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26편 (26/70)
제왕 노릇 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드는데 하필 당신이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뭐겠어요?" 단지흥 역시 듣고 보니 일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비위에도 맞았다. 그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는 말도 반말투로 나가고 있었다. "너희들이 이렇듯 잘 대해 주니 상을 톡톡히 주고 싶으나 보다시피 지금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만 가지고서도 될까?" 그러자 한 여인이 몸을 일으키며 정색을 했다. "지옥에서는 무보수로 하는 일이란 없지요. 당신에겐 숱한 재산이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없군요. 하지만 당신이 보답을 하지 않는다면 기필코 천벌을 받을 거예요." "그렇담 무얼로 보답해야 하나?" 단지흥은 일순 흥이 깨지는 듯했다. 그때였다. 어디에선지 돌연 한 여인이 나타나 그들 앞에 우뚝 섰다. 이곳에 와서 제일 처음 본 그 치주를 닮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추상같이 싸늘한 얼굴로 단지흥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줄곧 용모도 청수하고 적이 맘에 드는 낭군님을 얻게 된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당신은 천하에 쓸모없는 남정네에 불과하군요.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에게 무슨 재간이든 가진 걸 낱낱이 말씀해 보세요. 우리가 듣고 무엇으로 보답을 받을지 결정하지요." "그래요 홍사(紅紗), 그렇게 해요!" 이 치주를 닮은 여인의 이름이 홍사인 모양이었다. 단지흥은 너무도 당혹스러워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자기에게 무슨 재간이 있단 말인가. 한 번도 이런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라 그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러워져서 시무룩해서는 힘없이 말했다. "나는 황제야." 이제 와서 그가 내세울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자 홍사라 불린 여인은 코웃음을 치며 머리를.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제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일단 내하교(奈何橋)를 건너오기만 하면 아무리 관직이 높고 지위가 높다 해도 그따위 것들은 다 피안에 던져 버려야 하고 가지고 올 수 없는 것이다. 황제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쓸모가 없었다. 단지흥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슨 재간이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홍사가 불쑥 물었다. "당신은 무예 같은 건 알지 못하나요?" 그 말에 단지흥은 반박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그는 너무도 반가워 대뜸 응답했다. "난 일양지공을 알고 있어." 여인들은 놀라는 기색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보아하니 이 여인들도 일양지에 대하여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홍사가 교태롭게 웃으며 다른 여인들에게 말했다. "저이는 물론 일양지를 알고 있을 거예요. 저인 대리 황제인데 저분이 일양지를 모를 리 있겠어요?" "맞아요. 당신의 일양지가 어떤 무예인지 모르겠지만 실로 재미있겠죠? 우리도 그걸 배우고 싶어요. 배워 주시겠지요?" 한 여인이 방싯 웃으며 홍사를 바라보고는 단지흥의 품에 안겼다. 그는 이 여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얘야, 그게 아니다! 나의 일양지는 여인들이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황제께서도 익히셨는데 우리 여인들이라고 못 배울 게 뭐예요? 우리같이 아리따운 여인들이 그 동작을 흉내내기만 해도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만일 이곳에 나쁜 놈들이 왔을 때 그들에게 그 동작만 보여 줘도 겁을 먹을 게 아니겠어요? 그럼 얼마나 좋겠어요?" 단지흥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를 이 여인들은 그저 장난으로만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가르쳐 주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일양지는 참말로 사내들만 할 수 있는 거야. 여인들은 음(陰)에 속하는데 어찌 일양지공을 배워 낼 수 있겠나? 내가 배워 줘도 공연한 짓일 테니 다른 걸 배우는 게 차라리 나아." 그 말을 듣자 여인들은 기분이 상했는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당신한테 일양지보다 더 좋은 게 있나요?" "너희들은 황제를 너무 깔보는구나. 대리 황제는 비록 큰 나라의 임금은 아니지만 고상한 것들을 적잖이 알고 있다. 악기를 가져 와, 곡을 연주해 줄 테니." 그러자 여인들은 다시금 낯빛이 환해졌다. 그녀들은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더니 그중 나이가 제일 어린 처녀를 단지흥 앞으로 밀어냈다. "악기요? 다른 것은 몰라도 악기에서만큼은 아마도 폐하가 우리보다 못할 거예요. 황제께선 내기를 하실 생각이 있나요?" '허 참, 갈수록 방자한지고. 이 조그만 계집애가 무슨 그리 대단한 재간이 있겠는가? 저 계집애가 나보다 악기를 더 잘 다룬다고? 어디 한번 솜씨나 좀 보자!' 단지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저 애가 나보다 악기를 더 훌륭하게 다룬다니 그렇담 저 애와 내가 각기 한 곡씩 타 보기로 하지. 너희들은 잘 듣고 공평하게 판결을 내려야 한다. 만일 이 처녀가 악기 다루는 재간이 나보다 나으면 내가 너희들한테 일양지를 펼쳐 보이지. 만일 나의 재간이 낫다면 너희들 모두 이 단지흥에게 작은 선물을 내놓아야 해!" 여인들은 기뻐하며 일제히 손뼉을 쳤다. "선물을 드리고말고요. 만일 우리가 지게 되면 우린 폐하를 얼마든지 만족시켜 드리겠어요. 하지만 우리 이 애는 지지 않을걸요." 여인들은 초미금(焦尾琴)을 상 위에 갖다 놓았다. 그 옆에 향로 하나도 갖다 놓고 향을 피워 놓았다. 향 연기가 가물가물 공중으로 피어 올랐다. 지옥의 하늘은 티없이 깨끗했다. 어린 처녀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아주 태연자약했다. 노련한 악사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초미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먼저 폐하께서 연주하세요." 단지흥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는 지옥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었다. 이 내기에서 처녀들한테 진다고 해도 일양지를 한번 보여 주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일양지는 사내들의 기공으로서 기(氣)와 신(神)을 응축시켜야만 양강(陽剛)이 이루어질 수 있는바, 여인들은 아무리 해도 그것을 몸에 익힐 수 없다. 만일 여인들이 익힐 수 있다면 그걸 음양지(陰陽指)라 하지 왜 일양지라 하겠는가? 하지만 그가 이런 사실을 터놓고 말하지 않으니 이 여인들이 어찌 그런 도 리를 알 수 있으랴. '지옥의 여인들이 인간세상의 아름다운 음악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내가 정성을 다해 연주해도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 아닌가.' 그는 팔소매를 거두며 고요히 침잠해 들어갔다. 대리 황제들은 대대로 학식과 무예, 덕망이 높았다. 단지흥 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거의 나무랄 데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일양지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젊은 나이에 벌써 천하에 드문 고수가 되었다. 그는 또 불학(佛學)의 대가로서 몇몇 선황들처럼 일찍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불경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아울러 악기에 대한 조예도 깊어 대리에서는 함께 논할 이가 드물었다. 그는 정신을 한곳에 모으고 <겸가( )>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아름다운 곡이었다. 여인들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음악을 들었다. 어떤 여인은 꽃을 바라보고, 어떤 여인은 그윽한 눈길로 단지흥이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마다 음악에 심취해 들어갔다. 단지흥도 신들린 사람마냥 지그시 눈을 감고 초미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윽고 단지흥이 연주를 끝내자 한동안 정적이 고요히 깃들였다. 잠시 후 누군가 짤막하게 탄성을 내지르자 이내 모두들 탄성을 지르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인들의 얼굴엔 감동의 빛이 어른거렸다. 한결같이 꿈속을 헤매 도는 사람마냥 도취된 눈빛으로 단지흥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낯색을 보니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에 잠긴 듯싶었다. 홍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황제가 연주하는 인간세상의 음악에 아마도 우리 이 애가 겁을 먹지나 않았는지? 얘야, 어떻게 황제와 시합을 하겠느냐?" 그러나 이 처녀는 겁내는 기색이란 조금도 없었다. 처녀는 말없이 웃음을 지으면서 단지흥이 물러선 후에야 천천히 악기를 무릎에 얹고 앉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오래도록 마음을 가다듬었다. 단지흥은 입가에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내심 이제 겨우 악기를 배우는 초학자에 불과한 이 계집아이가 어찌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 낼 수 있으랴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악기 줄을 퉁기기 시작했다. 언뜻 들어도 야무진 소리였다. 개울물이 돌돌 흐르듯 했다. 그 소리는 여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단지흥도 점점 그 소리에 빨려 들어갔다. 눈을 감고 곡조에 나긋나긋 몸을 흔들어 가며 초미금을 타고 있는 처녀를 단지흥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머리 속에 한 여인의 영상이 비꼈다. 치주의 모습이……. '아, 치주는 어디로 갔을까? 나와 치주 사이엔 진정 연분이 없단 말인가?' 그는 점점 더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한 순간, 여인들의 탄성이 터져 올랐다. 그 처녀의 연주는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단지흥은 언뜻 치주의 생각을 떨쳐 냈다. '이거 야단났구나. 내가 저 아이의 연주에 무심하게 대한 걸 알면 이 여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지옥의 선인들을 불경스럽게 대했다간 큰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음악을 감상했다. 이 처녀에겐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녀만의 독특한 주법이 있었다. '보아하니 이 지옥의 여인들한테는 누구한테나 감동적인 면들이 있구나. 이처럼 부드럽고 훌륭한 여인들을 인간세상에 보내지 않고 왜 가두어 둔단 말인가? 이곳이 아무리 좋다기로 필경 지옥이 아닌가? 적막한 것은 그만두고 오가는 손님만 해도 대개 무심하고 재미없는 사람들뿐이니 이 여인들이 어찌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겠는가?' 음악 소리는 사뭇 색다른 음조였다. 이 처녀는 자신의 심사를 악기에 실어 이별의 한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나보다 악기에 능한 것 같다. 하지만 이 어린 계집애가 어떻게 이런 조예를 갖추었을까? 천하의 기재다. 어찌 인정하지 않고 칭찬하지 않을 수 있으리. 저 아이의 수심 어린 마음을 풀어 주어야지.' 이윽고 연주를 끝내고 처녀가 다소곳이 몸을 일으켰다. 단지흥은 손뼉을 치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훌륭하군. 과연 인간세상의 음악과는 색다른 것이야. 이곳 음악은 정말 훌륭해, 훌륭해!" 단지흥이 탄성을 내지르자 악기를 연주한 처녀는 얼굴을 곱게 물들였다. 다른 여인들도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역시 폐하는 음악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폐하가 인간세상의 것보다 낫다고 하셨으니 우리 애가 이긴 셈이죠?" 홍사가 한마디했다. 순간 단지흥은 아연실색했으나, 지금 그는 지고 이기는 데는 더는 마음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홍사는 외치듯 말했다. "폐하, 당신은 일국의 황제이시니 약속을 지키시겠죠? 폐하는 방금 이 애가 연주한 곡이 인간세상의 것보다 낫다고 하셨으니 내기에 지셨어요. 지셨으니 우리에게 그 일양지신공을 가르쳐 주셔야 해요." 여인들은 깔깔 웃으며 단지흥을 둘러쌌다. 제14장 가슴이 없는 여인들 단지흥은 여인들의 성화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 여인들이 이처럼 검질기게 달라붙을 줄 진정 꿈에도 몰랐었다. 그는 이 여인들을 달래느라 땀깨나 흘리고 있었다. "일양지공은 사내의 양기(陽氣)를 요구하는데 너희들은 모두 연약한 여인들이야. 그러니 다른 걸 배우는 게 더 낫다니까 자꾸만 이렇게 성화를 대는구먼." 아무리 그래도 여인들은 막무가내였다. 홍사가 사뭇 쌀쌀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황제께선 일양지공을 빼놓고 뭘 가르쳐 줄 수 있죠? 그것말고 뭐가 또 있나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여인들에게 대리 단씨 가문의 다른 무공이라도 한 수 배워 주어야겠다. 그러면 더는 일양지공 얘기는 안 꺼내겠지.' "그럼 내가 아주 재미있는 걸 보여 주지." 그는 한쪽에 늘어서 있는 초 열 자루를 가져다 탁상 위에 한 줄로 세웠다. "이건 일양지공보다 훨씬 재미있어. 이걸 배워 두면 심심풀이로 아주 제격이지. 정말 재미가 있단 말야." 그는 초 열 자루를 향해 장을 내뻗쳤다. 그러자 열 자루에 하나씩 하나씩 불이 반짝 붙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가할 때 이 놀음을 하면 사람들을 퍽이나 즐겁게 해 줄 수가 있거든." 단지흥은 다감하게 말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여전히 웃음기 하나 없이 쌀쌀한 눈길이었다. "왜, 재미가 없어?" 단지흥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와 말없이 스무 자루의 초를 가져다 단지흥이 한 그대로 세워 놓았다. 그녀가 세워 놓은 초는 단지흥의 것보다 길이가 배나 되었다. 그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가볍게 장을 뻗쳤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무 자루의 초에 모두 불이 붙었다. 여인들은 아무 말도 않고 단지흥을 응시했다. 그녀들의 눈길에서는 실망스런 기색이 내비쳤다. "내가 지금껏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했지만 대리 단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 오는 일양지공은 단씨 가문 사람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배워 주는 게 아니다." 단지흥은 몹시 난처했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배워 주겠다고 대답한걸요. 기실 인간이 지옥에 이르면 늘 이런저런 욕심 때문에 시달림을 받게 마련인 거예요. 당신한테 사욕이 있는 걸 전 나무라지 않아요." 홍사는 의외로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기왕 이곳이 인간세상이 아니고 지옥인 바에야 일양지를 한번 보여 준들 어떻단 말인가? 이 여인들이 그걸 본다고 해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바에야……. 그렇담 그저 한번 보여나 줘 봐…….' 단지흥은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은 속세의 인간들과는 다르지요. 이곳의 여인들은 당신의 일양지공을 능히 익힐 수 있을 거예요." 홍사는 단지흥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급급히 덧붙였다. 단지흥은 지옥과 속세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는지라 이제는 어쩔 수 없겠다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럼 내 한 번 보여 주지." 일양지공은 도학과 불가 간의 기(氣)를 연마하는 공력에 기초를 두고 양강의 기를 얻는 고도의 무학이다. 하나 단씨 가문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일양지공을 몸에 지니지는 못했다. 일양지공은 이러저러한 사심이 생겨 버리면 도저히 익힐 수 없는 것이다. 일심으로 기를 길러 최고의 경지까지 공력을 연마해 내지 못하면 일양지공은 도저히 숙련할 수 없다. 일양지공은 원래 단씨 가문의 오랜 선조가 새로이 창안해 낸 것이었다. 그는 무슨 연고인지 출가하여 모든 외적인 것들과 연을 끊고 오로지 일심으로 기를 연마했다. 그렇게 5년 동안이나 기를 길렀다. 그러던 어느 날, 벽을 마주하고 좌정하고 있는데 돌연 그 동안 기른 기가 샘물처럼 용솟음쳐 나오는 신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한 갈래의 기가 손에 있는 양명대장경(陽明大腸經)의 오리(五里), 곡지(曲池), 삼리(三星)로부터 무명지의 상양혈(商陽穴)에 이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기에 못 이겨 손가락을 내치자 한 줄기의 기가 손에서 뻗어 나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맞은켠 석벽을 대번에 무너뜨렸다. 그는 깜짝 놀랐다. 자기가 기이한 무공을 창조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신비하여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보았다. 그 초수는 틀림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낙심하여 그만 땅바닥에 엎드려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순간 그는 인간이 무공을 배우게 된 이래 인간은 무공의 목적이 다만 신체 단련에 있다는 것을 점차 잊어버리고 늘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죽이는 데 써 왔음을 문득 떠올렸던 것이다. 자기가 만일 이런 기세(奇世)의 무공을 후대에 전수해 준다면 이로 인하여 살인을 하기가 더욱 쉽게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단씨 가문은 종래로 인의로써 사람을 대했으며 무공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삼가 왔었다. 하지만 이후에 후대들 가운데서 불초의 자손이 나와 조종의 전통을 배반하고 천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생각할수록 두려웠다. 한번 손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바다를 밀어낼 듯 기가 용솟음쳐 나와 석벽을 무너뜨리고 돌덩이가 가루가 되는 판이니 이런 위력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후과가 빚어질 것인가? 그는 자기의 이 무공을 멸해 버리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는 그대로 좌정한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을 때 그는 자신의 육체를 없애 버림으로써 이 무공도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고 작심했던 것이다. 그는 고요히 죽을 시각이 닥쳐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그때 언뜻 매 한 마리가 창천을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는 비둘기를 쫓고 있었다. 그 비둘기는 산 아래의 단씨 가문에서 그에게 날려보낸 전서비둘기였다. 그 전서비둘기는 화가 닥친 것을 알고 내리꽂히듯 급급히 땅으로 활강하기 시작했다. 비둘기는 그의 머리 위까지 수직으로 곧장 날아 내려왔다. 매는 곧바로 그 비둘기 뒤를 쫓았다. 그는 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팍하는 소리가 일며 순식간에 매의 털이 모조리 빠져 공중으로 풀풀 날렸다. 매는 그 길 로 황망히 도망쳐 버렸다. 그 순간 그는 마음속이 환히 트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기의 지력(指力)을 선행에 쓰기만 하면 좋은 점이 무궁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단지흥은 여인들에게 부득불 일양지공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는 이곳이 양세간(陽世間)이 아니고 음세간(陰世間)이므로 선행을 베풀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단씨 가문의 자손이 아닌 사람들에게 허투루 일양지공을 시전해 보여서는 안 된다는 조상의 훈시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어서서 한참 동안 정신과 숨결을 가다듬으며 기를 모았다. 그리고는 일양지 초수를 하나하나 차례차례 보여 주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쥐 죽은듯이 고요했다. 단지흥은 일단 일양지를 펼쳐 내기 시작하자 흥이 한껏 올라 수많은 절묘한 지법(指法)을 보여 주었다. 여인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새로운 초수가 펼쳐질 때마다 열렬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네 시위는 산지사방을 헤매면서 종일토록 단지흥을 찾아 다녔다. 아무리 해도 다 허사였다. 그들은 기진맥진하여 한 수림에 당도했다. 수림 안엔 인적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어떻게 하면 황제를 찾을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더했다. 분명히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기가 뭉클 솟아오르더니 황제의 종적이 묘연해지니 실로 황당한 일이 아닌가. "우린 워낙 폐하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말았어야 했네. 혹시 어느 놈이 무슨 미향(迷香) 같은 걸 써서 폐하를 쓰러뜨린 게 아닐까? 몽약이 섞여 있는 걸로 말이야." 선비가 힘없이 말을 꺼냈다. 기실 그들은 연기가 피어 올랐을 때 일각 정도 정신을 잃었었다. 그 연기는 선비 말마따나 미향이 피워 올린 연기로 미향 중에서도 아주 기이하여 바로 곁에서 맡은 사람에겐 그 연기조차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마치 몽유병에 걸린 것마냥 무의식중에 모든 걸 하게 되고,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에겐 독의 효력이 조금 떨어져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매우 무서운 것이었다. 하니 네 시위들이 그 사실을 알 리 만무였다. 그러나 농부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을 거네. 폐하가 어떤 분이신가? 미향으로는 우리 같은 사람도 쓰러뜨리지 못할 텐데 하물며 그따위로 폐하를 대적하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네!" 나무꾼과 어부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 일은 정말 괴상하이. 두 눈 뻔히 뜨고 있는데도 순식간에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으니 참말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우리들 가운데 누가 대리에 가서 나라일을 배치하도록 해야 할 것 같아. 그런 다음 천천히 폐하를 찾아보세. 황제의 무공으로 보아 그리 간단히 넘어가실 분이 아니니 그래도 늦진 않을 거네." 그러나 선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보기엔 그리 간단한 일 같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를 찾는 게 급선무네. 역시 이곳에서 잘 찾아보아야 해. 그리고 소림 무공의 각 문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종당에는 무슨 단서라도 잡히겠지. 우리가 이곳에서 찾지 못하면 화산으로 곧추 가야 하네. 화산에는 필시 가실 것이니 거기 가면 혹 폐하를 만날지도 모르지." 세 사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흥이 일양지공을 모두 시전해 보이자 여인들은 일제히 탄성을 내지르며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홍사가 나서서 칭찬을 늘어놓았다. "황제께선 참말 수고하셨어요. 이런 멋진 무공을 어찌 쉽사리 구경할 수 있겠나요? 만일 황제 폐하께서 이 음세간에 오시지 않았던들 우린 결코 이런 절기를 구경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른 여인들도 너나할것없이 한마디씩 찬사를 던졌다. 단지흥은 자기가 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폐하께서는 이곳에서 쉬고 계세요. 가서 새 의복을 가지고 오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