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4편 (4/70)
막북삼괴는 제각각 속궁리를 해 보았다. '말을 들어 봐서는 강호에서 이름난 명인 같은데 천룡사를 아주 만만하게 보고 있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큰소릴 칠 수야 없지. 대체 누구인가? 도시 알 수가 없군. 강호에 이름이 뜨르르한 서역 구양봉인가? 아니면 천하 제일의 방(努)인 개방(芍幇) 방주 소씨 거렁뱅이? 그도 아니면 금방 낭패를 보고 달아난 전변노괴?' "어서 썩 나와! 정작 코빼기도 못 내밀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누군지 어서 낯짝을 보이란 말야." 왜금차호가 성마르게 소리쳤다. "좋아, 좋아. 정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 존안을 보여 주지. 상대방은 깔깔 웃었다. 순간 막북삼괴 앞으로 짙은 연기 같은 것이 확 끼쳐 오더니 이내 스멀스멀 사라지고 희뿌여니 사람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이윽고 뚜렷이 상이 잡혔다. 참 괴상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막북삼괴라고 자칭하는 그들보다도 더 괴상망측한 몰골이었다. 머리 꼭지는 대추씨처럼 뾰족하고 눈은 수수알처럼 작은데다가 가늘디가는 목은 남들보다 곱절이나 길었다. 그런가 하면 그나마 다리라고 붙은 것은 몽톡하니 짧아서 흡사 키 낮은 관목 사이에 세워 놓은 밀랍 인형 같았다. "어때, 실컷 봤냐? 그래, 보신 소감이 어떤가?" 그는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며 말했다. 왜금차호는 그 생긴 모양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천하에 자기보다 못생기고 키가 더 작달막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 보면 볼수록 자기보다 더 못난 것이 신통해서 그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재미있는데,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분명 재미있다 그랬겠다? 재미있긴 뭣이 재미있냐?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마냥 날 두려워했을 텐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만 만하게 보인다 그거지?" 대추씨 머리는 수수알 같은 눈을 모로 뜨며 발끈했다. 그러자 왜 금차호는 배를 부여잡은 채 간신히 한마디했다. "아이고, 만만하고 뭐고 그래 그 꼴을 해 가지고 나한테 상대나 되겠느냐? 나보다도 목 하나는 없겠는걸. 그래 가지고 무슨 수로……." 왜금차호는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하고 또다시 웃어젖혔다. "그래, 만만하단 말이지? 정말 내가 두렵지 않단 말이지? 꼴같 잖게 허풍이 센 녀석이로군. 사람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날 무서워했다! 내 친어머니마저도 날 무서워했다구. 그런데도 뭐? 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내 이름이 뭔지 알기나 해? 이름만 대도 너희 놈들은 벌벌 떨 거다." 막북삼괴는 그 말에 코웃음만 쳤다. 세상 구경 할 만큼 하고, 그 만큼 견식도 넓다 할 수 있는데 이름 때문에 벌벌 떤다는 말은 또 금시초문이 있다. "내가 누군고 하니, 바로 운남의 충피(蟲皮)다!" 그러자 막북삼괴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대리에는 강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인물이 여럿 있는데, 그중 으뜸이 천룡사 고승들이고, 황족 단씨 가문의 몇몇 고수들도 손꼽을 만했으며 또 대추씨 머리 이강(壽羌) 만족(蜜族) 충피 역시 결 코 매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충피는 운남에서도 독을 제일 잘 쓰기로 유명했다. 막북삼괴도 충피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는 터이나 그 충피가 이렇듯 한심하게 못났을 줄은 정말 생각 밖이었다. 세타명사는, 내심 겁이 나면서도 명성에 걸맞지 않게 몰골이 너무나 한심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 이것 봐라, 웃어? 이 운남에서도 대놓고 내 면전에서 웃는 사람이 없고, 하물며 한 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대리 단씨네도 나를 보고 함부로 웃지 못하거늘. 감히 네 놈들이 나를 보고 웃어 ? 그렇담 네 놈들이 대리 단씨네보다 더 세다는 뜻인가?" 그래도 세타명사는 코방귀만 뀌었다. '쳇 이름만 뜨르르했지, 이제 보니 다 허명이었군, 허명! 대추씨만한 녀석이 세면 얼마나 세다구 저따위로 거들먹거리는 거야. 기분도 그렇잖은데 어디 오늘 실컷 곯려나 줄까보다.' 그러다가 세타명사는 문득 백응향비의 상세(傷勢)가 걱정이 되었다. 마냥 입씨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계속 지체되면 백응향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는 역정을 내듯 시답잖게 한마디 내뱉었다. "됐다, 됐어! 충핀지 뭔지 대충 내막을 알았으니 어서 물러가기나해!" 충피는 막북삼괴가 이렇듯 무례하게 나오자 어이가 없었다. 그는 발끈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내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도저히 안 되겠다. 어디 너희 세 놈 다 오늘 내 손에 한번 죽어 봐라." 그러자 세타명사는 웃으면서 침을 퉤퉤 뱉었다. "대사막을 주름잡는 우리 막북삼괴가 겨우 이까짓 대리국 정도를 겁낼 성싶으냐? 보자 보자 하니까 이젠 어디서 쥐씨알만한 놈까지 걸려들어 생 난리를 피우는군. 어디 한번 덤벼 봐, 덤벼 보라니까." "하, 이거 정말 가관일제그려, 가관이야!" 충피는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자 왜금차호도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손바닥만한 대리국에 거추장스런 게 뭐 이리도 많아. 우리 삼형제가 천룡사에서 당한 분풀이나 해 줘 버려? 그나마 여기서 그 수치를 씻어 버리지 않으면 장차 무슨 낯으로 강호에 나선단 말인가. 좋다!' 왜금차호는 백응향비에게 말했다. "형님, 여기 좀 계시우. 내 동생과 더불어 저 놈에게 혼찌검을 내 줘야겠수." 백응향비는 그저 땅딸보를 바라보며 입술만 실룩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개중 가장 세심하고 재간 있는 위인은 백응향비였다. 그는 늘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둘째의 성미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간신히 죽다 살아난 백응향비로서는 도저히 말리려야 말릴 염도 못 내고 그저 두 아우가 하는 양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볼밖에 도리가 없었다. 충피는 두 사람이 다가들자 온몸을 비틀어대며 히히거렸다. 왜금차호는 이 난쟁이 괴물과 싸울 생각을 하니 신명이 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싸울 때면 언제나 키 때문에 깡충깡충 뛰어오르며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 난쟁이 괴물과는 그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수월하겠는가? 자기가 훨씬 더 크니 내려다보며 난쟁이 괴물의 가슴패기를 마음대로 콱콱 내지를 수 있으리라. 땅딸보 왜금차호는 난쟁이 괴물에게 닥치는 대로 주먹을 내지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 망할 놈의 자식, 네 눈엔 우리 막북삼괴가 만만해 보이더냐? 난쟁이 똥자루만한 녀석이 겁도 없이!……" 왜금차호는 주먹으로 충피의 머리통을 투닥투닥 방망이질을 해댔다. 바위라도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머리통을 북 치듯이 하는데도 충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 히 서서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세타명사는 한곁에 물러서서 지켜 보고만 있다가 사세가 영 이상하게 돌아가자 안 되겠다 싶어 잽싸게 달려들어 난쟁이 괴물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충피는 끄떡도 안 했다. "흥, 감히 먼저 손을 쓰다니, 버르장머리없는 녀석들이로군. 어이, 거기 땅딸보! 내 네 녀석부터 손을 봐 주겠으니 어디 한번 맛을 보아랏!" 충피는 왜금차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자 왜금차호는 대로 하여 외쳤다. "이 멍청한 놈아! 다른 놈들은 널 무서워하는지 물라도 우리 막북삼괴는 어림도 없어. 너 따위는 시들방귀로밖에 안 여겨!" "시들방귀고 나발이고 주둥아리 닥치고 그걸 보기나 하라니까!" 충피는 손가락으로 왜금차호의 주먹을 가리키며 여유작작 내뱉었다. 세 사람은 일제히 왜금차호의 주먹을 쳐다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충피에게 연신 휘둘러대던 왜금차호의 한쪽 손이 이미 시꺼멓게 죽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손가락사이로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등골에 오싹 식은땀이 돋았다. "너 이…… 이 놈…… 이 놈……." 왜금차호는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마에서는 땀이 주르르주르르 흘러내렸다. "하하하…… 네 놈은 나한테 중독됐어. 네 놈이 꼼짝 않고 가만 있는다면 반시간은 더 살 수 있겠지만, 한마디할 때마다 그만큼 명이 줄어든다는 걸 명심해라. 말 한마디에 살아 있는 시간이 줄어든대도 마냥 지껄일지 내 어디 두고 보리라." 충피의 그 한마디에 왜금차호는 낮빛이 사색이 되어서는 입도 벙긋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백응향비는 애가 타서 충피에게 몇 마디 사정해 보려고 손을 내둘렀지만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왜금차호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털썩 엎어져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서는 정신없이 대굴대굴 굴렀다. "나…… 나…… 나 좀……." 그는 눈까지 벌겋게 충혈되어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마치 목이라도 졸린 사람마냥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형님, 아이고, 형님!" 세타명사는 왜금차호와 백응향비를 번갈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몸을 홱 돌려 충피에게 덮쳐 들었다. 충피는 한바탕 박장대소를 하더니 세타명사에게 한번 잡아 보라는 듯 요리 피하고 조리 피했다. 충피가 하도 날쌔게 피하는 통에 세타명사는 헛손질만 하다가 숨을 헉헉거리며 제자리에 우뚝 섰다. "이 독충 같은 놈아!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 행패냐?" 세타명사는 악에 받쳐 으르렁댔다. "그래, 네 놈 말마따나 네 놈들과는 원수진 일이 없지! 천룡사라면 몰라도." 충피는 여유만만하게 한마디 던졌다. 그 말에 세타명사는 귀가 번쩍 뜨여 황급히 말했다. "우리도 천룡사와 원수간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한편인 셈이다. 자, 어서 해독약을 써서 둘째형님을 살려내 넷이 함께 천룡사로 가서 원수를 갚자!" 충피는 있는 대로 입을 삐쭉거리며 같잖다는 듯 세타명사를 쏘아 보았다. "그따위 얕은 꾀를 쓰려 들다니! 뭐? 네 놈들하고 같이 가서 원수를 갚아? 천룡사와 원수진 것도 나고, 원수를 갚는 것도 나다! 네깟 놈들이 그래, 도움이나 된다더냐?" 세타명사는 면박을 당하자 무안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왜금차호는 온몸을 불로 지지는 것만 같아,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기 몸을 마구 잡아뜯었다. 옷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 살점을 마구 잡아뜯으며 성난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백응향비와 세타명사는 처참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이든 다 들어줄 테니 제발 둘째형님 좀 살려 주슈." 세타명사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애원했다. 그러나 충피가 들어줄 리 만무였다. 되레 그는 웃음을 질질 흘리며 왜금차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본자 세타명사는 한껏 독이 올라서 이를 사리물고 사납게 충피에게 덮쳐 들었다. 충피는 슬쩍 피하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네깟 막북삼괴들이 날 어쩌겠다구? 까마귀 링 잡아먹을 생각하지도 마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충피는 손을 한 번 척 내둘렀다. 그러자 시뿌연 연기가 세타명사에게 훅 휘몰려 왔다. 세타명사는 얼른 몸을 솟구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밑에서 뭔가가 힘껏 잡아채는 듯한 감을 느끼며 그는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이를 치고는 벌렁 나자빠졌다. 그리고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 애를 썼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희들 막북삼괴가 내 손아귀에 들어온 이상은 삼괴가 아니라 세 마리 벌레에 불과하다. 이 충피보다 더 작고 못난 세 마리 벌레 말이다. 흐흐흐……." 충피는 건들거리면서 세타명사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막북삼괴야, 얼마나 오래 버티나 보자. 죽지 않고 살아나는지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리라!" 세타명사도 그만 중독이 됐는지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죽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고, 가려워! 아이고 나죽는다, 나 죽어." 그리고는 왜금차호처럼 자기 옷을 마구 찢어발기고 제 몸을 있는 대로 잡아뜯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가려움을 견딜 수 없는지 마침 곁에 비수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자 그는 냉큼 집어 들어 제 살점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타명사의 온몸은 피가 낭자해졌다. 그는 몸을 뒤틀며 충피에게 쉰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살려 주시오, 제발 좀 살려 줘……." 그러나 충피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날더러 살려 달라고? 제 손으로 할퀴고 제 손으로 칼질을 해대고선 날더러 살려 달라니, 그래 내가 어떻게 살려 준단 말이냐? 살려 주려 해도 살려 줄 재간이 있어야지." 그러자 세타명사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으며 악다구니를 썼다. "네 이 놈 충피야, 내가 죽어 귀신이 된다 해도 네 놈을 끝까지 찾아내 씹어 먹고야 말리라. 네 놈을 꼭 잡아……." 그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일순 고개를 푹 떨궈 버렸다. 그리고는 더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한켠에 쓰러져 있는 왜금차호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는 이미 숨이 멎은 지 오래였다. 충피는 왜금차호 쪽으로 건들건들 걸어가더니 능청스레 가벼운 한숨까지 지었다. "그래도 네 놈은 조용히 뻗었군그래." 두 눈 뻔히 뜨고 생사를 같이하기로 굳게 맹세한 형제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백응향비는 손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다.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충피도 저주하고 일어나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도 저주하면서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이윽고 충피가 설핏 곁눈질을 하더니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넌 맏이이면서도 아우들이 다 죽어 넘어가는 걸 구경만 하는구나. 그리도 살고 싶으냐?" 충피는 백응향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백응향비는 꺽꺽거리며 말을 못하다가 간신히 한마디 토해냈다. "왜 우, 우리를 죽이는……." 충피는 히죽 웃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나도 천룡사의 일양지공 비본을 노린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날 이때껏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구. 만일 너희들이 일양지공을 익혔다면 지금 이 꼴로 죽지는 않을 게야……." "우리가 도, 돕겠다는데도 왜 우리를 죽이는……." 백응향비는 가까스로 한마디 한마디 토해 냈으나 도저히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충피는 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않고 째지는 소리로 소름 끼치게 웃어젖혔다. "아무튼 넌 이젠 죽는다. 네 놈이 왜 죽어야 하는지 내 알려 줄까? 넌 바로 천룡사 때문에 죽는 거다." 백응향비는 그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가 왜 천룡사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걸까……. 그는 의아한 눈길로 충피를 올려다보았다. 충피의 손은 어느새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백응향비는 닥쳐 올 고통을 미리 알고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조용히 깨끗하게 죽고 싶었다. 충피는 힘껏 목을 졸랐다. 일순 백응향비는 심하게 퍼들거리더니 이내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충피는 그의 목을 턱 놓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슨 궁리를 하는 것인지 뒷짐을 진 채 세 사람 사이를 한등안 서성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중얼거렸다. "이렇게 놔둔다면 천룡사 덕 보게 하는 것 아니야?" 그는 왜금차호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더니 비수 하나를 슬쩍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왜금차호의 등을 더듬어 한 곳에 비수를 푹 꽂았다 뺐다. 방금 죽은 시체라 따뜻한 피가 주르르 흘러 나왔다. "됐어, 됐어, 이만하면 충분하다." 충피는 적이 흡족해하며 약 한 봉지를 꺼내 칼자국이 난 왜금차호의 등에다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흘러 나오던 피가 순식간에 멎었다. 충피는 다른 두 시체에도 똑같이 이렇게 칼로 째고 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내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어디선가 두 장정이 바람같이 달려와 머리 꼭지가 땅에 닿도록 공손히 인사를 했다. "동주님, 무슨 분부십니까?" "너희 둘은 밤낮을 이어 가며, 이 시체들을 대 사막으로 옮겨라. 가서는 대막(大漠) 옥수(玉樹)를 찾아라. 찾거든 그녀에게 시체를 건네고 말해! 훌륭한 세 제자가 그만 천룡사 중 놈들한테 해를 입어 죽었다고 말이야." 둘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라. 그녀의 이 귀한 제자들 시체에 내가 약을 넣어 주어 시간이 지나도 시체가 이렇게 생생하다고 말야. 그러면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천룡사로 찾아갈 것이다." "예, 예, 분부대로 거행합죠." 두 장정은 크게 읍을 하더니 어디론가 힁허케 달려갔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마차 한 대를 몰고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막북삼괴의 시체를 마차에 던져 넣고는 자기들도 냉큼 올라타 채찍을 힘껏 휘두르며 북으로 향했다. "그 늙은 여괴가 저걸 보기만 하면 대번에 펄펄 될 게다." 충피는 마차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며 흐드러지게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그때 갑자기 천룡사의 아침 종소리가 쩌렁쩌렁 고막을 울려 놓았다. "아무래도 그 일속인지 뭔지 하는 주지 놈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도대체 상대가 될 만한 작잔지 한번 겨뤄 봐야 하잖겠어……." 충피는 갑자기 몸이 달아 천룡사를 향해 홱 돌아서서는 천룡사를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이 시각, 천룡사에선 중들이 대응보전(大雄資嚴) 앞에 한 줄로 늘어서서 조과(早課)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을 정중히 모신 대웅보전은 자못 장엄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이루 다 말하지 못할 선법(祥法)과 이루 다 밝히지 못할 현묘한 도리들이 이 자비로운 부처님 아래 감돌고 있었다. 양 옆에는 융단이 깔려 있고 그 위에는 각종 법기들, 종과 북, 북채와 경직들이 올려져 있었다. 모두 부처님께 재배하며 생령들을 위해 복을 주는 데 쓰이는 물건들이었다. 큰 중이나 작은 중이 나 할 것 없이 모두 한 줄로 늘어서서 목청을 가다듬어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적이 숙연했다. 충피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천룡사 경내로 숨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가사를 몸에 걸친 일속 화상이 복판에 좌정한 채 여러 중들과 더불어 염불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 화상들이 염불하는 양을 보면 부처님이 정말 있는 성싶기도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듯 독경에 열심일 수 있는가? 모두가 고개를 내저으며 웅얼거리고 있는 품이라니, 쯧쯧……. 어디 이럴 때 독약을 한번 슬쩍 뿌려 봐? 염불에 정신이 팔렸으니 누구 소행인지 알 게 뭐야.' 충피는 기둥 뒤로 더 바싹 다가갔다. 눈앞에 문득 내리드리운 불번(佛幡)이 보였다. '저 불번 뒤에 숨어서 손을 쓰면 저 놈들은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꼴이다. 정신없이 우왕좌왕할 꼴이라니,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그는 날쌔게 불번 뒤로 몸을 옮겼다. 바로 그때, 잠시 독경 소리가 멎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 노승이 말했다. "어제 만과(晩課)에 풀지 못한 문제가 있으면 지금 주지님께 물어 보시오." 그러자 중 하나가 나와 합장을 하고는 물었다. "소승이 《금강경 (金剛經)》을 읽으매, 범법지법(凡法之法)이 무슨 전례(典例)인지 알 수가 없으니 주지님께서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일속은 또렷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강해(講解)를 시작했다. 중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대응보전에는 오직 일속의 말소리만이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넌 너대로 불경을 강해하고 난 나대로 독약을 뿌려 보자. 너희 네 천룡사 중들이 하나같이 다 내 독약에 꺼꾸러지는데도 그 일양지 비본을 내놓지 않는지 어디 두고 보자.' 충피가 이렇게 작정하고 막 손을 쓰려 할 찰나였다. 갑자기 일속이 말을 뚝 그치더니 불쑥 한마디했다. "오는 자는 맞이하고 가는 자는 놔두라고 하였거늘, 시주님께선 어이해서 숨어 계시기만 하는 겁니까?" 그러더니 일속은 충피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러자 팍소리가 일며 진력 한 갈래가 충피가 숨어 있는 불번쪽으로 획 몰아쳤다. '아차, 들켰구나.' 충피는 이렇게 된 바에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러자 한 갈래 뽀얀 안개 같은 것이 중들에게 획 날아갔다. 그러나 일속은 이미 충피 앞에 날아와 우뚝 서 있었다. "여기는 조용한 불문인데 어이하여 소란을 피우시오?" 그러자 충피는 일속에게도 독약을 훅 끼얹었다. 그는 일속의 무예가 경지에 다다랐음을 알고 있는 터, 좀전보다 독약을 더 많이 뿌렸다.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일속에 게도 끼쳐 갔다. 일속은 흠칫했다. 충피는 그 모양을 보고 일속이 자기 꾀에 걸렸다고 생각하며 기뻐서 소리쳤다. "쓰러친다. 잘도 쓰러진다." 과연 노승 몇이 픽픽 쓰러지며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그대는 운남의 충피가 아닌가?" 일속은 엄하게 물었다. 충피는 희희낙락하며 조금도 거리낌없이 대꾸했다. "그래, 내가 충피다. 나 충피가 아니고는 누가 이렇게 천룡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더냐?" "나무아미타불. 무슨 연유로 이렇게 사람을 해치는 게요?" "왜 사람을 해치냐구? 이봐, 너희들은 모두 구도자라고 자처하며 정직한 체한다마는, 정작 남을 해치는 천하 제일의 무예를 암암리에 수련하고 있지 않느냐? 잔말 말고 어서 일양지공 비본이나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단번에 이 절 중 놈들 씨를 말려 버릴 테니." 그러면서 충피는 턱짓으로 다른 중들을 가리켰다. 벌써 게거품을 물고 인사불성이 된 사람, 신음을 연발하는 사람, 두 눈 뒤집고 허우적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