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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38편 (38/70)

2026-09-30 18:32:08 조회 17
그 광경이 언뜻 스치기만 해도 소름이 확 돋는 것이었다. 요행히 화산에 오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감히 대전에 끼여들 엄두도 못 내고 그나마 천대평석 위엔 올라서지도 못한 채 겨우 그 아래 조그만 바위 위에 발이나 붙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도 그곳에 서 있으려면 자기를 향해 똑바로 뻗어 오는 게 아니라 할지라도 밀려오는 대력의 고통을 견뎌 내야만 했다. 대력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에는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정신없이 숨을 헉헉거려야 했다. 그리고……. 라마 중은 일순 소스라치게 놀라며 단호히 말했다. "나 이 지마탄(智摩呑)은 중원 무림 인사들 앞에서 맹세하오. 내 평생 다시는 중원 땅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겠소." 사람들은 이 라마 중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예를 겨루다 패해 급히 산을 내려오는 것일까.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그를 흔들어 가며 채근을 해댔다. "스님, 우린 산 위로 올라가지 못했으니 그 흥미진진한 시합을 볼 수나 있었겠소? 당신은 그래 알려만 주는데 뭐가 그리 어려워 남의 애간장을 끓이오, 끓이길! 어서 말을 해 봐요, 말을!" 그러나 라마는 창백하게 질린 채 다만 머리만 절레절레 저으며 산 아래로 휑하니 내려가 버렸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리를 못 뜨고 발을 동동 굴렀다. 또다시 몇 사람이 내려왔다. 그 뒤로 또 몇 사람 내려왔다. 그러나 하나같이 파리하게 질린 채 라마 중과 똑같이 말을 얼버무리다가 쏜살같이 내뺐다. 누구 하나 말을 내려는 사람이 없었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바위 위에 퍼더버리고 앉아 갖고 온 건량들을 먹고 개울 물로 목을 축이며 점심때까지 기다렸다. 연장자 노인이 씁쓸하니 말했다. "향녀, 당신들이 우릴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한 건 여러모로 참 유감스럽구먼. 우리도 싸움을 구경하지 못하고 당신들도 못했으니 세상에 이런 유감이 어디 있겠나? 직접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향녀들도 대전을 못 본 건 유감 천만이었지만 자못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등아가 화산 꼭대기에서 이미 사내들을 정복했을 것이며 기필코 《구음진경》을 쟁취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 단지흥이 왕중양을 이기기만 해도 향녀들은 《구음진경》을 차지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비록 단지흥 자신이 친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향녀들을 그토록 동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경서를 쟁취하기만 하면 자기들에게는 아주 유리한 것이다. 이윽고 산꼭대기에서 두 사람이 더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등아 향녀와 기막히게 뚱뚱한 대환희 보살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알고는 있으나 인사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두 여인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겹게 내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까이 오자 향녀들은 얼른 뛰어가 등아를 둘러싸며 물었다. "누가 이겼나요? 등아 향녀님이? 아니면 단황 나으리가?" "아니 그런데 왜 이 모양으로……. 혹시……." 또 한 향녀가 성급히 말을 하다가 말끝을 사렸다. 두 사람의 꼴은 실로 말이 아니었다. 대환희 보살은 신발도 없이 맨발이었으며 부대 자루같이 품이 넓은 두루마기도 실이 다 튿어져 꼭 누구에게 옷자락을 쥐어뜯긴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향녀라고 보살보다 나을 게 없었다. 머리에 꽂았던 금비녀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방금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 같았다. 그 지경이니 서로 부축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이 뻔했다. 연장자가 시비조로 대뜸 물었다. "향녀, 보살, 당신들 두 사람도 중양 진인과 싸웠소?" 등아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대환희 보살은 냉소만 칠 뿐 입도 벙긋 안 했다. "모두들 그만두고 이제 돌아가자! 돌아가! 다 끝난 일이다." 등아가 불쑥 외쳤다. 보아하니 《구음진경》을 손에 넣은 것 같지 않아 향녀들은 기갈을 하며 달라붙었다. "다 끝나다니요? 그럼 다신 그 《구음진경》을 상관치 않는단 말씀인가요?" 그러자 향녀와 대환희 보살은 서로를 마주보며 허탈하게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두 사람 다 이내 낯색을 굳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얼핏 공포가 서려 있었다. 향녀들은 등아가 이처럼 무서운 기색을 띠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그야말로 천만 뜻밖이라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등아는 사뭇 피곤한 기색으로 힘없이 한 마디 내뱉었다. "가자!" 그 말이 떨어지자 향녀들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따라 가 버렸다. 순식간에 향녀들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비틀비틀 북쪽 기슭으로 길을 잡았다. 뚱뚱보 여인들은 이제나저제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보살이 눈에 들어오자 냅다 달려들었다. "어찌 되었나요? 보살님, 구양봉이 이겼지요? 그분이 《구음진경》을 손에 넣었지요?" "그게 어디 그렇게 쉽다더냐?" 대환희 보살은 장탄식을 했다. 그리고는 맥빠진 소리로 힘없이 외쳤다. "가자!" 보살의 기색이 심상치 않자 뚱뚱보 여인들도 감히 말을 못 걸고 장막을 걷으며 행장을 꾸렸다. 대환희 보살의 무리들도 모두 그렇게 산 아래로 사라졌다. 저녁이 되도록까지 무슨 홍칠공이니 단지흥이니 황약사니 하는 무림 고수들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 갈 때쯤 해서야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뭔가 얘기를 주고받으며 기슭으로 내려왔다. 대리 황제 단지흥과 개방의 신임 방주 홍칠공이 있었다. 기색으로 보면 아직도 정신은 말짱한 듯하나 발걸음은 좀 지쳐 보였다. "홍칠공, 난 당신이 이처럼 호걸인 줄은 미처 몰랐소. 진작에 알지 못한 게 한스럽구먼. 하지만 이젠 친구로 지내고 싶구려." 단지흥은 자못 미더운 눈길로 홍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홍칠도 반색을 했다. "폐하께서 계시는 곳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소이다. 더욱이 우리 소씨 사부님을 구해 준 은공도 못 갚았구요. 언제 한 번 꼭 대리를 찾아갈 터인즉, 그때 가선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 상 거하게 차려 주셔야 하오!" 홍칠이 짐짓 농을 치자 단지흥은 껄껄 웃었다. "역시 듣던 대로 당신은 자시는 걸 좋아하는가 보구려. 여부가 있겠소. 그런 걱정일랑 말고 필히 한 번 찾아오시오! 내 대리의 천룡사도 구경시켜 드릴 테니!" "허허, 좋아요, 좋아! 꼭 폐하를 뵈러 가겠소이다!" 두 사람은 일전을 치르고 나서 오히려 서로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으며 서로의 무예에 깊이 감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산 아래까지 거의 다 내려와서야 서로 작별을 했다. "폐하, 우리 십 년 후에 다시 겨뤄 봅시다. 십 년 후에 폐하와 내가 다시 왕중양과 싸워 봅시다. 그때까지 일심으로 일양지 내력을 쌓아 이 거지를 탄복해 마지않게 해 주십시오!" '허허 과찬의 말씀이오. 오히려 제가 홍 형께 드릴 말씀이외다. 부디 십 년 후엔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했다. 단지흥은 홍칠과 헤어지자 좀전의 쾌활한 기색은 간데없고 적이 착잡해졌다. 끝끝내 이긴 사람은 왕중양이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왕중양이 이미 《구음진경》에 기재된 무공을 익혔기에 그의 무예가 그처럼 무서운 것이라고들 했다. 왕중양이 선뜻 황약사의 청을 받아들인 것부터가 천하 군웅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흥은 달랐다. 그는 왕중양이 딴 일에 마음을 두고 있음을 진작에 눈치챘다. 왕중양은 일심으로 그 누군가를 애절히 그리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급기야 구양봉, 단지흥 그리고 홍칠공과 황약사를 전승했으나 앙앙불락했으며 몹시 침울해했다. 단지흥은 다시금 지난밤의 대전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때 문득 여인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어느 사이엔가 세 여인이 코앞까지 바투 다가와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향녀들이었다. "단황 나으리께선 썩 기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왕중양을 이기지 못했나요?" 향녀들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비웃는 기색은 아니었다. "등아는 어디에 있나? 좀 만나게 해 주게." "저희들을 따라오세요. 저희들은 모시러 왔사옵니다." 세 향녀는 단지흥을 산속의 어느 한 집으로 데리고 갔다. 선비도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향녀들은 단지흥을 방으로 안내했다. 등아는 그 방에 홀로 앉아 탄미금을 타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흥이 온 것을 알고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단지흥은 그녀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 그 역시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은은하고 아름다운 소리에 취해 깊은 명상으로 빠져 들었다. 이윽고 음악 소리가 멎자 단지흥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정말 아름다운 음악이오! 등아가 만일 사내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실로 향녀일 것을……." "폐하, 이제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황제 폐하께서도 풍류스럽지 않다면 어찌 황제의 풍모가 풍기겠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등아는 그윽하게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단지흥은 실로 애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등아는 실로 총명하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구변이 대한한 기재임에 틀림없는데 그토록 자기 자신을 학대하니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었다. "황제께서는 패하셨지요?" 단지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라 생각했어요. 저는 끝까지 있지도 못하고 중도에 산을 내려왔어요……. 왕중양은 실로 대단한 무학대가예요. 하나 폐하는 조금도 불평스런 기색이 없으시군요. 폐하의 수양은 지극히 높사옵니다." 등아는 차제에 이르러 단지흥을 자못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녀는 그의 위인됨에 탄복하여 《구음진경》을 꼭 자기 손에 쥐여 주겠다는 언약을 하지 않았어도 선선히 그와 선비를 놓아준 것이었다. 한편 그가 자기 향녀들을 몹시 애틋하게 여기고 있는 고로 만일 그가 《구음진경》을 차지하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자기들에게 유리할 거라는 계산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은 《구음진경》에 대한 집념은 이미 접고 있었다. 단지흥은 가벼이 탄식했다. "과찬의 말이오! 기실 우리 네 사람이 모두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소!" "왕중양은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을 이미 익혔지요? 그걸 써 먹지는 않던가요?" 등아는 여전히 담담한 기색으로 물었다. 단지흥은 선뜻 대답을 않고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닐 거요. 그는 분명 아직 《구음진경》의 무공을 익히고 있지는 않아! 그 사람은 우리들과 다시 언약을 했소. 이제 십 년이 지난 후에 또다시 화산에서 무예 시합을 하겠다고 말이오. 그때 누구든 최후의 승자에게 그 기서를 기어이 내놓겠다고 했소. 중양 진인은 작은 인물이 아니오." 등아는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아직 무림을 잘 몰라요. 당신은 황제라서 무슨 일에든지 신용을 지켜야 하지만 왕중양은 딱히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만일 왕중양이 정말로 당신 생각대로라면 그는 아주 바보일걸요.' 등아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내흔들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당신들은 그 《구음진경》을 보기는 하셨나요? 그 책이 참말로 있긴 있던가요?" "보기만 했겠나. 중양 진인이 한 대목 읽기까지 했는걸……." 순간 왕중양이 그 대목을 읽던 정경이 떠올라 단지흥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네 사람 모두 경악하여 몸서리를 치지 않았던가…….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몸에 전율이 돋는 것이었다. "그 책은 그대나 내가 능히 얻을 수 있는 책이 아니오. 천하의 보물이란 종래로 덕 있는 자가 가지게 되어 있소. 그래야만 화가 미치지 않는 거요. 내가 보건대 그 경서는 오로지 중양 진인만이 가질 수 있소. 누구든 그걸 갖게 되면 조만간 목숨을 잃게 돼!" 단지흥은 길게 탄식을 했다. "폐하는 결국 경서를 손에 넣지 못했으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나의 일양지는 중양 진인의 선천신공을 이기지 못했소. 하나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니오. 만일 내가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 《구음진경》을 가지지 않았을 게요." 등아는 그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왜요? 무엇 때문에 그걸 가지려 하지 않지요?" "난 황제요. 신경 써야 할 국사가 한두 가지가 아니오. 그러니 그 《구음진경》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지가 없는 거요. 만일 내가 그걸 얻게 된다면 천하 무림 사람들이 모두 이번엔 나한테 와서 시끄럽게 굴 테니 내 어찌 그걸 감당하겠소?" "황제께서 진심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나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군요. 하나 나는 《구음진경》은 더 이상 갖지 않기로 했어요. 《구음진경》이 아니라도 우리 향녀들은 너끈히 사내들에게 대항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내들에게 복수를 하고 말 거예요." 단지흥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해도 이 여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으니……. 이 여인은 왜 한갓 헛된 복수심으로 이처럼 불행을 자초한단 말인가. 단지흥은 그저 애처로운 눈길로 등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등아는 단지흥의 심사를 눈치채고는 그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떨궜다. "폐하, 이젠 그만 돌아가세요. 비록 폐하가 제게 《구음진경》을 쥐여 주지 못했다 해도 원망하지는 않아요. 하나 제가 살려 보낸 사내는 폐하가 처음이라는 것만은 알아주세요. 또 한 사람, 그때 그 사내……. 어쨌든 그것만 아시고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단지흥은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할 것인지 익히 알고는 더는 무슨 얘기도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리라. 그것만으로도 다소 진심이 통했다고 할 수는 있었다. 다만 도중에 그녀가 얼버무린 그 말, 자기말고 또 한 사람 살려 보냈다는 그 말에 다소 궁금증이 일었으나 그는 묻지 않았다. 향녀들의 일이 자기 손을 떠난 이상 더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애처롭게 등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등아는 문 밖까지 단지흥을 따라 나왔다. "황제 폐하, 인연이 있다면 훗날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단지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은 모두 가슴에 묻어 둔 채 그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나머지 세 시위들을 찾아서 어서 빨리 대리로 돌아갈 일념으로 선비와 함께 발길을 재촉했다. 한시진 가량 걸어갔을 때 그는 떠들썩하니 마주 걸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가운데 몇몇 사내들이 서로 팔을 맞잡아 의자 모양을 만들어서는 한 뚱뚱보 여인을 태우고 뻘뻘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뚱뚱보 여인은 단지흥을 보더니 대뜸 쏘아붙였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산에서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구음진경》의 비밀을 어서 내게 알려 줘요." 여인은 음충맞게 능청을 떨었다. "대환희 보살, 당신도 화산에 갔었으니 까 《구음진경》의 그 무슨 비밀을 내가 모르고 있다는 걸 알지 않나? 그런데 무엇 때문에 걸고 넘어지는 게냐?" 단지흥은 단호하게 외쳤다. 선비도 보살을 노려보며 여차직하면 덤벼들려고 자세를 잡았다. "단황 나으리는 인품이 좋으시다더니 듣기와는 다르군. 왜 날 놀리는 게요? 그래요! 맞아요! 난 그 천대평석 위에서 내려온 뒤로는 다시는 올라갈 생각이 없더군요. 만일 다시 올라갔더라면 아마 지금쯤 대환희 보살은 없어지고 썩은 고깃덩어리만 남았을 거예요. 그러니 천대평석 아래에서 무엇을 볼 수 있었겠나요? 그래, 왕중양이 이겼지요?" "알고 있구먼. 중양 진인이 이겼소."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철썩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쳤다. "그것 보라니까, 역시 애는 제 집에서 길러야 한다더니, 모두들 법석을 떨어댔지만 누구도 《구음진경》을 뺏지 못하고 결국 원래 임자가 가지게 됐군요. 당신들은 괜히 소란만 피우고!" 단지흥은 아무 대꾸도 않고 그저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단황 나으리, 그래 《구음진경》을 손에 넣지 못해 얼마나 불쾌하시겠소?" 그러자 단지흥은 시답잖다는 듯이 불쑥 내뱉었다. "내가 그 《구음진경》을 가져선 뭣하겠나?"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목청을 높였다. "전 그걸 갖고 싶어요." "《구음진경》은 한 부밖에 없는데 누구나 다 그걸 갖고 싶어하는구먼. 그러니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남들이 그걸 갖고 싶어 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에요. 난 다만 내게 그것이 몹시 필요하다는 것만 염두에 둘 뿐! 난 원래 구양 장주님이 그 《구음진경》을 얻게 되었으면 했어요. 그분이 그 경서를 얻게 되면 나한테도 좋은 점이 있으니까요. 난 또 당신이 그 경서를 얻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보았어요. 당신이 《구음진경》을 얻게 돼도 나한테는 좋은 점이 있으니까." 단지흥은 그 말에 뭔가 상서롭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걸 직감하고 다그쳤다. "뭐 하는 수작이냐? 어서 바른 대로 못 댈까?" "성미도 급하시긴. 보셔요. 제가 당신한테 무얼 가져 왔나!" 대환희 보살은 획 손짓을 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뚱뚱보 여인들이 한 사람을 앞으로 쓱 떠밀었다. 그는 바로 네 시위 중의 한 사람, 농부였다. 농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단지흥을 쳐다 보기만 할 뿐 한마디도 못했다. 단지흥은 분기탱천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선비도 연신 입을 씰룩거렸다. "알 만해. 네 년 악명이 운남을 넘어 중원까지 자자하더니 내 오늘에야 실체를 보는군. 어서 이 사람을 놓아줘!"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당신은 가서 냉큼 《구음진경》을 빼앗아 와요. 구양 장주님과 함께 가서 그 《구음진경》을 빼앗아 오란 말이에요. 왕중양이 아무리 무공이 대단하다 한들 둘이 합심하는데야 당해 내겠어요?" "우린 넷이서도 왕중양을 제압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둘이서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단지흥은 냉소를 쳤다. "그런 건 난 관계 안 해요. 무엇을 어찌하든 당신들 두 사람이 가서 왕중양과 싸워야만 전 이 사람을 놓아주겠어요." 단지흥은 이내 대꾸를 않고 곰곰 생각해 보았다. '보아하니 저 뚱뚱보 여인은 사리도 뭣도 모르는구나. 그저 그 기경을 손에 넣을 일념으로 억지 소리를 해대니. 할 수 없지. 내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대환희 보살은 단지흥의 손이 심상치 않게 꼬물거리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소리쳤다. "단황 나으리, 꼼짝 말아요. 당신이 움직이기만 하면 이 농부는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어요!" 단지흥은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농부가 저쪽 손에 있으니 허투루 손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비를 바라보았으나 그 역시 주먹만 부르쥐고 있을 뿐 대책이 없는 눈치였다. 그때 별안간 한 사람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미꾸라지처럼 대환희 보살 무리에 뛰어들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농부의 손을 거머쥐고는 끌어당겼다. "가잔 말이야. 빨리 가지 않고 뭘 해?" "저 놈을 붙잡앗!" 대환희 보살은 급급히 소리를 질러댔다. "날 붙잡겠다구?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 그래 어디 붙잡아 봐, 붙잡아 보란 말이야!" 그 사람은 몸을 이리저리 꼬면서 농부를 끌고 뚱뚱보 여인들 속을 벌이 제 집 드나들 듯 제 마음대로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보살의 수하들은 누구 하나 그 사람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대단하오, 주 영웅! 그대가 그 사람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 버리시오!" 단지흥은 호기롭게 외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선비도 덩달아 쾌재를 불렀다. "훌륭하오, 훌륭해!" 그러자 주백통은 껄껄 웃으며 농부를 데리고는 훌쩍 내달았다. 그 뒤로는 흙먼지만 뽀얗게 일었다. 단지흥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대환희 보살에게 말했다. "당신은 《구음진경》을 얻겠다고 야단이지만 왕중양의 사제 하나 못 이기는 주제에 왕중양을 찾아가선 뭣하나? 그랬다간 흠씬 얻어맞기 십상이지." 그리고는 간다는 말도 없이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감히 뒤쫓아갈 엄두도 못 냈다. 그때 등뒤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보살은 도끼눈을 뜨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구양봉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보살은 퉁명스레 내뱉었다. "구양 장주님, 당신은 왕중양한테 졌다면서요?" "그랬지.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네. 난 다시 그자와 겨루겠어. 내가 그자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 주겠단 말이야." 구양봉은 짐짓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한풀 기가 꺾여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그 말에 한편 반가우면서도 웬지 밸이 꼴려서 쏘아 붙였다. "왕중양은 지금 종남산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 사람의 전진교엔 인재가 즐비하고 제자들도 재간이 대단하대요. 그러니 당신 혼자 찾아가 봤자 헛수고만 할 거 아녜요?" "헛수고를 하면 어떤가? 그래도 찾아가야지. 그래 그 작자 말마따나 지금부터 십 년이나 기다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