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2편 (2/70)

2026-09-30 18:35:20 조회 14
정말 가소로울 따름이오." 일속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또다시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그러자 세타명사가 흠칫 놀라 백응향비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나중에 다시 오는 한이 있더라도 이만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백응향비는 일속의 손가락을 노려보다가 도저히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좋소! 오늘은 이만 가지! 그러나 후일, 필히 다시 찾아을 테니 대비나 단단히 해 두시오. 오늘은 사정을 두어서 그저 방어만 했으나 그때 가선 우리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자, 아우들 이만 가세나!" 백응향비는 짐짓 배에 잔뜩 힘을 넣고 외쳤다. 그러자 왜금차호와 세타명사도 일속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백응향비 뒤에 바싹 붙어서서 줄레줄레 문께로 걸어갔다. 밖에선 이미 어슴푸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공중에서 누군가가 크게 웃어젖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의 웃음이라기보다는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기피한 소리였다. 뒤미처 숱한 사람들이 사원 지붕 위를 치 달려오는 듯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뒤따랐다. 한 순간 웃음 소리는 뚝 멈추고 발자국 소리도 멎어 버렸다. 천룡사는 일순 정적에 잠겨 들었다. 이윽고 웅근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날카롭게 내리꽃혔다. "천룡사가 대단하다는 것은 세인이 다 알고 있는 터, 일양지가 천하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음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렇다고 대리국에서 감히 이 노옹을 얕보진 못하겠지." 크게 외치는 소리도 아니요, 먼 곳에서 나는 듯싶었지만 그 목소리는 적이 또렷했다. 소리만으로도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말소리가 끝나자 어느새 문 밖에 사람이 사뿐 내려서는 기척이 전해 왔다. 이어서 손을 대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문이 스르르 열리고 험상궂게 생긴 웬 노인이 하나 나타났다. 불긋불긋한 얼굴엔 군살이 불뚝불뚝 튀어나왔고 구슬이 주렁주렁 매달린 얼룩덜룩한 범가죽 옷을 걸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적마다 구슬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이는 족히 오륙십은 됐으련만 그 기상이 흥맹하기 그지없었다. "또 오셨군요." 일속은 탄식하듯 말했다. 달갑지 않은 손님임이 분명했다. 노인은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어제쳤다. "일속 대사, 지난번엔 자넬 따르는 졸개들이 많아 어찌어찌 날 이겼는지 몰라도 이번엔 그리 수월치 않을걸." 그리고는 막북삼괴를 힐끔 보더니 고개 한 번 끄덕이지 않고 텁텁하게 말했다. "자네들은 막북삼괴가 아닌가?" 백응향비는 벌써부터 이 노인의 흉맹스러움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노인은 대체 누굴까? 누군데 자기들을 알고 있을까? 하긴 천하에 자기가 알고 있는 영웅호걸들이 그리 많은 편도 아니지만 이 영감이 누군지는 도시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언젠가 전지(塡池) 옆에 백 살하고도 열 살도 더 먹은 노인이 하나 살고 있는데, 그 노인은 행동이 괴이하고, 악한 짓이든 착한 짓이든 분별 없이 제멋대로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아마 이 노인이 그 영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응향비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당돌한 말씀일지 모르겠사오나 노인께서는 강호 모두가 칭송하는 전변노조(塡邊老祖)가 아니십니까? 이거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노인은 막북삼괴가 자기를 노조라고 칭하자 적이 흐뭇하여 얼굴에 희색을 띠며 ,쩔껄 웃었다. "자네 막북삼괴도 여기 일양지 비톤을 얻으러 왔겠다? 쯧쯧쯧, 그건 다 부질없는 짓이야, 부질없는 짓. 일양지공은 이 천룡사를 지키는 대리 단씨의 전가지보야. 한데 그런 것을 그래 그렇게 수월하게 자네들한테 내줄 성싶던가?" "노옹께서 그렇듯 이 사원의 고충을 잘 알고 계신다면 지금이라도 순순히 돌아가 주십시오." 일속이 얼른 끼여들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백응향비네 셋은 전변노괴를 더욱 열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방금 전만 해도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된 채 그저 한시 바삐 줄행랑을 치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운수 좋게도 이 전변노괴가 왔으니 힘을 합쳐 일양지 비본을 얻게 되면 그보다 더 큰 수확이 어디 있으랴. "일속 대사, 전번엔 내가 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번 더 겨루어 볼 일념으로, 내 그새 몇 가지 법술을 새로이 익혔지. 이번에도 내가 진다면 차후론 절대 천룡사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네." 전변노괴는 호기롭게 내뱉었다. "노옹, 저는 일속입니다. 천하 세상일은 만사라지만 전 일속일 따름이외다." 일속의 대답에 백응향비는 새삼스럽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불문에 입문한 사람들은 자고로 무념(無念), 무진(無塵), 무속(無俗), 무생(無生)을 최고의 경지로 삼는데 저 중은 어찌하여 일속이라 자처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직도 속세에 그 어떤 미련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일까? "하면 거기는 아직 그 어떤 속념 (俗念) 하나를 버리지 못했다, 이 말이오?" 백응향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뜸 물었다. 의표가 늠름한 일속은 종사(宗師)의 풍모를 차리며 점잖게 읍을 하고 말했다. "소승은 생사와 선악에 대해서는 이미 간파했습니다만 시비(是非)에 패해서는 아직 포기를 못하고 있습지요. 그래서 세상일에 부딪히기만 하면 우선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 보게 되는 것이오. 말 하자면 이 일속(一俗), 즉 이 시비 속념 하나만은 포기하지 못하고 있소이다." 백응향비는 그 말이 같잖기 그지 없었다. 시비를 포기하지 못했다면 기실 생사에 대해서도, 선악에 대해서도 간파했다고는 할 수 없는 노룻 아닌가. 그렇다면 일속은커녕 응당 다속(多俗)이라 해 야 옳을 터, 백응향비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어젖혔다. "그렇다면 일속은 빈말이로군. 그대는 다속이야, 다속! 집념이 강하고 시비에 얽힌 온갖 속념을 다 갖고 있으면서도 일속이라고 자처하다니, 역겹다, 역겨워." 이에 일속은 순간 깨닫는 바가 있어 똑바로 백응향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딴은 그렇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일리가 있어요. 정말 왜 일속이라고 했지? 다속이라 하지 않고……." 모름지기 불문에 몸담은 사람들이란 모두 항시 자기 주위를 돌아보고 늘 반성하며 또 그 속에서 그 어떤 선리(禪理)를 깨쳐 보려고 골몰한다. 차제에 일속 역시 그러했다. 그는 백응향비의 말에 그 어떤 선리가 있는 듯하여 그것을 따져 깨쳐 보려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변노괴는 원래 백응향비의 말을 듣고 내색하진 않았으나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한심한 자식, 중한테 교리를 가르치려 들어? 이거야 정말 눈먼 봉사가 앞장서겠다는 격이 아닌가 ?' 그러나 천만 뜻밖으로 일속이 백응향비의 말에 적이 얼굴이 상기된 채 골똘히 생각에 빠진 것을 보고는 입이 절로 벌어지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보아하니 이 막북삼괴도 여간이 아니구나. 말 몇 마디 안 하고도 일속을 잴쩔매게 만들었으니……. 어쨌든 잘됐다!' 전변노괴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대뜸 내뱉었다. "일속, 자넨 틀림없는 속인(俗人)이야! 자, 그렇게 넋 놓고 있지 말고 어서 나하고 누가 더 센가 다시 한 번 가루어 보자니까, 필시 내가 이기겠지만, 그땐 자네 영락없이 그 천룡사 보배를 꺼내 보여야 하네." 그러자 일속은 언뜻 정신을 차린 듯 정색을 하며 말했다. "노옹께서는 수차례나 천룡사에 왕림 하셨으니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소승이 다시 한 번 말씀드리오나 천룡사 일양지공은 대리 단씨 가문의 가학으로, 남에게는 절대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단씨 가문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다니 까요." 일속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백응향비가 따지듯 물었다. "사원 사람들은 불문에 입문한 사람들 아니오? 불문에 입문한 사람은 물욕이 없어야 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독점할 생각은 말아야 하는 거요. 참기름 서너 병을 얻어도 자기는 혀끝에 묻혀나 보는 정도고 나머진 모두 부처님께 공양함이 불문의 교리이거늘 천하의 천룡사가 그 잘난 비본을 독점해서야 말이 되겠소? 세상에 내놔서 무림 창생들에게 득을 줘야지, 그렇게 숨겨만 두고 있는 것은 불문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 아니오?" 일속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말 역시 그럴 법한지라 그는 다시금 자기가 왜 다속이라 이름하지 않고 일속이라 했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한편 전변노괴는 전변노괴대로 자기 좋은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난 세 번이나 왔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새파란 일속한테 지고 말았다. 하나 오늘은 재수가 좋을 것 같군. 일속이 백응향비 말에 정신이 어지러워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지. 암, 없고말고. 이 기회에 손을 쓰면 범이 토끼를 잡는 격이다.' "일속, 자, 어서 한번 겨루어 보자. 겨루어 보자니까!" 전변노괴는 발싸심이 나서 재촉을 해댔다. 곁에 있던 두 노승은 몹시 불안한 기색으로 일속을 바라보았다. 일속 대사가 저렇듯 정신을 엉뚱한 데 팔고 뒤숭숭해 있으니 자칫 당하고 말지 않을까 몹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저 마음을 졸이며 일속을 바라보기만 할 뿐, 두 노승은 감히 전변노괴에게 대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세 사람 중에서 천룡사 주지이며 대리 단씨 가문 사람인 일속만이 일양지에 능했고, 따라서 전변노괴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오 직 일속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일순 일속이 정색을 하며 외쳤다. "아니, 노옹께선 이미 저에게 세 번이나 지셨는데 또 뭘 겨루시자는 말씀이오?" "흥, 일속! 이걸 봐라." 전변노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뼈다귀 한 개를 척 내보였다. 보아하니 죽은 지 오래 된 영양의 뼈로 닳아서 반들반들한 것이 여러 사람 손을 거쳤음에 틀림없었다.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니다. 청해(靑海) 대사원 탑이사(塔爾寺)의 승축법기(憎祝法器)다. 자, 이걸 우리 둘 사이에 놓고 서로 내력을 내치되 이 법기엔 금 하나 내지 않는다면 그쪽이 이기는 것으 로 하자." "법기라군요? 그렇다면 안 되지요! 법기를 쳐서야 됩니까? 다른 것도 있는데 하필이면 왜 법깁니까? 다른 것으로 합시다." 일속은 의아했다. 그러자 전변노괴는 껄껄 웃었다. "일속, 이 작자야. 자낸 정말 다속이군, 다속! 이건 그저 법기일 뿐이네. 부처님 공경이야 마음에 달린 것,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법기라고 해서 신경 쓸 필욘 없지 않나. 내가 이 물건이 법기라 고 밝혔으니 망정이지, 아무 말 안 했다면 자네가 법기인지 뭔지 알 턱이 있는가? 그랬으면 이걸 쳐 갈기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을 게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어서 내기나 하자니까. 남들이 들으면 자네를 뭐라고 비웃겠나?" 일속은 언뜻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하여 급히 읍을 하며 대답했다. "노옹께서 일깨워 주시니 고맙습니다." 둘은 영양 뼈를 중간에 놓고 서로 마주앉았다. 막북삼괴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영양 뼈를 내쳐 누가 먼저 부스러뜨리는가 하는 내기라면 몰라도 금 하나 내지 않고 파두는 내기를 하다니. 그거야 힘만 적게 쓰면 되는 터, 식은죽 먹기 아닌가. 그러나 정작 일속과 전변노괴가 마주앉아 공격 태세를 취하자 막북삼괴는 대번에 기색이 달라졌다. 그렇게 우습게 볼 내기가 아닌 성싶었던 것이다. 오직 영양 뼈를 갖고 승부를 가르는 내기라면야 각기 제 마음대로 힘을 조절할 수 있겠지만 이건 그렇지가 않았다. 문제는 서로 상대방이 내치는 기문을 이기면서 영양 뼈를 쳐야 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면 쓰러지게 된다. 그것을 방지하려면 자연 두 켠이 서로 경계하면서 있는 힘을 다 내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힘을 다 쓰면서도 복판에 있는 영양 뼈를 상하지 않게 하자면 강유(剛柔)가 결합된 대단한 무공이 있어야 했다. 힘이 너무 강하면 복판에 있는 뼈가 부스러질 것이고 약하면 상대방의 힘에 못 이겨 꼬꾸라질 판이었다. 막북삼괴는 하나같이 가슴이 서늘했다. 그러나 이윽고, 일속 대사와 전변노괴를 번갈아 보던 백응향비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어쨌든 전변노괴는 미리 단단히 준비를 갖추고 왔을 테니 일속보다는 승산이 클 터였다. ' 변노괴가 이기면 우리 막북삼괴한테도 아주 유리하다.' 일속 대사와 전변노괴는 영양 뼈를 복판에 놓고 좌정하여 선뜻 손을 쓰지 않고 서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일속은 먹같이 시꺼먼 전변노괴의 손바닥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그윽이 바라보고는 말했 다. "시주님께서는 절기인 흑심장(黑心掌)을 수련하셨군요." 노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속은 내심 전변노괴가 먼저 손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한 순간 팍 소리가 일며 한 가닥 장풍이 일속 앞으로 확 밀려왔다. 일속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영양 뼈도 일속 쪽으로 반 자 가량이나 날아왔다. 장풍은 적이 알맞춤했다. 그보다 조금이라도 더 셌다면 영양 뼈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그보다 약했다면 일속에게 그런 강한 공격을 가할 수 없었을 터였다. 전변노괴는 처음 공격이 뜻대로 되자 득의양양하게 일속을 다그쳤다. "자, 어떤가? 이젠 그만 두 손 들지그래!" 기실 전변노괴는 오랫동안 머리를 쥐어짜 이 내기를 고안해 냈다. 그는 일속과 벌써 세 번이나 겨뤘지만 일속이 익히고 있는 대리 단씨의 가학인 일양지공 앞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었다. 해서 이번에는 이런 엉뚱한 내기를 궁리해 냈던 것이다. 일속은 영양 뼈를 보며 생각했다. 전변노괴가 툭하면 천룡사로 달려와 시끄럽게 구는 것을 막으려면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 전변노괴가 다시는 이 불문의 평화를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다. '내 스스로는 무속(無俗)을 바란다만 세인이 무속을 허용치 않고, 그나마 바라는 일속마저도 이 전변노괴가 허용치를 않으니 별도리가 없구나.' 일속은 내심 자탄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썼다. 일속이 식지를 들어 팍 하고 지풍을 내치니 영양 뼈는 노괴 쪽으로 반 자 가량 도로 날아갔다. 일양지공에도 이렇듯 강유가 결합되어 있을 줄 미처 몰랐던 전변노괴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 켠으로 밀려온 영양 뼈를 멍하니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일양지공은 본래 일종의 양강지공(陽剛之功)으로서 한 손가락으로도 상대방의 강검철창(鋼劍鐵槍)도 어렵지 않게 막아내는 절기중의 절기였다. 일양지공은 크게는 큰 산도 무너뜨릴 수 있고 작게 는 쇠구슬도 부술 수 있는, 예컨대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도 모두 깨쳐 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공이다. 전변노괴는 일양지공의 이런 강한 일면만을 알고 있었을 뿐 거기에도 강유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이런 내기를 하자고 했던 것이다. 이런 내기라면 양강한 일양지공에 영양 뼈는 여지없이 박살날 게 뻔했고 일속은 톡톡히 망신만 당해 비본을 안 내놓고는 못 배기지 싶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두 사람은 번갈아 한 번씩 공격을 했다. 영양 뼈는 그들이 내치는 기운에 밀려 둘 사이를 휙휙 날아다녔다. 전변노괴는 노심초사하며 이제나저제나 이 탑이사의 법기가 일속의 지풍에 부서지려나 애를 태웠다. 그러나 영양 뼈는 부서지기는커녕 그저 두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그러는 모양을 지켜 보면서 막북삼괴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내력은 갈수록 기세를 더해 지금은 아주 강한 기운을 서로에게 내뿜게 되었다. 영양 뼈 아니라 세상 어 떤 단단한 물건이라도 그 사이에서 당장 박살날 것 같은데도 신기하게도 영양 뼈는 두 사람 사이를 열심히 오가고만 있지 않은가. 그때였다. 문득 탁 소리가 나며 영양 뼈가 드디어 짝 두 동강이나 버렸다. 그런데 그것은 불행히도 일속의 손이 아니라 전변노괴의 손에서였다. 막북삼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렇듯 양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일속은 빙그레 웃으며 읍을 했다. 노괴는 분이 끓어올라 눈이 퉁방울만해졌다. "좋다. 이번은 네가 이긴 걸로 치지. 하지만 다음 내기는 그리수월치 않을 게다. 다른 내기를 한 번 더 하자." "다른 내기라니요? 무슨 내기요? 졌으면 의당 순순히 돌아가셔야지 또 내기를 하자니, 대체 무슨 말씀이오?" 일속의 말에 전변노괴는 두 눈을 부릅뜨며 윽박질렀다. "일속 대사, 그쪽이 주인이고 나는 객이다. 그걸 잊었는가? 주인이 객을 내쫓는 법도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겨루어 보자. 그래도 내가 지면 그땐 순순히 물러 나지." 노괴는 막무가내로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일속은 하는 수 없겠다는 듯 시답잖게 한마디했다. "정 그러시다면 또 한 번 가르침을 받아 보지요." 막북삼괴는 전변노괴가 이번엔 또 무슨 재주를 부려 보려고 저러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전변노괴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 일찍이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이 천하에 독보적이라 죽은 사람도 기사환생(起死還生)시킨다는 소릴 들은 터, 하나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야 그런 재간이 있다는 걸 도시 믿을 수가 있겠 나. 본시 무예란 사람을 죽이는 데 쓰는 것이거늘, 오히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무예가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오죽이나 좋겠나. 소문대로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이렇게 해 보자. 내가 내 무공으로 사람 하나를 죽일 테니 자낸 자네 무공으로 그 사람을 살려 보란 말이네. 살려낸다면 내가 진 것으로 하지." 일속은 표정을 굳히고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로 난처한 노룻이었다. 무룻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만민을 구하는 것이 불가의 섭리거늘, 전변노괴의 청을 받아들여 노괴가 먼저 사람을 죽 이고 자기가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면 기실 자기가 두 눈 멀정히 뜨고 살생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으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불자의 도리로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내기라면 찬성할 수 없소이다." 일속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전변노괴는 한창 몸이 달아 있는 터라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찬성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저희 불문에선 사람을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환생시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목전에서 살생하는 것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지요. 이번 내기는 서로 비긴 걸로 치고 어서 돌아 가십시오." 그러자 전변노괴는 코방귀를 뀌었다. "비겼다고 하자구? 아니 겨뤄 보지도 않고 어떻게 비겼다고 하잔 말인가? 내가 이길 수도 있는데 비겼다고 하자?" 그러는데 한켠에서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노승이 한걸음 성큼 나서며 일속에게 읍을 했다. "주지님, 소승으로 내기를 걸어 보시지요." 일속은 이 내기가 아주 위태로운 것인지라 말없이 그 노승을 바라보기만 했다. "주지님, 부처님께서는 내가 지옥엘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엘 가겠느냐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번 일로 설사 제가 지옥엘 간다 하더라도 추호도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 노승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일속도 더는 말을 못하고 전변노괴의 내기에 응하고 말았다. 노승은 두 사람 사이에 앉아 결부좌를 한 채 조용히 선정(禪定)에 빠져 들었다. 일속과 전변노괴는 모두 운기(運氣)를 시작했다. 전변노괴는 노승의 심맥을 내리치려는 것이고, 일속은 그것을 막아 노승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한 한판이 막 벌어지려는 찰나였다. 일속이 노괴의 장풍을 막을 수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못할 경우엔 노승은 당장 심맥이 끊겨 꼬꾸라질 것이었다. 일속은 먼저 노승에게 큰절을 올렸다. 노승이 이런 위험한 일을 자처해 나선 건, 모두 천룡사가 재난을 면케 하기 위함이었다. '일속아, 이 경난(慶難) 사숙의 선공(禪功)을 보아라. 얼마나 깊고 두터우냐. 목숨이 걸린 이런 위태한 순간에도 낮색 하나 변치 않으니, 사숙에 비하면 넌 얼마나 부족하냐.' 일속은 이렇듯 자신을 힐난하며 노괴를 바라보았다. 전변노괴는 연신 헤헤거리고 있었다. 한편, 한켠에 서 있던 백응향비는 전변노괴의 꾀가 참으로 비상하다고 경탄해 마지않고 있었다. 전변노괴가 정말로 이번에 일속을 이길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일양지공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일속 의 손을 통해 천룡사의 고승 하나를 죽이는 것이 된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천룡사의 모든 중들은 일속을 원망하게 되고, 일속도 참괴에 빠질 것이다. 그때 가서 전변노괴는 일양지 비본을 내놓으라고 일속을 다그쳐 일속으로 하여금 더 이상 어쩌지 못하게 할 심산임에 분명했다. 백응향비는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섬뜩하리만치 정적이 휘감돌았다. 한 순간, 정적을 깨며 전변노괴가 소리쳤다. "일속, 이제 손을 쓸 터이니 조심하게!" 일속은 손바닥으로 노승의 심장을 막아 보호하면서 마지못해 대답했다. "손을 쓰시오." 전변노괴는 소름 끼치는 웃음을 한 번 흩뿌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손바닥을 세우면서 일 장을 팍 내쳤다. 엄청나게 큰 힘이 노승에게 훅 밀려왔다. 일속은 노괴가 도대체 얼마나 큰 힘을 쓸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