로를 죽이는 곳이란 말인가?' 그녀는 겉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있는 아버지 유기에게 매달렸다. 가뜩이나 딸의 반응을 우려하고 있던 유기로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만약 죽게 되면 이 애는 누굴 믿고 살아갈 것인가?' 그는 속으로 한탄을 하고 있는데 무심이 챵바를 툭 치며 물었다. "그대 생각에는 저 사람들의 법수가 어떤 것 같은가?" 챵바가 요란스럽고 어지럽기만 싸움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하도 복잡해서 구경이나 제대로 하겠나?" 챵바의 시큰둥한 태도를 무심은 이해했다. 그 역시도 챵바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품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검술이든 검법이든 복잡하면 할수록 정신과 힘만 소모될 뿐이라 믿었다. 상대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은 채 단칼에 베어버리는 초수야말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공격이 아니겠냐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싸움은 그러나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여기저기서 칼과 검이 마찰할 때마다 챙챙!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또 피가 사방으로 튀고 목이 달아나는 참극까지 벌어져 그야말로 일대의 살육전이 이어지고 있는 판국이었다. 유일민은 더 이상 눈뜨고 볼 수가 없었는지 유기의 옷깃을 잡아 당겨 얼굴을 감추고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왕중양의 가슴엔 다른 의미의 떨림이 자리했다. 이들처럼 고함을 내지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지금은 그런 불길이 아닌 살육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이었다. 유기가 해불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해불개 네가 지난번 반화대회에서 나를 모욕했는데 그 대가는 알고 있겠지?" 그러자 해불개가 입을 실룩거리더니 받아쳤다. "이거 안되겠는데. 그런대로 낯 붉히지 않고 살려고 했는데 정말 귀찮게 구네. 죽지 못해서 안달이라도 난 거냐?" "뭣이, 네가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네가 아무리 강남 흑도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내게는 소용이 없다!" 유기의 도전에 해불개가 바람소리를 내듯 피식 하고 웃었다. "후후, 흥! 건방진 소리. 넌 당장 죽고 말 것이다. 후회할 사이도 없이 말이다. 후회할 사이도 없다고!" 사람들은 해불개가 왜 후회할 사이도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지 의아해 했다. 왠지 숨겨진 속뜻이 있는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해불개에 맞서려던 유기가 자신의 옆구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우욱!" 유기가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칼날이었다. 어느샌가 옆에 있던 옥총이 그의 옆구리를 칼로 찔렀던 것이다. "아버지!" 유일민이 유기를 안으며 오열을 터뜨렸다. 양손이 피투성이로 붉게 물들어진 유기는 두 눈을 흡뜨며 옥총을 노려보았다. "네, 네 놈이…… 네 놈이 이럴 수가…… 있느냐!" 옥총이 꺼져 가는 유기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입을 놀렸다. "반화대회 후에 내가 왜 그렇게 너를 대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고. 해불개 형님은 내 뺨을 몇 대 갈겼을 뿐이지. 하지만 난 해불개 형님에게는 원한이 없어. 아니 나를 죽인다고 해도 절대 원한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기는 숨이 막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는 왕중양에게로 사그라드는 눈길을 주었다. 왕중양이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 듯싶어 다가갔다. "유 장주님!" 유기가 다시 어렵게 입술을 떼려고 했다. "한 가지…… 난 죽어도 마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 그가 급히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본 왕중양이 얼른 등을 받쳐주었다. "염려마시고 어서 말씀하시오." "내 딸을 좀……." 유일민은 유기를 부여잡은 채 그저 울기만 했다. 왕중양이 그녀를 한 번 돌아보고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유기가 십팔검객 맏이에게 띄엄띄엄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서…… 어서들 피하시오. 당신들은 십도객의 적수가…… 못 되오." 그리곤 그만이었다. 유기는 목을 아래로 꺾은 채 더는 말을 잇지를 못했다. 유기가 죽자 해불개의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반벽산장의 인간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너희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이 해불개의 노복들임을 명심하여라. 어느 한 놈이라도 내 말을 거역한다면 몰살시키고 말겠다!" 그러나 반벽산장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해불개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해불개를 강물에 처넣을 듯이 덮쳐 들었다. "이것들이!" 해불개가 그중 한 노인의 머리채를 낚아채더니 눈을 부라렸다. "이 늙은 두상이 우기를 따라 지옥에 가지 못해 환장을 했구나!" 그가 노인의 목을 단번에 꺾어 비틀었다. 노인이 맥없이 해불개의 다리를 타고 주르르 미끌어졌다. "이놈 해불개야! 네 죄가 벌써 하늘에 이르렀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또다시 살인을 저지른단 말이냐?" 이때 왕중양이 불쑥 끼여들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해불개의 안중에는 왕중양이 제대로 된 적수로 여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건성으로 왕중양을 확인한 해불개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왕중양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여협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감히 해불개에게 대든 왕중양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는 눈치였다. 왕중양이 해불개를 치려고 일어서려는데 유일민이 붙잡았다.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왕중양의 팔에 매달린 채 부들부들 떨며 간청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요. 제발!" 어린 유일민을 바라보는 왕중양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감았던 눈을 뜨고는 해불개에게로 천천히 다가간 그가 위엄 있게 말했다. "네 이놈, 남은 파리목숨으로 알아도 제 목숨은 소중하다고 생각할 테지!" "네가 바로 그 유운장 놈들에게 혼찌검이 난 놈이더냐? 한 번 목숨을 구했으면 고맙게 알고 있을 것이지 왜 또 나서는 것이냐? 오냐, 어디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독이 잔뜩 오른 해불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젊은이, 그와 맞서지 마오! 해불개는 악독한 사람이오." 누군가 왕중양을 말렸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또한 얼굴을 가린 여협 역시 왕중양의 행동을 제지하고 싶었지만 내버려두기로 했다. 왕중양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과연 해불개를 물리칠 수 있을지……. 해불개는 왕중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번 반화대회에서 입은 중상으로 왕중양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회복이 되었더라도 완벽한 자기 실력은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 그의 실력이라고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넌 지금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죽더라도 아쉬워할 사람은 없다!" 말을 마친 해불개가 서서히 손을 들어 앞으로 절도 있게 내밀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오룡수(熬龍手)'였다. 이 오룡수는 손을 용의 발톱처럼 구부린 채로 움켜쥐기도 하고 때론 할퀴기도 하는 초수였다. 해불개가 왕중양을 잡아채려고 힘껏 손을 휘어 쳤다. 왕중양이 얼른 몸을 뒤틀며 해불개의 손아귀를 피했다. 이를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는 여협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을 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무심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엔 어림도 없다!" 옆걸음질을 치면서 기회를 엿보던 해불개가 몸을 휙 날리면서 왕중양의 손을 잡아챘다. "으악!" 그런데 왕중양의 한쪽 팔을 움켜쥐었던 해불개가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왕중양의 팔은 불덩이와도 같았다. 그는 손바닥으로부터 심장까지 들쑤시고 들어오는 화기에 당황했다. "우습군!" 하며 해불개를 내려보던 왕중양이 선천신공(先天神功)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는 선천신공이라 불리우는 내공심법이었다. 신공심법(神功心法)은 천하지성(天下至聖)의 심법으로 그것은 전후좌우가 온통 물이고 얼음이 없는 곳에서 공을 닦아야 하는데 태호에서 왕중양은 정말 우연하게 바로 그런 곳에 떨어졌었다. 호수 가운데 있는 거북의 등 위로 떨어진 왕중양은 그곳에서 이 선천신공을 비로소 터득했던 것이다. 해불개가 깜짝 놀라며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왕중양의 공격이 날아왔다. 조금만 늦었더도 해불개는 일격을 맞고 다시 허물어졌을 것이다. 얼른 양손으로 왕중양의 공격을 막아낸 해불개가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탁! 탁! 탁!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내밀며 밀었다 물러섰다는 주고받았다. 해불개는 그러면서 틈만 나면 왕중양의 손을 잡아채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는 왕중양의 몸 어디든지 잡히기만 하면 단번에 찢어버릴 태세였다. "제법이군!" 해불개가 왕중양의 눈을 응시하여 중얼거렸다. 그리곤 잽싸게 몸을 날려 왕중양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해불개의 손길이 다가오자 왕중양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이크!" 해불개가 팔을 부여잡으며 옆으로 비틀거렸다. 갑자기 어깻죽지까지 쩡 하고 울리는 통증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해불개는 조금씩 왕중양에 대해 두려움을 품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이 늘었군. 그런데 왜 남의 일에 참견하고 나서려는 게지?" 왕중양은 대답 대신 슬쩍 미소만 내비쳤다. 이제서야 여협은 안심을 하는 기색이었다. 이제는 여유롭게 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해불개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높이 쳐들었다. 무슨 꿍꿍이 수작을 하려는 것인가. 왕중양이 약간 경계를 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해불개의 손아귀로 칼 한자루가 슝 하고 날아들었다. 수하 중 누군가가 재빨리 칼을 해불개에게 던져 준 것이다. "어디 이 칼도 막을 수 있나 볼까?" 그가 곧 흙바람을 일으키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땅에서는 뿌우연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