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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17편 (17/60)

2026-09-30 18:55:31 조회 15
"좋다. 어쨌든 네 마음이 기특하다." 곧 모용준은 여인과의 기묘하면서도 낯선 체험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인은 수시로 자세를 바꿔 가며 모용준의 땀방울을 짜내었다. 모용준은 처음 맛보게 된 즐거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모용 준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여인의 교성과 함께 종과 방울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그 소리는 모용준의 기분을 더 한층 돋우어 주었다.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모용준이 수레에서 내렸다. 수레밖에 대기하고 있던 여인들의 얼굴엔 한결같이 시기심이 가득 넘쳐 났다. 모용준이 축 늘어진 몸을 의자에 앉히며 입을 열었다. "짐은 대연의 황제로서 경들을 모두 처첩으로 거느리고 있는 몸이다. 짐을 기쁘게 하는 것은 경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 연시아(燕翅兒)가 만든 훌륭한 수레는 짐을 매우 즐겁게 했다. 그리하여 짐은 이 연시아를 차관(車官)에 봉하노니 이후로 내가 수레를 쓸 때 경운 옆에서 시중을 들도록 하거라!" 연시아가 매우 기뻐하며 모용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궁전에서 나온 모용준은 혼자 길을 걸었다. 얼마쯤 걷던 그는 걸음을 세우고는 석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사정없이 석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넌 모용세가의 공자이다! 넌 대연의 황제가 아니란 말이다. 대 연엔 황제가 없다는 걸 넌 모르느냐? 대연에는 황제가 결코 없다 는 것을……."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석벽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석벽에 모용준의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주먹 역시 피멍으로 얼룩졌다. 뜨락에 이른 그는 가을 바람에 잠시 얼굴을 내맡긴 채 생각에 잠겼다. 어렸을 적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부친은 늘 대연의 자손이니 대연을 부흥시키는 황제가 될 것이라 말하곤 했다. 그러나 모용준은 그 말을 처음 얼마간은 머리 속에 담아 두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모용세가의 황제라면 몰라도 대연의 황제는 도저히 앉을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지하궁전을 만들고 모용씨의 제왕 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모용세가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공자를 불쌍히 여겼다. 이들은 대부분 모용준이 재난에서 구해 준 뒤 그의 노비가 된 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한평생을 공자를 봉양하고 공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정실(靜室)에서 무예를 닦거나 때로는 모용세가의 대사에 시간들을 할애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그런 모용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어서 훌륭한 아내를 맞이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 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매일 무예만 닦고 자신들이나 모용세가의 대사를 위해 애쓰는 공자의 짐을 덜어 줄거라 믿었던 것이다. 모용준으로서는 마음에 드는 여인을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너무도 자명했다. 난쟁이에 불과한 사내를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사람들도 공자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어 여인을 만나지 않는 거라 믿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데 그같은 근심을 약간 덜게 되었다. 바로 자지라는 처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정실에 박혀 있는 모용 공자를 밖으로 끌어내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래서 이들은 자지에게 공자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오로지 모용세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공자와 자지가 맺어지기를 원할 뿐이었다. 자지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창 밖의 야경에 눈길을 던졌다. 그녀는 지금 너무 외롭고 쓸쓸했다. 다른 날 같았으면 비녀가 말동무를 해 주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녀도 찾아와 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자지는 알지를 못했다. 그 비녀들 역시도 자지가 모용준과 잘 지내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자지는 쉽게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상념에 빠져 허우적댔다. 깊은 상념 속으로 낯익은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왕중양과 임조영이었다. 과연 그 두 사람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또 한 자지의 눈에는 왕중양을 경모의 눈길로 바라보는 임조영의 모습이 크게 들어왔다. 임조영은 왜 왕중양에게 그같은 자신을 내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자신이라면 벌써 왕중양에게 말했을 것이다. "왜 아직 자지 않는 건가?" 자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모용준이었다. 그는 새하얀옷에 감싸여 있는 공자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자지가 반색을 하며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공자님이 오셨군요." "자지, 자주 찾아오지 못해 미안해. 그동안 큰형님과 셋째를 찾는 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모용준의 말에 자지가 눈물을 비쳤다. 한동안 눈물을 보이던 자지가 모용준에게로 바투 다가섰다. 그녀는 모용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말하듯 그녀가 모용준을 내려다 보며 입을 떼었다. "공자님, 당신이 저를 좋아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그러자 갑자기 모용준의 안색이 변했다. 중심을 잃고 비칠대듯 주위를 황망히 둘러보던 모용준이 대답했다. "그대는 셋째의 여인이야. 그런데 왜 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자지가 모용준의 작은 어깨를 잡고는 더 진한 눈물을 쏟았다. "공자님께 알려 드릴 일이 있어요. 그 낡은 절에서 그런 일이 있을 때……그때 전 처녀의 몸이었어요. 흑!" 자지의 목소리는 파도에 몸을 맡긴 배처럼 심하게 떨렸다. 여인 이 사내에게 자신의 가슴속에 든 말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런 사실을 말해야 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자지는 모용준이 자꾸 다른 소리를 하고 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저는 정말 처음으로 사내의 품에……." 모용준의 낯빛은 검푸른 바다를 닮아 갔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의 눈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서로 교차하며 맑은 빛을 뿌려댔다. "그렇다면 그댄 셋째와는 몸을 섞지 않았단 말이오?" 임조영이 사내가 아닐지 모른다는 자신의 추측에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이 믿고 있는 사실이 거짓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임조영과 자지는 분명 살을 섞었으리라. 이들은 한 방에 들어 있지를 않았던가?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또 한 가지 예측 해 볼 수도 있으리라. 임조영이 사내인데도 자지를 탐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값진 사내로서의 자세인가. 모용준은 어느 쪽이든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위치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축이 되었다. 모용준이 얼굴 에서 그늘을 거두지 않자 자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전 당신을 처음부터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모용세가에 도착한 후 당신의 행동과 처신을 보고 느꼈어요. 당신이야말로 사내 대장부라는 사실에 전 탄복했지요. 그리고 사실 임 공 자님은……." 그러나 자지는 또 한 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이 모용준의 마음을 잡으려는 것으로 비칠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가 손을 내저으며 자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오? 누군들 그 정도의 일을 안 하겠냔 말이오?" "공자님, 당신은 정말 기개가 뛰어난 사내예요. 가난한 사람을 돌봐 주는 건 창생을 위해 덕을 쌓는 일인데 공자님 같은 사람은 많지가 않아요. 어떤 여인이든 공자님을 보면 호감을 품을 게 틀림 없어요." "하지만 그대의 말대로 모두가 날 생각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자지가 다시 모용준의 힘없는 대꾸를 잡아 주려는데 문소리가 났다. 자지가 고개를 돌리며 들어오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명기 처녀였다. 그녀는 매우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머리를 숙이고는 천천히 걸어왔다. 모용준이 물었다. "명기, 할말이 있나 본데 주저하지 말고 어서 하거라. 자지 역시도 남은 아니니까, 상관말고." 명기가 망설인 끝에 겨우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공자님, 이 명기는 날이 밝으면 시집을 가게 돼요. 그동안 공자님이 이 명기를 아껴 주신 걸 생각하니 잠을 이를 수가 없어서……. 공자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전 마지막으로 공자님의 시중을 들고 싶어요. 술이라도 한잔 따라 드리고 싶어요." 모용준이 감동하여 명기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곤 안면에 웃음을 띄우며 자지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지, 이 얼마나 기특하고 마음씨가 고운 여인이오? 우리 명기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술 한잔씩 해야겠소." "정말 부럽고도 욕심이 나는 마음씨예요. 전 명기의 그같은 마음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요." 자지도 칭찬을 아끼지 않자 명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명기는 곧 모용준 앞으로 술잔을 대령하고는 조심스레 술을 따랐다. 그녀가 자지를 바라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자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명기가 모용준 앞에 꿇어 앉았다. "공자님, 제가 드리는 말씀을 꾸짖지 말아 주세요." 난데없이 눈물을 보이는 명기 앞에서 두 사람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모용준은 예전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명기의 행동에 더욱 놀라워하며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명기야, 네가 늘 총명하였기에 난 네게 기예(棋藝)까지 가르쳐 주었었지. 네가 어떠한 말을 한다 해도 난 용서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자지 처녀 역시 그러할 테니 너무 염려 말아라." 모용준이 따뜻한 어조로 명기의 가슴을 토닥여 주자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제10장 명기의 정체 모용준의 허락을 받은 명기는 눈물을 거두며 자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엔 깊은 갈망의 뿌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하려는데 그토록 애절한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자지는 속으로 자기를 보고 있는 명기의 눈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때 명기가 말하기 시작했다. "자지 처녀, 우리 공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잘 대해 주셨어요. 공자님께서는 매일 감당해 내기 어려운 대사를 치르시며 땀을 아끼지 않았답니다." 말을 중단한 명기가 눈가를 어루만지더니 곧 뒤를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자님이 저와 바둑을 두셨는데 밤이 깊어지자 저는 부끄럽게도 마구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 때 공자님이 혼자 주무시면 적적할 것 같아 곁에 있겠다고 하였지요. 헌데 공자님께서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으시다며 저를 심하게 꾸짖으셨어요. 전 그 일이 있는 후 한시도 공자님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명기의 눈가로 다시 눈물이 흘렀다. 모용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명기야, 난 네가 앞으로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라겠다." 명기가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자 자지가 대신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 듯 말했다. "공자님께서는 앞으로 꼭 천당에 가 복을 받으실 겁니다." 그 말에 모용준이 정색을 했다. "천당엔 자고로 불쌍한 사람들이나 올라가야 하지. 옥황상제께서 나 같은 인간을 어디 돌봐 주기나 하시겠나?" 알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스쳐 가는 것을 본 자지는 우울해졌다. 명기가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부탁할 말이 있어요. 자지 처녀께서 우리 공자님을 부디 잘 보살펴 주길 바랍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공자님의 눈에 차는 여인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자지 처녀를 보시는 공자님의 시선은 그때와 달라요. 공자님께서는 자지 처녀를 진정 아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원하건대 부디 우리 공자님 곁에서 행복하게 해 드리세요." "너무 걱정 말아요." 자지는 자신의 대답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무엇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인가. 명기의 말대로 모용준을 보살피겠다는 의미의 대답만은 아니었다. 자지는 그 대답의 속뜻을 정확히 끄집어낼 수 가 없었다. 자지는 방금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무언가 덧붙이려고 했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고요한 밤하늘엔 뭇별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별들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무수한 꿈을 꾸게 해 준다. 사람들은 어렸을 때 자신의 앞날에 대해 수많은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나이가 차츰 들면서 의지는 나약해지고 그동안 겪어 왔던 삶의 굴곡들 때문에 기개 역시 꺾이고 마는 것이다. 말하자면 칼날은 무뎌지고 금현(琴弦)이 끊어져 급기야는 눈까지 멀게 된다. 바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용한 밤이면 별을 바라보며 꿈을 꾼다. 그것도 언제나 영롱한 빛으로 떠있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꿈에 자신을 비쳐 보게 된다. 그처럼 수많은 꿈을 꾸게 해주는 별 아래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수림 앞에 멈춰 서더니 잠시 주위를 살피는 듯했다. 그림자를 보니 아주 건장한 사내가 분명했다. 그는 오랫동안 나무와 마주한 채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던 그가 나무를 향해 예를 올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쳐 댔다. "천하에 폐인(蔽人)이란 없는 법이다!" 한밤중에 나무와 말을 나누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번엔 나무에서 말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땅 위에 있는 잡초들은 모두가 약이로다!" 나무가 말을 할 리는 없었다. 곧 나무 중간이 쩌억 하고 마치 문처럼 열리면서 구멍이 드러났다. 그 사내가 구멍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 안에서는 연무(烟霧)들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연무를 타고 수많은 벌레들이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 보였다. 벌레들의 몸은 매우 번들거리고 눈부시어 오래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이 시렸다. 사내가 순식간에 연무를 뚫고는 큰 대청에 이르렀다. 대청에는 대형 조각상이 서 있는데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 위에는 글자가 씌어져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호미 한 자루와 약바구니가 놓여져 있었다. 약왕(藥王) 손사막(孫思邈)의 형상이었다. 또한 약왕상 앞에는 열여섯 개의 의자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 의자에는 열여섯 사람이 앉은 채로 그들 위에 놓여져 있는 빈 의자를 일제히 주시했다. 이윽고 누군가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와 빈 의자에 앉 았다. "할말이 있나요?" 의자에 앉은 여인이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양 호법이 일어나 읍을 했다. "장문인, 이번에 강남 정강아 가서 모용 공자의 대사를 적절하게 처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분은 꽤 만족해 하면서 날짜를 정해 감사 표시를 표하러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장문인은 면사포를 쓰고 있었기에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가 면사포 뒤에서 말했다. "모용 공자는 우리 약왕문에 은혜를 베푼 분입니다. 그분이 요구 한 일은 응당 해 드려야 해요. 당신들이 적절하게 조치를 취한 건 잘한 일이에요." 양 호법이 예를 올리고 나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또 좌중을 훑어보며 물었다. "강호에 다른 소식은 없나요?" "듣자하니 강남에 한 기인이 출몰했다고 합니다." 한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급히 예를 올리곤 말을 이어 갔다. "그 사람은 황약사라 부르는데 늘 제멋대로여서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인다고들 합니다. 그 사람이 중원에 가서 중원의 8대 문파들에게 도전을 했는데 그 문파들이 여지없이 얻어맞고 쫓겨갔다는 군요. 또한 그 사람은 중원 무림의 악인들을 일부 잔폐로 만들어 동해 도화도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다른 사내가 거들며 나섰다. "이상한 건 해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도화도로 찾아갔다고 합니다. 가지 않겠다고 한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답니다." 거들고 나선 사내의 말에 의문이 생겼는지 누군가 큰소리로 물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 당신이 어떤 독약을 먹었다면 마음대로 도망을 칠 수 있겠소?" 그때서야 모두들 이유를 알겠다는 듯 웅성웅성거렸다. "누구냐?" 밖에서 학수를 보고 있던 제자들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뒤이어 몇 사람이 화닥닥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모용세가의 가신들로 지청, 주정 그리고 목우였다. 그중 목우는 임조영에 게 입은 상처로 인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오른쪽 손목은 잘려 나가 천으로 싸매져 있고 어깨에도 깊은 상처를 입은 처지였다. 이들 세 사람이 길을 내자 뒤에서 교자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교자는 비교적 작았는데 두 명이 들고는 총총걸음으로 들어 왔다. 교자 를 바닥에 내려놓자 면사포를 쓴 약왕문의 장문인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모용 공자께서 본 방에 드신 것 같은데 무슨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이군요?" 교자의 문발을 걷고 모용준이 나오더니 머리를 들어 장문인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약왕문은 신비한 방착(幇派)라고들 말하면서 장문인은 미모의 여인이라고도 하였소. 처녀의 옥용(玉容)을 볼 수 있겠는지요?" 모용준의 말에 그녀가 어깨를 약간 들썩였다. "약왕문은 작은 파이고 모용 공자님은 또한 우리 약왕문의 은인이 아닌가요? 모용 공자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분부만 내리시지요." "소문에 따르면 당신은 아주 사랑스럽게 생겼다고 하던데?" 알겠다는 듯이 그녀가 손을 들어 면사포를 벗으려 했다. 막 그녀의 얼굴이 드러날 참에 갑자기 누군가 소리쳐 제지했다. "모용 공자! 당신은 지금 행동이 약왕문에 대한 모욕인 것을 정령 모르오?" 양 호법이었다. 벌떡 일어난 그가 모용준에게 정중히 읍한 다음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속에는 상당히 도전적인 무엇이 섞여 있었다. "모용 공자께서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있고 약왕문에 은덕을 베푼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없소. 하지만 공자의 지금 행동은 실로 실망이 아닐 수 없소. 우선 약왕문의 은밀한 장소에 이렇듯 뛰어든 것이 그렇고, 또한 우리 장문인을 업신여기려 한 것도 그러하오. 우리 약왕문을 하잘것없는 작은 문파라 하여 만만하게 보려는 겁니까?" 그는 모용준이 그냥 넘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양 호법은 떳떳하게 맞서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모용준은 그의 눈빛을 힐금 살피고는 그만이었다. 대신 나선 것은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약왕문은 모용세가의 한 작은 갈래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가 다시 한 번 일깨워 줘야겠나?" 약왕문 사람들이 비웃었다. 그것으로 이들이 모용세가에 대해 불복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모용준인 정색을 하며 다짐했다. "원래 난 약왕문에 대해 아무런 적대감도 없었다. 난 자질구레한 일은 따지지 않는 성미이다. 그대들 약왕문이 나의 명령에 충성을 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로지 죽음뿐이다!" 말끝에 일침을 놓듯 사나운 기색을 보인 그가 대청 안을 한바퀴 돌았다.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자 열여섯 개나 되는 의자의 등받이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장문인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모용준에게 쏘아붙였다. "모용 공자님, 당신이 만일 계속 약왕문을 깔본다면 뱀에게 물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허허, 넌 도대체 누구길래 얼굴을 감추려는 것이냐? 당장 면사포를 벗어 버리지 못하겠느냐?" 모용준이 바닥을 힘껏 박차덕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한쪽 손을 뻗은 채 그녀에게로 날아갔다. 그녀의 면사포를 벗겨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 역시 경공을 부려 훌쩍 다른 쪽으로 피해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그녀는 꼭 월궁(月宮)의 옥토끼인 양옥으로 된 절굿공이를 손에 들고는 모용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모용준이 자리를 피해 날아간 그녀를 향해 슬쩍 미소 짓자 다시 그녀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이번엔 그 절굿공이를 치켜 든 채 공격을 해왔다 . '피릭―피리릭―' 모용준이 팔을 들어 옷소매를 휘둘렀다. '더엉!' 옷소매는 쇠붙이로 만들어진 듯 절굿공이를 막아내며 커다란 징을 울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옆으로 비껴 지나간 그녀가 얼른 거리를 두며 숨을 몰아쉬었다. "면사포만 벗으면 될 텐데 왜 이리 힘들게 하느냐?" 모용준이 틈을주지 않고 다시 매처럼 몸을 날렸다. 미처 모용준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한 그녀가 놀라며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모용준의 손아귀엔 면사포 대신 그녀의 옷자락이 잡혀 부욱 찢어졌다. 어깻죽지의 백옥 같은 새하얀 살이 드러나고 말았다. "하하하, 이토록 살결이 고운데 어찌 얼굴을 감추려 드느냐?" 모용준이 재미있어 하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대며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가 꾸짖었다. "모용준, 당신의 선조들은 대연의 황제들이었는데 그들도 당신처럼 개망나니였나 보죠?" "잘 알고 있군 그래. 그런데 황제들이 모두 여색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왜 모르는가? 하하하!" 모용준이 다시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며 슬쩍슬쩍 손을 뻗으려 했다. 그녀는 면사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래서 이들의 행동을 올려다보고 있는 약왕문 사람들의 표정이 매순간마다 변해 갔다. 안타까워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노기를 품기도 했고 또 때로는 곡예를 구경하는 천진한 아이들처럼 조마조마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벽을 타오르다 몸을 뒤로 젖혀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모용준, 우리 약왕문 사람들이 당신을 도와 그 무지한 처녀애를 속이기까지 한 것을 잊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