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20편 (20/60)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의 대답은 너무 빨라 내가 믿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시선을 지청에게서 돌린 그녀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알렸다. "난 당신들의 공자와 내기를 했는데 그 승패에 따라 당신들의 목숨은 좌지우지될 것이오." 사람들은 그 결과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지청이 탄식하며 나섰다. "그대가 죽일 생각이면 그렇게 하라구. 난 공자님과 함께 죽기를 원해." "호호호, 내가 보기엔 모두 투항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엔 목우가 눈에 불을 켜며 잡아먹을 듯 정충 앞으로 나섰다. "내가 왜 그대에게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정 그렇다면 날 원망하지 마오." 정충이 곧 사람들을 시켜 이들의 손과 발을 묶어 버렸다. "너희들은 곧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 있는 표정을 교환했다. 한 사내가 먼저 주정의 몸을 천으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 천은 점액질에 담갔다 꺼낸 듯 끈적거렸다. 사내가 주장의 몸에 그것을 붙였다가는 다시 힘껏 뜯어 냈다. "으악!" 주정이 숨넘어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뒤로 꺾고 말았다. 천이 살가죽을 함께 뜯어가 그곳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정, 네 놈이 우리 약왕문 사람을 해쳤으니 그 대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정충이 이를 갈며 사내에게 다시 눈짓을 보냈다. 사내가 천을 들고는 주정에게 접근했다. "안돼!" 주정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이를 지켜 보고 있는 모용세가의 사람들의 눈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정충이 모용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공자님, 지난날의 정분을 생각하여 당신에게는 어떠한 형벌도 가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약왕문 문하에 있기를 원한다면 백초단(百草丹) 한 알씩을 먹인 뒤 자유롭게 풀어 주겠어요." "닥치거라! 내 곧 네 년을 죽여 버릴 것이다!" 모용준의 외침에 정충이 씁쓸히 웃었다. "꿈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요. 그러기 전에 먼저 공자님이 죽게 될 텐데요." 정충이 손을 들어 지청에게 다시 형벌을 가하도록 일렀다. 그녀가 지청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공자님과 형님 동생 한다는 것을 잘 알아요. 정말 함께 죽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아까운 목숨을 버리기보다는 우리 약왕문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요?" 지청이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정충에게 대답했다. "그대는 지금 공연한 수고를 하고 있군." "그런가요? 할 수 없군요. 당신들을 먼저 죽여 주는 수밖에." 절굿공이를 꺼내 든 정충이 매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절굿공이는 괴상하게 생겨 먹었는데 머리 부분에 뾰족한 돌기가 몇 개 있어 칼이나 마찬가지였다. 뒤쪽에는 둥근 테를 씌워 묵직하게 느껴졌다. 정충이 절굿공이를 지청을 향해 어지럽게 그어댔다. 피하고 말고 할 사이가 없었다. 그녀의 절굿공이가 지청의 몸에 닿자마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알몸뚱이가 돼 버렸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절굿공이가 다시 지청의 몸에 소용돌이를 남기며 스쳤다. 지청의 발악전기(拔岳顚氣) 초수로도 그녀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지청의 살갗은 절굿공이의 돌기에 파헤쳐졌다. "당신은 공자를 위해 훌륭한 계략을 일조했다고 아는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이죠?" 지청은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시선을 꽂았다. 상처에서 피가 하염없이 흘렀다. 크게 분노한 것은 모용준이었다. "더러운 년, 사람을 죽이고 싶거든 어서 나를 죽이거라!" "걱정 말아요. 이 사람들을 모두 없앤 다음 당신을 천천히 죽일 생각이니까." 그녀가 다시 절굿공이로 지청의 몸을 마구 헤쳤다. "어서 말해 봐요. 나에게도 말해 줄 훌륭한 계략이 없나요?" 이렇게 소리친 그녀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를 갈았다. "만약에 그럴 수 없다면 당신들마저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모용준이 곤혹스런 얼굴로 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만약에 약왕문 무리들에게 참패를 당한다면 모용세가는 큰 수치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꿈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가 우리 공자님을 원한다면 솔직히 말하라!" 이렇게 말하고 나선 것은 지청이었다. 그는 언제나 명석한 머리를 지녔기에 사태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차라리 공자님의 품에 안겨 애교를 떨어 보라고!" 지청이 마저 말을 잇자 정충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뭐라고?" 갑자기 지청에게로 달려든 그녀가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내가 난쟁이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멋진 사내를 좋아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대는 분명 공자님을 좋아하고 있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지청이 입을 열었다. 정충이 지청을 풀어 주며 힘없이 명령했다. "이들을 다시 끌고 가거라!" 사내들이 이들을 끌고는 다시 나갔다. 한동안 뒷짐을 풀지 않은 자세로 모용준 앞을 서성이던 그녀가 턱을 괴었다. 모용준에게 할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선뜻 꺼내지 않는 것이 꽤나 망설이고 있음을 알게 했다. 그녀가 비로소 모용준을 주시하며 입을 메었다. "그렇게 옷을 벗고 있으니 더욱 보기가 좋군요." 그러나 정충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지면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모용준이 비웃었다. "날 미워하면서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무언가?" "상관하지 말아요." 그녀는 예전의 명기를 그리워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용준이 슬쩍 그녀의 심중을 건드려 보았다. "그대는 명기일 뿐 다른 여인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 정충이 흐느끼며 모용준의 품으로 쓰러졌다. 모용준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는 갑자기 생겨난 애정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대는 다시 명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해. 지금 쓰고 있는 탈은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아." 모용준이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머리칼이 조용히 쓸렸다. 그녀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더욱 모용준의 품안으로 들어오며 뜨겁게 숨을 내뿜었다. "그댄 어떻게 정충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나?" 그녀가 조용히 모용준의 가슴에 기대어 자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저의 아버지께서는 약왕문의 장문인 노릇을 하셨답니다. 제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끊임없이 각혈하게 하는 독약을 만드셨는데 정정아(丁丁兒)라 불렀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면 정용(丁龍)이라 부르고 딸이 태어나면 정충이라 부르기로 하셨대요. 그래서 제가……." 모용준이 깊은 숨을 토했다. 그녀가 다시 모용준의 가슴을 토닥였다. "공자님, 그런데 왜 당신은 저에게 모질게 대하셨나요?" 모용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다. 정충은 이미 그가 지하궁전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그 궁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에 대해서도. "난 모용세가에서는 훌륭한 공자였지만 지하궁전에서는 하나의 악인으로 살아왔지." "공자님, 당신은 강호에 있는 그 어떤 호수(好手)에 비해 무공이 뒤떨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왜 당신은 그런 호수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거죠?" 모용준이 웃었다.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 놓고 싶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정충이 알고 싶어하는 부분은 더욱 그러했다. "당신은 제게 너무 무정한 사내였어요. 어느 날인가 머리에 꽃을 꽂고 당신 앞에 나섰지만 여전히 무심한 시선을 줄 뿐이었어요. 전 그때부터 당신에 대한 원망의 칼날을 세우게 되었죠." 갑자기 그녀가 모용준의 가슴팍을 물어뜯었다. 모용준의 가슴에서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당신은 제가 그토록 싫었나요? 당신이 제게 얻어 준 그 사내를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불현 그녀가 한 사내에게 시집을 갔었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모용준이 가슴으로부터 이는 아픔을 삭이며 눈으로 물었다. "혼례를 치른 그날 밤 전 그 도련님을 동방(洞房)에 불러들였어요. 그리곤 사내에게 제가 이렇게 말했죠. 저를 이겨야만 한평생 순종하며 옷도 벗겠노라고. 하지만 반대로 도련님이 지면 제 말을 들어야 한다고요. 호호호!" 모용준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정충이 입을 다물자 모용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도련님이 그대를 이겼나?" 정충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럼 그대가 이겼나?" 또 정충이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냔 말이다?" 모용준의 눈빛이 요동을 치듯 심하게 떨렸다. 그렇다면 결과는 오직 하나, 그 사내는 죽음을 당한 게 분명했다. "호, 혹시 그대가……." 정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사내를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혼자의 몸을 다시 찾겠어요?" 두 사람 사이에 질기고도 함부로 내몰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이 자리했다. 모용준은 정충의 마음을 훔쳐보고는 치를 떨었다. 그녀가 쉽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모용준은 속으로 자신이 모용세가의 마지막 사람이 될 거라는 것도 새겼다. "당신은 지금 몹시 떨고 있군요. 왜 제가 당신을 죽일까 봐 두려우신가요? 하지만 전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당장 강호의 영웅들에게 당신과 내가 결혼을 한다고 알릴 작정이에요." "뭣이라고!" "천하의 이름을 날리던 모용 공자는 사라지고 힘없고 유순한 한 가정의 지아비와 어버이란 이름으로 남겨질 뿐이에요. 사람들은 그때 가서 당신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볼 테죠. 아니면 내가 모용씨의 이름을 등에 엎고 사람들을 호령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하여 난 약왕문의 일을 더 넓게 펼칠 수도 있겠죠." 그녀의 음모는 무서웠다. 모용세가의 최후뿐만 아니라 모용준 자신에게도 그것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또한 대연국의 회복은 더 더욱 어려워지는 게 아닌가. 모용준이 그녀를 향해 일격을 가하려 고 했다. "닥치거라!" 그러나 그녀가 얼른 모용준의 혈도를 눌러 놓았다. 모용준은 꼼짝없이 그녀에게 사로잡힌 꼴이 되었다. 모용준이 분노를 씹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모용준이 태도를 바꾼 것은 조금 후였다. 한참을 눈을 감은 채 골몰하던 그가 말을 건넸다. "난 지금까지 많은 여인과 상대를 해왔지만 불행히도 후사가 없었지. 만약에 그대가 나의 아들을 잉태해 줄 수만 있다면 난 그대를 정식으로 대연국 황후에 앉히겠어." 모용준의 뜻밖의 제의에 그녀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12장 반벽산장의 혈투 반벽산장(半壁山莊)은 무림에서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 강릉부(江陵府)에 이르러 반벽산장의 주인인 유기를 배알하지 않고서는 발을 붙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강릉부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곳으로 이곳에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부호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기도 했다. 대문 앞에 돌사자를 위풍 있게 세워 둔 집들이 수없이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강릉부의 부호 가운데서도 유기는 그중 으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기의 장원에는 새 주인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옥총이었다. 이 옥총은 장원에 들어온 후 유기와 의형제를 맺고 서로 우의를 다졌다. 어느 날 반벽산장 병마들은 해불개와 결사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해불개가 그날 이후로는 바다에 빠진 돌처럼 종무소식이었다. 그가 반벽산장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품고 있지를 않은 듯이 도통 그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반벽산장에서는 수많은 호환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름이 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젊은 협객들인 직검(直劍) 마옥(,騎鈺)과 그의 아내 손불이(孫不二)가 그중 하나였다. 또한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십팔검객(十八劍客)이 있고 경도(京都)에서 유명한 다리도적 제일사(齋一思)도 참가했다. 이들은 강남 혹도의 총두목인 해불개와 싸우기 위해 모여든 길이었다. 반벽산장은 산과 물을 끼고 있는 형상이라 매우 경치가 아름다웠다. 평소에도 강호 사람들이 부러워했는데 그렇기에 더욱 부유한 것으로 여겼다. 한 나라와도 맞먹을 정도로 아름답고 값진 산장을 두고 사람들은 부러움의 눈길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산장을 함부로 건드리려는 자도 없었다. 그런데 반벽산장과 강남 흑도의 총두목 해불개가 자웅을 겨루게 되어 위기를 막게 된 것이다. 겨울철로 들어서자 반벽산장에서는 무림에 서신을 돌려 수많은 무림 호수들을 청하였으며 이와 함께 해불개도 청했었다. 강호에서의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태호를 벗어나 강남에까지 이른 왕중양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그는 시원한 물줄기를 굽어보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둘째와 셋째에게 부담거리로만 머물렀었으나 이젠 그렇지가 않다. 나의 선천신공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지는 알 수 없으나 다시 기력을 회복한 것만 사실이다. 그러니 반벽산장과 강남 흑도간의 싸움이나 구경하면서 원기를 더 다져야겠다.' 그가 웬 사람에게 반벽산장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뒤로 넘어갈 듯 크게 놀라며 손을 저어댔다. "당신이 그곳에 가서 뭘 하려는 거요?" 왕중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듣자하니까 반벽산장에서 무림에 청첩을 돌렸다고 합디다. 그러니 그곳은 곧 흥청거릴 테고, 그래서 구경을 가는 길이오." 왕중양의 말에 대경실색한 그가 목소리를 죽였다. "쉿, 내가 보기엔 당신은 얌전한 선비 같은데 그런 곳엔 아예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많은 강호 사람들이 그곳에서 싸움을 벌인다고 하던데 괜히 휩쓸려 아까운 목숨 버리지 마시오." 왕중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가 다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왕중양의 어깨를 짚었다. "소원이 정 그렇다면 가 보시오만 후회할 것이오." 왕중양은 얼른 일러주지 않는 그를 설득해 겨우 반벽산장으로 가는 길을 알아냈다. 그 길로 걸음을 재촉하여 반벽산장 앞에 도착한 왕중양은 주의깊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산장은 작은 강 건너편에 있었는데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나룻배를 모는 사공은 외눈박이였다. 그는 삿대를 쓰지 않고 강을 가로질러 매어 둔 밧줄을 당겨 배를 움직였다. 왕중양말고도 배 위에는 세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구레나룻을 텁수룩하게 기른 사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분명 중원 사람이 아닌 듯싶었기에 얼른 눈에 들어왔다. 그는 뱃머리에 앉아 배 를 빨리 움직이라고 연신 호통을 쳐댔다. 다른 한 사람을 비교적 말끔하게 차려 입은 공자였는데 손에는 온통 순금으로 만들어진 부채를 들고 있었다. 부채의 중간에는 누공(누空)으로 새겨진 불조도겁도(佛祖渡劫圖)가 있기도 했다. 그 불조의 겁탈을 그린 조각은 모두 색에 대한 것들이었다. 또 한 사람은 여인으로 줄곧 유유히 흐르는 강물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 셋은 일행으로 한결같이 배가 어서 떠나 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들을 보자 무공이 보통은 넘을 것이라 왕중양은 상상했다. 구레나룻이 난 사내는 계속 마뜩찮은 눈길을 부라리며 어서 배를 띄우라고 사공을 닦달했다. 사공이 참다못해 한마디했다. "손님께선 반벽산장에 가실 의양이면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요. 사람들이 더 오른 다음 떠날 테니 그리 아시오."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사공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댔다. "허튼 수작 말어. 어서 배를 띄우지 못하겠어?" 그가 사공의 멱살을 부여잡더니 번쩍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배를 띄울 테야 말 테야?" 사공이 말을 듣지 않으면 배 밖으로 던져 버릴 태세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공자가 허허 웃었다. "불조께서 요구하시는 뱃사공 역시 이런 방법으로 배를 모는 사람은 아닐진대, 아예 그 놈의 팔다리를 작신 분질러 강 속에 집어 던지시오. 그러면 그 놈도 겁탈을 한 번 겪은 셈이 되니까." 사공이 목놓아 울부짖었다. "제발 집어 던지지 마시오. 제가 배를 띄우겠소이다!" 겨우 사내에게 풀려난 사공이 잔뜩 주눅이 든 몰골로 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사내가 사공을 윽박지르며 나섰다. "왜 이렇게 꾸물거려? 내가 당길 테니 저리 비켜!" 그가 사공에게로 다가가 밧줄을 빼앗더니 힘껏 당겼다. 배는 마치 날개라도 단 듯 강 건너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강기슭에 이르렀다. 사내가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다시 배를 건너온 쪽을 향해 밀었다. 배는 또 날개를 달아 눈 깜짝할 사이에 강을 건너갔다. "무심(無心) 공자, 갑시다!" 사내가 몸을 솟구치더니 작은 언덕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공자도 그를 따라 몸을 날렸는데 마치 바람에 몸을 준 낙엽처럼 소리조차 내지를 않았다. 그런데 혼자 남았던 여인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날려 가늘고 예리한 침을 뿌렸다. 그 침이 언덕 위에 있는 한 바위에 가 꽂혔다. 자세히 보니 침에는 가느다란 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비단인지 쇠붙이를 갈아서 만든 것인지 햇빛에 반짝였다. 여인이 곧 몸을 훌쩍 띄우더니 그 줄을 타고 언덕 위까지 날아갔다. 이들이 언덕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왕중양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들은 분명 엄청난 고수들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왕중양은 곧 반벽산장이 시끄러워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왕중양이 얼빠진 사람처럼 그때까지 서 있던 사공에게 뱃삯을 던져 주었다. 언덕 위에서 왕중양의 거동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던 구레나룻의 사내가 공자에게 중얼거렸다. "무심 공자, 정말 모를 일이라니까. 반벽산장으로 오는 사람들은 모두 무공을 지닌 사람들인데 저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니 한심하기 그지없어. 무공도 없어 보이는데 이곳엔 무슨 일로 왔을까?" 무심이 사내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길을 주다가 웃었다. "하하, 어쩌면 자기의 실력을 숨기려는 진정한 호수일는지도 모르지." 여인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곧 언덕 위로 오른 그들은 왕중양과 더불어 반벽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반벽산장은 과연 훌륭한 곳이었다. 산장에 들어서니 곳곳에 울창한 나무숲이며 어느 곳이 중심이 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고도 아름다웠다. 이들이 산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의 장 객(莊客)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 예순 살 안팎으로 보이는 늙은이가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네 왔다. "여러분들이 산장에 오신 것을 장주께서는 환영하십니다. 오신 분들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무심이 미소를 띄운 얼굴로 약간 허리를 굽혔다. 그리곤 일일이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이분은 몽골의 으뜸가는 용사인 챵바이고 이분은 귀낭자(鬼娘子)라 부르며 나는 무심이라 한다네." 두 장객은 이 세 사람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황급히 세 사람에게 읍을 하면서 입을 모았다. "반갑소이다. 장주께선 다른 일 때문에 영접하지 못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챵바가 빈정거렸다. "무심 공자, 장주가 일이 있어 영접하러 나오지 못했다는데, 그 대신 우리에게 욕먹는 걸 각오해야 될걸." 무심은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강호의 예절로 한 말일 뿐이라구." 챵바가 알듯 모를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장의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장객들이 이들을 경의청(敬義廳)으로 안내했다. 경의청에 이르니 그 옥총이란 사람이 웃는 얼굴로 환영해 주었다. 그는 네 사람에게 읍을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무심 공자와 몇몇 분이 함께 오신다는 말을 듣고 아주 기뻤습니다." 챵바가 또 빈정대는 투로 무심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분이 내가 찾아오는 걸 원했다고 말한 것 같은데 맞소?" 무심이 쓴웃음을 지으며 챵바를 책망하듯 말했다. "중원 사람들은 말할 때 원하지 않으면서도 원한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걸 믿나?" "내가 왜 믿지 않겠소? 저 사람은 진정 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심은 챵바가 중원 사람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혼자 쓴맛을 마셨다. 옥총이 이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여러분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장주님과 해불개 간의 일전이 벌어질 테니 많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래야지." 무심이 건성으로 대꾸를 했다. 그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소리가 났다. 무심 공자의 일행은 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왔어요. 왔습니다요!" 누군가 이렇게 외치자 옥총의 낯색이 달라지며 급히 일어섰다. "여러분께선 잠깐 앉아 계십시오. 제가 나가 보고 오겠소이다." "좋소. 우린 상관하지 마시게." 기분이 약간 상한 무심이 손을 들어 알겠다고 했다. 밖은 어수한 것이 전쟁이라도 한바탕 치를 조짐이 역력했다. 바로 해불개와 그의 일행이 당도한 것이었다. 산장 밖 강변에 배 몇 척이 들어왔는데 그 위에는 해불개 일행들이 앉아 있었다. 배에서 내린 이들은 들소 떼를 몰아붙이듯 산장을 향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해불개는 또한 각오를 다지듯 자기네들이 타고 온 배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도록 명령했다. "이 해불개와 형제들은 반벽산장에 복수하러 왔다. 복수를 하지 않고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해불개가 선창을 하자 모두들 하늘을 찌를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