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18편 (18/60)
잊지 않았다면 왜 우리를 이처럼 못 살게 구는 것이오?" "그대들이 날 진심으로 도와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허나 그대의 약왕문 놈들이 자지 처녀 앞에서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나? 날 쓸모 없고 볼품없는 난쟁이라고 모욕을 했지 않 았는가?" 사실 약왕문의 사람이 자지 앞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모두 모용준을 돕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어찌 죄로 여길 수 있겠는가. 한 사내가 변명을 하려고 움찔하자 모용준이 알았다는 듯 얼른 몸을 날렸다. 그 사내 앞으로 날아간 모용준이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바로 네 놈이렷다!" 사내가 약간 물러서다 말고 갑자기 옆으로 몸을 틀어 재주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몸이 거꾸로 세워질 때에 맞춰 이렇게 나불거렸다. "그래, 이 난쟁이 놈아!" 모용준이 사내를 따라 몇 걸음 따라가려다 멈췄다. 사내가 곧 몸을 세우더니 모용준을 향해 주먹을 뻗어 왔다. "받아랏!" 그러나 사내의 주먹에 얼굴을 내줄 모용준이 아니었다. 살짝 상체만 비낀 채 사내의 주먹을 얼굴 옆으로 흘렸다. 다시 사내가 달려들었다. 이번엔 사내의 주먹이 날아오기도 전에 모용준이 번개 같이 손을 내밀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콧잔등 위로 모용준의 주먹이 꽂혔다. "억!" 사내가 코를 감싸 쥔 채 뒤로 넘어졌다. 잠시 자신의 코를 어루만져 보던 그는 별이상이 없다고 여겼는지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를 지켜 보던 약왕문 사람들의 눈들이 일제히 밤톨만하게 커지고 말았다. 사내의 코에 구멍이 뚫렸는데 차츰 넓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급기야 얼굴 전체가 휑하니 뚫리며 해골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이미 두 눈알은 어디론가 빠져 달아났고 이목구비는 엉망이 된 상태였다. "으악!"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며 풀썩 고꾸라졌다. 이를 본 양 호법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상흔권(傷痕拳)!" 모용준이 껄껄 웃으며 약왕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천하의 무림에서 이 모용준에게 덤빌 자는 없다. 모용세가는 천하의 무림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무엇이 정도인 지도 모르고 있느냐? 하하하!" 칼끝보다 더 예리한 눈초리로 이들을 노려보는 모용준의 얼굴엔 살기가 맴돌았다. 그의 눈길엔 사람들의 생각마저도 녹여 버릴 듯 한 강력한 독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용준과 눈길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모용준이 양 호법에게 일렀다. "네 놈은 사람들을 시켜 내게 무례함을 범했다. 그래, 모용세가를 멸시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모용준의 무공은 실로 소문에 듣던 것보다 월등해 이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장문인도 겁에 질린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님, 천하의 남쪽엔 모용이 있고 북쪽엔 신독행이 있다는 말에 결코 반기를 들지 않겠소. 그러나 공자님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 알고 싶소. 만약 우리 약왕문에 죄가 있다면 내가 듣고 난 뒤 진심으로 사지드리리다." 모용준이 손을 높이 쳐들자 일기충천 지청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모용준에게 작은 병 하나를 넘겨주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갔다. 모용준이 그것을 높이 쳐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약왕문 무리들아, 잘 듣거라! 이 병 안에는 약이 들어 있는데 만일 너희들이 한 알씩 받아먹는다면 난 기꺼이 용서할 것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양 호법이 모용준의 말을 거역하고 나섰다. "당신은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서 우리 약왕문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기오?" 모용준의 반응은 애초 기대하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양 호법이 눈에 불을 켜더니 자기 말이 끝나자마자 약을 찧을 때 쓰는 절굿공이를 모용준을 향해 던졌다. 모용준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다가 슬쩍 손을 내뻗기만 했다. 그러자 절굿공이가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양 호법에게로 날아가는 게 아닌가. '파팍!' 하며 양 호법이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양호법의 손가락들을 모조리 부러뜨린 절굿공이는 그의 가슴팍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으으……." 양 호법이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아픔을 참아냈다. 그러나 곧 아래로 향한 얼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그는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목우가 실실 웃으며 다가와 쓰러진 양 호법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공자님께서 네 놈을 용서해 목숨만은 살려 주신 걸 감사하라구." 양호법은 아픔을 참는지 아니면 수치심을 억누르고 있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신음조차 내지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치명타를 입은 게 분명했다. 주정이 목우의 뒤를 이어 이죽거렸다. "양 호법, 네 놈이 어디 할말이 있거들랑 해 보라구?" 두 사람이 자신을 개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양 호법은 더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저 어렵게 치켜 뜬 두 눈으로 이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양 호법, 그대는 왜 말이 없어졌지? 조잘조잘 나불나불 어서 입을 벌려 보라구. 공자님이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이라도 있나?" 이렇게 또 집적댄 것은 목우였다. 그는 말로 어르는 척하다가 몸을 돌려 양 호법에게 장을 날렸다. 그의 일격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양호법의 등짝을 부셔 버렸다. "어헉!" 양 호법이 입을 벌리며 피를 토했다. 때를 기다려 일기충천 지청이 고함을 질렀다. "죽여라!" 그러자 일제히 모용세가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약왕문 사람들은 그저 소리를 지르며 겁을 주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정말 살기를 내뿜으며 공격해 오는 이들을 보고는 맞서기 시작했다. "아악, 살려!" 삽시간에 피가 솟구치고 어느 부위인지 모를 살점들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대청 안은 온통 피바다가 되어 비린내로 코를 찔렀다. 모용준이 주먹을 날릴 때마다 상대의 얼굴엔 커다란 구멍이 나 버렸다. 얼굴이 휑하니 뚫려 버린 자들은 황급히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울부짖었다. 손가락 사이로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피가 온몸을 적시는 바람에 사람의 형상이 말이 아니었다. "모용준, 네 놈 때문에 우리가 악인으로 가장해 네가 여인을 차지하게 해 주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들을 죽여 증거를 없애려는 수작이 분명하구나. 네 놈을 도저히 살려 둘 수 없으 니 각오해라!" 그는 낡은 절간에 있었던 사내 중 하나였다. "얏, 간다!" 그가 질풍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달려들었지만 모용준은 손끝 하나 움직이질 않았다. 모용준 바로 앞에 몸을 세운 그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서히 눈앞으로 뿌연 안개가 피어 올랐다. 안개 속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차츰 사라져 갔다. 운무 속에서 사내가 사방으로 팔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모용준을 죽였다! 내가 모용준을 죽였단 말이다!" 다시 안개가 빠른 속도로 흩어지며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두의 눈동자가 화둥잔만하게 커졌다. 사내의 얼굴에서는 살점들 이 피범벅이 되어 하염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사내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로 비틀거렸다. 약왕문 사람들은 풀과 나무 등으로 독약을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그렇지만 모용준의 이같은 재주를 대하고는 모두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준의 그 작은 주먹이 얼굴에 한번 닿기만 하면 저절로 살점이 헤어져 나가고 피바다를 이루니 어찌 두렵지 않을 것인가. 순식간에 해골로 변해 버리는 것을 보고 누가 섣불리 그와 대적하려 들 것인가. 일찍이 소림사(少林寺)의 칠상 대사(七傷大師)조차도 모용준의 주먹이 두려워 이를 상흔권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사태를 주시하던 장문인이 다급하게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빨리 제황목왕정(祭黃木王鼎)을 가져오너라!" 뒤쪽으로 급히 달려갔던 한 사내가 다시 몸을 공중에 붕 띄우면서 나타났다. 그가 제황목왕정을 그녀의 손에 넘겨주며 물었다. "몇 가지의 향을 태울까요?" 그녀가 조급하지만 위엄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이 없으니 가급적 많이 태워라!" 사내가 향에 불을 붙이자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일기충천 지청이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목청을 높였다. "저 놈이 목정을 태우지 못하게 해라!" 모용세가에서 가장 총명하다고 이름난 그의 말이었기에 모두들 수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그의 말에 따라 바닥을 얼음판 위를 지치듯 매끄럽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약왕문의 무리들 역시 이제는 마지막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달려오는 이들에 맞서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래도 의리는 살아 있는지 방금 전 널브러진 두 사내를 둘러싼 채 공격을 막으며 목정에 불이 붙기를 기다렸다. "땅 위에 있는 잡초들은 모두가 약이로다!" 다시금 그 소리가 들려 왔다. 이들이 쓰는 일종의 주문 같은 거였는데 용기를 주며 기를 되살려 준다고 믿었다. 약왕문 사람들은 이 주문을 외우며 결사적으로 목정을 지키려 했다. 드디어 목정에 불이 붙고 그 안에 있던 향이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 오를 뿐이었다. 약간의 냄새만 풀풀 풍기자 모용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까짓 목정 하나로 날 이겨 보겠다고?" 더욱 화가 뻗친 모용준이 별이라도 따려는 듯 높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열 길도 넘게 공중으로 솟구친 모용준이 빙그르르 몸을 화전시키더니 곧추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정확히 목정을 향해 아래로 내리꽂히려 했다. "공자님, 안 됩니다!" 거의 목정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지청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가슴을 쳤다. 모용준이 어렵게 몸을 틀어 옆으로 내려앉은 것은 지청의 목소리가 사뭇 다르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공의 힘으로 가슴에서부터 내지르는 소리였는데 분명 어떤 절실함이 어려있는 듯했다. 모용준은 그때서야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약왕문 무리들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약왕문 사람들은 오히려 목정을 빼앗기려고 허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닌가. 허튼 초수로 눈가림을 했을 뿐 이들은 목정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지를 않았다. 이 목정은 천하의 삼대 독보(三代毒寶) 중 하나로서 약왕문 무리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거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죽기 살기로 지켜 내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약왕문 무리들은 힘을 제대로 쓰지 않고 있어 모용준은 어리둥 절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지청의 외침이 다른 때와는 달리 절실하게 가슴을 후려쳤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모용준은 지금 눈앞에 진을 치듯 목정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의 거동을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이들 정도라면 아무리 속임수를 갖고 있더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재빨리 몸을 써 목정만 빼내 오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이들은 곧 발톱 잘린 맹수 꼴이 되어 나자빠질 게 분명했다. 모용준은 자신의 무공을 믿고는 약왕문 무리들의 틈을 노렸다. 이들은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약간의 빈틈을 보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모용준이 재빨리 목정 옆의 탁자 귀퉁이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아니!" 떨어져 나간 귀퉁이로 곧 독을 품은 지네와 뱀들이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특히 독이 잔뜩 오른 뱀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두 가닥의 혀를 벌름거리며 모용준을 향해 흔들어 댔다. 뿐만 아니었다. 이 밖에도 올빼미와 박쥐 같은 썩 보기 좋지 않은 독물들이 연이어 밖으로 튀어나왔다. 모용준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얼른 인상을 썼다. "오호라, 바로 이것을 보여 주려고 했군. 하하하, 하지만 이까짓 걸로 날 어쩔 셈이냐?" 그녀가 뒤질세라 역시 웃음으로 받아쳤다. "오호호! 또 하나 당신께 보여 드릴 게 있소. 당신이 정 나를 보고 싶다면 보여 드리지요." 그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벗었다. 곧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이럴…… 수가!" 모용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몸까지 떨고 있는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란 사실을 곧 깨달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찌……. 바로 너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그녀는 바로 자기와 늘 바둑을 두던 명기였다. 또한 자지에게 눈물로 호소를 하던 그 명기였다. 명기가 웃음을 싹 거두며 차갑게 모용준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계집들이나 사들이더니 나중엔 약왕문의 장문인도 사들일 작정이었나요?" 다분히 비꼬는 투였다. 모용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너의 진짜 이름은 무어냐?"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명기라고 불러요." "아니다. 너의 진짜 이름을 말해라!" "공자님께서는 아두들의 이름짓기를 즐기셨죠? 당신은 아두들을 자신의 독점 물로만 생각하셨기에 저의 진짜 이름은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모용준은 속으로 자기를 돌봐 주던 명기, 아니 정체 모를 이 여인이 지닌 미모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왜 전에는 이같은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을까?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난 정충(丁忠)이라 부르지요." "하하하!" 모용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충? 명기? 정충? 명기? 한 마리의 벌레에 지나지 않는 군." 사태는 서서히 역전돼 가고 있는 중이었다. 독을 품은 뱀이 일기 충천 지청의 몸을 친친 감았다. 그러나 그는 소리도 내지 않고 손톱을 튕겨 이들을 물리치려 했다. 탁탁 하는 소리가 나자 독사들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번엔 왕지네와 왕거미들이 그를 향해 꿈틀꿈틀 다가왔다. 이 틈을 타 약왕문 무리들이 기세를 높였다. "피리를 불어! 어서 피리를 불란 말이야!" 곧 누군가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피리는 매우 작았지만 소리는 날카롭고도 음이 높아 소름끼칠 정도였다. 피리 소리를 들은 독물들이 불안을 느끼는지 더욱 날뛰었다. 삘리리리―피리 소리에 따라 그 독물들은 모용세가 사람들만 골라 덮쳐 들었다. "모용 공자님, 당신의 몸엔 왜 저 독물들이 덤벼들지 않나요?" 정충이 불쑥 물었다. "난 어려서부터 독약을 먹고 자랐기에 독물들도 날 좋아하지 않지." 정충이 뒤에 있던 사내에게 눈짓을 주었다. 모용준은 잠시 후 목우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한 손을 마구 휘두르며 몸으로 기어오르는 독물들을 내리치려고 했다. 또한 주정은 겁을 먹고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오직 지청만이 고함을 지르며 독물들과 피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정충이 모용준에게 말을 걸었다. "공자님, 당신은 날 때부터 사내 구실을 하지 못하는 고자가 아닌가요?" "뭐라고!" 모용준의 심기를 흐트러 놓자는 수작이었다. 모용준은 그녀가 모용세가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이같은 일을 꾸몄을 것이라 상상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용서할 수가 없었다. 명기라는 여인 만을 알았고 또 온순하고 마음씨 고운 한 여인만을 기억했던 모용 준으로서는 악몽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준이 품속에서 작은 책을 꺼냈다. 약왕문 무리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그건 《염왕장(闇王帳)》이 아니오?" 그중 하나가 이렇게 소리치자 모용준이 크게 웃었다. "하하핫! 그래, 《염왕장》이구말구." 이 《염왕장》이 모용세가의 보물이란 것은 강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염라대왕의 구혼장(句塊帳)처럼 이 책을 꺼내 들기만 하면 당장 사람이 죽어 자빠진다는 것이었다. 모용준이 정충을 보며 꾸짖었다. "정충아, 네가 나의 시중을 들어준 일을 생각하면 백번이고 고마움을 금할 길 없다. 헌데 네가 이렇게 나를 모욕하다니 널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마음을 편히 하겠느냐?" 모용준이 몸을 그녀에게로 날리며 잡아채려고 했다. 그녀는 여전히 살짝 몸을 피하여 모용준의 손길을 벗어났다. "당신이 만일 약왕문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장문인을 해친다면 곧 화를 부르게 될 것이오!" 모용준이 들고 있던 《염왕장》을 휘두른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곧 눈앞에서 놀랍고도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갑자기 온 누리에 금빛이 가득 들어차면서 사방이 훤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약왕문 사람들은 말로만 들었지 《염왕장》의 위력을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사방으로 퍼진 금빛 때문에 오히려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조여드는 기분에 한 사람씩 컥컥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한 사내가 목이 찢어진 채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며 허둥댔다. 그가 앞으로 뛰쳐나오며 무의식중에 칼을 뽑아 들었다. 바로 그 앞에 모용준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가 칼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곧 사내의 목에 붉은 점이 나타나며 힘없이 아래로 허물어졌다. 뒤를 이어 약왕문 사람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 갔다. 정충이 위기에 몰리자 최후의 수단을 쓰려고 했다. "미심약(媚心藥)을 뿌려라?" 아직 쓰러지지 않은 약왕문 사람들이 모용준과 모용세가의 사람들을 한복판에 몰아넣었다. 제각기 흩어져 있던 독물들도 일제히 이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용준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정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당신 같은 난쟁이는 아예 여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아. 당신이 그러면 괜히 울고 가는 여인들만 생기니까." 정충이 훌쩍 몸을 날리며 모용준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모용준이 뒤를 따라 날며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게 섰거라!" 그녀가 바닥으로 소리 없이 내리자 모용준도 따라 내렸다. "모용 공자, 얼마나 힘이 드는지 내가 당신을 안아보고 싶네요." "그럼 어서 안아 보지 않고 뭘 하지?" 모용준의 손에서 《염왕장》이 다시 번쩍했다. 모용준은 《염왕장》으로 그녀를 공격하려 했지만 어느 틈엔가 피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녀가 높이 오르며 아래에 대고 지껄였다. "모용 공자, 듣자하니 모용세가 사람들은 대대로 색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당신은 어찌하여 여인에 대해 이토록 모진가요? 호호호!" 《염왕장》이 다시 번쩍였으나 이번에도 그녀는 몸을 피했다. 그녀의 머리는 어지럽게 흐트러져 얼굴을 가렸다. 모용준이 《염왕장》을 계속 휘두르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던 지청이 말했다. "공자님을 모시고 뚫고 나가자!"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청이 얼른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벌어진 지청의 입으로 약가루가 들어가는 통에 그가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목우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지청이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이거 왜 이래?" 지청이 목우의 멱살을 거머쥐고 말았다. 놀란 목우가 지청을 뿌리치려 했지만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이 사람, 나야 나!" 지청이 매서운 눈을 치켜 떴다. "그래, 바로 널 죽이려는 거다! 네 놈은 내가 처음부터 공자의 부하 노릇을 하기 싫어하는 줄 몰랐단 말이냐? 내가 줄곧 저 놈의 뒤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저 난쟁이를……." 목우의 눈동자가 함지박만하게 부풀었다. 그 말을 모용준이 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청은 살아 남기가 어려웠다. 지청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듯싶었으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망발을 마 구 지껄여댔다. 모용준이 목우에게 일렀다. "어서 저 사람을 끌어내거라!" 지청의 무공은 이들 중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이 나간 상태인지 목우가 잡아끌자 순순히 따라왔다. 그런데 갑자기 지청이 소금벼락을 맞은 미꾸라지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들이 몰려들자 사정없이 그가 주먹을 내지르며 고함을 쳤다. "내가 공자 노릇을 하자고 들면 못할 줄 아느냐?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난 무림 중에서 모용씨 가문이 아주 대단한 줄 알고 가신이 되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이젠 당신을 대단하게 보지 않아!" 지청의 시선은 모용준에게로 달려가 박혔다. 그리고는 열에 들 뜬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 당신은 이미 미약(迷藥)에 중독되었어!" 정충이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의 소름 돋는 웃음소리를 냈다. "오호호홋! 모용준, 당신의 부하까지 이젠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데 그만 체면 따위는 벗어 던지시지?" 그녀에게로 달려갈 줄 알았던 모용준은 느닷없이 지청을 향해 몸을 던졌다. 지청은 귓볼을 세게 얻어맞고는 비틀거렸다. 이를 본 주정이 남모르게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라 주정은 지청이 공자에게 신임을 잃어 가는 듯 싶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미심약을 다시 뿌려랏!" 정충이 또다시 외치며 몸을 띄워 한쪽으로 물러섰다. 약왕문 사람들이 약주머니를 꺼내 일제히 사방으로 뿌려댔다. 목우가 지레 목을 움켜쥐고는 컥컥거렸다. "헉, 야단났어. 이 도깨비 같은 놈들이 날마다 이런 독약을 주물러대더니 아예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하는구나!" 목에 모랫가루라도 들어간 듯 심하게 컥컥대며 뒤로 물러서던 목우가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다. 모용세가가 이제 끝장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모용준이 눈치를 채고는 쏜살같이 달려가 막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던 목우를 덮쳤다. 검을 빼앗으려 했으나 목우의 힘은 대단했다. "그자는 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찌르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