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1편 (1/70)
[화산논검4부] - 김용 남제 단지홍편 제1장 천룡사에 감춰진 비본 우레가 울고 번개가 번쩍이는 무시무시한 밤이었다. 번개가 들이칠 때마다 산자락을 타고 구불구불 엎어져 있는 사원이 퍼뜩퍼뜩 드러났다. 진노한 하늘은 마치 이 거대한 사원을 모조리 짓부숴 버리려는 듯싶었다. 시퍼런 섬광이 허공을 가르고, 파르룽 굉음에 천지가 푸르르 떨었다. 우레가 잠시 멈칫할 때마다 어디선가 비명 소리, 흐들거리는 웃음 소리, 혹은 간장을 에는 듯한 곡성 소리마저 감때사납게 끼여들어 등골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원은 조금도 아랑곳없이, 마치 혼수 상태에 빠진 듯 잠잠하기만 했다. 다만 문루 위 칠흑 같은 편액(扁額)에 송나라 선황 신종(神宗)이 친히 쓴 '천룡사(天龍寺)' 라는 황금및 세 글자만 이 기세등등하게 위풍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순간, 한껏 기승을 부리던 천둥 번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숙이고, 추적추적 빗소리만이 아련히 울려 퍼졌다. 천지는 다시 적막에 잠겨 들었다. 그 즈음 문득 세 사람의 그림자가 사원 앞에 떠올랐다. 어둠 속에 드러난 윤곽은 제각각으로 하나는 비쩍 마르고, 하나는 작달막하니 똥똥하고, 하나는 섬뜩하리만치 새하얀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불쑥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은 천룡사 편액을 올려다보며 싸늘히 냉소를 날렸다. 그러더니 그중 하나가 성큼 몸을 솟구쳐 두 장 높이나 날아올라 삽시에 문루 위 편액을 사정없이 내동댕이치고는 훌쩍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셋은 주먹 을 쳐들며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그래도 천룡사엔 대문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몇 백근은 족히 될 듯싶은 육중한 천룡사 문은 굳게 닫힌 채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셋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동문동당(同門同黨)이라 눈짓 한번으로도 대번에 뜻이 통했다. 먼저 비쩍 마른 자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성큼성큼 대문으로 다가가 한 손 손바닥을 척 갖다 붙였다. 별것 아니라는 듯 그저 그러고 있을 뿐인데도 잠시 후 대문은 장정 한 여남은 명이 들이미는 것마냥 쩌그덩쩌그덩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할뿐 육중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땅딸보가 나섰다. "아우는 저리 물러서. 이제 형님이 솜씨를 좀 보여 주지." 말라깽이는 머쓱해서 물러섰으나 천룡사 대문에는 손바닥 자리가 한치 깊이나 패어 있었다. 땅딸보는 손가락 마디를 톡톡 꺾으며 어정어정 문으로 다가섰다. 그는 몽톡한 손가락을 확 펴 문에 대고는 안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문 열어라. 냉큼 이 문 열지 못해?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문전박대하다니 인정도 사납구나. 이렇게 밤새도록 비바람 속에 세워 둘 작정이냐? 에잇 고약한 놈들!" 땅딸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대문을 확 긁어 내리자 문에 박힌 주먹만한 쇠못들이 투두둑투두둑 퉁겨 나와 획 날아갔다. 그러자 땅딸보는 한껏 신명이 나서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대문을 긁어댔고, 쇠못 퉁겨 나오는 소리가 어둠 속을 진동했다. 그래도 사원 안에선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형님, 이 절간엔 늙은 화상이고 젊은 화상이고 싹 뒈져 버린 모양이오." 그러자 아마 맏이인 듯 백의를 걸친 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묵묵히 사원을 쏘아보았다. 연달아 즐비하게 늘어선 추녀들이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삐쭉삐쭉 치솟아 있었다. 이름 그대로 천룡사였다. 이윽고 백의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인같이 쨍쨍했다. "천룡사는 운남에서 제일 큰 사원이다. 사람이 없을 리 없어. 천하의 무예 고수들이 수두룩할걸세. 그렇지 않고서야 그 보배를 지금까지 대대로 지켜 내려올 순 없었을 테지." "하기는 큰형님 말도 맞소. 하나 한 놈도 기어 나오질 않으니 좀 이상하잖소? 가만, 아예 대문을 박살내 버릴까? 얼마나 견디나 한번 해 보자." 그때, 백의 사내가 쓱 그를 가로막았다. 산같이 육중한 대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이 열리며 사원은 차츰차츰 몸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만 괴괴하게 내려앉아 있을 뿐, 내부를 분간키는 어려웠다. 의당 있어야 할 인기척도 없었다. 한참을 지나도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문을 열어 놓았으니 소란 피을 것 없이 들어올 테면 들어오라는 겐가?' 셋은 작정을 못한 채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강호의 험악함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자칫 섣부르게 나갔다가는 무슨 올가미에라도 걸려들지 않을까 내심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천룡사에서 친히 문까지 열어 주는데 꽁무니를 뺀다면 강호에서 비웃음만 살 게 뻔했다. 마침내 백의 사내는 마음을 다잡고 목청을 높였다. "천룡사 주지는 들으시오. 대사막의 막북삼괴(漠北三怪)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왔소." 그리고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문 안으로 성큼 한 발 들여놓았다. 말없이 비를 맞으며 적막에 잠겨 있는 천룡사는 적이 안온했다. 그 무슨 살기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강호에서 굴러 온 이 세 사람은 이 평화로움에 오히려 주춤 놀랐다. '제길, 어째 시원찮은걸. 이런 맥빠지는 절간이 천하 무림이 우러러 마지않는 성지라니. 강호에 자자한 명성은 다 뭐란 말이냐. 이따위에 도시 그 귀한 것이 있을 성싶지 않구나.' 세 사람은 시큰등하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이 커다란 사원 어디에서 천룡사 주지 일속(一俗) 대사가 도를 닦고 있는지 종 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백의 사내는 조급한 마음에 또다시 호기롭게 외쳤다. "천룡사 사람들은 들으시오. 막북삼괴가 요긴한 일로 천룡사 주지를 만나러 왔소. 주지를 불러 주시오!" 그때였다. 불현듯 캄캄하던 사원에 일제히 불이 켜졌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발이 불빛에 반사돼 현란함을 자아냈다. 세 사람은 눈이 부셔 일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번쩍 뜨고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이윽고 삐꺽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황색 승복을 입은 노승 둘이 천천히 다가와 공손히 읍을 했다. "먼 길 오신 시주님들 같으신데 어서 선방(禪房)으로 드시지요." "우리 같은 불청객도 천룡사에선 반갑게 여기는지 모르겠소." "저희 사원을 찾아 주신 시주님이시면 모두 저희 사원의 귀객이지요. 어서 선방에 드시어 비를 피하십시오." 노승은 선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합장했다. 셋은 으쓱해져서 두 노승의 뒤를 따랐다. 선방에 들어가 앉자 말라깽이가 먼저 점잔을 빼며 운을 뗐다. "우리는 천룡사에 천하 없는 무예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한 수 배울까 하여 이렇게 찾아온 것이오. 노선사(老禪師)께서 천하의 기학(奇學)인 일양지공(一暘指功)을 한번 보여 줄 순 없겠소?" 노승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저희 천룡사는 변강 소국 대리(大理)의 일개 사원일 뿐입니다. 이런 곳에 절세의 무예라니요, 허허허……. 어디서 헛소문을 들으신 게로군요." 그러자 백의 사내는 입 꼬리가 일그러지며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정녕 이럴 테요? 이미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대리 단씨 (段氏)의 일양지공이 다 헛말이라? 일양지공이 천하 절학(絶學)이라 남에게는 절대 비밀에 부친다는 것까지 알고 왔으니 따돌릴 생각일랑 아예 접으시오! 우리 삼형제는 그 일양지공을 한번 보고자 불원천리 예까지 온 것이오. 어서 보이시오!" 세 사람의 기색은 자못 살기가 등등했다. 두 노승은 오늘 일이 상서롭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쉬기를 권했다. 그러자 막북삼괴는 징그럽게 웃음을 흘리며 노승들을 쏘아보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아우들, 이자들은 우리들이 솜씨를 보여 줘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백의 사내는 한마디 외치더니 서서히 몸을 기울이는 듯하다가 노승 옆으로 획 날아가 잽싸게 그의 손목을 콱 틀어쥐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노승은 눈 한 번 깜짝 않고 단아한 고승의 풍모 그대로 온화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래도 귀사에 무예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테요?" 백의 사내는 강때 사납게 으르댔다. 노승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꾸도 안 했다. 곁에 있던 노승이 분기탱천하여 백의 사내를 덮치려 하자 그는 되레 한 팔을 휘휘 저었다. "사제, 사제…… 그만……." 그는 간신히 한마디 토해냈다. 그러자 노승은 주먹을 불끈 쥔채 백의 사내를 노려보기만 했다. 백의 사내는 일순 분근착골(分筋錯骨) 초수를 펼치며 노승의 손목을 힘껏 비틀었다. 순간 수백 마리 뱀에게 온몸을 물어뜯기는 것 마냥 혹독한 고통이 밀려와 노승은 연신 신음 소리를 뱉어 냈다. 백의 사내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뇌까렸다. "일양지공만 가르쳐 주면 놔주지." "시주님, 일단 그 손부터 놓고 말씀하시오. 우리들은 무예를 모르오. 설사 안다고 해도 당신들처럼 심성이 곱지 못한 사람들한텐 절대로 가르쳐 줄 수 없소!" 곁의 노승이 분을 가라앉히며 가까스로 말했다. 그러자 땅딸보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 심성이 어쩌고 어째? 그래, 너희 천룡사 놈들 심성은 어떠냐? 어디, 심성 고운 천룡사 놈들 맛 좀 봐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땅딸보는 팔짝팔짝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노승의 가슴팍에도 못 미칠 정도로 키가 작은 땅딸보가 노승의 코끝에 닿을락말락하니 뛰어오르니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 었다. 그러나 그의 내력은 보통이 아니라서 그가 뛰어오를 때마다 그 내력의 힘이 노승에게 확확 밀려가, 노승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한편 난데없이 막북삼괴가 나타나 소란을 피우자 천룡사 화상들은 모두 깨어나고, 반야원(般若院)에도 어느새 아홉 선사(禪師)가 나와 좌정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정갈한 모습으로 한치도 흐 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자태였다. 한가운데 앉은 화상이 제일 젊어 보였는데, 용모가 수럭하고 맑은 기품이 우러나왔다. 그들은 모두 선방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지님, 아무래도 우리가 나가 봐야 할 모양입니다." 한 화상이 넌지시 의향을 건네자 젊은 화상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여러 사숙님과 사형님들, 그럼 제가 한번 나가 보지요." 젊은 화상은 다소곳이 여덟 화상들 앞을 물러나와 선방으로 향했다. 그는 서두르지도 않고 조용히 선방으로 들어섰다. 막북삼괴는 살기를 내뿜으며 이제 막 두 노승을 옥죄고 있었다. 한 노승은 팔이 꺾이고 허리가 눌린 채, 또 한 노승은 바닥에 나뒹굴어진 채, 느닷없이 덮쳐 든 세 무뢰한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었다. 젊은 화상은 고고한 자태로 태연자약하게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그러자 막북삼괴는 소리난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우리가 귀사의 노승 두 분과 담소중이니 거기선 참견하지 마시오!" 말라깽이가 소리쳤다. 그러나 두 노승은 다 죽어 가면서도 반색을 하며 외쳤다. "아이고, 주지님?" 그 소리에 막북삼괴는 흠칫 놀라 그러쥐었던 노승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똑바로 그 젊은 화상을 쏘아보았다. "소승이 천룡사 주지 일속입니다. 천하에 욕(欲)은 많으나 나는 하나뿐이니 일욕(一欲)인데, 일욕이 곧 일속(一俗)입니다." 막북삼괴는 일속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통성명을 하느라고 저러나 할 뿐이었다. "자네가 천룡사 주지라, 이 말이렷다? 그렇다면 어디 일양지공을 한번 보여 봐라. 그저 견식이나 좀 넓히려고 그러는 것이니!" 땅딸보가 사뭇 거드름을 피우며 대뜸 나섰다. 그 말에 일속은 초연히 웃으며 천천히 응대했다. "청룡사의 무공은 단지 호신용일 뿐, 다른 사람과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 분께서는 극구 천룡사의 무예를 보시고자 하나, 보여 드릴 수 없으니 죄송합니다." "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로군!" 백의 사내는 대번에 남색이 사나워지며 거칠게 내뱉었다. 일속도 웃음을 거두고 사뭇 엄숙하게 되물었다. "그래 세 분께서는 소승을 죽이고야 말겠다. 이 말씀입니까?" "그걸 또 말해야 알겠느냐? 천룡사 일양지공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인 줄 알아라!" 백의 사내가 외치자 그 말을 신호로 막북삼괴는 일속을 빙 둘러쌌다. 그와 동시에 백의 사내는 일속의 머리 위로 대뜸 손을 내뻗쳤다. 이제 그가 손끝만 까딱하면 일속은 불귀의 객이 될 판국이었다. "흐흐흐…… 네 놈들이 일양지공 비본을 내놓지 않으면 너희들의 이 주지를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 버릴 테다. 어서 썩 내놓지 못할까!" 땅딸보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두 노승은 기겁을 하며 냉큼 달려 들었으나 말라깽이의 일 장에 힘없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우리는 막북삼괴다. 나는 맏이 백응향비(白應向飛), 저기 저 땅딸보는 둘째 왜금차호(矮禽且虎), 그리고 이 말라깽이는 막내 세타명사(細駝明獅)다. 우리는 오로지 천룡사 비본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니, 비본만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 주지." 백의 사내, 백응향비는 짓씹듯 뇌까렸다. 그가 여전히 손을 뻗치고 있는데도 일속은 여유작작 웃음을 머금은 채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그래, 천룡사 일양지공을 꼭 가르쳐 달라, 바로 그 말씀이지요?" 의외로 일속이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백응향비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 중이 비록 나이는 그리 많지 않으나 천룡사 주지라고 나서는 걸 보아하니 필시 일양지공을 몸에 익히고 있음에 틀림없다! 일이 의외로 순조롭겠는걸!' 그러나 두 노승은 일속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속 대사가 막북삼괴에게 순순히 일양지공을 전수해 준다면 큰일 아닌가. 노승 중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주지님, 안 됩니다. 저들은 심보가 고약한 놈들입니다." 그러자 왜금차호가 눈을 부라리며 훌쩍 날아올라 노승의 뒷덜미를 낚아채더니 검 끝으로 목을 겨누었다. 한마디만 더 소리치면 죽일 기세였다. "세 분께선 그만 무례한 행동을 거두심이 좋겠습니다." 일속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침착하게 말했다. 백응향비는 냉소를 쳤다. "천룡사 일양지공 비본만 주신다면야 여부가 있겠소?" "참, 내가 한 가지 잊고 있었소이다. 천룡사 비본을 보자시지만 저희 천룡사에는 사규(寺規)가 있으니 어쩝니까? 천룡사 사규에는 본 사의 승려가 아니고는 그 비본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일속은 짐짓 농조로 말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백응향비는 싸늘하게 한마디 내쏘고는 손을 홱 치켜 들었다. "이래도 말 못하겠느냐?" "좋소! 그렇게도 일양지공이 보고 싶다는 말이지요?" 일속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가볍게 손가락을 들었다. 백응향비는 일속이 그저 손가락을 쳐드는 것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수리에 선뜩 하는 기운이 감돌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백응향비는 가소롭다는 듯 일속을 노려보았다. 하나 왜금차호는 백응향비의 머리를 쳐다보고는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울상이 되어 더듬거렸다. "마, 맏…… 형님…… 아이고 맏형님……." 세타명사도 그의 머리만 멍하니 바라볼 뿐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말도 못했다. 백응향비는 영문을 몰라 두 눈이 화등잔만해져서는 얼른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그는 그만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정수리가 온통 반질반질한 것이 머리칼이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일속이 단지 손짓 한 번 했을 뿐인데 단번에 머리칼을 통째로 날려 버리다니……. 그는 혼이 다 빠져 버릴 지경이면서도 애써 속내를 감추며 조심스레 일속을 뜯어보았다. 그렇다고 백응향비가 그 정도로 물러설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악이 받쳐 소리를 질러댔다. "이 정도로 물러설 막북삼괴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일양지공 비본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 사원은 떼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아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응향비가 먼저 날아오르고 뒤이어 왜금차호, 세타명사도 일속 대사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승들은 덤벼들 생각은 않고 한켠으로 물러서서 팔짱을 긴 채 느긋하게 구경만 했다. 막북삼괴에게 둘러싸인 일속은 긴장한 빛이라곤 하나도 없이 여유만만하게 팔소매를 너울거렸다. 그러다 가끔 손가락 하나를 세워 가볍게 툭툭 내지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팍팍 지풍(指鳳)이 일 며 매서운 바람이 세 사람에게 밀어닥쳤다. 막북삼괴로 말하면 대사막을 주름잡던 효웅(梟雄)들로서 그곳에선 무공으로 이름깨나 떨치던 자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만 일속 앞에서는 털 뽑힌 장닭 모양 겁을 잔뜩 집어먹고 주춤거리며 불시에 공격해 오는 지풍에 반 걸음도 채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백응향비는 속이 덜덜 떨리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호기롭게 외쳐댔다. "어서 일양지공 비본을 내놓아라. 안 그랬다간 이 천룡사는 재앙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나 일속은 코대답도 않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춤을 추듯 가볍게 팔소매를 너울거렸다. 그럴 때마다 팍팍팍 매섭게 지풍이 휘몰아치며 막북삼괴를 죄어 들어갔다. 셋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 속을 막아냈지만 무슨 수를 써도 허사였다. 진작에 왜금차호와 세타명사의 머리칼마저 뭉텅뭉텅 날아가 버린 터였다. 일순 일속이 한층 힘을 가하자 막북삼괴는 더 이상 버터 내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셋이서 일시에 한데 엉켜 나가넘어지고 말았다. 일속과 두 노승은 두 솥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막북삼괴, 당신들이 우리 천룡사의 절세 무학인 일양지공 비본을 보려 한다면 당신들은 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천룡사의 중은 될 수가 없지요. 천룡사는 대리국의 국사(國寺)니까요. 설사 천룡사에 들어와 중이 된다 하더라도 얼마간 시간이 흘러야만 당신들은 일양지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양지공은 대리 단씨 가문의 가학(家學)이기 때문이오. 소승은 천룡사 중이 된 지 얼마 안 되지만 단씨 가문 사람이기에 일양지공에 대해 얼마간 알고 있는 겁니다 ." 일속의 말에 백응향비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아니, 방금 일속의 지풍에 단단히 혼이 난 터라 도저히 입을 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네 셋이 이 천룡사에서 무슨 득을 보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미욱하기 이를 데 없는 왜금차호는 눈망울을 뒤룩거리며 일속을 쏘아보다가 물불 가리지 않고 소리를 내질렀다. "일속 대사, 잔말 말고 어서 천룡사 비본을 내놓아라! 끝끝내 못 내 놓겠다면 이판사판으로 싸워 볼 테다!" 그러더니 왜금차호는 벌떡 일어나, 괴상하게 생긴 붓 두 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붓 두 개를 놀리며 붓 끝으로 일속의 앞가슴 대혈을 향해 똑바로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일속 대사가 손가락을 한 번 가볍게 내두르자 그의 붓 두 개는 대번에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연이어 일속이 한 번 더 손가락을 들어 혈도를 가리키자 그는 혈도가 찔려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백응향비는 눈알이 뒤집혀서는 아우성을 치면서 몸을 솟구쳤다. 일속이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려고 기를 모으기 전에 그 틈을 타 잽싸게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어 으스러뜨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백응향비가 획 몸을 날리자마자 일속은 어느새 새끼손가락에 기를 모아 백응향비를 겨누고 가볍게 까딱거렸다. "그것도 다 일양지공이냐? 그런 아이들 장난 같은 짓은 당장 집어치ㅇ!" 백응향비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순간 어떤 강력한 힘이 온몸을 잡아채는 듯하더니 정신이 아찔해지며 가을 낙엽 떨어지듯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제길, 신공(神功)은 신공이로군!" 백응향비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혼자말로 나직이 투덜거렸다. 백응향비까지 그 지경이 되자 세타명사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저 일속을 쏘아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토록 고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으니 중년 나이에도 천룡사 주지가 됐겠지. 일양지공은 실로 천하 기학 중에서도 기학이다. 일거수일투족이 저렇게도 힘이 있고 자유로을 수가 있는가.' 그는 연신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되자 막북삼괴는 일양지공에 대해 더욱 침을 흘리게 되었다. 그들 셋은 오금을 못 펴고 주저앉아서도 날카롭게 일속을 노려보았다. "일속 대사, 이 자리가 무덤이 된다 해도 일양지공 비본을 손에 넣지 않고서는 이 막북삼괴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 그러니 천룡사가 피로 물들기 전에 어서 그 비본을 내놓기나 하시오!" 백응향비는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외쳐댔다. 막북삼괴는 자기들이 지닌 암기(暗器)들을 믿고 끝끝내 일양지공 비본을 손에 넣고자 대들고 있는 것이었다. "천룡사가 대리의 국사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물과 불에는 결코 견디지 못할걸!" 백응향비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금 덧붙였다. 천룡사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수작이었다. "세 분 시주님은 소 심줄보다 질기시군요. 고작 그따위 재간으로 우리 천룡사를 어떻게 하겠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