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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33편 (33/70)

2026-09-30 18:32:08 조회 11
한 여인이 시답잖다는 듯 건성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치주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를 쓰고 말했다. "안 돼요.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해야 해요. 이 약속을 어기면 벼락을 맞아 죽겠다고!" 그러자 한 여인이 버럭 화를 내며 고함을 쳐댔다. "야 이것아, 네 년이 대체 뭐란 말이냐? 네 년이 뭐 진짜 황비라도 된다더냐? 진짜 황비들처럼 선반(仙班)에 서고 하늘에서 성위(星位)를 가질 수 있느냐 말이다? 네 년은 천민이야, 천민! 개똥 같은 천민 주제에 뭐가 그리 대단해서 잘난 체야, 잘난 체는?" 곁에 있던 여인도 콧김을 킁킁 내뿜으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네 년은 좀 날씬하다고 해서 뭐 아주 아름다운 줄 아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도 이전에는 이처럼 뚱뚱하지 않았어! 아주 날씬했다구! 보살님께서 뚱뚱해지라고 하시니까 미약을 먹고 이렇게 뚱뚱해진 거란 말이다. 네 년만 날씬하니까 기가 살아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거들먹거리는데,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콧대 세우고 있나 한번 두고 보자! 네 년도 우리처럼 뚱뚱보를 만들어 놓으랴, 엉? 대답을 해 봐, 대답을!" 그 여인은 이미 독약을 먹였으면서도 강박을 하느라고 치주를 윽박질렀다. 그러나 치주는 가늘기는 하나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싫어요." 그러자 그 여인은 경멸 어린 눈길로 치주를 쏘아보면서 징그럽게 웃었다. "건방진 계집! 네 년이 원하든 원치 않든 네 년은 죽어 줘야겠다. 죽더라도 우릴 원망하지는 마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뚱뚱보 여인들은 요란하게 웃어댔다. "치주야, 네 년은 이미 독약을 먹었느니라. 그건 우리 대환희 보살님께서 만드신 독특한 독약이지! 이제 곧 네 년은 몸이 졸아 붙어 죽게 돼 있어!" 치주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불현듯 살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구쳤다. 반드시 살아 남아서 황제를 만나 오해를 풀어야 한다! 그녀는 급히 품속을 더듬어 해독약을 찾았다. 그러나 해독약이 있을 리 만무였다. 약을 넣어 둔 자그마한 주머니는 이미 여인들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치주는 목멘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저님들은 참말로 절 죽일 참이군요……." 그러나 뚱뚱보 여인들은 비웃기만 하면서 서로 쳐다보며 입을 삐쭉거릴 뿐이었다. '그만두자, 다 그만둬! 난 단황을 모시면서부터 남녀간의 일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한 생, 후회할 것도 미련 둘 것도 없다. 날 죽이겠다면 죽으면 그뿐, 산다 한들 다시 폐하를 만나 볼 면목도 없는 것을…….' 치주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녀는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여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좋아요. 여러 사저님들께 감사를 드려요. 나를 이렇게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막상 치주가 이렇게 나오자 여인들은 할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자기들 손에 달갑게 죽겠다는데야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여인들은 서로 흘끔흘끔 눈치만 살필 따름이었다. 치주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다소곳이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여인들더러 나가라고 소리치고 혼자서 조용히 죽고 싶었지만 어차피 죽을 몸, 이 여인들과 이러니저러니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치주는 오한인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면서 신음을 토해냈다. 견디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여인들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이나 지켜 보았다. 일순 한 여인이 차마 더는 볼 수 없던지 다가앉으며 물었다. "치주야, 내가 좀 도와줄까?" 그 여인은 돌연 치주에 대한 연민이 일어 검으로 찌르거나 장을 내쳐 그녀의 고통을 덜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치주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비록 육체는 고통스러웠으나 마음으로는 그럴 수 없이 평온을 느끼고 있었다. 죽을 생각을 하니 세상의 모든 은원도 사라져 가는 듯했다. '이렇게 죽으면 단황 나으리께서는 내가 도망간 것으로 아실 게야. 어떤 사내와 함께……. 하나 기왕 죽을 바에야 황제께서 날 어떻게 생각하실지 맘에 두어 뭣하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법, 순순히 하늘의 뜻을 좇으면 그뿐, 그분 생각은 이제 하지 말자.' 이윽고 치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마침내 온몸이 졸아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려고 이를 앙 다물며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뚱뚱보 여인들은 치주를 지켜 보고 있자니 은근히 겁이 났다. 늘 이 약을 지니고 다녔지만 종래로 이 약에 중독되어 사람이 죽어 가는 모양은 본 적이 없는 터라 이렇듯 두 눈 뻔히 뜨고 지켜 보고 있자니 그녀들은 하나같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었다. '이 약이 이다지도 독하단 말인가?' 그때 문득 인기척이 들리며 누군가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대환희 보살이었다. 보살은 치주가 중독되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누가 저 애한테 독약을 먹였느냐? 어서 빨리 대지 못하느냐?" 대환희 보살은 눈앞의 광경에 노기충천하여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 가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여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감히 보살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꺽꺽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그녀들은 대환희 보살의 심보가 지독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독약을 먹인 사람이 발각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보전치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치주가 죽기만 하면 스스로 자결했다고 발뺌을 할 수도 있지만 죽지 않는다면 큰일이 벌어질 판이었다. 한 여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보살님, 저…… 저 앤 자, 자살하려고……." 대환희 보살은 이 여인들을 냉랭히 쏘아보며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허튼소리! 나의 이 독약은 천하에 기이한 약이다! 스스로 먹었다면 저 모양일 수 없어. 누가 독약을 먹였느냐? 어서 말해!" 여인들은 머리를 더욱 깊이 처박으며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징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참말로 누구도 한 짓이 아니란 말이지?" 대환희 보살이 그렇게 나오자 여인들은 더욱 떨어댔다. 오늘 일이 사뭇 상서롭지 못하다는 징조였다. 먼저 나섰던 여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보살님 제, 제가 먹였어요…… 요, 용서해 주세요!" "그래 네가 했느냐? 잘했구나. 네가 저 애를 죽이려 들었다면 이제 조만간 나도 죽이지 않겠느냐?" 보살의 목소리는 사뭇 온화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당황해서 더욱 허둥댔다. "아니에요. 보살님, 아니에요. 제 어찌 보살님을…….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보, 보살님께서 그렇게 뚱……." 여인은 사색이 돼서는 횡설수설 주워섬기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숨을 훅 들이켰다.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고 말았다. 대환희 보살은 벌써 그 말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보살은 대번에 낯색이 바뀌며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래, 내가 뚱뚱보란 말이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언제…… 보살님께선 뚱뚱하시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거푸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거렸다. "발칙한 것! 내가 엄연히 네 년들보다 뚱뚱한데도 뚱뚱하지 않다구? 그래 넌 두 눈 뻔히 뜨고 날 놀릴 셈이냐?" 뚱뚱보 여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아무리 변명해야 쏟아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죽이든지 살리든지 보살의 처분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넌 날 보고 뚱뚱하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게야. 날 보려무나, 조각달처럼 여위지 않았느냐?" 그러자 뚱뚱보 여인은 더욱 기겁을 했다. 얼굴에서 땀이 철철 흘러내렸다. 여인은 다급히 애원했다. "보살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 "나도 널 용서해 주고 싶구나. 하나 이미 늦은 일! 넌 그래 치주가 나한테 얼마나 쓸모가 많은지 모른단 말이더냐?" "보살님, 저 애를 대관절 어디다 쓰시려고 그러시옵니까? 제가 대신하겠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그 말에 대환희 보살은 별안간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좋은 생각이군. 그럼 한번 그 몸뚱이로 단지흥 앞에 나서 보아라! 네 년이 치주라고 하면서. 한데 그때 가서 단지흥이 네가 치주라는 걸 믿지 않는다면 넌 어떻게 할 셈이냐, 응? 어떻게 그를 믿게 하지?" 여인은 대답을 못하고 그저 넙죽 엎드릴 뿐이었다. "네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라." 보살은 단호히 내뱉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여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꺽꺽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보살님, 아이고 보살님…… 제발 절 살려 주십시오! 하, 한 번만 사, 살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정수리를 향해 팍 하고 장을 날렸다. 빠지직하니 두개골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장막 안을 뒤흔들었다. 여인들은 몸서리를 치며 더욱 고개를 처박았다. 여인은 두 눈을 홉뜨고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면서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퉤, 네 년은 살찐 돼지야! 돼지! 돼지!" 대환희 보살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발을 쾅 굴렀다. "돼지라구? 지독한 년! 끝까지 발악을 하는구나." 그리고는 보살은 다른 여인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여인들은 일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얼른 심호흡을 하고는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우린 뚱뚱한 여인을 좋아해요? 여인들은 뚱뚱한 게 좋아요. 보살님이 뚱뚱한 게 우린 보기 좋아요!" 대환희 보살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 년들도 다 죽어 마땅하다. 하나 치주만 살려내면 목숨은 구해 주지!" 하지만 그 여인들에게 그런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치주는 이미 너무나도 심하게 중독되었는지라 신선이 내려온다고 해도 살릴 수 없을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여인들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여인들에게도 장을 내치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보, 보살님, 제발……." 모두들 깜짝 놀라 머리를 돌렸다. 열두어 살 먹은 어린애같이 졸아 든 치주가 힘없이 두 눈을 치켜 뜨고는 보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냉큼 내달았다. "치주야, 네가 소생했구나! 네가 소생했어!" 대환희 보살은 탄성을 내지르며 치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원래 뚱뚱보 여인들이 당황해서 독약을 조금만 쓴 덕분에 치주는 천만 요행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그러나 살아났지만 그녀는 너무나 작아서 사뭇 기이해 보였다. 대환희 보살은 치주를 바라보다가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 하나를 붙잡았다. '보아하니 정녕 나쁘지 않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생겼어. 이 계집애가 희한한 물건이 되었으니 써먹을 데가 많겠다! 이 깜찍한 계집애를 좋아하는 사내들이 한둘이 아니겠지? 흐흐흐흐, 이 애는 이제 천하에서 가장 기이한 여인이다.' 대환희 보살은 만면에 웃음을 짓고 치주를 안아 올렸다. "꼬마야, 날 따라가자." 치주는 예까지 말하고는 눈물을 담뿍 쏟아 냈다. 그녀는 한동안 어깨를 들먹이더니 이내 목멘 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두들 백타산장의 장주님은 영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같이 조그만 계집을 어디다 쓰시겠어요. 전 정말 하잘것없는 계집에 불과하옵니다……. 제발 저를 단황 나으리와 만나게만 해 주십시오. 진정코 부탁드리옵니다. 전 그분한테 꼭 말씀드려야 해요, 전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넌 아직도 단지흥을 마음에 두고 있구나?" 구양봉은 치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치주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하소연을 했다. "장주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이런 꼴을 해 가지고 어찌 단황 나으리를 모실 꿈이라도 꾸겠나요? 다만 단황 나으리께서 제 마음만 알아주신다면 전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구양봉은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난 백타산장의 장주이니 부귀를 누리고 있다 할 수도 있다. 백타산장의 천지인 삼층집에는 미인들이 수두룩하고 내 명이라면 누구든 죽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내가 없을 때 그 여인들도 이 꼬마 여인이 단지흥을 생각하듯 나를 생각할까? 아마 그런 여인은 하나도 없을 게다…….' "얘야, 세상엔 사내들이 얼마든지 있다. 단지흥이 널 그렇게 잘 대해 주었다 하나 나도 그 사람 못지않게 널 살갑게 대해 줄 수 있어. 그러니 날 달리 대하지 말아라." 치주는 구양봉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장주님, 불쌍히 여겨 주시와요." 그러나 구양봉은 연해 음심이 꿈틀거렸다. 모용쟁과 그 낡은 절에서 영별한 뒤로 그는 더는 여인에게 진정으로 정을 두지 않았었다. 그는 치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이전에 아내, 아니 형수 한 분이 계셨는데……." 치주는 당황한 눈길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구양봉이 형수를 아내로 삼기까지 허다한 곡절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가 음심이 동해 저리도 횡설수설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구양봉이 그 사연을 단 몇 마디로 다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죽었어. 네 마음이 움직인다면 날 따라와. 난 너를 잘 대해 줄 거야." 치주는 구양봉 같은 사람은 일대 무학종사(武學宗師)로서 일 처리가 보통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구양봉은 남녀간에 쉽게 할 수 없는 이런 말을 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불쑥 꺼냈다. 그러나 그만큼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치주가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터였다. '보아하니 이 사내도 음란한 사람인 것 같구나. 저 사람은 나를 차지하고 노리개로 삼고 싶어한다. 만일 내가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대로할 거야.' 하지만 치주는 이젠 죽고 사는 건 대수롭지 않았다. 그녀는 구양봉의 위풍에 눌리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저는 이미 단황 나으리한테 속한 몸이옵니다. 장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러나 구양봉은 그런 말에 머리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껄껄 웃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네가 단지흥의 사람이라구? 좋아, 난 단지흥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그 사람을 죽여 버릴 게야. 너는 나와 함께 화산에 가자. 단지흥이 내 손에 죽는 걸 너한테 직접 보여 주리라!" 치주는 그 말이 차마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흥의 일양지공이 천하 무림에서 유일무이한 초수라고 알고 있었다. 한데 구양봉이 무슨 수로 단지흥을 죽이겠다고 큰소리를 친단 말인가. 구양봉은 치주의 속심을 눈치채고는 코방귀를 뀌었다. "흥, 믿지 않는군. 너네 단지흥이 그렇게 대단하냐? 좋다. 내가 너한테 내 재간을 보여 주리라."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좌정하고 앉아 꼼짝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그의 배가 불룩하니 솟아오르며 단전에서 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다 드러나 보였다. 치주는 그가 그저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구양봉이 갑자기 나직이 말했다. "좀 보라구!" 구양봉은 즉시 두 손을 위로 쳐들었다. 그러자 장막 천장이 불룩하니 바깥쪽으로 밀려났다. 이 장막은 원래 질긴 돛 천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구양봉의 장풍에 밀려 종이짝같이 얇아지며 마치 바람에 불린 돛 같은 형상이 되었다. 구양봉은 손만 쓸 뿐 몸을 까딱하지도 않고 오로지 기만 가지고 장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장력은 실로 대단했다. 치주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참말…… 참말로 단황 나으리를…… 죽이실 건가요?" 구양봉은 그녀가 대경실색하는 것을 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난 애시당초 너와 단지흥 간에 이런 인연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이제 오늘 알게 됐으니 잘됐다. 네가 날 따라가고 싶지 않으면 그만둬. 난 화산에 가서 대리에서 온 그 단씨란 자를 죽여 천하에 더는 무공을 갖춘 황제가 없도록 할 셈이니까!" 구양봉은 치주가 질겁을 할수록 한층 더 큰소리를 쳤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그가 그리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치주는 강호의 내막을 전혀 모르는지라 그 말을 어김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는 급히 그의 옷자락을 틀어쥐며 매달렸다. "장주님, 단황 나으리를 해치지 마세요. 당신은 왜 하필 그를 해치려 하시나요, 네? 왜 하필이면 그를……." "하면 넌 나를 따라갈 테냐?" 구양봉은 징그럽게 웃으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지주는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돼서는 정신없이 울먹였다. "따르지요, 따르겠어요! 제가 장주님 말만 들으면 되죠? 그럼 황제 폐하를 해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제야 구양봉은 속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내 백타산장에는 여인들이 허다하고 그 여인들은 저마다 많은 재간을 갖고 있어. 하지만 너처럼 아름답고 깜찍한 여인은 참말로 천하에도 없을 거다. 네가 내 시중을 잘 들기만 하면 난 너를 천(天)자 방의 첫번째 부인으로 삼겠다." 워낙 백타산장에 있는 천지인 삼층집에는 숱한 미인들이 있었는데 인(人)자 방에는 인간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세의 여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인들은 지(地)자 방에 있는 여인들보다는 덜 요염했다. 가장 훌륭한 미녀는 천자 방에 있는 미인들이었는데 그 여인들은 모두가 경국지색의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구양봉은 치주를 그 천자 방에, 그것도 첫째 부인으로 두겠다는 것이었다. 치주는 마음속으로 피울음을 토해냈다. '황제 폐하, 전 또 능욕당하는 걸 피할 수 없게 됐어요. 전 워낙 한마음으로 폐하만을 섬기려고 했지만 저의 운명은 그것을 허락치 않는군요. 이제 와서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터……. 전 폐하께서 남의 해를 받지 않게만 된다면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아요.' 밤이 꽤 깊어 있었다. 이따금씩 밤새 울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사내와 계집이 한데 엉겨 수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었다. 구양봉이 옷을 벗으면서 치주에게 말했다. "넌 성숙한 여인이다. 그러니 내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치주는 천천히 일어나 구양봉의 목에 살며시 매달렸다. 치주의 몸뚱이는 너무나 깜찍하여 쥐면 꺼질 것만 같았다. 무수한 여인들을 숱하게 겪은 구양봉이지만 치주처럼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은 진정 처음이었다. "좋아, 좋다니까." 구양봉은 치주를 안고 적이 흡족하여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리고는 멀찌가니 떨어져 있는 등잔불을 대번에 훅 불어 껐다. 그는 어둠 속에서 치주를 힘껏 껴안았다. 한 순간 여인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는 듯한 처참한 소리였다. 뚱뚱보 여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몸을 뒤척였다. 처음에는 그저 누군가 죽어 가는가 보다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처절하게 울려 퍼지자 너나없이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벌떡 일어났다. 처음에는 고소하게 여겼으나 계속 듣고 있노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사람, 대환희 보살만이 아직도 단잠에 빠져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여인이 대환희 보살의 장막으로 찾아 들어 보살을 깨웠다. "보살님, 보살님!" 연해 불러도 일어날 기미가 없자 여인은 보살의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윽고 보살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 "치…… 치주, 치주가 죽어 가고 있어요. 그 애가 목숨이 꺼져 간단 말이에요."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시뜻해서 듣고 있더니 단박에 성을 버럭 냈다. "저 애가 한창 좋아서 그러는 걸 모르느냐? 저 앤 좋아서 저러는 것이니 작작 상관하란 말이야!" 그 순간에도 여인의 비명 소리는 계속 들려 오고 있었다. 여인은 그렇게 온밤을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화산의 나무 숲이 고요히 설렌다. 비명 소리는 점점 미약해지다가 드디어는 뚝 그치고 말았다. 등아는 황홀한 표정으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전 이 세상의 사내란 사내들은 몽땅 죽여 버리고 싶어요. 사내들이란 모두 여인을 지배하려고 하거든요. 그들은 여인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며 덮치려고만 하는데, 그나마도 한두 여인으로 족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얻어 들이려 한단 말이에요. 그런 사내들은 정말 사정을 두지 않고 죽여 버리고 싶어요. 사랑이오? 진심이오? 사내들은 그런 건 몰라요. 그런 걸 아는 사내란 하나도 없어요. 연약한 여인의 심사는 조금만치도 생각지 않아요. 그런 사내들은 이 세상에서 하 나도 남기지 않고 내 손으로 깡그리 죽일 작정이에요. 난 나의 향녀들더러 이런 사내들을 데려다 하나하나 시중들게 해서는 사내들이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해 취생몽사하게 만들겠어요. 이전에도 숱한 사내들이 향녀들의 품에서 저 세상으로 갔지요. 어떤 사내들은 원한을 품고, 어떤 사내들은 여인의 품에 안겨 비웃으면서 죽어 갔어요. 그자들을 보면서 전 정말 다짐했어요, 이 세상에서 그런 사내들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겠다고!" 단지흥은 처연히 등아를 바라보았다.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이 여인……. 그는 그녀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전 세상 사내들의 기를 다 빼놓고 그들을 색에 굶주린 바보로 만들어 죽여 버린 후 십팔층 지옥에 처넣겠어요. 당신들이 화산에서 무예 시합을 한다지만 난 그것을 여지없이 망쳐 놓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