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36편 (36/70)
왕중양은 급급히 몸을 날려 임조영과 구양봉 사이로 끼여들며 외쳤다. "구양봉, 그만 하면 한 재미 톡톡히 봤으니 이젠 됐네! 그만 내려가게!" 구양봉은 이빨을 바드득 갈면서 손을 걷어들였다. 뭐라 해도 왕중양과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와 싸우다가는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고 화산에는 아예 발도 못 들여놓은 채 강호에서 비웃음만 사게 될 게 뻔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능글맞게 깔깔 웃으며 임조영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워낙 활사인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참말 정이 깊구먼그래. 묘 안팎에 온통 사랑이 철철 넘친단 말이에요. 중양 진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으하하하……." 임조영은 매섭게 보살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선 살기가 튀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찔끔하여 뚱뚱보 여인들에게 어서 빨리 산에서 내려가자고 서둘러댔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앞장서서 꽁무니 빠지게 달려 내려갔다. 구양봉도 씁쓰레하니 입맛을 다시며 냉소를 머금은 채 그 뒤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산 아래로 내려 갔다. 왕중양은 그윽이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왕중양이 먼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조영이, 당신……. " 그가 운을 떼자마자 임조영이 그의 말허리를 똑 끊으며 찬바람이 일도록 쌀쌀맞게 내뱉었다. "중양 진인, 당신은 존귀하신 교주님이시고 전진교는 천하 무림의 사표(師表)이옵니다. 당신은 그래, 너무나 존귀해서 저를 그렇게 부르시나요? 아까처럼 그냥 임 시주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요." 왕중양은 흠칫하며 임조영의 눈길을 좇았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피하고 있었다. 그는 임조영이 지금 자기를 조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좀전에는 외간 사람들 앞이라 존중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여 그녀를 임 시주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둘만 남게 되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자기가 이렇게 한 것이 무에 잘못된 것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임조영은 왕중양이 얄미워서 그 거동을 낱낱이 걸고 넘어졌다. 왕중양은 그녀의 말에 어정쩡해져서 선뜻 말을 못 이었다. '임조영은 아직도 나를 미워한단 말인가…….' 그는 못내 서운했다. 그는 미움도 사랑에서 연유한다는 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숙맥 같은 사내였다. 그는 다시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난 당신과 함께 화산에 오르려고……." "제가 화산에 가선 뭣하겠어요? 전 그 《구음진경》이라는 걸 얻을 생각이 없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림 영웅이 될 생각도 없어요. 전 활사인일 따름이에요. 하필 인간세상의 허영을 쟁탈할 필요는 제겐 하나도 없어요." 임조영은 사뭇 담담하게 말했다. "조영이, 내 말 좀 들어 보오. 내가 처음에 이 석굴을 팠을 때 난 내 스스로 활사인묘라는 이름을 지었더랬소. 그때 난 이 석굴을 당신한테 빼앗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소. 그리고 또……." 임조영이 말을 가로챘다. "제가 당신을 이겼거든요. 당신은 그걸 인정하지 않나요? 물론 이제 와서 그걸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당신은 지금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이니까요.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해요. 그러나 당신은 일찍이 저한테 진 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해요. 안 그런가요?" "아오, 난 그대한테 졌었소." "왕중양, 당신은 천하의 제일인자이긴 하지만 내게만은 패했어요. 그러니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당신은 관계치 말아요. 일단 패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사사건건 내 일을 참섭하려 드는 건가요?" "조영이, 답답하구려. 난 당신의 일을 간섭하려는 게 아니오. 난 다만 당신이 이 책을 보아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일 따름이오. 이 책은 천하의 기서인 《구음진경》…… 난 이 책을 읽고 나서 천하의 무학이란 바다와 같이 넓다는 걸 알게 되었소. 우리가 배운 건 참말 한줌 재에 불과하단 말이오. 더군다나 당신의 병세가……. 지난번에 왔을 때는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그대의 안색을 보니 결코 소홀할 수가 없겠구려. 그러니 빨리 그 독을 해독해야 하지 않겠소?" 임조영은 선뜻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애잔한 눈길로 왕중양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왕중양, 당신은 진정으로 제가 배운 것이 한줌 재에 불과하다고 여기시나요? 당신은 끝내 저한테 탄복하지 않는군요. 그러면서 제가 뱀 독에 중독된 걸 걱정해선 무엇 하겠어요……. 뿐더러 당신은 내가 그때 당신을 꾀로 이긴 걸 알게 되면 더군다나 날 우습게 여기겠지요. 당신은 이 책에 기재된 무예가 내 것보다 훨씬 더 우수하다고 하고 싶으시겠지만 당신의 그 책이 뭐 그리 대단한가요? 제가 새로 창안해 낸 옥녀심경이야말로 고금에 없는 것이에요. 더욱이 그 책 에 이 뱀 독을 해독할 만한 그 무슨 비결이 있을 리 없어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한 난 이렇게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뿐이이에요.' 임조영은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무거운 것이 짓누르는 듯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고금에 드문 무학기재로 두 사람은 마주앉기만 하면 평소에도 늘 무학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두 사람 다 자기 주견을 고집하는 바람에 매번 말다툼이 생겼다. 뿐더러 임조영은 왕중양이 이 활사인묘에 들어가 있지 못하게 하려고 자청해 이 석굴로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왕중양은 그 마음을 진정 알아주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임조영은 왕중양이 자기의 《구음진경》만 으뜸이라고 내세우면서 다만 겉치레로 자기의 병세가 어떻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사랑이 깊을수록 임조영은 왕중양에 대한 미움도 깊었다. 왕중양이 이런 여인의 심사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줄곧 임조영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 십여 년 동안 본의 아니게 그녀가 마음 고생을 한 걸 무시해 버린 것이 되어 그에 대해 속죄를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임조영을 잘 대해 주면 줄수록 그녀는 성만 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절하게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임조영은 그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해 버렸다. '당신은 절 활사인묘에 들어가게 했지요. 그래서 전 천하 무림이 다 아는 활사인이 되었어요. 당신은 이제야 비로소 나한테 인정상 빚을 졌다는 것을 느낀 것 같군요. 당신 같은 매정한 사람의 청을 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임조영은 웬일인지 마음이 더욱 외로 꼬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먹서먹하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왕중양이 먼저 어색하니 말문을 열었다. "이 책을 좀 읽어 보오. 참말 신기하다니까." "당신은 그것 때문에 화산으로 천하 무림 고수들을 다 불러모아 땀을 흠뻑 흘려야 할 테니 당신이나 많이 보세요. 저에게는 아무 소용 없어요. 전 그것 없이도 제 무공을 닦아 나갈 수 있어요. 그리고 제 병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더는 괘념치 마세요." 왕중양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원래 임조영 앞에만 서면 구변이 신통치 못했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그녀의 부아를 돋우는 것인지도 몰랐다. 만일 사내가 구변이 좋아 가끔씩 달콤한 말도 해 줄 줄 안다면 여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필 것이고 웬만한 분노도 얼음 녹이듯 녹일 수 있을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의 사랑에 이처럼 오래도록 금이 가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왕중양은 종래로 임조영만 보면 말문이 콱 막혀 버 리곤 했다. 임조영은 왕중양의 이런 꼴을 볼 때마다 더욱 성이 났다. 그가 평소에 무림 호걸들과 한자리에 모일 때면 얼마나 재미있게 얘기를 하고 열변을 토하는가. 하지만 자기 앞에 오기만 하면 무뚝뚝하니 입을 다문 채 얼빠진 사람처럼 있기가 일쑤였다. 그리하여 임조영은 더 더욱 왕중양을 미워하게 되고 그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임조영은 왕중양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든 간에 왕중양을 위해 기꺼이 고초를 겪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에는 왕중양을 위해 죽기를 소원해 왔다. "조영이, 난 이 책을 가져다 당신한테 보이려고 언제부터 작정하고 있었소. 이 책엔 나도 이해하지 못할 곳이 적지 않소. 당신이 만일 나와 함께 《구음진경》을 배우기만 한다면 한 근심 덜겠는걸 당신은 한사코……." 임조영은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했다. '당신은 또 날 속이려 드는군요. 무슨 무예를 익힌다고 그래요? 두 사람이 함께 그걸 익히자고요? 왕중양, 당신은 이젠 이 땅의 신선으로 치부되는 사람인데 나하고 무슨 무예를 익히자고…….' "중양 진인, 당신이 그 《구음진경》을 잘 보존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 혼자 그것을 간직하고 절대로 경솔하게 남에게 내보이지 마세요." 임조영이 끝내 이렇듯 뻣뻣하게 나오자 왕중양은 할말이 없어졌다. 이런 때에 왕중양이 임조영 당신은 내 사랑이고 나 때문에 활사인묘에까지 들어가 있는데 내가 이 경서를 당신한테 내준들 어떻단 말인가 하고 뜨거운 말 한마디만 했더라면 임조영의 가슴속에 서리서리 쌓인 원한도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중양은 이런 생각을 심중에 품고만 있을 뿐 입 밖에 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왕중양은 그토록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남녀간의 일이란 본디 아차하는 사이에 금이 갈 수도 있는 터, 그가 이처럼 미욱하게 구니 임조영이 매번 쌀쌀맞게 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 저 사람은 맘속에 뚱딴지 같은 궁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 활사인묘에 거처하는 걸 원치 않는 거야. 매번 이 일만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모양이군.' "당신이 자꾸 날 찾아오는 건 마음속에 승복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그러는 거 아닌가요? 나하고 다시 승부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난 당신과 그 무슨 승부를 내거나 하지는 않아." 왕중양은 딱 잘라 말했다. 그는 가슴속에 서린 감정을 뭐라고 이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의 내기를 두고두고 원통하게 생각해 왔다. 자기가 그 활사인묘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맹세만 하지 않았던들 임조영이 어찌 이 차디차고 음습한 활사인묘로 들어갈 생각을 했을 것인가? 그 일만 해도 정녕 후회막급인데 어찌 또 임조영과 승부를 가르려고 한단 말인가. "중양 진인께서 딱히 그럴 마음이 아니시라면 전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임조영은 쌀쌀하게 돌아섰다. 두어 걸음 떼어놓다가 그녀는 문득 발길을 멈추더니 주춤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그리도 대단한 경서라면 함부로 나돌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세요." 그녀의 낯빛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잠시 왕중양을 바라보더니 이내 발길을 돌려 내처 활사인묘로 들어가 버렸다. 왕중양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임조영이 석굴로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두 사람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제19장 화산의 달밤 이윽고 중양절 달이 둥실 떠올랐다. 청청히 밝은 밤이었다. 다만 바람에 풀잎 스치는 무심한 소리가 섞여 들어 으스스한 기운을 자아낼 뿐이었다. 화산 양쪽 기슭을 메우고 수많은 사람들이 산봉우리로 오르고 있었다. 사람마다 각양각색이요, 생각도 천차만별이었다. 악심을 품고 갖은 수단을 다하여 왕중양의 손에서 그 천하의 기서를 빼앗으려는 사람, 별 생각 없이 구경이나 실컷 해두자는 사람……. 하지만 천하에 드문 고수들의 싸움을 지켜 보려는 일념만은 너나할것 없이 똑같았다. 화산 양지쪽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산기슭의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조용하던 밤 하늘에서 불현듯 우레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이거 좋지 않군. 인기척이 있어!" 누군가 큰소리로 말했다. 화산파의 곽명송이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입을 다문 채 서로 근심스런 눈길을 주고받았다. 순간 암벽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이내 쿵쿵 소리가 진동하며 큰 바위 하나가 사람들을 향해 곧추 굴러 내려왔다. "피해욧! 누가 저 뒤에 매복하고 있소!" 곽명송은 급히 외치고는 몸을 날려 절벽 쪽에 바투 붙어 섰다. 절벽에 붙어 선 그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맹수와 흡사했다. 몇몇 사람들은 비록 곽명송의 고함소리는 들었지만 영문을 몰라 멍청히 있다가 굴러 오는 바위을 안고 그대로 나뒹굴었다. 악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찢었다. 순식간에 족히 십여 명은 될 듯싶은 사람들이 바위에 깔려 죽었다. 요행 살아난 사람들도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한곳에 모여 서서 떠들썩하니 갑론을박을 했지만 그 바 위가 어디에서 굴러 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 길은 좁으니 빨리 지나가야 해요. 어물거리다간 위험하단 말이오!" 곽명송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제압하며 고함을 내지르곤 앞장서서 성큼성큼 내달아 갔다. 모두들 서로 먼저 가려고 밀치락거리면서 뒤를 따랐다. 이윽고 저 높이에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좀전에 바위가 굴러 내린 것말고는 요행히 그때껏 그 누군가가 그들을 암해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 산봉우리에도 사람의 자취는 아직 없는 듯했다. 보름달은 아닐망정 교태로운 달빛이 내리비추고 맑은 바람이 불고 있을 따름이었다. 일순 무리 중에 누군가가 목멘 소리로 말했다. "사제, 사부님께선 날더러 자네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셨지. 그런데 결국 그 《구음진경》을 빼앗으려고 길만 다그쳐 다니다가 이 꼴이 됐구먼. 경서는 구경도 못하고 싸움 한 번 못해 본 채 형제만 죽고 말다니." 그 사람은 일단 말을 꺼내 놓자 서러움이 복받치는지 끝내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아까 그 바위에 자기 문파 사람이 하나 깔려 죽은 모양이었다. 곡성이 화산 위로 애처롭게 울려 퍼졌다. "사형, 너무 그렇게 비감해하지 마시오. 우리라도 어서 가서 무예 시합을 구경해야 하지 않겠소? 사형이 만일 갈 생각이 없으시다면 이곳에다 그냥 우리 시체를 묻도록 합시다!" 아마 그 사람의 사제인지 누군가가 입을 떼자 그는 쓱 눈물을 훔치며 급히 나섰다. "아니, 안 돼. 어서 산에 올라감세. 사부님께선 우리들에게 꼭 그 《구음진경》을 갖고 오라고 당부하셨어. 난 꼭 그걸 빼앗고야 말 테야!" 그 사람은 울음을 뚝 그치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곽명송은 이윽고 화산 남쪽 기슭에 당도했다. 그 뒤로 강호 호걸들이 한 무리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잔뜩 긴장한 채 내처 걸어왔는지라 온몸이 뻣뻣이 굳어질 지경이었다. 곽명송은 잠시 멈춰 서서 산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여인들의 낭랑한 웃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는 이내 꽃같이 어여쁜 여인들이 바위 뒤쪽에서 몰려 나오며 앞을 가로막았다. 호걸들은 얼떨떨하니 서로를 마주보며 주춤주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인들 가운데서 한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여러분은 밤이 이렇게 늦었는데 뭣 하러 화산을 오르는 거예요?" 호걸들은 눈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모두 여인인지라 의아스럽기 그지없었다. 강호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몰려들었기로서니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미인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중에 꼭 원숭이같이 생긴 사람이 제일 먼저 나서서 말을 건넸다. "처녀를, 오늘 밤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는데 그쪽도 그걸 보러 가는 길이우?" "우리가 어찌하든 그건 상관할 바 아니에요. 전 다만 여러분한테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시라고 권하려는 것뿐이에요. 만일 뱀한테 물리기라도 하면 앞으론 아무 구경도 못할 게 아니에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 기색은 적이 냉랭했다. '난 화산에서 여러 해를 지내 왔지만 도적들이 들끓는다는 말은 종래로 들어 본 적이 없다. 한데 저 여인들은……. 실로 우리 화산파의 명예를 더럽히는구나.' 곽명송은 여인들을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생각을 굴렸다. 곽명송은 그 여인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 여인은 대뜸 쌀쌀하게 내뱉었다. "곽 대협, 당신은 강호의 명인이니만큼 이런 어중이떠중이들과 한데 섞여서는 안 되지요. 만일 당신이 물러서신다면 살 길은 내드리겠어요." 그 말은 아주 사정을 보아 주는 듯하여 모두들 곽명송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곽명송은 그 말이 몹시 거슬렸다. 그는 평소 성품이 아주 온화하여 누구와도 큰소리로 대거리하는 법이 거의 없었으나 이처럼 감히 화산파를 건드리고 깔보는 여인들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뭐 하는 계집들이냐? 감히 화산에 와서 무례하게 굴다니, 화산파의 검술을 배워 보겠다는 겐가?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러자 여인은 냉랭히 낯색을 굳히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네 녀석이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세 여인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곽명송을 향해 똑바로 찔러 왔다. 사정없이 검을 휘두르는 품이 무예가 만만치 않음에 분명했다. 곽명송은 급급히 피하며 홱 검을 빼들었다. 세 자루의 검이 일제히 곽명송을 겨누고 춤을 추면서 그의 검과 맞부딪쳐 밤 하늘에 불꽃을 날렸다. 곽명송은 화산 검술을 정통으로 전수받은 화산파이 으뜸가는 제자로서 한치의 빈틈도 없이 세 여인의 검을 번개같이 받아 쳤다. 네 사람은 한데 어우러져 차 한잔 마 실 시간 동안이나 싸웠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곽명송은 원래 일단 자신이 초수를 써서 눌러 놓으면 세 여인이 순순히 물러서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세 여인이 만만치 않게 세 자루의 검으로 맹렬한 공격을 들이대자 속이 뜨끔했다. 아무리 화산파의 정통 검술을 펼쳐 낸다 해도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데야 별 재간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 여인들이 똑같은 초수로 연이어 공격을 들이대자 적이 의아하여 한켠으로 썩 물러났다. 아무래도 이 여인들에겐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 분명했다. "당신들은 왜들 이러는 건가?" 곽명송은 고함을 내질렀다. "우린 다만 당신들더러 산에서 내려가라는 것뿐이에요. 산놀이를 하시겠거든 내일 다시 오세요." "무슨 농담을 하는 게냐? 우린 바로 오늘 밤에 일이 있어서 화산에 온 것이다. 허튼수작 말고 냉큼 길을 비켜라!" "당신이 화산파 대협 곽명송이라는 걸 우리는 익히 알고 있어요. 정히 그러시다면 다른 분들은 올라가세요. 하지만 곽 대협께서는 오늘 밤 절대로 화산에 올라가셔서는 안 돼요." 곽명송은 안색이 확 달라졌다. "내가 화산에 올라가면 왜 안 된다는 거냐? 무슨 연고로 다른 사람은 화산에 올라가도 일없고 나 이 화산파의 제자만 못 올라간다는 말이냐?" 세 여인은 의미 심장한 눈길로 서로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곽 대협, 창 앞이 밝고 땅속이 밝은데 정의도 몰라봐서야 되나요?" 여인의 그 한마디에 곽명송은 삽시에 안색이 변했다. "다, 당신들은……." "곽 대협께선 강호에 명성이 뜨르르한 분이시라 모두들 우러러보지요. 하지만 우리 가문의 처녀들만 보면 몸둘 바를 몰라 하시거든요." 뭇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얼떨떨하게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그는 필시 말못할 고충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세 여인을 바라보며 고분고분 말했다. "여인들께선 무슨 분부가 있어서 그러시오? 속시원히 말해 보시오." 그러자 뭇사람들은 그만 아연실색해졌다. "무슨 어려운 건 아니에요. 단지 곽 대협께선 이 화산 꼭대기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한 여인이 정색을 했다. 곽명송은 하얗게 질리더니 이윽고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 "좋소, 이 곽모는 물러가리다." 곽명송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고개를 꾸뻑 숙이고는 쏜살같이 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곽명송이 왜 저리도 황황히 떠나가는지 도무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뭇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내두르면서도 한시 바삐 화산 꼭대기로 올라가 무예 시합을 볼 생각이 앞서 곽명송의 일을 자세히 따져 보려 하지 않았다. "여인네들, 난 필히 화산에 올라가 무예 시합을 구경해야겠소. 우린 가게 해 주겠지?" 누군가가 운을 떼자 또 한 사람이 거들었다. "난 당신네와 초면강산 처지인데 내가 가는 걸 막을 리야 없겠지." "우린 이곳에서 사람들이 산정에 오르는 걸 막고 있어요. 당신이 화산에 올라가지 않는다면야 막을 필요도 없겠지요." 한 여인이 쌀쌀하게 말했다. 적이 냉기가 감돌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화를 발끈 내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네들이 그런다고 화산에 안 올라갈 내가 아니야! 이렇게 쉽게 돌아갈 거면 애초부터 나서지도 않았어!" 그러나 여인들은 이번엔 대꾸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문 채 매섭게 쏘아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인들의 눈빛에선 살기가 번쩍였다. 그러자 사람들 가운데 연장자인 듯한 사람이 손짓을 하면서 사람들을 물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처녀들, 처녀들은 왜 우리가 산에 올라가는 걸 막는 겐가? 뭘 알아야 내려가든 올라가든 할 거 아닌가?" 그러자 그 여인은 옥같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었다. "노옹, 화산 꼭대기는 위험하기 그지없으니 노옹께서는 올라가시지 않는 게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