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27편 (27/70)
홍사는 웃으며서 한마디하더니 다른 여인들에게 손짓을 하고는 쪼르르 달려갔다. 홍사의 손짓을 신호로 여인들은 일제히 단지흥을 에웠쌌다. 그 바람에 단지흥은 홍사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홍사는 곧장 병풍 뒤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아주 큰 옥석 위에 올라섰다. 이윽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여인과 옥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낙하하여 아주 큰 석실 안에 내려섰다. 석실 안 한복판에 있는 대들보 위에, 천장 바로 밑으로 아주 큰 유등(油燈)이 한 개 걸려 있었다. 그리고 유등의 언저리에는 무수한 해골들이 매달려 있었다. 이 석실은 아주 높아 몇 장은 족히 될 듯싶었다. 석실 안에는 길다란 돌의자가 놓여 있고 머리를 풀어헤친 한 여인이 위엄 서린 자태로 그 돌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홍사는 그 여인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읍을 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하던가?" 돌의자에 앉은 여인은 자못 쌀쌀한 기색이었다. 그러자 홍사는 공손히 대답했다. "별다른 말씀은 없고 일양지공을 시전해 보였사옵니다." 여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화산의 무예 시합이 곧 시작될 게야. 그때가 되면 난 그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어. 그 사람의 일양지공에 어떤 묘한 점이 있는가 잘 익혀 두어라." 홍사는 머리를 숙인 채 일각이나 흘러도 대답이 없었다. 돌의자에 앉은 여인이 다시 쌀쌀한 기색으로 물었다. "넌 왜 대답이 없느냐?" "등아(燈蛾) 향녀(香女)님, 세상에 제가 배울 수 없는 무공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전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았사옵니다." 홍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등아라는 여인은 대로하여 소리쳤다. "넌 천하의 무공을 손쉽게 배워 내는 기재(奇才)가 아니냐? 어떤 절세의 무공이라도 그 비결을 속속들이 알아내지 않았느냐?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고? 그래 일양지공이 어디가 그리도 신묘하더냐?" "허다한 무공 초수들은 그 동작만 배우면 되지요. 하지만 이 일양지공은 그 비결이 기에 있어요. 그의 기는 입으로 일일이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사옵니다. 호방한 그 기세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지요. 그러기에 그 사람도 일양지공이 사내의 무공이라 여인들은 써먹을 수 없다고 누누이 말했사옵니다." 그러자 등아는 더욱 노기충천해서 소리쳤다. "단황이 한 말을 넌 그래 그대로 믿는단 말이냐?" 등아가 불같이 성을 내자 홍사는 머리를 더욱 숙이며 탄식하듯 말했다. "제가 그 말을 믿겠사옵니까마는……. 하지만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옵니다." "이 향녀 등아는 속세에서 버림받은 여인이다. 그래서 이 불음불양(不陰不陽)한 곳에 칩거하게 된 게야. 난 사내들이라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데 넌 그 젊은 황제를 보고 마음이 움직인 거지, 안 그러냐?" 등아가 다그쳤다. 홍사는 머리를 숙인 채 또 한참 동안이나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말했다. "제가 보기엔 그 황제는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았사옵니다. 그 분은 정의로운 사람이며 주색을 즐기는 여느 강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것 같았사옵니다." "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향녀 등아에게는 꼼짝못해. 아무리 인품이 좋다 해도 여색에 끌리지 않을 수는 없지." "그런 점은 없지 않았사오나 한 번도 우리 향녀들에게 그 짓을 요구하는 법이 없고……. 보아하니 그분은 대리에 있을 때 주색에 빠진 황제는 아닌 듯했사옵니다." 아닌게아니라 홍사는 단지흥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등아는 홍사의 속내를 환히 들여다보고는 꾸짖듯이 엄하게 말했다. "홍사야. 넌 종래로 세속의 사내들한테 마음이 움직인 적이 없지 않더냐? 그 사람이 황제라고 해서 그에게 빠졌단 말이지?" 홍사는 흠칫 놀라며 극구 발뺌을 했다. "아니에요. 만일 향녀께서 친히 그분을 만나 보신다면 아마도 제가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말씀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러자 등아는 요란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웃음 소리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웃고 나서야 유등을 바라보면서 뇌까렸다. "그래, 이 등아도 그 사내를 만나 보면 그렇게 된다구? 등아가 그런 사내를 만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어찌 향녀 등아가 생겼을꼬!" 그녀는 분기탱천하여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그녀의 외침 소리는 마치 우레가 우는 듯 석실 안에 메아리 치기 시작했다. 등아는 갑자기 몸을 솟구쳐 높이 걸려 있는 유등을 덮쳤다. 유등은 한창 기세 좋게 타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심지를 틀어쥐었다. 순간 석실 안엔 암흑이 내려앉고 그녀의 웃음 소리만이 어둠 속으로 처절하게 울려 나갔다. 그녀는 앞가슴을 헤쳤다. 옥같이 맑은 살결이, 그러나 봉곳 솟은 젖가슴은 간데없고 밋밋한 가슴이 등불같이 환히 드러났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고통과 절망이 비낀 신음 소리로 변해 갔다. 홍사는 돌의자 앞에 꿇어 엎드린 채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말 그대로 향기로운 여인, 향녀였다. 계집만 탐하는 세상의 뭇사내들을 증오하여 그녀들은 스스로 향녀라 이름하고 이곳에 석굴을 파고는 칩거하면서 사내들에 대한 복수의 불길을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산 무예 시합에 즈음하여 이 기회를 잡아 무림을 휘어잡고 대대적으로 복수전을 펴고자 미향으로 단지흥을 미혹해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향녀들은 사뭇 살뜰하게 단지흥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는 한껏 흥에 겨워 연신 입을 벙싯거렸다. "너희들은 어째서 날 이렇게 잘 대해 주지?" 한 여인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당신뿐 아니라 훌륭한 사내라면 우린 모두 잘 대해 주지요. 천하엔 훌륭한 사내가 너무나도 귀해요." "일리 있는 말이다. 천하엔 진정 사내대장부라 할 만한 사내들이 많지 않지." 단지흥은 그녀들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녀들의 살결은 아주 매끌매끌했다. 단지흥은 문득 이 여인들이 왜 젖가슴을 만지는 것을 꺼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이제껏 이상하게도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은 추호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내들이 여인을 애무하면서 젖가슴을 만지지 못하고서야 무슨 재미란 말인가? 단지흥은 일순 그것이 너무도 기이해서 곁에 있는 여인의 젖가슴께로 슬쩍 손을 가져 갔다. 그러자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두 팔로 앞가슴을 감쌌다. "왜, 왜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게냐?" 단지흥은 더 더욱 조급증이 나서 그 여인의 팔을 뿌리치며 앞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여인은 한사코 몸부림을 쳤다. 곁에 있던 여인들도 한결같이 막아 나섰다. "황제 폐하, 이러지 마세요……." 그러자 단지흥은 속삭이듯 한 목소리로 여인을 얼렀다. "미인은 옥과 같은 거야.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 젖가슴인데 왜……." "폐하께서는 잊으셨나 봐요. 이곳은 지옥이에요. 사내들과 여인들의 지옥이란 말이에요. 이곳은 속세와는 달라요. 우리의 몸도 속세 사람들의 것과는 달라요. 폐하께선 만져 보려 하지만 소녀는 폐하가 놀라게 될까 두려워요." 그래도 단지흥은 막무가내였다. "좀 만져 보게 해 줘. 내 나무라지 않을 테니까……." 옛날 불경 이야기에 범가죽으로 만든 옷을 가진 여인에 대한 설화가 있다. 그 여인은 그 옷을 입으면 수시로 도망을 갈 수도 있고 사람을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이 여인들이 범가죽 옷을 입은 여인이라 해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빨리 옷을 벗으라고 독촉했지만 여인은 마냥 눈물을 쏟아 낼 뿐이었다. "폐하, 폐하께서 참말 보려 하신다면 어려울 거야 없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폐하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래도 굳이 보셔야겠나요? 그냥 재미있게 노시면 될 걸 하필 젖가슴을 보아선 뭣 하시나요?" 그래도 단지흥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여인의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젖무덤께로 선뜻 손을 가져 갔다. 지옥의 여인들이 속세의 여인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는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옛말에도 있듯이 여체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젖가슴이다. 그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오르는 두 개의 구름과 깊숙이 팬 골짜기, 그 아름답고 유연한 곳에서 사내들은 종달새 노래 같은 휴식을 맛보곤 했다. 당조 때 현종이 총애하던 귀비 양옥환(楊玉環)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젖가슴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방금 목욕을 하고 나왔는데 몸에 두른 명주 옷 위로 옥 같은 젖무덤과 새빨간 젖꼭지가 그대로 내비쳐 당 현종은 즉석에서 시 두 구절을 읊었다고 하지 않는가. 단지흥은 떨리는 손길로 여인의 젖가슴을 더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악 소리를 지르며 손을 덥석 떼어 냈다. 젖가슴이 하나도 없이 마냥 밋밋했던 것이다. 여인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단지흥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지었다. 단지흥은 두 눈을 휘등그래 뜨고는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워낙 지옥의 여인들은 모두 이러하구나. 보아하니 저 여인은 기필코 생전에 풍진 세상에서 방탕하게 굴다가 벌을 받은 모양이다.' "미안하이, 미안해. 난 너를 슬프게 만들려고 그런 게 아니야. 난 다만 호기심 때문에 그랬던 게야. 네가 그처럼 아리따운데 약간 허물이 있은들 그게 뭐 그리 대순가?" 하지만 여인은 마냥 눈물을 흘렸다. "저와 자매들은 당신에게 시중을 잘 들어 드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어요. 당신은 지옥에 있는 여인들의 비밀을 알고 말았으니 우릴 깔보시겠죠? 그렇고서야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은들 무슨 재미가 있겠나요? 우린 가겠어요." 단지흥은 할말을 잃고 그저 여인들이 점점 멀어져 가는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때 홍사가 여인들을 스쳐 지나 보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홍사, 우린 이곳을 떠납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제일 뒤에서 종종걸음을 치며 쫓아가던 여인이 홍사에게 한마디 남겨 놓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홍사는 천천히 단지흥에게 다가왔다. 단지흥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하소연하듯 애절하게 말했다. "난 정말 그럴 생각이 아니었소. 이 여인들은 왜 떠나가는 거요?" 홍사는 두 눈에 애련한 빛을 담고 가볍게 탄식했다. "자고로 미인박명이라 했어요. 지옥에 있는 여인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여인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장 중히 여기지요, 그런데 오늘 폐하께선 그 여인들의 비밀을 알아내셨으니 그녀들의 상처를 건드린 셈이에요. 여인들은 폐하를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예요." 단지흥은 자기 자신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왜 쓸데없이 여인들의 젖가슴을 보자고 고집을 피웠던고. 이 여인들이 나를 얼마나 살뜰히 대해 주었는가? 이 여인들과 함께 있으니 그리도 좋던 것을…….' "홍사, 다시 그 여인들과 함께 있을 수는 없나? 내 이제 다시는 섣불리 굴지 않겠어, 맹세코 내 이제 다시는……." "지나간 일은 돌이키지 못해요. 속세나 지옥이나 그건 마찬가지예요." 홍사는 적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세상의 정사란 종래로 사랑보다 원한이 많았다. 세상에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랑 때문에 액운을 당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단지흥 역시 모르는 바 아니나 이곳 지옥에서 그가 직접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이곳에 온 이후,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으나 화산 무예 시합이 임박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지옥문을 들어선 이상 그는 속세와 다름없는 이곳에서 여인들과 나날을 보내며 시름을 잊고 있었다. 그 역시 한때는 무림의 고수들과 결사적으로 겨루어 《구음진경》을 차지할 꿈을 꾸었으나 이젠 주검이 되었으니 속세의 그런 다툼도 아무 소용이 없는 터, 그런 차에 여인들마저 떠나가 버리자 그에겐 아무런 꿈도 희망도 낙도 없어졌다. 이곳 지옥에 갇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는 그 나날들을 어찌 무미건조하게 지낸단 말인가. "홍사, 그대도 알고 있겠지? 난 한평생 남녀간의 정사에 그리 집착해 온 사람은 아니야. 난 그대들과 함께 있으며 벗으로 지내기를 원했을 뿐……. 그대가 그 처녀들한테 전하게, 날 용서해 달라고 말이야." 홍사는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녀는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네 시위들은 각자 흩어져서 단지흥을 찾아 헤매다가 아무리 수소문해 보아도 행방이 묘연하자 마침내 저마다 화산으로 가기로 작정하고는 비슷한 시점에 각각 화산에 당도했다. 화산에 당도하니 제가끔 할말들이 많은지 《구음진경》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고자 무림 고수들은 물론 흔히 얼굴을 내밀지 않던 무객들도 거의 다 화산에 몰려왔다고 가는 곳마다 이야기로 성시를 이루었다. 화산 기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 도화도주 황약사, 개방 방주 홍칠 등이 벌써부터 와서 진을 치고 있다고도 하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왕중양은 누군가 사람을 기다리며 아직도 종남산에 칩거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왕중양 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문을 닫아걸고 무예를 익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는 왕중양이 《구음진경》의 일을 발설한 것도 알고 보면 이 《구음진경》을 남한테 내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놓고 독점하기 위해서라고들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그만큼 천하의 모든 영웅들을 제압하고 《구음진경》을 자기 손에 틀어쥘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왕중양이 기다려 마지않는 그 한 사람이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여인 역시 종남산에 칩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왕중양은 왜 그처럼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도 찾아가 만나지 않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것일까. 그 내막에 대해서도 구구하게 말들이 많았지만 딱 부러지게 이렇다 하게 단언을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 시위는 모두 화산 기슭에서 단지흥의 소식을 탐문하느라 사처를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다 허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네 사람은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애가 닳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밤도 선비는 밖에 나가 단지흥의 소식을 탐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발이 아프게 돌아다니다 화산 기슭의 한 절 앞에 이르렀다. 어마어마하게 큰 이 절은 그 옛날 노대(魯代)의 한 제왕이 화산 기슭에 봉한 대성선사(大成先師) 공자(孔子)의 사당으로서 지금은 다 스러져 가는 낡디낡은 절로 그 옛날의 영화를 잃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선비는 소리를 죽여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한 무리나 되는 아름다운 묘령의 처녀들이 모두 머리를 숙인 채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모두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비가 전으로 들어가 살펴보려는데 갑자기 밤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사람의 그림자가 번개같이 절간으로 내리꽂혔다. 그러자 앉아 있던 처녀들은 일제히 일어나 방금 나타난 사람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 사람은 주위를 한번 휘둘러보더니 천천히 두건을 벗었다. 의외로 그 사람은 여인으로 천하 절색 이었다. 선비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려다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여인은 미색에 어울리지 않게 자못 쌀쌀하게 한마디 던졌다. "모두들 왔느냐?" 한 여인이 허리를 굽실하며 대답했다. "등아 향녀님, 모두 왔사옵니다." "그럼 좋아, 내 말을 듣거라. 화산 밑에서는 지금 온통 북새통이 일고 있다. 서역에서 왔다는 그 구독사옹 문하의 독인(毒人) 구양봉은 지금 어떠한가?" 자주색 옷을 입은 처녀가 아뢰었다. "향녀님께 아뢰나이다. 그 구양봉은 부하들을 데리고 왔사옵니다. 그 사람은 독사를 몰아왔는데 서역의 살기를 그대로 화산으로 몰아온 셈이옵니다. 강호의 인물들과 한곳에 있지도 않고 따로 화산 아래 뜨락이 곁달린 집에 묵고 있사오며, 그의 사노(蛇奴)들은 날마다 뱀을 먹이고 있는데 그 뱀들은 아주 지독한 것들로 사노의 호령에 따라 움직인답니다." "구양봉은 나와서 훈련을 하지 않더냐?" "아뇨. 그가 나온 걸 두 번 보기는 했지만 그저 산보만 하더이다. 언뜻 보기엔 눈치가 없어 보이고 겉모습만 봐서는 무예가 특출해 보이지도 않더이다. 하지만 사람들 말을 듣건대 그 사람은 얼마 전에 형수가 죽어서 그렇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이번 화산 무예 시합에도 참가하지 않으려다가 하는 수 없이 참가했다 하더이다." "형수가 죽은 게 그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여인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강호에서 떠도는 말에 의하면 구양봉은 형을 죽이고 형수와 통간했다고 하더이다. 그 둘의 관계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옵니다. 형수가 죽자 그 사람은 한동안 마음을 못 잡고 다른 일은 돌볼 생각도 안 했다 하더이다. 화산에 와서도 매양 그 모양이랍니다." 여인은 빙그레 웃었다. "좋아. 그 사람이 풀이 죽어 있다면 시합 때 어찌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있겠느냐? 그럼 넌 그 사람을 왜 네 사내로 만들지 못했지?" 처녀는 갑자기 쏙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었다. "찾아가긴 찾아갔었사옵니다……. 하지만 그……그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절 쏘아볼 뿐으로……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더이다……." 내전 뒤에 숨어서 엿듣던 선비는 깜짝 놀랐다. 이 여인은 필시 강호에 숨어 있는 한 문파의 수제자 아니면 우두머리임이 분명했다. 여인이 이처럼 세밀하게 따지는 것으로 보아 이 여인이 나타남으로써 이번에 화산에 온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리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더라고? 그래 그 사람이 단지흥보다 더하단 말이냐?" '뭐라구?' 선비는 일순 귀가 번쩍 뜨이며 더욱 쫑긋 귀를 기울였다. 여인이 대갈일성을 내지르자 처녀는 감히 대꾸를 못하고 조용히 서서 그녀의 명만 기다렸다. "세상에 어디 좋은 놈이 있단 말이냐? 그 구양봉이란 놈은 형을 죽이고 형수를 통간했다니 아주 간악한 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놈이 형수한테는 그다지 악독하게 대한 것 같지는 않군. 마침 그 형수를 잃었다니까 이런 때 대신할 여자를 찾아 주는 게 어떠냐?" 처녀가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리자 여인은 무서운 목소리로 화를 냈다. "됐다! 더 말하지 말아라! 만일 이번에도 구양봉이란 놈을 홀리지 못한다면 그땐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 알았느냐?" 처녀는 여인의 기세에 눌려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읍을 하고는 천천히 물러섰다. 또 한 처녀가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향녀님 앞에 아뢰나이다. 저는 홍칠공에게 갔다가 망신만 당했나이다. 그자는 저를 보더니 대뜸 그저 알고 있다고 말했사옵니다. 하지만 그자가 무얼 안다는 건지, 개방에서 참말로 우리 일을 알고 있다는 건지는 통 모르겠더이다. 그래 따져 물었더니 더는 한 마디도 대답이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전 그저 그를 주시하면서 그의 강룡십팔장이 어떤 것인가 알아보려 했지만 그자는 하루 종일 술만 퍼마실 뿐 조금도 무예를 연마하지 않았사옵니다." 여인은 그 말을 듣더니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온종일 술만 퍼마시고 무예 연마를 하지 않더라구?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알건대 이번 일은 단지 홍칠의 운명에만 관계되는 게 아니라 개방의 흥망마저 걸려 있다고 했다. 만일 그자가 지게 되면 천하에서 제일 큰 개방의 위신이 납작해진단 말이다. 그런데 이런 판에 그자가 날마다 술만 마시다니, 이상하지 않느냐?" "제 말에는 한치도 거짓이 없사옵니다. 그 사람은 술을 마실 때면, 어디를 가든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던 타구봉까지 땅바닥에 내려놓았사옵니다. 그리고는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타구봉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었사옵니다." 그러자 여인은 사뭇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자가 타구봉을 바라볼 때 어찌 하더냐?" "그 사람은 타구봉을 때로는 옆으로 눕혀 놓기도 하고, 때로는 곧게 세워 놓기도 하고, 술단지 곁에 놓아두기도 했사옵니다. 혹은 눈앞에 곧추 세워 두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이상하게도 온종일 타구봉만 들여다보는 것이었사옵니다." "그자는 타구봉법을 알고 있어. 하지만 그자는 그 타구봉 쓰는 초수만 가지고는 왕중양의 선천신공을 이겨 낼 수 없을 거야. 그자가 그러는 건 필시 타구봉 쓰는 새 초수를 생각하느라고 그러는 걸게다." 여인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신중히 말했다. 선비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여인은 보아하니 계책이 대단한 여인 같았다. 이전에 본 어떤 사람들보다 퍽이나 주도면밀해 보였다. 만일 이 여인이 단지흥을 주목하고 있었다면 필연코 그의 거취도 탐지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선비는 속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만일 이 여인이 단지흥을 탐지했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을 것 아닌가. 여인은 고개를 돌리더니 다른 한 처녀에게 또 물었다. "그녀가 석굴에서 나왔느냐?" "그 여인은 아직 석굴에서 나오지 않았사옵니다. 보아하니 그 여인은 천하에서 으뜸을 다투는 이번 시합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는 것 같았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