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35편 (35/70)
'저이의 공력이 이다지도 고강한데 누가 감히 이겨 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저이는 반드시 《구음진경》을 얻고야 말 거야.' 왕중양은 산 저쪽에서 울려 오는 외침 소리를 듣고 중천에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아마도 동해 도화도주 황약사일 게다. 저 소린 좀 무례한 듯하나 음충스럽지는 않아. 저 사람이 《구음진경》을 차지하게 된다면 최소한 무림에 해는 입히지 않을 게야." 그때 산 뒤쪽에서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린 적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길게 여운을 남겼다. 아마도 숨 가쁘게 밤길을 다그치는 듯싶었다. 왕중양은 곰곰 생각을 굴렸다. '저 사람의 공력은 나보다 못하지 않겠군. 일전 나를 기습하던 구양봉일지도 모르지.' 뒤미처 산 쪽에서 또 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엔 낭랑히 불경을 외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자못 평온했다. 하지만 한 글자, 한 구절 힘껏 외우는 그 목소리는 아주 박력이 있었다. 왕중양은 그 목소리를 듣고 다소 근심이 되었다. '이 사람의 공력은 아마도 나보다 나은 것 같구나. 저 사람이 외우는 불경은 아주 평온하고 살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황약사나 구양봉의 외침과는 달리 공력을 아주 깊이 닦은 게 분명하구나.' 왕중양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대리 황제 단지흥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왕중양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모두들 화산의 무예 시합을 고대하고 있다. 몇 년 간이나 벼르고 별렀던 그 기다림이 이제야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과연 올 것인가. 임조영도 필시 찾아올 테지만 일찌감치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지난날 임조영을 오랫동안이나 기다리게 했었다. 이제는 그가 임조영을 기다릴 차례였다. 언제까지든 임조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리라. 그는 조용히 침잠하면서 마음의 온갖 사심을 털어 내려고 정신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왕중양이 무엇 때문에 밤에 무예 시합을 벌이려고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구음진경》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만 추측하고 있었다. 《구음진경》은 기경(奇經)이라 꼭 밤에 얻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중양 진인이 하필 한밤중에 화산으로 오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왕중양의 의중은 딴 데 있었다. 그는 이번 쟁탈전에서 그 여인과 마지막으로 승부를 가르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승부를 가려 지난날 뜻하지 않게 두 사람 사이를 얽어맸던 그 비정한 운명의 끈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산의 어둠 속에 지난날의 원망을 깨끗이 묻어두리라고 그는 거듭거듭 다지고 있는 것이었다. 종남산 뒤쪽으로 자그마한 돌비탈이 있고 그 돌비탈 위에는 수풀이 우거졌다. 그 수풀은 매우 울창하여 가을이 되었는데도 아주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바로 거기에 임조영의 활사인묘가 있다. 그 석굴 어귀로 언뜻 사람 그림자가 희끗하더니 휘파람 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구양봉과 대환희 보살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지금 보살의 계책으로 왕중양의 여인 임조영을 사로 잡아 왕중양을 협박해 번거롭게 화산 무예 시합 따위는 치르지도 않고 그녀의 목숨과 《구음진경》을 맞바꾸자고 할 심산으로 내처 이 종남산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뚱뚱보 여인 하나가 소리를 쳤다. "석실 안 사람은 들으시오!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이 좀 뵙기를 청하오!" 그러나 석굴 안은 잠잠하니 오래도록 기척이 없었다. 구양봉은 이내 대꾸가 없자 발싸심이 나서 더 큰소리로 외쳐댔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손님 대하는 법이 이다지도 무례하냐? 문을 부수고 들어갈 테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구양봉의 옷소매를 잡아 끌며 짐짓 질책을 했다. "구양 장주님, 좀 고분고분하세요. 임조영이란 여인은 예사 여인이 아니에요. 듣건대는 이 여인은 왕중양을 이겨 이 석굴을 차지했대요. 이 석굴 이름이 활사인묘인 것을 봐도 그녀가 속세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아요. 당신이 그 여인 손에 잘못 되면 강호에서 비웃음만 사는 꼴이 아닌가요?" 그 말에 구양봉은 시뜻해서 냉소를 쳤다. "보살은 이 구양봉을 너무 업신여기는구먼. 나도 임조영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 내가 계집 하나 제압하지 못한단 말인가?" 구양봉은 임조영을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는 한평생 사내만을 대단하게 여기고 여인은 늘 하잘것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임조영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결국 계집이 아니란 말인가. 그저 왕중양의 여인이란 것 때문에 여기까지 이렇게 친히 온 것이지, 그렇지만 않다면 직접 찾아 나선다는 건 그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아무리 해도 석굴 안에서 찍소리도 없자 이제는 대환희 보살이 나서서 큰소리로 열을 올렸다. "구양 장주님, 길게 고함을 치세요. 아무려면 이렇게 끈질긴데 안 나오겠어요? 어서요!" "그런데 아까는 뭐가 어쩌고 어째? 고분고분하라구?" 구양봉이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내쏘자 대환희 보살은 무색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구양봉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짓고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수림의 나무들이 정정 울리고 메아리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임조영은 석실 안에서 천년 동안 얼어붙은 석상(石狀) 위에 올라앉아 기를 모으고 있었다. 밖에서는 연해 떠들썩하니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목소리를 들으니 심보가 고약한 놈이로군. 혹시 왕중양에게 무슨 일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제자를 불렀다. "굴 밖에 누가 왔느냐?" "사부님, 복색을 보아하니 서역 오랑캐 같은데 아주 흉악해 보이는 녀석이 하나 와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또 여인들도 여럿 되는데 모두 다 어찌나 뚱뚱한지 보기조차 역겨웠어요." "뚱뚱하다구? 그렇담 그 여인들은 운남 대환희 보살네 무리들이군. 그런데 그 사내는 누구지?" 임조영은 석실 밖으로는 추호도 나가지 않겠다 맹세했으나 혹 왕중양 신변에 위험이 닥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그냥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구양봉은 임조영이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조갈이 날 지경이었다. 한 순간 돌 문이 쩌그덩거리더니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조영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저어하는 기색이 없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구양봉의 코앞까지 바투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요? 대관절 누군데 여기 와서 고함을 지르며 이 난리를 부리는 게요?" 언젠가 먼발치에서 한 번 보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더욱 천하 절색이라 구양봉은 일순 얼빠진 사람마냥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쌀쌀맞게 다그치자 언뜻 정신을 차리고 대뜸 주워섬겼다. "그대가 임조영인가?" 마음은 사뭇 설ㄹ으나 구양봉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짐짓 거만한 기색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여인을 쏘아보았다. 임조영은 아무 대꾸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구양봉은 잠시 바라보다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좋아. 난 왕중양과 화산에서 한판 붙어 볼 생각인데, 듣자니 당신이 왕중양을 이긴 적이 있다기에 당신과 먼저 한번 재미를 보려고 이렇게 온 것이다. 자, 어서 한판 붙어 보자구!" 임조영은 자못 멸시하는 듯한 눈빛으로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흥, 보아하니 왕중양한테도 질 것 같은데 감히 내게 이기겠다구?" "듣던 대로 방자한 계집이로군!" 구양봉은 짓씹듯이 내뱉었다. "그래,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인데 감히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왕중양이 내 손에 패했다는 사실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모양이군? 왕중양도 내 적수가 못 되는데 네 녀석은 죽으러 예까지 온 게야?" "아직 내 명성도 듣지 못했다니 우물 안 개구리로군. 난 서독 구양봉이다! 왕중양은 네 년한테 진짜로 진 게 아니라 일부러 져준 게야, 일부러! 허장성세는 집어치우라구!" 임조영은 가느다랗게 눈살을 찌푸리며 구양봉을 건너다보았다. '왕중양이 일부러 나한테 져 줬다구?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그가 참말 나보다 못할까? 그렇다면 그이는 왜 남한테는 다 이기면서 나한테는 늘 져주는 것일까? 내가 지난번에 비석에 글을 새길 때…… 이건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왕중양, 당신은 나한테 일부러 양보할 필요가 없노라. 이 임조영이 참말로 당신을 이길 수 없는 줄 아는가?' 구양봉은 유심히 임조영의 기색을 살폈다. 방금 나오는 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허튼소리를 지껄였을 따름인데 임조영이 이처럼 반응을 보이다니…….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럴 때 손을 쓰면 이 여인을 사로잡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만 되면 왕중양이 나한테 굽히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지…….' 그때 갑자기 대환희 보살이 입을 열었다. "임조영, 듣자니 당신이 천하 제일인자라고 하여 구양 장주님이 당신과 무예를 비겨 보려고 온 거예요." 임조영은 대환희 보살을 싸늘히 쳐다보더니 홱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똑바로 구양봉을 겨누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좋아, 신난다! 한바탕 해 보자. 내가 너한테 진다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구양봉은 독사장을 홱 들이댔다. 그의 독사장은 워낙 그의 형인 구양적이 쓰던 병장기로서 거기에 그의 무공이 실리자 아주 지독한 것이 되었다. "어디 독사장 맛을 보아랏!" 임조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구양봉의 손목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검을 휘두른 순간, 구양봉은 그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 여인이 대뜸 공격을 들이대는 걸 보면 무학이 뛰어나긴 뛰어나구나. 뿐더러 검세에 한치도 빈틈이 없다. 실로 무학대가다운 기백이다!' 구양봉은 임조영의 검을 피하면서 바짝 정신을 집중해 사장을 휘둘렀다. 채 십여 합도 싸우지 못해 구양봉은 벌써 조급해졌다. 임조영의 검술에는 실로 공격과 방어가 엄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두 사람은 수십 합을 싸웠지만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 구양봉은 임조영을 인질로 잡겠다는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자 조급하면서도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마구 고함을 지르며 독사장을 휘둘러댔다. "쥐새끼 같은 녀석이 함부로 종남산에 발을 들여놔? 죽고 싶은 게로군. 목숨 하나는 여기 두고 가도 내 개의하지 않으마." 임조영이 한껏 이죽거리자 구양봉도 질세라 임조영의 화를 돋웠다. "뭐라구, 이 여우 같은 것이? 네 년은 왕중양의 노리개지? 놈과 물론 통정했을 테고! 내가 네 년을 붙잡아 왕중양의 《구음진경》과 맞바꿔야겠으니 어서 순순히 사장을 받으라!" 임조영은 그간 석실에서 오래도록 지내며 왕중양에 대한 화가 점차 가라앉자 뱀 독에 중독되어 있는 중에도 마음을 침잠하고 새로운 검법 한 가지를 익혔다. 이 검법은 내공심법(內功心法)이기도 했는데 그녀는 이를 옥녀심경(玉女心經)이라고 이름했다. 그녀는 이젠 웬만해서는 그 어떤 감정의 충동을 받지 않았으나 구양봉이 무례하게 욕설까지 퍼붓자 불같이 화가 나 전력을 다해 중독된 몸을 추스르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좋아, 어디 내 검 맛이나 보아라!" 그녀는 초수를 바꾸어 옥녀심경 초수를 쓰기 시작했다. 한켠에 서 있던 그녀의 제자도 사부가 이 초수를 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임조영이 옥녀심경 초수를 펼쳐 내자마자 구양봉은 연신 피하기만 하면서 쩔쩔맸다. 제자는 저도 모르게 퐁퐁 뛰며 소리쳤다. "멋지다! 사부님, 저 놈에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줘요!" 임조영은 기세를 올려 구양봉에게 더욱 바싹 공격을 들이댔다. 그러나 그 순간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등짝을 때렸다. 얼른 머리를 돌려 보니 대환희 보살이 그녀의 제자를 틀어쥐고 징그럽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제자를 놓아주지 못할까!" 임조영은 분기탱천하여 구양봉에게 한층 가열차게 검을 휘두르면서 호통을 쳤다. 그 제자는 임조영과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처녀가 갓난쟁이 아기였을 때 들판에서 주워 와 이만큼 크도록 함께 동고동락해 왔다. 그러니 이 두 여인들 사이의 사제의 정이란 더없이 깊은 것이었다. 그런 터에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그녀는 도저히 태연할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득의양양하여 껄껄 웃어댔다. "잘했어, 대환희 보살! 난 이 년을 쉽사리 이길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이 년의 제자를 붙잡고 있으면 일이 한층 쉬워지지. 임조영, 어서 검을 내려놓아. 내가 네 년의 혈도를 눌러 왕중양한테 끌고 가야겠다." 임조영은 제자와 대환희 보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살의 얼굴은 징그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보살은 분명 자기 제자한테 독약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일순 제자는 또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임조영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임조영의 제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 나쁜 년, 나를 놓아라! 사부님, 이 년 말을 듣지 말고 그 더러운 놈을 어서 죽여 버리세요. 절 위해 복수를 해 주세요, 사부님!" 임조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단칼에 구양봉을 쓰러눕히고 싶었지만 마음이 조급하여 손끝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검을 급히 휘두를수록 옥녀심경 초수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고 그 위력은 점점 못해 갔다. 그러자 역으로 구양봉은 마음을 다잡고 독사장을 더욱 힘있게 휘둘러댔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서로 어슷비슷하게 검과 사장을 주고받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힘들어 하시는구나. 사부님께서 검을 쓰시는 초수가 좀전보다 퍽 못하다. 이러다간 사부님께서 지게 될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 지게 된다면 난 하등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계집이다. 사부님께선 한평생 남한테 져본 일이라고는 없지 않은가. 천하에 이름을 날린 대협 왕중 양마저 사부님의 손에 패하지 않았던가. 사부님께서 수치를 당하시게 할 수는 없다…….' 처녀는 머리 속으로 슬한 사념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언뜻 자기가 죽게 되면 사부님은 반드시 노기충천해 자기를 위해 복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 이 제자는 사부님께 더는 효성을 드리지 못하옵니다. 사부님께서는 자중하시옵소서!" 그녀는 큰소리로 외치고는 급히 혀를 깨물어 자살하려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갑자기 등허리가 마비되는 듯해 몸을 움찔 떨었다. 혀의 감각도 점점 없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이어서 적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살아가자면 고통을 당하게 마련인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쉽사리 생명을 버리려 하는가?" 임조영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왕중양이 대환희 보살 뒤에 서 있었다. 왕중양은 화산 밑에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그녀의 병환이 걱정되어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다시 한 번 권해 보고자 재우쳐 종남산으로 달려온 터였다. "대환희 보살, 공연히 힘 빼지 말게!" 대환희 보살은 왕중양을 보더니 질겁을 하여 창백하게 질려서는 살살거렸다. "백타산군이 화산 무예 시합을 하기 전에 임 여협과 놀아 보느라고 저래요." 왕중양은 태연한 기색으로 구양봉을 건너다보았다. "구양봉, 자네가 임 시주님과 싸우는 건 난 참섭하지 않겠어. 하지만 대환희 보살이 남의 제자를 인질로 삼아 위협하는 건 나쁜 짓이야." 왕중양은 지극히 평온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대환희 보살의 귀엔 마치 작탄이 터지는 것처럼 들렸다. 보살은 극구 발뺌을 했다. "중양 진인, 그렇게 날 나무라지 마세요. 임 시주님의 제자가 나를 능멸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만……. 이제 놓아주면 되잖아요." 대환희 보살은 연신 왕중양에게 굽실거리며 임조영의 제자를 탁 놓았다. "자 가라, 가!" 왕중양은 임조영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 일에 끼여드는 걸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구양봉이 아니라 천하 무림 호걸들이 다 온다고 하여도 그녀는 왕중양이 자기 일에 관계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왕중양은 한켠에 물러나 앉아 눈을 감고 양신(養神)을 했다. 임조영은 자못 못마땅한 기색으로 퉁명스레 내뱉었다. "전진교 사람이 예서 뭘 하려고 가지 않고 그러고 있어요?" 임조영의 어조에 호의라고는 조금도 없자 왕중양은 괜히 성을 돋우게 될까 저어되어 얼른 말했다. "임 시주, 난 당신과 구양 장주가 싸우는 걸 구경하려고 그러오. 구양 장주의 독사장 초수가 천하에 다시 없고 그대의 검술도 세상에 다시 없으니 좀 보자고 그러는 것일 뿐이오." 그러자 임조영은 대뜸 쓴웃음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왕중양, 사공이 뱃머리 돌려 대듯 말을 잘도 둘러대시는군요. 내 일에 털끝만큼도 참견 말아요. 당신은 천하를 정정 울리는 대협이니 당신은 당신 할 대로 대협 노릇이나 하고 난 나대로 활사인 노릇이나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내 일에 상관 마세요!" 왕중양은 어색하니 웃으며 입맛만 다셨다. 구양봉은 경난을 많이 겪어 본지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대번에 그것이 사랑 싸움인 것을 알아챘다. '보아하니 저 미련퉁이 대환희 보살이 보기는 바로 보았군. 이 왕중양은 임조영을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내가 만약 참말로 이 임조영을 사로잡기만 한다면 왕중양은 고분고분 내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겠다!' 하지만 왕중양이 이곳에 와 있는 한 구양봉이 임조영을 사로잡는다는 건 한갓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입맛이 몹시도 씁쓰레했다. "구양봉 네 이 놈, 네 놈은 이 활사인묘로 죽으러 왔느냐?" 임조영은 왕중양이 들으라는 듯이 더욱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구양봉은 바싹 약이 올랐다. '네 년이 왕중양의 계집이든 어떻든 내 오늘 단단히 버르장머리를 고쳐 놔야겠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꼭 그 격이 아니냐! 감히 이 구양봉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고 한갓 계집이 날뛰다니…….' 구양봉은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면서 독사장을 치켜 들고 임조영을 향해 똑바로 찔러 갔다. 임조영은 번개같이 피했다. 그러나 임조영은 이번에는 있는 재간을 다 부리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워낙 그 자체로 검법이기도 하고 내공심법이기도 한 옥녀심경을 뱀 독에 중독된 중에도 일심으로 연마한 것은 왕중양한테 뒤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왕중양이 다만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대송 강산을 되찾을 생각에만 불타고 자기를 성심으로 대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결코 자기도 왕중양한테 뒤져서는 안 된다고 오래 전부터 다짐하고 또 다짐해 왔다. 그리하여 무예에 있어서만 큼은 기어이 왕중양보다 우세를 점하리라고 벼르며 활사인묘로 들어간 뒤에도 병세를 아랑곳 않고 무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이 옥녀심경을 창안해 낸 것이었다. 그러한지라 임조영은 결코 왕중양한테 옥녀심경 초수를 허투루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왕중양과 싸우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아 온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어찌 왕중양이 보는 앞에서 자기가 창안한 검법을 경솔히 써먹을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일심으로 왕중양에게 대적하려 하면서도 때가 되면 그녀는 그 초수를 필히 왕중양한테 전수해 주리라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극적인 순간에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내심 필히 자신의 옥녀심경이 왕중양의 《구음진경》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런고로 지금은 진정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러자 구양봉은 실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여인은 왜 아까의 그 괴상한 검법을 써먹지 않는 것일까……. 그는 워낙 임조영의 검법에 눌려 힘이 부쳤는데 그녀가 옥녀심경 초수를 쓰지 않자 더럭 의심이 났다. 그렇게 되니 정신을 한곳에 집중할 수가 없어 자연 그의 독사장 초수에도 예사롭지 못하게 틈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녀는 진작에 왕중양과 이 임조영 사이에 아주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간파해 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조영이 대번에 그 검법을 걷어들일 리 없는 것이다. 대환희 보살은 음흉한 눈빛으로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천하를 뜨르르하게 울리는 대협이라 해도 저 사내 역시 치인(痴人)에 불과하다고 보살은 속으로 마음껏 비웃어댔다. 임조영의 검법은 갈수록 속도가 느려졌으며 아주 힘겹게 검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워낙 임조영은 왕중양과 공력이 어슷비슷하여 이들 둘이 싸운다면 승부를 가르기 어려운 정도이다. 그리고 이 구양봉과 제대로 싸운다면 더 빨리 끝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왕중양이 신경이 쓰여서 그녀 역시 정신을 한곳에 모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싸우지 못했으므로 검법은 평온하기 그지없고 허점도 많았다. 왕중양은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지게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일순 임조영이 빈틈을 보인 사이 구양봉의 독사장이 그녀에게로 똑바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바로 구양봉 독사장의 그 유명한 천외비장(天外飛杖) 초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