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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25편 (25/70)

2026-09-30 18:32:08 조회 18
"자넨 저승과 지옥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나? 이곳이 바로 저승으로 가는 입구일세. 사람들은 이곳을 망향대(望鄕臺)라고들 하지. 한번 올라와 보려나?" 노파의 말을 듣고 단지흥은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내가 죽었단 말인가? 언제? 어찌하여 내가 이 지옥의 망향대에까지 오게 되었단 말인가? 아니다. 난 그 사람을 따라 치주를 찾으러 온 것이다.' "한 선생이 소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가 저에게 치주를 팔겠다고 했지요. 저는 죽은 적이 없습니다." 단지흥은 당혹스러워서 황급히 몇 마디 주워섬겼다. 그러자 노파는 눈을 부릅떴다. "난 백여 살을 살았는데 무슨 일이든 안 겪었겠나? 내가 뭣 하러 자넬 속여? 자, 어서 이리로 올라와 봐! 올라오기만 하면 내 말을 믿게 될 테니. 여기서는 대리도 볼 수 있다구." 노파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의 팔을 덥석 잡더니 망향대로 끌어올렸다. 망향대 위에 올라서니 아래로 구름송이들이 둥둥 떠다니고 아주 먼 곳까지 내려다보였다. 운무 사이로 멀리 죽루화동(竹樓晝棟)이 보였는데 그 어름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은 아닌게아니라 대리였다. 단지흥은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란 짧고 짧아 천추가 한 순간이라더니 참말로 그 말이 맞구나. 한데 언제 어떻게 죽은 게야? 도시 믿기지 않는군……. 듣기로는 몽약(夢藥)이라고 꿈속을 헤매게 만드는 약이 있다더니 내가 혹시 그 약에 중독된 건 아닐까…….' 그는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찌푸리며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성곽들은 보일락말락 희뿌연하고 사람의 그림자도 그저 조그맣게 어른거릴 뿐이었다. 그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는 것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다. "더 똑똑히 볼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러자 노파는 비시시 웃었다. "자세히 보겠다구? 자세히 봐서 뭘 하나? 자넨 이젠 죽은 몸이라 망향의 일념이 가득할지라도 어렴풋이밖에 볼 수 없는 거라네." 단지흥은 평소 불경을 좋아했는데 그중 《금강경(金剛經)》을 제일 즐겨 읽었다. 사람들은 《금강경》을 읽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들 했는데 어찌하여 자기는 부처님을 만나 보지 못하는가? 그는 생각할수록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 이런 일을 당하는 건 불심이 깊지 못해서일까……. '부처님을 믿어야만 한다, 믿어야만 한다! 부처님의 힘은 끝간 데없이 미치거니 어찌 감히 볼 수 있다고 내가 이리 흔들린단 말인가?' 단지흥의 얼굴엔 짙게 그늘이 비꼈다. 노파는 대번에 그의 심사를 알아챘다. "여보게, 자넨 어째서 이곳까지 끌려왔는가?" 그 순간, 멀리에서 초롱불이 가물가물 비쳐 왔다. 그리고 그 뒤로 많은 사람이 줄지어 따라오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세 보니 열여섯 사람이었다. 그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이제는 하나둘 얼굴도 또렷이 보였다.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 여인들을 보고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같이 천하 절색이 아닌가. 그녀들은 저마다 궁등(宮 )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마침내 단지흥 앞에 가까이 와 서더니 개중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황제 폐하, 어서 용차(龍車)에 오르세요!" '무슨 용차를 타란 말인고? 용차가 어디에 있다고……. 그렇지, 이전에 경전을 배울 때 누군가 불가의 인도를 받아 용차를 타고 천정(天庭)에 올랐다고 하더니 나도 이제 그렇게 되는 모양이로구나.' 단지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주저하지 않고 의연히 허공으로 발을 올렸다. 그러자 과연 눈앞에 용차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용차에는 말을 네 필 맸는데 두 마리씩 짝을 지어 굴레를 씌워 놓았다. 마부는 묘령의 여인으로 단지흥이 차에 오르자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단지흥은 마치 인간세상에 돌아온 듯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다시금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 금은주옥이 가득 놓여 있었던 것이다. 마차는 마치 걷는 것처럼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시위는 어찌 되었을꼬. 내가 죽은 줄도 모르고 찾고 있을 테지……. 염라대왕을 만나거든 그들을 대리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원하리라.' 한 순간 덜컥하더니 마차는 나는 듯이 내달렸다. 그렇게 한 나절이나 달려서야 마차는 어떤 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맨 처음 말을 건넨 여인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도하였으니 폐하께선 어서 내리시옵소서." 단지흥은 마차에서 내려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저만치에 옥선원(獄仙園)이란 명패가 보였다. 옥선원 안에는 기이한 화초들이 가득 자라고 있었는데 모두 대리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장미와 등나무를 접목시킨 것인지 등나무에 장미꽃이 만발해 있기도 했다. 만화방초가 우거져 춘색이 짙었다. '이곳은 대리에 비겨도 손색이 없구나. 이곳의 꽃들이 조금 희귀하긴 하지만. 하나 차 꽃이 일제히 만발하는 대리의 그 진세(陣勢)에는 비길 바가 못 된다.' 여인들은 그를 옥선원 안 화청(花廳)으로 안내해 들였다. 그곳에는 옥석으로 된 화분 몇 개가 있었는데 거기에 비단을 씌워 놓았다. 저승의 제왕도 사치를 즐기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흥은 보는 것마다 속세와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 것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화청에는 이십여 개의 궁등이 걸려 있었다. 궁등의 색깔은 모두 검었다. 무슨 기름으로 칠했는지 자못 기이했다. 단지흥이 궁등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을 보고 좀전의 그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 궁등은 사람의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거랍니다. 나쁜 짓을 한 자들의 기름이어서 불을 켜면 검은 연기가 많이 나지요." 단지흥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되물었다. "왜 좋은 사람의 기름은 쓰지 않소?" 그러자 여인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황제께선 재미있으시네요. 좋은 사람은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유쾌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왜 그런 사람들의 기름으로 등불을 켜겠어요?" 단지흥도 풍류를 즐기는 황제였다. 평소 그는 귀비들과 후원을 거닐며 한담을 나누길 좋아했었다. 그는 그 나날들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양세(陽世)가 아닌 이곳 음세(陰世)에서 남의 미움을 사면서 고생할 생각을 하니 갈수록 마음이 착잡해졌다. 여인은 다소곳이 그의 곁에 서 있다가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조용한 목소리로 일렀다. "황제 폐하, 기억해 두세요. 누가 와서 폐하를 찾을 거예요.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응하셔야 해요. 그러지 않으시면 큰 재앙을 만나게 되고 폐하의 황족들한테까지 화가 미칠 수 있어요." 단지흥은 저승에까지 온 몸인데 이제 와서 얼마나 더 큰 재앙을 만나랴 싶었으나 황족에게까지 화가 미칠 수 있다는 말에는 근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여인들은 물러가고 그만 홀로 가슴을 졸이며 초조하게 서있었다. 이윽고 잘랑잘랑 장신구 부딪는 소리가 언뜻 들리더니 누군가 가까이 오는 듯 그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곧 향내가 풍겨왔다. '그래, 이젠 드디어 지옥의 제왕이 오는 모양이로구나. 한데 지옥의 제왕은 필시 사내일 텐데 무슨 향내가 이리도 그윽하단 말인가?' 단지흥은 웬지 몽롱해지면서 생각을 더듬었다. 이윽고 사람의 자취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발걸음도 옮기지 않고 그대로 천천히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녀는 단지흥에게 예를 갖추며 정중히 말했다. "황제 폐하, 오시느라고 신고가 많으셨습니다." 단지흥은 그 눈부신 자태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언뜻 눈길을 들었다. 그 여인을 바라본 순간, 그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여인은 바로 치주, 치주가 아닌가. 사내의 간장을 녹이던 그 교태 어린 웃음까지, 그녀는 틀림없는 치주였다. 단지흥은 뭐라 말하려 했으나 심하게 가슴이 고동쳐서 도무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여인은 치주 같으면서도 치주와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치주는 좀 살이 올랐으나 여인은 여위었고, 치주는 무던한데 여인은 사뭇 영민해 보였다. 치주가 웃을 때는 볼우물이 약간 팰 정도지만 이 여인은 아주 쾌활하게 웃는 것이었다. 여인이 입고 있는 옷도 치주가 입던 옷과는 썩 다른 것이었다. 여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시겠습니다. 어서 쉬셔야 할텐데 제가 바삐 지내다 보니 그만 접대가 늦어졌습니다. 달리 생각지 마십시오." 단지흥은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으나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과히 신경 쓰지 마시오! 한데 이곳은 어디오?" 그러자 그 여인은 또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문을 열었다. "지옥에는 칠중천(七重天)이 있는데 폐하께선 지금 그 첫번째 중천에 계시옵니다. 다른 말로 이곳을 망우천이라고도 하는데 지옥에서 가장 향락을 누릴 수 있는 곳이지요. 이곳에 이르러 갖은 향락을 다 누리고 나서 때가되면 누군가가 와 데리고 갈 겁니다. 그때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이는 서방(西方)으로, 도교와 인연이 있는 이는 선경(仙境)으로 가게 될 것이에요. 오로지 이곳에서만 속세에서 받아 오던 번거로움에서 해탈되어 훌륭한 보응을 받게 되지요." 아무리 견식이 넓다 한들 단지흥은 지옥은 처음 오는지라 무어라 할말이 없었다. 그는 묘령의 이 여인에게 그저 머리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여인은 섬섬옥수로 단지흥을 가볍게 건드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단랑(段郎)님, 저는 당신이 평소에 선덕(善德)을 많이 베풀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았던들 당신은 이런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실 거예요. 이곳의 모든 것을 마음껏 향유하세요." 그녀는 단지흥의 손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이 와 닿자 그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지고 기분이 미묘해졌다. "단랑님, 눈을 감으세요. 저를 따라 낙원 선경으로 가십시다." 단지흥은 불가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지라 눈을 떠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 여인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많은 층계를 올라갔다. 속으로 세 보니 팔백 계단도 넘을 듯싶었다. 선경이란 이처럼 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인가. "당도했어요, 폐하. 눈을 뜨세요." 단지흥은 눈을 번쩍 떴다. 너무나 오래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한순간 가물가물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러더니 차츰차츰 하나 둘씩 그곳의 정경이 눈에 잡혀 왔다. 그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그만 입이 헤벌어지고 말았다. 눈길 미치는 곳마다 여인, 여인…… 여인 천지였던 것이다. 그녀들은 일제히 두 사람 주위로 몰려왔다. 언뜻 보기에도 대리 황궁의 궁녀들보다 많은 듯싶었다. 여인들은 저마다 미색이 뛰어나고 저마다 교태를 부리고 추파를 던지며 단지흥과 정을 나누고 싶어했다. "이곳은 천경(天境)인데 무릇 이곳에 와서는 모든 향락을 다 누릴 수 있지요. 인간세상에서는 만사에 규범을 따라야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런 제한도 없으니 걱정 마시고 마음껏 누리세요. 이곳이 진정 선경이지요. 자, 보세요. 이곳이 바로 왕이 성교하는 꿈을 꾸는 곳이랍니다." 함께 온 여인은 단지흥을 바라보며 병풍을 가리켰다. 단지흥은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큰 병풍을 바라보았다. 병풍에는 숱한 미녀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미녀들은 하나같이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다만 한 여인만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는데 수태를 한 듯 좀 뚱뚱한 편이었다. 단지흥은 그 여인에 대해 물어 보려다가 갑자기 얘기 하나가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꿈에 선녀와 성교했다는 얘기였다. 옛날에 한 선비가 친구와 함께 들놀이를 나갔다가 우연히 어느 헐망한 절에 당도해 그곳에서 병풍을 보게 되었다. 병풍 안에는 머리칼을 풀어헤친 미녀가 그려져 있었다. 선비는 병풍 속의 그 여인을 보자마자 그 미녀를 한입에 꿀꺽 삼키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났다. '내가 만일 저 여인과 단 며칠이라도 아기자기하게 보낼 수 있다면 한평생 원이 없으련만.' 그가 이처럼 달콤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한 순간 그 그림 안에 있는 미녀가 웃으면서 손을 저어 그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발을 내밀어 병풍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하나 병풍 안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선비는 그제야 자기가 선경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고 경관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옷을 벗고 천천히 침대에 올랐다. 두 사람은 그후로도 오랫동안이나 향락을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러자 미녀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에구머니나, 사람들이 와요! 어쩌죠?" "사람들이 오는 게 뭐 어떻소?" 선비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 답답하시네요. 사람들이 오면 들통이 나잖아요. 이곳은 선경이어서 들통이 났다가는 큰 화를 입는다구요." "그럼 어떻게 하지? 어디 숨지?" 선비는 흠칫 놀라며 당황하여 정신없이 허둥거렸다. 미인은 잠자코 생각을 굴리다가 이내 묘안을 하나 떠올렸다. 미인은 급히 선비를 침대 밑으로 들어가게 했다. 뒤미처 한 무리나 되는 미인들이 병풍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은 모두 미색이 빼어난 선녀들이었다. 그녀들은 미인을 대령해 놓고 다짜고짜 캐물었다. "넌 날마다 이곳에 숨어 뭘 한 게야?" "뭐 별로요! 한 것도 없어요!" 이 미녀는 능청스럽게 딱 잡아뗐다. 그러자 선녀들이 달려들어 목이며 겨드랑이며 발바닥이며 정신없이 간질여댔다. 그래도 여인은 실토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재수 없게도 나이 어린 선녀 하나가 우연히 허리를 굽히다가 침대 밑에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선비를 발견했다. "아이, 이봐요, 여기에 좋은 물건이 있군요." 선녀들은 와 하니 달려들어 선비를 침대 밑에서 끌어냈다. 끌어내고 보니 사내인지라 그들은 저마다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들은 서로 밀치락달치락 뒤로 물러서면서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선비는 와들와들 떨면서 단단히 마음을 사려 먹고 백배사죄하며 선녀들에게 호소했다. "선인을 범했으니 실로 큰 죄를 지었나이다. 이번 한 번만 어여삐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천만 뜻밖으로 선녀들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녀들에게서 그 무슨 대로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선녀들은 선비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말했다. "참말 영준한 사내를 숨겨 두었구나." 선녀들은 오히려 이 미녀를 부러워하면서 선비와 미녀를 번갈아 보았다. 선녀들은 저마다 선비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개중에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가장 아름다웠는데 그녀가 선비의 여인에게 말했다. "넌 이미 시집간 몸이다. 그런데 그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어서야 되겠니?" 미녀는 고개를 푹 숙일 뿐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자 선녀들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모두들 이 여인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를 틀어 올려 준다고 성화를 부려댔다. 그녀들은 머리를 빗어 주면서 노래를 불렀다. 사내는 검을 차고 여인은 머리 단장을 해야 하거니 넌 박씨 감추는 걸 잊지 말고 삼단 같은 머리칼도 틀어 올려야 하리.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길게 여운을 끌며 사라져 갈 무렵 갑자기 무섭게 우레가 울어댔다. 붉은 옷을 입은 선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이봐요, 선비님! 어서 떠나세요, 어서요! 안 떠나면 큰 화가 미쳐요!" 선비는 크게 당황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숨을 데라곤 아무데도 없었다. 문득 붉은 옷을 입은 선녀가 궤짝을 발견하고는 그 모서리 뒤에 숨겨 주었다. 뒤미처 천신(天神)이 하늘에서 곧장 내려왔다. 흉악하게 생긴 천신은 손에 괴상한 칼을 들고 선녀들에게 소리쳐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 선녀들은 기겁을 하며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채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흉악한 천신은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선비는 겁이 덜컥 났다. 들키는 날에는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병풍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서생, 아직도 안 나오시오? 서생 빨리 나오시오!" 소리를 지른 사람은 바로 이 절의 중이었다. 우연히 지나치다가 병풍을 보니 웬 선비 하나가 궤 뒤에 숨어 사방을 살펴보며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불쌍한 중생을 구제해 주자고 냅다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선비는 누가 자기를 부르기에 소리난 쪽을 바라보니 먼 곳에서 중이 애가 달아서 손짓을 해 가며 자기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궤 뒤에서 얼른 뛰쳐나왔다. 그 순간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일순 악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이마의 식은땀을 쭉 훑어 내며 주위를 둘러보니 그는 웬 헐망한 절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눈앞엔 병풍이 하나 떡하니 서 있는데 그 안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들이 가득 그려져 있고 개중에서 한 여인만이 머리를 틀어 올린 젊은 부인이 되어 있었다. 단지흥은 세속에서 꿈이라 회자되던 일을 이곳 지옥에서 두 눈으로 뻔히 보게 되자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는 넋 나간 사람마냥 골똘히 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언뜻 머리를 풀어헤치고 엷은 천을 걸친 여인들이 한발 한발 그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들은 그야말로 한 송이 꽃 같았다. 예닐곱 되는 듯싶었다. 여인들은 그에게 바싹 다가오더니 그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 냈다. 그리고는 반짝 안아다가 커다란 온천에 들여놓았다. 뜨끈뜨끈한 온천 물에 몸을 담고 누워 있노라니 기분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지흥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윽고 미녀들도 가슴만 가린 채 옷을 홀딱 벗고 호호 웃으며 온천물에 뛰어들었다. 그녀들은 단지흥의 혈도를 가볍게 안마해 주었다. '지옥이 이처럼 좋은 곳일진대 사람들은 지옥을 왜 두려워한단 말인가?' 단지흥은 여인들의 손길이 닿자 차츰차츰 욕정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페하, 폐하께서 제 머리를 틀어 올려 주시지 않겠나이까?" 한 여인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새빨간 입술은 언뜻 욕정에 불붙은 듯했다. 그녀의 그 불타듯 한 입술은 단지흥의 가슴에도 거세게 불을 지펴 놓았다. '지옥도 다를 바가 없구나. 인간들이 원래 이러할진대 난 왜 속세에 있을 때 늘 욕정을 절제했던가? 지옥에서도 이렇듯 사무치도록 욕정을 갈구하게 될 줄 내 어찌 알았으랴?' 처녀는 단지흥의 심사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사뭇 부드럽게 속살거렸다. "황제 폐하, 저희들은 인간세상의 여인들과 비길 바가 못 되옵니다." 여인은 눈동자를 초롱거리며 물 안에서 단지흥을 꼭 끌어안았다. 여인의 몸은 황홀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단지흥은 아찔하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평소 색을 멀리해 왔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단지흥은 황제의 체모를 염두에 두고 다소 절제하며 지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지금에 와서는 속세의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인간의 욕망이 뭐가 잘못된 것이랴? 지금까지 욕망을 절제했다면 오늘은 그것을 보상받아 기꺼이 즐겨야 하리라. 네 시위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선 채 단지흥이 그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이 까물까물 어두워지더니 땅속에서 연기가 물씬 솟아올랐다. "큰일났다!" 선비가 소리를 지르며 총망히 뛰어갔다. 나머지 세 사람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화급히 내달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큰 나무 뒤쪽으로 난 발자국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폐하, 폐하!" 네 사람은 경황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만 같았다. 그들은 안타까이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목이 쉬도록 불러도 단지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네 사람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각자 흩어져 찾아보자고 입을 모았다. 단지흥은 더없이 즐거웠다. 그는 선대 제왕들 중 유왕(幽王)이 날이면 날마다 황음무치한 생활에 빠져 쾌락만을 좇고 국사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책에서 읽고 늘 일상의 교훈으로 삼았었다. 색에 미친 황제가 조국강산을 망쳐 놓았다는 사실에 통분해 그는 책상을 내리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제왕이 아니라 한가로운 망인(亡人)일 따름이다. 조국강산이 그와 무슨 상관이요, 그것을 애써 지킨들 무엇 하겠는가? 그는 향락에 빠져 세상만사 오만 근심 걱정을 다 잊고 있었다. 발밑에도 여인이요, 무릎에도 품속에도 머리맡에도 여인, 여인들이 그를 휩싸고 돌았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살을 섞지는 않는지 그녀들은 한 번도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꿈꾸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왕이 이렇듯 나날을 허비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무릎 위에 앉은 미녀가 눈을 깜박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