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34편 (34/70)
천하에서 오로지 이 향녀 등아만이 우쭐거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구요!" 단지흥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웃었다. "등아, 그대가 화산에 가면 그 고수들을 다 이길 자신이 있소?" "제가 그들과 왜 싸워요? 그저 웃어 보이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걸요." 단지흥은 내심 장탄식을 했다. 칼과 창 같은 병장기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천하 영웅이라도 자고로 여인의 수작에는 견뎌 내지 못하지 않는가. "등아, 내 그대한테 할말이 있노라." 등아는 놀란 눈길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주저하지 말고!" 등아는 적이 매정하게 내쏘았다.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등아, 세상에는 종래로 사내가 있으면 여인이 있어야 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거요. 그래야 세상에 인간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오. 그대가 일심으로 사내를 없애 버리려 하는 건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것이오." 그러자 등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 듣기 싫어요. 전 사내들을 미워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사내들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요." "사랑이 있어야 미움도 있는 법, 미워하는 것도 다 사랑하기 때문인 거요. 그렇지 않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당신이 만일 진정으로 우리 향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한평생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나 진배없어요. 나나 우리 향녀들이란 원래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요." 사내의 품에 안긴 여인이 사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느 사내가 기분이 좋겠는가. 하지만 단지흥은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등아, 사내들의 해골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는 건 그대가 그만큼 그들을 미워한다는 걸 말해 주지만 반면 그걸 매달아 놓게 되면 그대는 그들을 정녕 잊을 수 없게 되는 거요. 그대가 그들을 잊지 못하게 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미워하게도 되지만 사랑하게도 되어 끝내 정을 끊지 못하게 되는 게지. 이런 심정은 그대도 똑똑히 말할 수 없는……." 그러자 등아는 그의 말허리를 똑 자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해요. 그만 하시란 말이에요!" 단지흥은 씁쓰레한 남빛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등아는 낯색이 자못 험상스러웠다. 기실 그녀 역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단지흥의 그 한마디는 정곡을 찔렀을 뿐 아니라 그녀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그녀는 들릴락말락 뭐라고 속살거리더니 끝내 말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단지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여인이 지독하기 이를 데 없으나 가슴 한구석에는 여리디여린 여인의 순정이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등아는 일순 몸을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생각난 것마냥 불쑥 물었다. "단황 나으리, 절 도와주실 수 있죠?" "무엇을? 무엇을 도와 달라는 게요?" "전 그 《구음진경》을 꼭 손에 넣어야겠어요." 단지흥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픽 웃고 말았다. "내가 보기엔 그댄 결코 《구음진경》을 얻지 못하게 될 거요. 왕중양이 천하 무림에 내놓고 공표를 한 바에야 그 경서를 얻으려면 실로 뛰어난 재간이 필요한 거요. 무슨 교묘한 꾀를 쓰거나, 무예를 겨뤄 차지하거나 둘 중 하난데…… 내 보기엔 그대가 그걸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오." 그러자 등아는 눈에 불꽃이 튀며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 아니에요! 그래 당신은 절 도와 주시겠나요, 안 도와주시겠나요? 그 말씀만 하세요. 난 원래 당신을 화산 무예 시합에 가지 않게 하는 조건으로 선비를 데려왔으나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요. 꼭 당신을 화산으로 데리고 가 그 《구음진경》을 앗아 내도록 하겠다는 말이에요!" 여인은 의외로 단호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단지흥은 같은 말밖에 할말이 없었다. "어렵소. 어려운 일이오." "왕중양은 그 책을 얻은 뒤 밤이나 낮이나 한탄만 하고 있다더군요. 그 경서가 나쁜 놈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한테 무궁한 우환을 남기게 될 거라고 말이에요. 보아하니 그 책은 기필코 무학밀서이므로 나한테는 큰 이득이 될 거예요. 난 그 책을 얻어 천하의 사내들이 모두 나한테 숙이고 들게 만들겠어요." 등아는 《구음진경》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지흥은 이 여인의 부질없는 한갓 일장춘몽에 더욱 깊게 연민만 느낄 따름이었다. 홍사와 두 여인이 선비를 둘러싸고 애교를 떨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여인들이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지라 선비는 그 여인들을 마주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책만 들여다보며 곁눈 한 번 파는 법이 없었다. 선비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좌전(左傳)》이었다. "그 책이 무슨 책이에요? 선비께서 책을 읽으실 바에야 《구음진경》을 읽으셔야죠. 그래야 선비님 무예가 천하에 다시 없는 것이 되지 않겠어요?" 홍사는 한껏 아양을 떨며 선비에게 다가들었다. 선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머리를 저었다. "그게 아니오. 당신들은 천하에 《구음진경》만 있는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오!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나가면, 아니 십 년만 흘러가도 아마 사람들은 이 《좌전》은 읽어도 《구음진경》같은 건 읽지 않을 것이오." 홍사는 입을 삐죽이 내밀며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렸다. 그러자 선비는 사람 좋게 웃었다. "내 말을 잘 들어 보오. 천하 사람들은 다 《구음진경》을 서로 빼앗으려 하면서 모두들 그걸 보물로 여기고 있소. 하나 그걸 얻은 자는 극구 그것을 남에게 보여 주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걸 잃은 자는 몹시 가슴 아파하며 그 경서 얘기는 입 밖에 꺼내려 하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되면 이 책은 자연 인간세상에 전해지지 않게 돼 버린단 말이오. 하지만 이 《좌전》이 잊혀져 유전되지 않았다는 얘긴 못 들었소." "당신은 승상이시라더니 말재간이 대단하군요.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니 우리 같은 소인에 비하겠나요? 당신 말씀이 맞아요. 당신이 하시는 말씀을 우린 모두 믿어요. 그러니 만일 당신께서 《구음진경》을 얻게 되면 우리한테 주세요. 그럼 우리가 상아에다 새겨 넣은 《좌전》을 드리겠어요. 어때요?" 세 여인은 자신들의 제안이 퍽 그럴싸하다는 듯 깔깔 웃어댔다. 그러나 선비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않고 불쑥 물었다. 겉으로는 자못 태연자약했지만 속으로는 한시 바삐 황제를 구해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애가 닳았다. "당신네의 등아와 우리 황제 폐하는 지금 어디에 있소? 내가 찾아뵐 수 없겠소?" 그러자 홍사는 선비를 붙잡고 안타까운 듯 말했다. "선비님, 당신은 참말 책벌레가 아니면 바보로군요.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데 왜 끼여들려 하시나요? 더욱이 당신은 즐기지 않고 이곳에서 멍청하니 기다리고만 있을 건가요? 인생은 짧고 고달픈 거예요. 당신은 정녕 그걸 모르세요?" "알고 있소. 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조금 전에 한 여인이 폐하에게 벌을 주겠다고 데려갔으나 그건 걱정 안 해도 되지. 폐하는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실 분이 아니니까. 그러나 나는 어서 빨리 폐하를 모시고 이곳을 나가야겠소!" 선비는 지금의 이 형세가 몹시도 답답하여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가고 안 가고는 우리 손에 달린 일이에요. 당신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원래 등아 향녀님께서는 황제 폐하를 화산으로 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조건으로 당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지만 이제는 달라졌어요. 폐하가 우리 향녀들을 위해 《구음진경》을 빼앗아 주겠다는 걸 약정해야만 당신들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진정으로 인생이 짧고 고달프며 한 번 지나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아신다면 그 일은 폐하께 맡기고 이곳 에서 우리와 재미를 보아요. 그런 다음 폐하와 그 무슨 화산의 무예 시합인가 하는 델 가시란 말예요. 그때 가도 늦지 않으니……." 선비는 이 여인들이 무슨 수작을 꾸며 댈지 알 수가 없었다. 간신히 황제를 찾아내긴 했으되 그저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지금 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으니 실로 난감할 따름이었다. 선비는 몹시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는 다만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 향녀가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선비는 웃기만 할 뿐 조금도 반응이 없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참말 바보로구나. 이 사람이 참말로 우리에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이러는 걸까? 만일 참말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의지가 굳센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어디, 우리를 당해 내나 두고 보자.' 그녀들 셋은 마음속으로 생각을 굴리다가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일제히 선비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선비는 눈 하나 까딱 않고 큰소리로 《좌전》만 읽어 내려갔다. 선비는 점점 더 큰소리로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는 차츰 흔들리고 있었다. 여인의 향긋한 체취만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은 책에 가 있지만 책장에는 글자가 아니라 여인들의 요염한 모습이 어리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이제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칫 여인들을 겁탈하게 될까 저어되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은 그래 여인이란 쟁기를 쓰지 않고고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걸 모르시나요?" 홍사가 사뭇 정겹게 속살거렸다. 선비는 머리를 숙인 채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대꾸했다. "알고 있소. 옛날 서시라는 여인은 오나라와 월나라의 정예 군사 팔만보다 강했소. 그 여인은 일거에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단 말이오. 또 귀비 양옥환은 나라를 망치고 임금을 사경에 몰아넣었지……." "선비님께선 굳이 말씀을 안 하시려고 자꾸만 피하셔서 그렇지 일단 입을 열었다 하면 그런 학식으로 온종일을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거예요." "아니오. 그렇지 않소. 여인이 얽혀 들어 빚어진 그런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춰 내긴 몹시 겁이 나니까……." 그는 향녀들의 유혹을 받아 죄과를 범하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웠다. "선비님, 당신은 일국의 승상이시니 여색에 빠지면 나라를 망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반대로 여인이 나라를 구할 수도 있는 거예요. 선비님도 그건 알고 계시죠? 만일 당신이 단황 나으리를 도와 우리들이 《구음진경》을 얻으려 하는 것에 일조해 주시기만 한다면 우린 꼭 당신들 군신에게 훌륭히 보답할 거예요." 그러자 선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대들이 우리 황제 폐하에게 미향을 뿌려 이곳까지 데리고 와 아직까지도 폐하가 저처럼 혼미해져 있도록 해 놓고는 아까부터 도시 그게 무슨 말이오? 이건 모두 그대들이 우리 대리국의 황제와 신하를 깔보았기 때문 아니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더러 《구음진경》을 빼앗는 일을 도와 달라니 실로 어불성설이구먼. 그건 망상이오, 망상!" "흥, 아무리 그래도 별수없을걸요? 단황 나으리와 선비님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언약해 주시지 않는다면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달이 점차 차고 있어요. 중양절 날 밤에 당신들은 서로 참살해야 해요. 그때 누가 그 《구음진경》을 얻게 되고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가 되겠나요? 과연 누가?" "난 모르오. 하지만 우린 아니오. 우린 그것을 얻을 생각이 없소." 그러자 홍사는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참말 그걸 보게 되더라도 얻으려 하지 않으리란 말씀인가요?" 선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소. 우린 그걸 바라지 않소." "됐어요, 아주 훌륭해요. 한데 우린 참말로 당신들 군신들의 도움을 바래요. 당신들처럼 이 《구음진경》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많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를 도와 그 《구음진경》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홍사는 정색을 했다. 선비는 그 말에는 더 이상 대꾸를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거야 어찌 됐든 어서 폐하를 만나게 해 주오. 어쨌든 우린 화산으로 가야겠으니." "그렇게 서두를 게 뭐예요? 어차피 우리도 갈 테니 함께 가면 더욱 좋지 않나요?" 선비는 앙천대소를 했다. 그는 정말 철없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대들이 화산에 가선 뭣하오? 그대들은 참말로 그깟 재간으로 화산에 가 싸우려 하는 게요?" "비웃는 거군요. 우리 향녀를 비웃으면 안 돼요. 잘못 생각하셨어요. 그럼 선비님 신변이 위태롭게 된다구요." 선비는 뭐라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홍사가 그의 등에 있는 비구(脾樞) 대혈을 찌른 것이었다. 그러자 두 여인도 일제히 손을 써서 순식간에 선비의 대혈 열세 곳을 찔러 놓았다. "선비님, 당신은 스스로 재간이 대단하다고 믿고 계시는군요." 선비는 태연자약하나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대들한테 알릴 일을 잊었구먼그래. 화산 무예 시합 때 그대들과 마주앉으려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게요." 그것은 화산의 무예 시합 때 향녀들한테는 근본적으로 남을 제압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선비님, 당신은 승상 노릇은 할 수 있지만 여인들한테는 안 되겠군요. 두고 보기나 하세요." 홍사는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제18장 왕중양의 여인 구양봉은 온밤 내내 치주를 상대로 그 짓을 했다. 그는 몇 번이고 절정에 달해 신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하룻밤 보내고 나니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가 이렇듯 중원 무림을 찾아온 것은 비단 《구음진경》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심중에는 이 참에 이 백타산군 서독의 악명을 천하 무림에 톡톡히 드높여 놓아야겠다는 의도가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야만 설사 《구음진경》을 손에 못 넣는다 하더라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누구라도 자 기 손에 걸려들기만 하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치주가 그 첫번째였던 것이다. 그는 중원 무림 호객들이 치주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핍박을 당하며 손이야 발이야 빌 것을 생각하니 절로 흥이 나서 연신 징그럽게 웃음을 흘리며 요란하게 떠들었다. "좋아, 훌륭해! 꼬마 미인, 넌 날 무척 즐겁게 해 주었어. 난 네가 한평생 만족하고 살게 해 주겠다." 치주는 치가 떨렸다.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인 채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 장막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기 몸이야 어찌 되든 그럼으로써 단지흥을 살릴 수 있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구양봉은 날이 밝아서야 치주를 놓아주었다. "참 좋았어. 좋았단 말이야……." 대환희 보살은 장막 밖에서 기색을 살피다가 구양봉의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잠시 뜸을 들인 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치주 쪽을 힐끔거렸다. 치주는 되는 대로 옷을 걸치고 있었는 데 아랫도리가 벌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 장주님께선 이 한 밤 기분 좋게 보내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지 않아도 구양봉은 묘한 여운이 남아 입을 벙싯거리다가 보살을 바라보며 요란히 웃어댔다. "훌륭해, 정말 훌륭해! 보살은 참말로 내 맘을 잘 알아준단 말이야, 흐흐흐……."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입맛 좋게 비위를 맞추었다. "구양 장주님, 어제 저 애와 잘 보내셨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잘됐어요. 이제 장주님께서 내 말을 들으실 차례군요. 내가 저 애를 상납했으니 이번엔 장주님이 내 요구를 들어주셔야지요. 그래 어떻소, 내 보기엔 이번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무림 고수란 고수들은 다 모여들었으니, 당신이 그 기서를 빼앗긴 쉽진 않을 텐데……." 대환희 보살은 구양봉이 기분이 좋은 김에 얼른 매듭을 짓자는 심산에서 대뜸 말을 꺼냈다. 구양봉은 그 말이 거슬렸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래 보살 생각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이렇게 합시다. 장주님께선 시름을 놓으세요. 당신은 위로 왕중양 한 사람만 대적하면 돼요. 제가 밑에서 화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막아내겠어요. 그러면 당신은 왕중양하고만 싸우면 될 거 아니에요? 장주님께서 왕중양 한 사람만 이긴다면야 그 《구음진경》은 장주님 호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 아니냔 말예요?" 대환희 보살의 말에 구양봉은 한껏 구미가 당겼다. "훌륭하군, 대환희 보살. 당신은 참 수완이 좋군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일이 성사되면 내 당신한테 단단히 보답하지." "기실 저도 그 《구음진경》을 손에 넣고 싶지만 재간이 못 미치니 장주님께서 꼭 그걸 얻기를 원해요. 다만 그 경서에 있는 무공 초수를 저한테 두서너 가지는 반드시 전수해 주어야 해요. 그 조건으로 난 장주님을 도와드리겠어요." 구양봉은 대환희 보살이 이처럼 겸손의 말을 하자 우쭐해져서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 내 그대 요구대로 해 주지." "한데……." 대환희 보살은 일순 웬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며 말을 맺지 못했다. "한데 어쨌단 말이냐? 어서 말을 해라, 말을!"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과연 구양 장주님이 단지흥의 일양지공, 홍칠공의 강룡십팔장, 왕중양의 선천신공을 다 이겨 낼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 고수들을 다 이겨 내기란……." 구양봉은 대환희 보살이 한껏 추어올렸다가 다시금 그를 얕잡아 보며 종작없이 굴자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이 뚱뚱보가 그까짓 계집 하나 안겨 놓고 자기를 갖고 놀자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대로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이봐 뚱뚱보! 무슨 믿는 구석이 있어서 큰소릴 치는 모양인데 내 사장 맛을 보기 전에 냉큼 말하지 못할까! 무슨 좋은 계책이 있으면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구!"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계속 아리송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 순간 보살의 머리 속에 기가 막힌 계책 하나가 번개같이 스쳐 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탁 치며 환성을 올렸다. "구양 장주님, 기실 당신이 그 경서를 얻자고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이리 좀 가까이 와 봐요!" 대환희 보살은 겉보기엔 미련해도 속에 꾀가 가득 들어찬 여인이었다. 구양봉이 다가가자 보살은 그의 귀에 대고 한참 동안이나 뭐라고 속닥거렸다. 이윽고 구양봉은 삽시에 얼굴이 환해졌다. '나 이 백타산군은 한다면 하는 성미다. 천하의 기서를 왕중양 손에 두고서야 내 어찌 참을쏘냐. 난 기어이 그 책을 수중에 넣고 말 테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좋소. 당신 계책대로 하지." 왕중양은 화산 꼭대기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활사인묘 앞에서 그 여제자가 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히 울리는 듯했다. 그 처녀는 그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면서 임조영도 뒤미처 화산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었다. 왕중양은 은은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무엇보다 짙어 가는 그녀의 병색이 여간 근심되지 않았었다. 하나 《구음진경》에 힘입어 독을 해독하자고 그토록 권고해도 듣지를 않고 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나 이번에는 꼭 온다고 했으니 병세가 다소 나아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임조영은 승부심이 대단한 여인이다. 왕중앙과는 이미 십여 년이나 승부를 다투어 오고 있었다. 그녀가 화산 무예 시합을 놓쳐 버릴 리는 없다. 그녀가 오기만 하면 그는 기꺼이 그녀에게 져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아니, 사정을 두지 않고 싸워도 임조영은 능히 그를 이겨 낼지도 모른다. 임조영은 그때 큰 바위에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겨 넣지 않았던가. 왕중양은 진심으로 탄복하여 그녀에게 활사인묘를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임조영은 실로 천하에 드문 기녀(奇女)였다. 그녀가 자기에게 질 리 만무였다. 자기가 임조영에게 져서 《구음진경》을 내어준 뒤 훗날 그 활사인묘를 찾아가 함께 배우자고 하면 그녀는 응낙해 줄 것인가……. 뱀 독도 말끔히 해독하고……. 그는 씁쓰레 하니 미소를 지었다. 한 순간, 산 저쪽에서 홀연 긴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실로 어마어마한 내력이었다. '저 사람이 임조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임조영이 아니라면 절대로 방심할 수 없지!' 그는 며칠 전 서독 구양봉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한 후 한층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그는 구양봉 같은 악인한테 지게 된다면 차라리 이 일전에서 《구음진경》과 함께 자신의 육신을 깨끗이 없애 버리리라고 마음을 굳혔었다.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였다. 그는 그의 아내 아형을 데리고 화산 아래에 당도했다. 그는 마침내 화산 아래에 이르러 아내에게 말했다. "아형, 당신은 무공을 닦지 못했으니 먼저 이 옥석 두 개로 귀를 틀어막아. 왕중양도 이미 화산 아래 객점에 와 묵고 있다고 했으니 내가 당도했다는 걸 그에게 소리쳐 알려야겠어." 아형은 황약사가 시키는 대로 옥석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황약사가 머리를 뒤로 제치고 소리를 지르자 화산에 빽빽히 들어찬 수목들이 일제히 으스스 울어댔다. 옥석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는 아형마저도 낯색이 창백하게 질리면서 겁이 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