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29편 (29/70)
"제, 제발 사람을 자, 잡아먹지 마십시……오. 이 객점에 고, 고긴 어, 얼마든지 있으니……. 고기를 자시겠다면 다, 당장 요리를 만들어 드리리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갈고리 사내를 돌아봤다. "에잇 귀찮아! 이 놈아 내가 네 놈 갈고리로 네 놈 뇌를 끄집어 내려는데 좀 써도 되겠느냐?" "날 잡아먹지 마, 잡아먹지 말란 말이야! 내 네 년을 용서치 않을 테다!" 쌍갈고리 사내는 소리소리 내질렀다. "허튼소리 작작 해! 어서 지옥으로 보내 주겠다니까! 지껄일 말이 있으면 거기 가서 마저 해!" 그리고는 다시 주인에게 윽박질렀다. "빨리 가져 오란 말이야. 네 놈 객점이 박살난 다음에야 가져 오겠느냐?" 주인은 이번엔 찍소리도 못하고 기다시피 주방 쪽으로 사라지더니 이내 자그마한 도끼 하나를 가져 왔다. 여인은 뺏듯이 도끼를 낚아채 머리 위로 치켜 들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차, 잊어버릴 뻔했군. 네 놈은 술을 잘 마시는 놈이냐?" 쌍갈고리 사내는 왜 이런 걸 묻는지 몰라 이랬다저랬다 종작없이 외쳐댔다. "난 술을 안 마셔, 아니 술을 마셔……." "그래, 술을 좀 마셔야지. 술을 안 마시는 놈들 것은 맛이 없거든. 하지만 주정뱅이 건 냄새가 너무 지독해. 그저 술을 적당히 마시는 너 같은 놈의 뇌가 맛있단 말야." 그러자 쌍갈고리 사내는 정신없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냐. 난 술고래야, 술고래! 저……저 사람 것이…… 저 사람은 술을 많이 안 마셔……." 그러면서 쌍갈고리 사내는 잣대를 쓰는 사내를 가리켰다. 그러자 잣대를 쓰는 사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 놈? 저 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 저 놈이 술을 알맞게 마시고 또 미주(美酒)만 골라 마신다구! 저 놈 뇌는 기가 막힐거야." 농부는 그쯤 되어도 이 뚱뚱보 여인들이 그저 허세를 부리는 거겠지 설마 사람 뇌를 꺼내 먹을까 싶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인은 아무 말도 않고 냉소를 날리더니 불현듯 도끼를 쳐들어 잣대를 쓰는 사내의 머리를 힘껏 내리찍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머리가 두 쪽으로 짝 쪼개졌다. 여인은 씽긋 웃음을 흘리며 도끼날로 사내의 뇌를 짝짝 펴더니 텁석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입맛을 다시며 두 여인을 돌아봤다. "음, 맛이 기가 막히는군! 얘, 너네들도 와서 어서 먹어 봐." 그러자 두 여인도 득달같이 달려와 기갈 들린 사람마냥 마구 퍼 먹었다. 이 객점에는 그들말고도 손님이 몇 사람 더 있었는데, 여인들이 사람 뇌를 먹는 것을 보고는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서로 먼저 내빼려고 아우성을 치면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객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더러는 비칠거리고 넘어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농부는 통탄해 마지않으며 자기 자신을 질책했다. 왜 진작 쌍갈고리를 쓰는 사내를 구해 내지 못했던가! 맞아 죽어 뇌를 파먹힐 망정 이 여인들과 결단을 냈어야 했다. 그는 진정 후회막급이었다. 농부가 분기탱천하여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한 여인이 먼저 소리쳤다. "이 놈의 뇌는 참말 기가 막힌다! 보아하니 이 놈은 술고래는 아닌가 봐." "전번에 먹은 것은 어찌나 비리던지 내 보살님께 물어 보았지. 보살님 말씀이 여인을 다룰 줄 모르는 사내의 것이 맛이 그렇대. 한데 이 녀석은 아마 여인을 다루는 재간이 있었던 모양이지?" "이 놈이 여인 다루는 재간이 있었다면 왜 우리를 대적해 내지 못했겠어? 이 녀석은 우리같이 무서운 여인은 아직 만나 보지 못했던 모양이지?" 뚱뚱보 여인 셋은 악귀같이 입을 놀려댔다. 농부는 그 세 여인을 바라보면서 장탄식을 했다. '중원 사람들이 남방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하면서 피하는 게 다 우연은 아니었군! 이 꼴을 보고 누군들 겁이 나지 않겠는가? 이들이 이런 짓을 하니까 말은 보태고 떡은 뗀다고 운남의 대환희 보살이 산 사람의 뇌와 장을 파먹는다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떠들어 대지. 이러니 운남 사람들이 중원 땅에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때 한 여인이 잔뜩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이 좀 불쌍하긴 해, 아까는 달리 도리가 없어 이 놈을 죽이고 뇌를 파먹었지만 운남에서라면 머리만 내리치고 죽이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면 놈이 견디다 못해 알아서 머리로 담벽을 들이받아 자살을 했을 텐데. 아무래도 방법이 좋지 않았어." 여인은 느직느직 말하더니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두 사내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겁이 나서 더욱 머리를 파묻으며 와들와들 떨었다. 그러다가 한 사내가 소리쳤다. "차라리 깨끗이 죽여라. 그렇게도 악독하게 능멸하지 말고 제발 깨끗이 죽여!" 그러자 다른 한 사나이도 용기를 냈다. "죽이려면 그냥 죽일 게지 이토록 고통을 줄 게 무어냐. 내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네 년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그 사내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한 여인이 펄쩍 뛰어오르며 방금 말한 사내의 뺨을 연거푸 휘갈겼다. "난 네 놈을 죽이지 않겠다! 운수 좋은 줄이나 알고 입 닥치고 잠자코 있어. 다시 한 번 더 찍소리를 했다가는 네 놈을 산 채로 잡아먹을 테니. 아까 저 놈보다 더 끔찍하게 말이야!" 그쯤 되자 농부는 더는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인들에게 단단히 뜨거운 맛을 보여 다시는 악한 짓을 못하게 만들어 놓을 작정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그 순간 세 여인의 손에 들려 있는 향 주머니를 보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것은 필시 사람을 중독시키는 향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한 여인이 농부에게 힐끔 눈길을 던지더니 대뜸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넨 농부가 아닌가? 그 호민 왜 쥐고 있나? 호미로 뭘 하려구? 우릴 찍어 죽이려구?" 그러자 다른 한 여인도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이 사내가 위풍이 있어 보이는군. 보아하니 보살님께서 매우 좋아하실 것 같아. 이 사내를 보살님한테 데려가면 아주 기뻐하시며 톡톡히 상을 내려 주실 것 같은데." "그래, 네 말이 맞아. 우선 저 놈을 붙잡아 놓고 보자." 여인들은 일제히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는 일제히 농부한테 덮쳐 들었다. 농부는 세 여인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셋이서 동시에 달려드니 우세를 점하기가 어려웠다. 농부는 조급한 나머지 모든 초수를 다 동원해 세 여인을 한걸음 한걸음씩 밀어붙였다. "재간이 대단하군. 그만하면 뽑낼 대로 뽑냈으니 호미를 던지란 말야. 우리와 함께 가면 보살님께서 네 놈을 한평생 호강시켜 줄게야!" "여부가 있나! 보살님께서 네 놈을 첩(妾)으로 삼으려 하실걸. 그분 첩이 되면 얼마나 멋진 줄 알아? 늘어지게 호강하지, 아따 팔자 한번 기막히게 핀다니까! 일단 가기만 하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구." 여인들은 돌아가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농부는 그야말로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그는 그저 혼신의 힘을 다해 죽어라고 호미만 휘둘러댔다. 그가 호미를 휘두를 때마다 세찬 바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세 여인은 그가 이처럼 결사적으로 호미를 휘둘러대자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쳐 꼬꾸라지겠어요. 사내가 맥을 너무 빼면 닭 새끼보다도 못하게 된다 했어요. 맥빠진 닭 새끼 꼴이 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렇게 힘을 빼지 말아요. 그 힘을 아껴 두었다가 보살님 침대에서 써야죠. 그처럼 재미있는 일을 팽개치고 여기서 힘을 뺄 게 뭐예요?" 여인들은 일부러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 소리에 농부는 더욱 성이 나서 악 소리를 지르며 닥치는 대로 호미를 휘두르고 내리찍었다. 그렇게 한참이 흐르자 농부는 맥이 빠져 호미를 휘두르는 바람 소리도 점점 약해졌다. '이거 내가 너무 마구 힘을 쓰는 건가?' 세 여인은 웃으면서 그저 이리저리 몸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세 여인은 농부가 맥이 빠지는 틈을 타 독약을 쓸 심산이었다. 여인들은 연해 농부의 부아를 돋우면서 손톱을 살짝 퉁겼다. 여인들의 손톱 안쪽에 독가루가 묻어 있었다. 일단 독가루가 농부의 콧구멍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공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손톱을 퉁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농부가 비틀하더니 호미를 툭 떨어뜨렸다. 농부는 그제야 자기가 이 여인들의 속임수에 걸려들어 독약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그는 대번에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듯한 환상에 빠져 들었다. 종남산 원산에는 한 뙈기 평지가 있다. 이곳에서 옆으로 비껴 보면 석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석굴 입구는 제법 커서 눈에 잘 띄었다. 한데 유심히 살펴보면 이 석굴 문과 문 앞의 평지는 사람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석굴 입구엔 커다란 문짝 두 개가 달려 있는데 이 문짝은 꼭 닫힌 채 열릴 줄을 몰랐다. 왕중양은 벌써 오랫동안이나 그 앞에 서 있었다. 만일 석굴 안에 있는 사람이 이대로 계속 나오지 않고 있으면 그도 천년 만년 기다릴 작정이었다. 이 석굴은 예전에 대협 왕중양이 천하 무림 호걸들을 거느리고 금나라의 침략에 항거할 때 그가 손수 판 것으로 그는 거기에서 수진양성(修眞養性)을 했었다. 그는 금나라에 항격하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더는 세상사에 관계치 않고 이 석굴에서 수행을 할 작정이었다. 그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금나라 군대와 참으로 피어린 싸움을 했다. 그런데 그가 계속 금나라 군대와 맞서는데도 남송의 조정은 화친을 맺을 생각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마침내는 종남 산으로 돌아와 스스로 전진교 교주가 되었고 전진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자 급기야 이 석굴에 들어가 오랫동안이나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임조영은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석굴로 찾아와 이긴 사람이 이 석굴을 차지하기로 내기를 걸어 그와 일전을 겨루었다. 이긴 사람은 임조영이었다. 그리하여 왕중양의 이 석굴은 임조영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왕중양은 사흘이나 이 석굴 문 어귀에 서서 임조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려 함께 화산으로 갈 작정이었다.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얻었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감사를 드렸었다. "청천이시여, 이 왕중양은 하늘의 두터운 사랑을 받았기에 그 인연으로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였나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이전부터 임조영은 왕중양에게 깊은 정을 품고 있었지만 왕중양은 악무목(岳武穆)처럼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지 않고서는 가정을 돌볼 수 없다며 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왕중양은 임조영의 애절한 사랑은 알은 척도 하지 않고 금나라와 싸우는 데만 전념했다. 세월이 흘러 금나라 군대와의 항전에서 실패한 후 다시 돌아와 임조영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녀도 그에 대한 배신감에 사무쳐 그를 사뭇 냉랭하게만 대했다. 그는 임조영과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을 괴로워하며 종남산에서 전진교를 세우고 시기를 기다렸다. 하나 그가 《구음진경》을 얻었을 때 첫 사람으로 마음에 둔 것은 바로 임조영이었다. '만일 이 책을 가지고 임조영과 함께 배운다면 더욱 빠르게 무예를 정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경서에 힘입어 임조영의 독을 해독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조영의 성미로 봐서 그녀는 결코 나와 함께 《구음진경》을 배우려 하지 않을 게다. 그러나 무예 시합에서 우승을 한 자가 이 《구음진경》을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 아무리 임조영이라도 활사인묘에서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그때 가서 내가 다시 지게 되면 그녀는 화를 풀 것이고, 그러면 다시 화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무림 고수들과 약속한 일이긴 하지만 왕중양은 내심 이런 생각으로 중앙절 날 밤에 천하의 무림 호걸들과 무예 시합을 벌여 우승한 사람에게 《구음진경》을 내주겠다고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의 예측과 달리 임조영은 그의 권고를 비웃기만 할 뿐 참가할 의도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중양은 화산 무예 시합이 임박해 오자 임조영을 다시 한 번 찾아가 종용해 보기로 결심하고 석굴 앞에 이렇게 오래도록 서 있는 것이었다. 석굴을 바라보며 왕중양은 감개가 무량했다. 그는 친히 이 석굴을 뚫었고 여기에 거처했을 뿐 아니라 종당에는 이곳이 자기의 분묘가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이 석굴을 활사인묘라고 부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배신감이 깊을수록 임조영은 그에 대한 사랑도 사무쳐 자기가 이렇게 활사인묘를 차지하고 있으면 왕중양을 세상에 나가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슴속에서 언제나 자신이 떠나지 못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극구 이곳을 차지한 터였다. 왕중양은 석굴에 당도한 후 줄곧 여러 번이나 소리쳐 불렀으나 석굴 문은 굳게 닫긴 채 번번이 기척 한 번 없었다. 임조영이 그가 찾아온 것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한편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선 채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켜 보면서 그녀가 나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심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그녀를 얻을 기회를 많이 놓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못내 통탄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 으리라. 그렇게 서 있자니 왕중양은 일순 가슴에 피멍이 맺히는 슬픔을 느꼈다. '하늘이여, 왕중양이 이 굴 앞에서 백년을 서 있는 한이 있더라도 임조영을 내주소서. 꽃 같은 여인이 적막한 석굴 속에서 어찌 그 고독을 참아 낼 수 있으리까? 더욱이나 병세까지 점점 짙어지는데……. 만일 그녀가 저 안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고 있다면 이 왕중양이 대신 죄를 받으리다. 아, 이 굴을 팔 때 임조영을 이 굴속으로 밀어 넣게 될 줄 내 어이 알았으랴.' 왕중양은 자기가 화산에 가야 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있었다. 하나 임조영을 내버려두고 어떻게 화산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임조영이 없다면 화산에 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욱이 임조영과 함께 그 경서에 실린 무예를 수련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 경서로 인해 임조영의 독을 해독할 수 없다면 그 경서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의 눈에는 언뜻 참회의 눈물이 비꼈다. 넷째 날이 또다시 어두워진 후에야 비로소 문이 스르르 열리고 안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이전부터 임조영의 시중을 들고 있는 처녀였다. 왕중양은 내심 오늘도 헛고생을 한 셈이라고 울적한 심정에 빠져 있었는데 뜻밖에도 사람이 나오는지라 적이 기뻤다. 그는 마주 걸어가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곳 주인에게 좀 전해 주게! 내가 꼭 한 번 만나잔다고! 진심으로 부탁드리네!" 처녀는 왕중양을 보더니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내때문에 자기의 사부가 중독된 몸으로 매일 석굴 속에 틀어박혀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왕중양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처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왕 진인께서는 근심 마세요. 저의 사부님은 석굴 속에서 잘 지내고 계세요. 그분은 이미 이곳에 익숙해지셨는걸요. 사부님은 나오고 싶어하시지 않아요. 사부님께선 저에게 대신 감사를 드려 달라고 했어요. 자기 한생에 진인 나으리의 두터운 관심을 많이 받았노라고 전하랍니다." 왕중양은 처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한마디 대답도 못했다. 이 처녀의 말에는 다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막상 처녀를 대하자 임조영의 심사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해 그는 탄식을 자아냈다.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을 이 어두운 석굴 속에서 지내게 하다니……. 그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할말이 없어 멍청하니 처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야 왕중양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다시 한 가지 간곡히 부탁드리네만, 임 시주한테 이 왕중양이 화산으로 꼭 청한다고 전해 주게! 천하 고수들이 다 모였은즉, 어서 빨리 독을 해독하고 그들과 무예를 겨뤄 달라고 말이야." "중양 진인께서는 잘못 생각하고 계셔요. 저의 사부님은 남과 무예를 겨룰 생각이 없으세요. 당신은 천하 으뜸이란 명성을 대단하게 여기시는 모양이지만 저의 사부님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으세요. 이전에는 그분이 한 사람한테 뜻을 두고 계셨지만 그분은 좋은 사람이 아니래요. 사부님께서 하필 다시 그 사람한테 뜻을 둘 필요가 어디 있나요?" 왕중양은 그 처녀의 심사를 건드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기는 이 처녀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기도 했다. 당초에 왕중양은 온몸에 피가 끓어 임조영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는 오로지 금나라 군대를 항격하는 일에만 골몰했고 2, 3년 시간이면 금나라 군대를 능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가 중년이 되도록까지 금나라 군대는 도무지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덧없이 늙어 버린 것이었다. 그 처녀가 조소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자기를 죽이려고 든대도 왕중양은 할말이 없었다. "소저, 성가시겠지만 내가 만나잔다고 딱 한 번만 전해 주게! 제발 부탁이네!" 왕중양은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다. 처녀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이 딱딱하게 말했다. "이 종남산 뒷산은 저희 사부님 가문의 땅이니 전진교 사람들이 더는 한걸음도 침범하지 말길 바래요. 그걸 위반한다면 나으리 스스로 체면을 깎아 내는 결과가 되리라는 걸 기억해 두세요." 처녀가 그 말을 꺼내자 왕중양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임조영과, 만일 내기에서 그가 이기게 되면 그녀는 그의 요구라면 어떤 것이든 다 들을 것이지만 그녀가 이기게 되면 뒷산은 그녀의 소유로 하기로 약정했었다. 전진교 왕중양의 제자들은 더는 뒷산에 들어가지 못하며 그것을 위반한 자는 목숨을 내놓기로 했던 것이다. 지금 왕중양은 그 언약을 어긴 셈이 되었다. "소저, 내가 임 시주의 규정을 어겼은즉 마땅히 약속을 지켜야 하리라. 다만 오늘만은 나한테 요긴한 일이 있으니 내가 좀 만나잔다고 전해 주게." "중양 진인께서는 천하 무림 사람들 중 가장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신데 무슨 요긴한 일이 있어 예까지 오셨나요? 저는 진인께서 무림 대사나 돌보러 이제 그만 돌아가시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그러다가 대사를 그르치십시다." 왕중양이 재삼 간청해도 그 처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왕중양은 임조영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터, 만일 자기가 억지로 들어간다면 기필코 그녀의 화만 더욱 불같이 돋워 놓을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일은 필시 한층 더 시끄러워질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좋은 말로 처녀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손이야 발이야 하고 빌어도 처녀는 꿈쩍도 안 했다. "듣건대, 중양 진인께서는 화산에서 큰 싸움을 치러야 한다고 하던데……. 중양 진인께선 화산 무예 시합에 참가하며 천하에 으뜸가는 영웅이 되셔야지 이곳에 와서 뭐 하시는 겁니까? 긴말할 것없이 사부님이 진인을 만나려 하지 않으니 어서 돌아가세요!" 왕중양은 처녀의 말을 듣고 그제야 알았다. 임조영이 이미 화산 무예 시합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나 다만 이 여인은 왕중양 자신이 천하에서 으뜸이라는 것을 내놓고 자랑하기 위해 무예 시합을 벌이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정말 오해였다. 그것이 진정 오해인 바에야 진심을 알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항변하기는커녕 혼자말로 중얼거는 것이었다. "이리 청하는데도 나오지 않으니 내가 거긴 가서 뭘 하겠는가? 그런 천하의 으뜸이란 명예는 쟁탈해서 뭘 하는가? 난 이미 천하의 으뜸가는 바보인데 뭐 하러 천하 으뜸이란 이름을 쟁탈한단 말인가? 다 부질없는 일……." 하나 처녀는 왕중양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가 더욱 기고만장해하는 줄로만 알고 코방귀를 뀌며 한껏 비꼬았다. "중양 진인, 종래로 대협들이란 모두 고독한 사람들인가 봐요. 천하 으뜸이란 칭호를 따내는 것은 이 백여 년 무림사에서는 무엇보다 큰일이고 축하할 만한 일 아녜요?" 왕중양은 얼빠진 사람마냥 멀거니 처녀를 바라보았다. '자고로 투기적인 말은 절대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 하였다. 나는 일찍이 그 여인에게 투기적인 말을 한 적이 없거늘, 임조영은 일부러 나를 깔보려고 이러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아랑곳하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일까?' "소저, 지나간 일은 모두 내 탓이요, 나 때문에 임 시주가 지금까지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이네. 난 지금 그걸 사죄하고자 임 시주가 석굴에서 나오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그녀가 나오기만 하면 기필코 천하 으뜸의 칭호를 얻게 될 것이네. 하나 그것은 명성에 뜻을 두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무림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이네!" 왕중양은 오랫동안 심중에 묻어 두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적이 진중했다. 처녀는 왕중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왕중양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중양 진인께서 이곳에서 나흘 동안이나 기다린 수고를 생각해서 제가 사부님께 한번 여쭙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