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32편 (32/70)
그때 불현듯 구양봉은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쌍장을 내밀었다. "중양 진인, 조심하게!" 그 소리와 동시에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울 듯한 대력이 왕중양에게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노독물 구독사옹 신독행의 합마공이었다. 왕중양이 만일 사전에 방비하지 않았더라면 기필코 그는 크게 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구양봉의 손가락이 움직거릴 때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마음을 도사렸다. 그는 구양봉의 대력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속으로 꿈틀 놀랐다. '참말로 천하에 드문 재간이다. 과연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사람이 나를 기습하는 데 무예 초수를 쓰지 않고 내력을 쓰는 건 무엇 때문일까?' 워낙 구양봉은 내력을 다 기울여 단번에 왕중양에게 내상을 입히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손을 쓸 때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간 의구심이 일었었다. 행여나 자신의 공력이 왕중양보다 못할까 근심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힘을 다 내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왕중양에게 막아낼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었던 것이다. 왕중양은 구양봉이 장을 내치는 것과 동시에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며 선천공으로 장을 내밀었다. 역시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울 듯한 대력이 파도처럼 구양봉 쪽으로 밀려갔다. 두 사람의 장풍이 맞부딪치며 꽝 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 다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왕중양은 얼른 몸을 날려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져 내렸는데 원래의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구양봉은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뒤로 더 밀려났다. 구양봉은 물러나 면서 얼핏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모두들 자네를 대독물이라 하더군. 난 그걸 믿지 않았었는데 오늘에서야 믿게 됐군." 왕중양이 의연하게 한마디했다. 그에게는 실로 대가이 기백과 풍모가 역력히 배어 있었다. 기습을 당하고도 저토록 태연자약하지 않은가? 구양봉은 속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난 북방 유운장에서 나온 뒤 아직까지 진짜 적수를 만나 보지 못했는데 오늘 중양 진인을 보니 실로 어려운 적수로구나.' 구양봉은 겁이 났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난 천생 악인이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왕중양은 기억 속의 유운장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 유운장에서는 사람마다 악을 영광으로 알고 있으며, 어느 날 거기에 일심으로 천하 악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보니 구양봉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구앙봉, 《구음진경》은 꿈도 꾸지 말게. 자네가 그걸 얻으려 해도 내가 내주지 않을 거야. 모름지기 천하의 기서란 덕이 있는 자가 갖고 있어야만 해. 자네가 무슨 낯으로 그런 기서를 얻겠다고 허튼 궁리를 하는 겐가?" 그러자 구양봉은 앙천대소를 하고는 냉랭히 쏘아보았다. "무슨 낯이냐구? 난 천하에 드문 귀재다. 난 중원의 모든 무림 고수들을 다 이길 수 있어. 그러니 《구음진경》은 의당 내 거야!" 왕중양은 하찮다는 듯이 코방귀를 뀌었다. 구양봉은 그를 노려 보면서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이자와 싸워서 좋을 게 없어. 방금 보니 내력이 나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다. 이런 자와 싸워 봤자 재미없는 일이야. 일단 양보하고 슬쩍 물러가자. 화산 꼭대기에서 다시 겨루는 거야. 일단 내력의 정도를 알았으니 단단히 방비를 해야지!' "중양 진인, 내가 지금 온 건 그대가 남을 속이기나 하는 쥐새끼같은 놈이 아닌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일단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난 이만 물러가겠어!" 구양봉은 훌쩍 내달아 문 밖으로 뻗어 나가더니 순식간에 몸을 솟구쳐 단번에 백 보쯤 물러갔다. 그는 귀가 쩌렁쩌렁하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왕중양, 그 《구음진경》을 잘 읽어 두라구. 한 달쯤 후에 내 가지러 올 테니!"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구양봉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구양봉은 왕중양의 거처를 나와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다. 문득 먼 곳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ㄴ?" 구양봉은 내심 경계심을 가지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대답은 없고 웃음 소리만 요란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사람 그림자가 하나 끄물거리더니 구양봉을 향해 내처 걸어왔다. 구양봉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간을 찌푸리며 잠자코 쳐다보았다. 그 그림자는 의외로 여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뚱뚱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구양봉 앞에 와 서더니 대뜸 히히덕거리며 물었다. "듣자니 당신은 북방 유운장 사람이라면서요?" 구양봉은 자기가 북방 유운장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지 이미 오래였던지라 그 물음에 코대답도 안 했다. 그는 그 뚱뚱한 여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추물도 그런 추물은 없었다. "이봐, 그쪽은 운남 사람인가 아니면 양광(兩廣) 사람인가?" 이 여인이 운남 사람이라면 필시 대환희 보살 수하일 것이고 양광 사람이라면 양광 방건묘( 묘) 사람일 터였다. "참말로 구양봉 어르신답군요. 당신은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시는군요. 저는 대환희 보살님 수하예요. 보살님께서 당신을 청하십니다. 미인을 하나 내드리겠다고요. 어떻게, 가시겠습니까?" 구양봉은 영 시답지 않은 눈길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모양새가 아주 가소로웠다. 엄청나게 큰 적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적삼은 너무도 커서 마치 커다란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얼굴에 분과 연지를 가득 처발랐으며 걸음걸이도 마치 그 옛날 미녀 서시(西施) 흉내를 내기 좋아했다는 추녀 동시(東施)를 연상시켰다. '미인들이라면 나의 백타산장에도 얼마든지 있다. 내가 어떤 미인인들 만나 보지 못했겠는가? 저희들한테만 미인이 있는 것처럼 말하니 실로 꼴같잖군.' 구양봉은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여인이 못난 주제에 교태를 부리는 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내가 화산에 온 건 그 기서를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왕중양의 무예가 대단하니 그를 이긴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만일 대환희 보살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잘된 게지.' "좋아, 내 한번 가 보지. 대환희 보살이 나한테 어떤 미인을 주나 어디 선이나 보자." 그러자 뚱뚱보 여인은 읍을 하고는 앞장서 길을 잡았다. 구양봉은 그 여인을 따라 한 수림에 당도했다. 수림은 화산의 음지쪽에 있었는데 거기에는 몽고포 같은 장막들이 줄지어 쳐져 있었다. '대환희 보살이 이렇듯 수하들을 이끌고 와 있는 것을 보면 그녀도 《구음진경》에 뜻을 두고 있다는 겐가? 하나 제까짓 것이 그따위 재간으로 《구음진경》을 차지해 보려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구양봉은 실로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그를 대환희 보살에게로 데려갔다. 보살은 장막 안에 앉아 있었다. 구양봉은 장막 안을 쓱 살펴보았다. 듣기에는 화장을 한 사내 녀석들이 이 여인을 시중들고 있다 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분이나 연지를 바른 사내 녀석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뚱뚱한 여인들만 진을 치고 있었다. "이곳은 아주 조용하구먼. 안 그러오?" 구양봉이 대뜸 말을 건넸다. 대환희 보살은 대번에 구양봉의 의중을 짐작해 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그런 사내도 여인도 아닌 자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내 미리 모두 물렸지요. 그래야 당신이 비웃지 않을 것 아니겠소?" "사람을 보내 날 찾은 이유가 그쪽 시중을 들라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또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녀가 웃을 때는 어김없이 온몸의 살집이 다 흔들거렸다. "백타산군,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게요? 내가 무슨 담력으로 감히 당신더러 시중을 들라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럼 무슨 일로 날 불렀나? 어서 말해!" "밤이 긴데 어서 자리에 앉기부터 하세요. 우리 술잔이나 기울이면서 차차 미인들을 구경합시다. 그러면서 대사도 상론하구." "보살이 말하는 미인들이란 모두 저런 뚱뚱보 아닌가?" 구양봉은 사위를 둘러보면서 대환희 보살의 제자들을 가리켰다. 그는 이런 여인들을 외눈으로도 보지 않았다. 이곳엔 온통 피둥피둥한 고깃덩어리들만 있을 뿐 미인이라고는 보고 죽자 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넘겨짚으시기도 잘하시네요! 나한테 제자가 하나 있는데 그 앤 대단한 미인이지요. 심지어 대리의 황제 폐하마저도 그 애에게 빠져 넋을 잃었다오!" 대환희 보살은 자못 거들먹거리더니 손뼉을 탁탁 두 번 쳤다. 그러자 그녀 뒤쪽에서 한 여인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그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인의 얼굴은 절반쯤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도 미색이 빼어나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어찌나 작고 깜찍하게 생겼는지 마치 상아를 조각하여 만든 인형 같았다. 구양봉은 침을 꿀꺽 삼키며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 여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용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키며 몸매가 모두 균형이 잡혀 있었다. 얼핏 보면 채 자라지 않은 어린 애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여인의 성숙미가 물씬 풍겼다. 아니 성숙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사를 아주 많이 겪은 여인 같았다. 구양봉은 정신나간 사람마냥 그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대환희 보살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구양봉이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한 순간 깔깔 웃어댔다. "구양봉 장주님, 이 여인이 어떻습니까? 참으로 특별난 여인 아니에요? 어떤 여인은 여위고 어떤 여인은 뚱뚱하고 어떤 여인은 얼굴만 보기 좋고 어떤 여인은 몸매만 쭉 빠졌지만 이 앨 한번 보세요. 당신은 종래로 이 같은 미인은 본 적이 없을 거예요. 언뜻 보면 어린애 같지만 잘 익은 복숭아처럼 씹으면 단물이 나온단 말이오, 으하하하……." 구양봉은 세상이란 실로 기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이 여인은 원래부터 이렇게 작지 않았을 게다. 누가 무슨 약을 먹여 이렇게 만들었음에 틀림없어.' 과연 구양봉의 눈썰미는 속일 수 없었다. 이 여인은 기실 치주였다. 뚱뚱보 여인들이 강제로 독약을 먹여 예기치 않게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 것이었다. 치주는 구양봉을 흘끔 보고 나서 더는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날 더는 사내들과 한곳에 두지 말았으면…… 아아, 정말 그랬으면. 왜 갈수록 망종들과 만나게 되는 걸까? 첫 사람만 마음씨 좋은 단황 나으리였을 뿐 그 다음에는 중에게……. 오늘 이 사람은 더욱 흉악해 보이는구나. 저 눈, 저 눈은 꼭 독수리나 호랑이 눈같고 정말로 거칠게 생겼어. 참말로 저런 거친 사람은 생전 처음 보아.' "대환회 보살, 지금 나더러 저 여인을 그저 보기만 하라는 겐가?" 구양봉은 온몸이 근질근질해져서 역정 내듯 큰소리로 다그쳤다. "물론 일단은 보기만 해야지요. 우리가 서로 약정을 하기 전에는!" 보살은 마냥 느물거렸다. "일단 내가 좀 만져 봐야겠다. 난 요런 여인은 보다 보다 처음이거든!" "그저 만져 볼 생각이라면 맘대로 하시구려." 대환희 보살의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구양봉은 냅다 달려들어 덥석 치주의 허리를 껴안았다. 나긋나긋하니 감겨 오는 맛이 정말 황홀했다. "훌륭하군. 과연 훌륭해. 내 백타산장에도 숱한 미인들이 있으나 이 여인만한 보옥은 없다……." 그는 치주의 몸을 구석구석 만져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대환희 보살, 우선 내게 장막부터 하나 내주게. 그 무슨 의논같은 건 내일 하고." 제17장 음녀들의 궤계 구양봉은 품에 치주를 안고 있으니 벌써부터 황홀경에 빠져 들어 갔다. '내가 백타산장에서 장주 노릇을 해 온 지 이미 오래인데 어디 한 번이나 이런 재미를 본 적이 있었던가? 중원에 오니 이거 일거양득이로구먼. 천하의 보배를 빼앗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렇게 미인도 얻게 되니, 흐흐흐…….' 그는 자신의 백타산장을 생각해 보았다. 백타산장에는 천지인(天地人) 삼층집이 있고 저마다 미색이 빼어난 여인들이 그 집 가득 살고 있다. 하지만 구양봉은 백타산장을 떠나온 지 오래인데다 중원에 온 후로는 여인과 즐기는 것도 피했었다. 더욱이 그 여인이 죽은 이후로는……. 그러나 일단 치주를 품에 안자 그간 잊고 지냈던 남녀간의 그 일이 미쳐 버릴 듯이 그의 온몸을 사로잡아 그는 마치 야수가 포획물을 삼켜 버리듯이 치주에게 달라붙었다. 대환희 보살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뚱뚱보 여인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은 지체 않고 구양봉과 치주를 한 장막으로 데려갔다. 구양봉은 치주와 단둘이서만 장막 안으로 들었다. 그는 치주를 덥석 안아다가 짐승 가죽 위에 내려놓고 징그럽게 웃음을 흘리며 치주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몇 살인고?" 그러더니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몸을 마구 주무르면서 황홀경에 빠져 소리를 질러댔다. "훌륭하군, 훌륭해. 참말 훌륭해." 그는 눈빛마저 희멀게져서는 조바심이 나서 헛손질을 해 가며 그녀의 옷을 벗겼다. 드디어 눈부시도록 매혹적인 나체가 다 드러났다. 그는 음미하듯 자세히 그녀의 나체를 바라보다가는 봉곳 솟아 오른 젖무덤을 주무르면서 연신 소라를 내질렀다. "훌륭하군, 훌륭해. 참말 얻기 힘든 보배야." 구양봉은 침을 질질 흘리며 치주한테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는 성마르게 그 일을 치르려고 허둥대다가 언뜻 치주의 볼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다. 구양봉은 한참 몸이 달아 있는데 여인의 눈물을 대하자 버럭 성이 나서 소리쳤다. "사내와 처음 자 보나?" 그 소리에 치주는 그만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지며 눈물을 함씬 쏟아 냈다. "전 워낙 이렇게 작은 여인이 아니었어요. 전 본래 보살님 수하 여인이었는데 용모가 괜찮다 하여 보살님이 나를 운남 대리의 황궁에 궁녀로 들여 보냈지요. 황제를 유혹하라고……. 다행히 단황 나으리는 저에게 반해 저를 총애하게 되었지요. 얼마간 재미있는 나날을 보냈으나 일이 잘못되어 그만 납치를 당하고 이후 또다시 보살님 신변으로 끌려 왔어요. 그후부터 저는…… 저는……." 치주는 한번 입을 떼자 그간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줄줄이 엮어져 나왔다. 그녀는 자기와 일속 사이에 있었던 일까지 이야기하려 했으나 부끄러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말았다. 이 여인은 일속에게 몸을 더럽힌 후로는 걷잡을 수 없이 허탈해지고 자기 운명이 비관되어 마음을 앓았으며 그럴수록 더 더욱 일심으로 단지흥을 그리게 되었다. '황제 폐하는 내가 대환희 보살님 수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계셔. 그분은 아마도 내가 도망하여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줄로 아실 거야, 내가 이처럼 억지로 끌려 와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을 그분께서 어찌 알 수 있으리? 그분은 나를 음란한 여인으로 여기실지도 몰라. 내가 그분을 떠나 딴 사내의 품으로 도망쳤다고. 아, 그분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내가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총애를 받고 싶어한다는 걸 알려 드릴 수만 있 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단지흥을 생각하다 보니 치주는 식음마저 전폐하게 되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치주가 병에 걸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언뜻 혼자 중얼거리는 걸 들으니 치주는 줄곧 단지흥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뚱뚱보 여인들은 치주를 비웃으면서 망령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치주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얘, 너는 황비이니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겠지? 귀하신 몸이 어찌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겠니?" "황비님, 제가 부채를 부쳐 드릴깝쇼!" 여인들은 모두 치주를 조소했다. 아무리 그래도 치주는 귓전으로 흘려 버리며 일심으로 단지흥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비웃고 놀려대고 쥐고 흔들어도 치주가 꿈쩍도 하지 않자 뚱뚱보 여인들은 종당에는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호통을 내질렀다. "네 년은 이제 황비가 아니야! 이젠 자기가 황비라는 허튼 생각은 버리란 말야. 네 황제 폐한지 뭔지는 조만간 대환희 보살님 손에 죽고 말 거야!" 치주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분을 죽여선 안 돼요! 그분을 죽여선 안 된단 말이에요!" 뚱뚱보 여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시샘이 나서 치주가 얄밉기 그지없던 참인데 그녀가 단지흥을 감싸고 나서자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치주를 밀어 넘어뜨려 놓고는 깔고 앉아 마구 짓눌러댔다. 치주는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이것들 봐요, 제발 좀 비켜요! 깔려 죽어요. 깔려 죽는단 말예요!" "그래, 황제 밑에 깔린 건 견딜 수 있고 우리한테 깔리면 안 된단 말이냐? 왜 이렇게 고함을 지르고 이 난리야, 난리가? 입다물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치주가 소리를 지를수록 여인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댔다. 치주는 말을 해 봤자 통할 사람들이 아니란 걸 새삼 깨닫고는 다만 가쁜 숨을 몰아 쉴 뿐이었다. 여인들은 이 기회에 그때껏 참았던 분풀이를 하느라고 한결같이 미친년처럼 날뛰었다. 결국 치주는 견디다 못해 그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렇게 되자 뚱뚱보 여인들은 파랗게 질려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아직도 치주를 보배로 여기고 있는데, 그런 차에 자기들이 저지른 짓을 알게 되면 보살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여인들은 겁먹은 얼굴로 서로 마주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한 여인이 나섰다. "내 보기엔 저 애를 아예 죽여 버려야 해. 그래야 절대 우릴 일러바치지 못하지." 그러자 다른 여인들도 대번에 얼굴이 환해지며 쌍수를 들고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 수밖에 없어? 보살님한테 들키기만 하면 우린 살아남지 못해." "아니, 아니야. 내 보기엔 이 애한테 미약을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애가 우리보다 더 뚱뚱해져 버리면 보살님도 귀히 여기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만 되면 황제도 더는 이 애를 거들떠보지 않을 거 아니니? 그 뚱뚱한 꼴을 보기만 해도 왈칵 구역질을 할거란 말야. 그렇게 되면 꿩 먹고 알 먹고 아니니? 저것이 매우 상심하게 될 테니 이 얼마나 묘안이냔 말야?" 그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게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다른 한 여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셋이 첫 며칠 동안 미약을 먹였었어. 그런데……." 다른 여인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지라 깜짝 놀랐다. "미약을 먹였다구? 그럴 리가. 미약을 먹였는데 왜 몸매가 더 날씬해졌지?" 세 여인은 서로 흘금흘금 바라보았다. 그들 세 여인은 치주가 너무나 얄미워 견디다 못해 미약을 먹였던 것인데 몸이 뚱뚱해지기는 커녕 되레 더욱 날씬해지는 게 아니겠는가. 세 여인 중 하나가 기가 죽어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왜 그런지 우리도 모르겠어. 너무나 이상해. 보통 먹이는 대로 똑같이 했는데……. 그러니 내 보기엔 독약을 먹여 죽여 버리는 게 제일 묘수야. 만일 보살님께서 캐물으시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 아니야? 이 년이 자나깨나 단지흥 생각만 하고 있더라고 아뢰면 보살님도 우릴 의심하지 않을 거야." 여인들은 잠시 잠잠히 말이 없더니 미약이 효과가 없다면 그게 더 낫겠다고 결론을 냈다. 한 여인이 부스럭거리며 독약을 꺼냈다. 여인들은 누구나 비상시를 대비해 이런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이것으로 사람을 해친 여인도 있었다. 바로 그 독약을 써야할 때가 온 것이었다. 한 여인이 치주를 안고 다른 한 여인이 독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치주는 가물가물 정신이 돌아오다가 누군가 목에다 무엇을 쏟아 붓는 것을 어슴푸레 느끼면서 그대로 받아 먹었다. 이 독약은 일단 먹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조그맣게 졸아 붙다가 급기야는 뼈만 남고 그마저도 아예 흔적조차 없어지는 열성(熱性) 독약이었다. 한 순간 치주가 힘없이 눈꺼풀을 치켜 올리고 뚱뚱보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울먹였다. "사저(師姐)님들, 절 양해해 줘요. 전 결코 당신들과 맞서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전 그저 한 분만 생각하다 보니……." "보살님께선 우리더러 제자가 되면 다시는 딴 사내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하셨다. 넌 우리 문파의 금기를 어겼으니 죽어 마땅해!" 한 여인이 소리쳤다. 치주는 희멀건한 눈으로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의 눈에선 한결같이 살기가 번뜩였다. '그렇구나. 이 여인들은 날 놓아줄 생각이 없는 거다. 내가 아무리 말해 봤자 이 여인들은 들으려 하지 않을 거다. 이 여인들은 종래로 한 사내를 사랑해 본 적이 없으니 사내한테 마음을 둔 여인의 애타는 심정을 결코 헤아릴 수 없겠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인들에게 한 사내를 향한 이 절절한 사랑을 토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 여인들은 나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치주는 마음속으로 장탄식을 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요. 차라리 날 죽여 주세요! 다만 단황 나으리를 만나게 되거든 한마디만 전해 줘요. 이 치주가 황궁을 떠난 건 본의가 아니었다고." "좋아, 그 정도야 뭐 우리가 그 사람한테 알려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