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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31편 (31/70)

2026-09-30 18:32:08 조회 11
등아는 대번에 싸늘히 낯색을 굳혔다. "당신은 후회할 거예요." 이제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곧 해골로 만들어 놓을 게 뻔하다. 등아가 사내들을 저처럼 가혹하게 해골로 만들어 놓은 걸 보면 그녀는 그녀 말마따나 사내들에게 크나큰 원한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단지흥은 마음이 몹시 착잡해졌다. 일단 이들을 제압하려고 들면야 식은죽 먹기지만 그는 그녀들을 어떻게든 구원해 주고 싶어서 잠시 관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 사람을 채찍으로 후려갈겨라!" 등아가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은 무척 기뻐하며 얼른 천조편을 집어 들고 소리쳤다. "소리는 마음껏 질러도 돼요. 그런 소린 참으로 듣기 좋으니까. 일부러 이를 악물고 참지 마세요. 당신이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않을수록 전 더 얻어맞고 싶어 그러는 걸로 여기고 더욱 호되게 굴겠어요." 여인의 낯빛엔 그 어떤 흉포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단지흥은 그저 천연덕스럽게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조편을 본 순간, 그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 채찍은 끝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그 가닥들은 모두 뱀의 힘줄로서 매우 가늘고 엄청나게 질겨 보였다. 하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이곳은 아주 훌륭하군." "무엇이 훌륭하다는 거예요?" "그 채찍 말이오! 난 황제이면서도 그런 채찍은 없다오." 등아는 단지흥이 끝끝내 빈정거리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때려! 난 혓바닥 놀리기 좋아하는 놈을 가장 미워해!" 철썩철썩,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채찍은 몸에 감기듯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 순간 살갗이 찢기는 아픔이 온몸으로 확 퍼져 나갔다. "아이쿠!" 단지흥은 소리를 내지르며 털버덕 옆으로 쓰러졌다. 보아하니 여인은 채찍질에 이골이 난 듯싶었다. 여인은 단지흥이 몸을 비트는 대로 쫓아다니며 연거푸 몇 십 번이나 채찍을 휘둘렀다. 단지흥의 몸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채찍은 그의 가슴 속에 들어앉은 불집을 마구 쑤셔 놓는 듯싶었다. 그의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흘렀다. 한 순간 채찍 소리도 사라지고 여인의 발자국 소리도 없어졌다. 채찍질이 멎었다. 단지흥은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등아가 천천히 다가와 한 손으로 그의 턱을 쳐들었다. "황제 폐하, 시원하시겠소? 여인을 가지고 놀 때처럼 기분이 좋으시죠?" 그녀는 마치 가학의 쾌감을 맛보는 듯했다. 단지흥은 눈을 감았다. 한평생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그는 점점 노기가 끓어올라 눈을 번쩍 뜨고 등아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여인의 눈에서는 복수의 기쁨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저 여인들은 사내들에게 많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게 뭐 대순가? 난 황제가 아닌가? 하늘이 나를 황제로 이 지상에 내려 줄 때 남한테 매를 맞으라는 뜻은 결코 없었을 게다. 일평생 누가 감히 나를 때리겠는가? 나를 때려 저 여인들이 가슴에 맺힌 울분이 풀린다면 맞아 주자, 맞아 줘! 이 향녀 덕에 매를 맞는 게 어떤 것인가도 알게 된 셈이니…….' 단지흥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등아, 때리고 싶거든 때리시오. 난 염두에도 두지 말고 때려요!" 그러자 등아는 질겁을 하며 발딱 일어섰다. "과연 대단하군요. 바보 계집들이 당신을 좋아할 만도 해요." 향녀는 짓씹듯이 한마디 내뱉더니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틀어쥐고는 그를 질질 끌고 통로로 나갔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이쪽저쪽으로 끌고 다녔다. 그녀의 손 힘은 엄청나게 셌다. 등아에게는 단지흥이 한 구의 해골로만 보이는 듯싶었다. "자, 저걸 보시오, 황제! 저 놈은 중인데 힘이 좋았지. 난 이처럼 힘이 좋은 사내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했어요. 이 사내는 이레 동안이나 밤낮을 쉬지 않고 우리 애들을 가지고 놀았어요. 이젠 만족하냐고 물으니 이 사낸 너털웃음을 웃으며 '난 이 짓엔 종래로 만족을 몰라' 하더란 말이에요. 그래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겠소? 먼저 가위로 그 놈의 그것을 썩둑 잘라 냈지요. 그러니 놈은 실로 사자같이 울부짖는데, 으하하하……." 등아는 완전히 실성한 사람 같았다. 그녀는 단지흥을 한쪽에다 팽개쳐 놓고는 도통 그칠 줄 모르고 숨을 헐떡여 가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저기, 저것도 좀 보시오! 저 물건은 여윈 사내였는데 도사였지요. 이자는 처음에는 여인들을 건드리지도 않더군요. 그저 품에 안기게 놔둘 따름이었지요. 내가 '유하혜(柳下惠)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하고 말하자…… 참, 폐하는 황제이시니 유하혜를 모를 리 없겠죠? 색을 멀리한 것으로 이름난 노나라 때 귀족말이에요……. 어쨌든 놈은 냉랭한 기색으로 '유하혜는 참말로 여인을 갖고 놀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난 아냐……' 하는 게 아니겠어요? 결국 놈은 자기가 진짜 사내라는 걸 내게 보여 주더군요. 저 놈은 여위었어도 힘만은 대단했어요." 단지흥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안 했다. "난 저 놈을 꼭 껴안고 사흘 동안이나 주물러댔지요. 드디어는 못 참고 나동그라지고 말더군요." 등아는 그때의 그 감미로운 순간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단지흥은 이 여인이 왜 이런 악몽에 빠져 있는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탄식을 하며 한마디 꺼내 놓았다. "기실 그대들은 정말 이럴 필요가 없소. 세상 사내들이란 진심으로 대하기만 하면 여인을 저버리지 않아!" 그러자 등아는 쏜살같이 단지흥 앞으로 달려가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당신은 매일 황궁에서 여인들을 당신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을 테죠? 여인들은 한마디도 거절할 수 없었을 테고요? 여인들이 맘속으로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겠죠? 당신은 여인을 실컷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마치 고고한 군자마냥 꾸며 대고 슬그머니 피해 나왔을 거예요. 여인들의 심정을 헤아리지도 않고. 그러니 여인들이 얼마나 서럽겠나요?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살면서 여인들이 왜 당신들의 노리개가 돼야 한 단 말이에요? 듣자 하니 운남에는 대환희 보살이란 여자가 있다던데 그 여자가 사내를 가지고 노는 데 아주 재간이 있다면서요? 그 여자가 참말로 잘하는 게지요. 세상 사내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마음대로 주무른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안 그래요?" 단지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에게는 참된 사랑이 있소. 남녀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그댄 정녕 모른단 말이오?" "사랑이니 뭐니 하는 그따위 말은 하지도 말아요. 구역질 나요. 세상 사내들에게 사랑이란 한 순간의 불장난에 불과해요." 단지흥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참으로 난처했다. 도저히 이 향녀 등아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연민의 정이 치밀어 처연히 등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등아가 단지흥의 손을 잡아 자기의 젖가슴 쪽에 갖다 대고 문지르더니 갈라진 소리로 외쳤다. "날 가지고 노세요. 날 가지고 놀란 말이에요! 당신은 알고나 있나요? 사내들이란 종당에는 바로 이 젖가슴을 만지고 난 후부터는 이곳 여인을 가지고 놀려는 심사마저 없어졌다는 걸……. 얼굴에 피어 오르던 음탕한 기운이 대번에 가시고 온통 놀라움과 두려움밖에 남지 않아요, 겁쟁이들같으니라구……."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단지흥의 손을 힘껏 틀어쥐며 또다시 소리쳤다. "가지고 노세요. 가지고 놀란 말이에요. 두려운가요? 그래요? 두려운 거지요?" 단지흥은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찌하면 좋을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그저 여인이 이끄는 대로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 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가슴 살짝 어루만졌다. 이제부터는 입이 아니라 손이 모든 것을 말해 주리라. 저 밑에 감추어져 있는 가슴속 진실까지도 이제는 손이 말해 줄 것이었다. 등아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다 미워해선 안 되오. 세상엔 나보다 훌륭한 사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오." 단지흥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등아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당신이야…… 좋지요. 좋고 말고요……. 하지만 사내들이란 모두 심보가 고약해요……." 이 여인은 사납게 단지흥을 끌고 다니던 좀전의 그 여인이 아니었다. 등아는 완전히 딴사람이 된 듯했다. 단지흥은 가볍게 등아를 부축하여 석실로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침대는 아주 컸다, 수많은 사연이 깃들인 바로 그 넓이만큼 되듯이……. 농부는 언뜻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꼭 무슨 꿈을 꾸고 있는 듯싶었다. 머리 속이 어질어질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농부는 의식을 잃어 모르고 있었으나 방금 뚱뚱보 여인 셋이 그를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그는 지금 여인들의 욕망을 채워 주는 도구로 전락해 있었다. 그녀들은 욕망을 다 채우고는 농부를 높이 달아매 놓고 밥을 먹으러 가 버렸다. 그녀들은 이렇게 매달아 놓으면 사내의 욕정은 더욱 커진다고 믿고 있었다. 농부는 견딜 수 없이 구역질이 나서 거꾸로 매달린 채 계속 음식물을 토해냈다. 여인들은 농부에게 미약을 자그마치 한 사발이나 먹였다. 만일 그나마 여인들한테 한바탕 시달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미약 독이 온몸에 퍼져 벌써 딴 세상으로 갔을 터였다. 한바탕 토하고 나자 독 기운이 퍽 약해진 듯싶었다. 그는 자기의 처지가 한심하기 그지없어 이빨을 바드득 갈며 있는 대로 욕설을 퍼부었다. 대리에 돌아가게 되면 대환희 보살 무리들을 깡그리 죽여 없애 더는 운남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들리라. 그러나 능히 살아서 대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없었다. 세 여인은 한참 만에야 돌아왔다. 여인들은 밧줄을 풀어 농부를 내려놓고는 뺨을 살살 어르며 말했다. "아이, 우리 귀염둥이, 우리 보살님을 잘 따르기만 하면 복이 덩굴째 굴러 들어요. 이제 곧 보살님이 오실 텐데 그전에 뭘 좀 잡수셔야지?" 여인들은 한 장막으로 농부를 끌고 갔다. 그 장막 안에는 바닥에 커다란 가죽을 펴 놓았는데 무슨 짐승의 가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인들은 제각기 가죽 위에 벌렁벌렁 드러누우며 소리쳤다. "보배둥이, 어서 와요, 어서 와. 와서 누워요. 방금 힘을 많이 썼으니 무얼 좀 자시고 몸을 추슬러야지요!" 개중 한 여인이 누운 채 한 팔을 뻗어 농부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평소 같으면 농부가 능히 당해 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나 지금 농부는 중독되어 있는지라 속수무책으로 여인이 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은 농부를 한가운데다 자빠뜨려 놓고는 개중 한 여인이 농부의 발을 끌어다가 불룩하니 솟아오른 배 위에다 올려 놓고는 배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여기가 몽글몽글하니 발을 올려 놓으면 좋을 거예요." 그러자 다른 한 여인도 뒤질세라 머리를 품에 껴안으며 속닥거렸다. "난 당신의 귀한 머리를 받들어 줄 테야요." 다른 한 여인은 농부의 손을 쥐었다. "난 당신의 손만 잡겠어요." 농부는 여인들이 왜 이처럼 법석을 떨어대는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갑갑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윽고 얼굴에 덕지덕지 분을 바른 사내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쟁반에다 음식을 날라 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 여인은 벌떡 일어나 앉아 눈빛을 반짝였다. 순식간에 짐승 가죽 위엔 음식이 가득 차려졌다. 천하에서 먹는 것에 이토록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마도 대환희 보살밖에 없을 것이다. 짐승 가죽 위에는 남방 요리며 북방 요리며 할 것 없이 갖가지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졌는데 농부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도 많았다. 세 여인은 좀전에 이미 한바탕 먹었으면서도 서로 질세라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마구 퍼 넣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젓가락 같은 건 쓰지도 않고 아예 손으로 마구 쑤셔 넣었는데 그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입을 우물거릴 때마다 무슨 철물이라도 씹는 듯이 빠드득 빠드득 소리가 났다. 그때껏 농부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어지간히 배가 찼는지 한 여인이 갑자기 농부의 머리를 바싹 끌어당겨서는 그의 입에다 시꺼먼 음식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이건 녹양(鹿陽)인데 잘 먹어 둬요. 이걸 잡숴야 대환희 보살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으니까." 곁에 있던 여인도 끼여들었다. "당신이 대리 사람이란 걸 우린 이미 알고 있어요. 당신도 우리 보살님 명성을 익히 알고 있겠지요? 지금 당신은 필시 대환희 보살님의 속심을 알고 싶을 거예요. 그러자면 잘 잡숫고 기운을 추슬러야 할 게 아니에요? 보살님께서 당신을 좋아하게만 되면 당신은 복에 파묻히게 되거든요. 보살님께서는 평소 세 사내를 제일 좋아하셨는데 며칠 전에 그중 한 사내가 죽었어요. 그래서 보살님께서는 지금 매우 상심해 계신데 당신이 만일 보살님의 환심만 사게 된다면 그야말 로 복덩어리가 되는 거라구요. 그럼 매일매일을 얼마나 즐겁게 보낼 수 있겠어요." 그러자 세 여인은 앞을 다투어 농부에게 음식을 먹였다. 어떻게나 마구 퍼 넣는지 농부는 미처 씹어 삼킬 틈도 없었다. "날 즉일 셈이냐?" 농부는 손을 가로 저으며 입 안의 음식물을 캭 뱉어 내고는 소리를 질렀다. "토하면 안 돼요. 만일 보살님 앞에서 음식을 토하면 살아 남지 못해요!" 한 여인이 질겁을 하며 농부가 뱉은 것을 일일이 주워 먹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세 여인은 서로 마주보고 깔깔 웃었다. "참말 우리는 입이 셋이라 그렇지 셋이서 한꺼번에 음식을 떠 먹였으니 저분 혼자 어찌 다 받아 자실 수 있었겠니?" 한 여인이 눈을 찡긋했다. 곁에 있는 여인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하나 보살님이었다면 우리 셋이 바삐 떠 드려도 미처 따라가지 못할 텐데. 세상에서 보살님보다 더 빨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듣자니 홍칠이라는 사람도 먹을 것을 보면 사족을 못 쓴다더라." 여인은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어댔다. 홍칠공이 개방 방주요 풍운아로 무예가 대단하다는 것을 농부는 잘 알고 있었다. 무림 고수의 이름을 듣고 나니 농부는 더한층 자기 처지가 한심해졌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황제 폐하는 어찌 되었을까……. 그는 숨이 막히도록 배가 불러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속으로는 연신 장탄식을 하고 있었다. "충분히 쉬셨지요? 푹 쉬셨는가 말이에요?" 한 여인이 다그치듯 물었다. 옆의 여인도 거들었다. "당신은 대리의 벼슬아치지요? 지위가 그러하시니 우리가 시중을 들어 드릴게요. 대리에 돌아간 다음에도 우리 서로 잘 지내요." 농부는 기가 막혀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순간 이 뚱뚱보 여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뚱뚱한 여인과 눈길이 마주쳤다. 대환희 보살이었다. 여인은 큰 곰 같은 몸집으로 소리 없이 농부 앞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 어떤가? 쓸 만한가?" 보살이 묻자 여인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히히덕거렸다. "보살님, 이분은 팔 힘이 대단해요." 한 여인이 대답하자 대환희 보살은 사뭇 흡족한 듯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자 그녀의 살집은 징그럽게 흔들거렸다. "좋아, 좋아! 내가 직접 시험해 보지. 이 녀석 팔 힘이 센가, 내 팔 힘이 센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보살은 농부한테 팔을 쓱 내밀었다. 하나 그것은 사람 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깃덩어리 같았다. 농부는 이 여인들이 어찌하든 대뜸 자기 말만 했다. "대환희 보살, 당신은 우리 황제를 보지 못했소? 우리 황제를 보았다면 제발 행방 좀 말해 주시오. 보답은 후하게 해 드리리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실눈을 뜨며 농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한데 어떻게 보답하겠다는 것이냐? 날 안아 주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무슨 보답인지 똑똑히 말해야 알아먹지." "난 지금 황제 폐하를 찾고 있는 중이오. 만일 그분을 보셨다면 어서 알려 주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드리리다." "난 중양절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일간 무예 시합이 열리면 자연 단지흥을 찾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니 나만 따라 가면 그를 만나게 돼!" 보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 내뱉더니 농부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세 여인들을 툭툭 차면서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거라, 일어나. 내 이 녀석한테 보답을 받아야겠다!" 왕중양은 화산에 당도했다. 그가 마침내 화산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가 묵고 있는 객점 앞에는 각 문파 인사들이 몰려와 만나기를 청했다. 왕중양은 워낙 후덕하고 남한테 함부로 굴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찾아온 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누구 하나 소홀히 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느라고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왕중양은 휴식할 짬이 생겼다. 마침 긴장을 풀고 몸을 눕히려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불쑥 들어섰다. 한눈에도 흉악해 보이는 인상에 호복(胡服)을 입고 있었다. 살펴보니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대뜸 불량스레 말머리를 꺼냈다. "모두들 왕중양이 미치광이라고 하기에 그게 사실인가 알아보러 왔소이다." 왕중양은 하루 온종일 공손한 말만 들었던지라 적이 의아해하면서도 너그럽게 대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가르칠 거야 무어 있겠소만, 난 당신 수중에 있는 《구음진경》을 좀 보려고 하외다." 그는 껄껄 웃었다. 왕중양도 마주 웃으면서 인자하게 말했다. "그래 당신은 아직도 저의 말을 믿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믿도록 말씀해 주면 나도 믿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 않소?" 내내 곱지 않은 말투였다. "믿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이 먼 길을 오시었소? 당신 차림을 보아하니 서역 사람 같은데. 서역에서 불원천리 예까지 오신 걸 보면 아마도 절 믿기 때문이겠지요?" "천하에 둘도 없는 무학기서를 남한테 내주려 한다니, 그 사람은 미치광이가 아니면 바보 아니겠소? 그러니 믿지 못하는 거고,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이렇게 온 것이오." 왕중양은 장탄식을 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할는지는 모르겠소만 실제로 미쳤다고 해도 나는 오히려 그 멋을 알고 있소이다. 다행히 미쳤기 때문에 숱한 사람들이 방해하는 중에도 그 재미를 알 수 있는 게 아니겠소이까?" 그 사람은 왕중양을 유심히 쏘아보았다. "좋소, 좋아. 사람들이 왕중양은 불가전승이라고들 말하지만 당신을 직접 대하니 역시 인정이 많은 사람이로군. 그렇다면 당신을 이기기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소." 그리고는 그 사람은 대뜸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왕중양은 일순 그 사람에 대하여 흥미가 생겼다. 그 사람은 흔히 보는 강호 무객들과는 달랐다. 눈길이 사나워 보이는데다 체구가 우람했는데 한눈에도 강호의 악인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만일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강호에서 소문이 자자한 악인 구양봉이로군요?" 왕중양이 말하자 그는 대뜸 그 자리에 멈춰 서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과연 대단하구먼. 중양 진인은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신다니까." "중양절이 눈앞에 임박했소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당신은 《구음진경》을 쟁탈하려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당신은 간악한 사람이라 만약 《구음진경》을 갖게 된다면 천하가 편안한 날이 없을 겁니다." 왕중양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구양봉이 요란하게 웃어젖혔다. "왕중양, 당신이 그 밀서를 그토록 아끼는데 차라리 내가 그 《구음진경》을 몰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그랬다면 당신에게 큰 번뇌도 주지 않았을 게 아니오?" "구양봉, 모두들 당신은 형을 죽이고 형수를 통간한 자라고 하더군요. 떠도는 말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말해 줄 수 있겠소?" "난 성미가 뻐들뻐들하여 떠도는 말을 관계치 않소. 사람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든, 남한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있소?" 이때 구양봉의 머리 속에는 갑자기 한 사람의 자태가 떠올랐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자태가……. 그는 그 여인 때문에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인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는 터, 설사 그 여인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라면 여인에게 얽매여서는 안된다. 사나이가 여인만 생각하고 여인의 치마폭에서 허우적댄다면 결국 그 여인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구양봉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마음속에 그 여인을 새겨 두고 있으면 되는 게지 남이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걸 두려워해서 뭣하랴?" 그러더니 구양봉은 험상궂게 얼굴을 굳히며 뚫어지게 왕중양을 쏘아보았다. '떠도는 말에는 이 중양 진인의 무예가 천하 으뜸이라고 하더라만 직접 대하고 보니 대단할 것 같지 않구나. 내가 손을 써서 아예 이 자리에서 죽여 버려야지.' 구양봉은 마음속으로 독기를 품었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거렸다. 왕중양은 구양봉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적이 의아했다. '저 사람이 갑자기 왜 저토록 긴장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