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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45편 (45/60)

2026-09-30 18:52:09 조회 17
"무심 공자, 이젠 도리가 없겠지. 우선 철의법왕의 남은 숨통을 조이고 너를 쳐죽이겠다!" 철의법왕의 눈빛은 지레 사그라들었다. 모용준이 날이 시퍼런 장검을 뽑아 들고는 달려가 철의법왕의 가슴을 찔렀다. "나무아미타불……." 철의법왕은 염불을 비명으로 대신하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제27장 왕중양의 위기 모용준은 자기 막사로 왕중양을 청해놓고 술잔을 건넸다장 왕중양은 모용준이 또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평양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급선무인지라 모용준을 채근하였다. "동생, 여지껏 평양성을 둘러싸고 온갖 공격을 퍼부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될 것 같네." "큰형님, 너무 재촉하지 마십시오. 따놓은 당상이나 진배없으니 조만간 기쁜 소식이 있을 겁니다." "아무튼 평양성을 치고 금나라의 도읍까지 쳐들어가는 것이 이 왕중양의 평생 소원이네." 둘은 술잔을 부딪히며 멋쩍게 웃었다. 모용준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조금 늦었다 싶은 대답을 했다. "형님, 통수인 형님으로서야 평양성을 에워싸고 있기만 한 지금 몹시 안타깝겠죠. 하지만 정세가 변한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정세가 변하다니? 그래서 평양성을 무너뜨릴 결심을 하지 못하는 건가?" 왕중양이 막 따져 물으려고 하는데 막사 안으로 두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하나는 무심이고 다른 하나는 귀 낭자였다. 이들의 출현에 왕중양은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심이 왕중양에게 읍을 하며 예상 밖의 말을 툭 던졌다. "왕 공자, 평양성을 무너뜨리고 대정까지 쳐들어가겠다는 말씀인가요? 허나 그건 어림도 없는 말씀이오!"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선 왕중양이 모용준을 향해 화를 냈다. "동생, 이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와 함부로 지껄인단 말인가?" 불쾌해 두 눈을 부릅뜬 왕중양을 보며 모용준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형님,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십시다. 자꾸만 동생 동생 하는데 앞으로는 모용 공자라고 불러 주시오." 모용준의 말속에 서슬 시퍼런 날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막사 안을 둘러보니 어느새 들어왔는지 구석구석에 지청과 허불잉 그리고 주정이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왕중양, 그대 같은 사내가 무슨 덕이 있고 무공이 있어 감히 대군 통수의 권좌에 앉는단 말이오?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나 모용준은 그대의 대송을 회복시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소이다." 왕중양의 심정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왕중양은 휘청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질 듯 비칠거렸다. "모용준, 그대가 대송이 아니라 대연을 회복하려고 일을 꾸몄다는 사실은 내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네." 왕중양도 자신의 속마음을 툭 털어놓고 모용준과 단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참 총명하시군요! 남의 속을 손금 보듯이 하는데, 그럼 과연 내가 대연제국을 되찾을 수 있을지 그 결과에 대해서도 아시겠소? 난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그 일만은 꼭 성사시키고 말 것이오." 모용준이 말끝에 힘을 주며 왕중양을 쏘아보았다. 뒤에 서 있던 지청이 음흉스럽게 웃어댔다. "흣흣, 대연국을 다시 찾으면 재상 자리는 이 일기충천의 것이야!" 허불잉도 뒤질세라 가슴을 턱턱 치며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에 급급했다. "장수 자리 하나는 꼭 비워 두어야 한다구. 이히히……." 벌써 개국공신이라도 된 듯이 날뛰는 이들의 꼬락서니를 보다못한 왕중양은 실소를 터뜨리며 이들을 향해 단호한 일침을 쏘았다. "백성들 모두가 대송의 강산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 본디 대송은 완벽하고 통일된 제국이었기 때문이지. 그러나 대연은 작은 나라였고 벌써 먼 옛날에 이슬처럼 사라진 과거 속의 기억일 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대연국을 송나라 땅에 다시 세우겠다는 건 억지에 불과한 망상이다." "망상이라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공자님, 이자를 일찌감치 해치웁시다!" 협박조로 을러댄 것은 지청이었다. 그의 말에 모용준의 눈빛이 잠시 번뜩였다. "큰형님, 형제간의 우의와 신의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소이다. 형님의 목을 쳐야겠소." 모용준의 배신에 왕중양은 그저 쓴웃음을 베어 물 뿐이었다. 그러면서 이 큰 충격에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지청이 허리를 숙이며 능청을 떨었다. "왕 공자, 이젠 별 수 없으니 순순히 포박을 받으시오." 모용준이 왕중양과 정면으로 마주섰다. 모용준의 눈가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살기가 그득했다. "대연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과 의형제를 맺은 것이 잘못이었소." 그가 음흉스럽게 말을 뱉더니 막사 밖에다 대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금세 두 여인이 커다란 가죽을 맞들고 들어섰다. "형님, 이 가죽주머니야말로 재미있는 물건이지요. '염라구'라고 하는데 가지고 놀기가 여간 흥미롭지가 않소. 하지만 형님은 땀을 좀 쏟아야 할 것이오." 모용준의 지하궁전에서 온 듯한 허리가 잘록하고 미색이 뛰어난 두 여인이 왕중양 뒤로 가 섰다. 가죽주머니를 벌린 여인들은 재빨리 왕중양의 혈도를 누른 다음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하하, 몇 해 전에 웬 행각승에게서 배운 것이 바로 이 염라구를 써서 사람을 죽이는 법이었지." 염라구라 하면 일종의 죄인을 다스리는 형구였다. 그 안에 죄인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불에 책이면 가죽이 조여 들었다. 그래서 안에 든 사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서서히 조여 드는 가죽에 왕중양은 숨조차 내쉴 수가 없었다. 물처럼 흐르던 땀마저 말라 버리고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아픔이 뒤를 이었다. "흥, 그런 꼴로 어떻게 무림의 맹주 노릇을 하겠느냐? 천하 영웅 왕중양이 물러터진 밤송이가 되었으니 말이야!" 모용준의 빈정거림에도 한마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차츰 가늘어지는 자신의 숨결을 헤아리다가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오늘도 변함없이 사자우는 담화를 끼고 종일 재미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모용준이 준 약을 자기뿐만 아니라 담화에게까지 먹인 후로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사자우의 사타구니는 온종일 뿌듯하였고 담화 역시 온순해졌다. 반듯하게 눕혀 놓은 담화의 알몸을 감상하며 그는 더없는 행복감에 젖었다. 막 담화와 다리를 벌리고 묵직해진 사타구니를 달랠 찰나였다. "어허, 끔찍도 해라. 사자우 나으리께서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나? 이거 낯이 뜨거워 볼 수가 있어야지." 후닥닥 상체를 일으킨 사자우가 고개를 홱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누구야! 썩 나오지 못할까?" "알몸의 계집을 품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들어가겠소. 옷이라도 입혀야 인사를 나누던가 하지." "들어오든 말든 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목숨만은 잘 챙기거라." 담화의 귀에 걸려 있던 귀걸이를 떼어 휙 하고 던졌다. 귀걸이는 문밖의 벽에 깊숙이 박혔다. 그러자 문어귀에 숨어 있던 사내가 피식 웃으며 지껄였다. "사자우, 너무 날뛰지 말라구. 난 그대를 거꾸러뜨릴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흥, 이제야 네 놈이 누군지 알겠군. 홍칠이 이 놈, 왜 또 물귀신처럼 찾아왔느냐?" "그대가 아무리 악명을 쌓아 간다 해도 이 홍칠에게는 예외이지." "뭐야?" 홍칠이 방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더니 혀를 끌끌 찼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딸아이 같은 어린 계집을 깔고 뭉개 뭘 어쩌자는 게지?" 아직도 사자우는 담화의 봉긋한 젖무덤을 한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 놈의 거렁뱅이야, 이 담화라는 계집은 천하라 둘도 없는 여인이라구. 여인이란 짜고 여윌수록 고소한 맛이 더 나지." 홍칠공이 쓴웃음을 던졌다. "밤낮 객주집에 붙박혀 계집과 노느라고 큰일은 못하겠구먼?" 사자우가 눈알을 부라리며 물었다. "큰일이라니?" "모용준이란 자를 혼내 주는 것이지!" "모용준을 다루기가 어디 쉬운가. 같은 난쟁이지만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독종이라구." 하기야 개방의 장로가 보낸 제자들 몇이 모용준의 손에 실종된 사실을 알고 있는 홍칠공으로서는 수긍이 갔다. 그중에는 난다 긴다 하는 여섯째 제자도 끼여 있었기에 더욱 실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왕중양이라도 빼내 와야지?" "왕중양? 흥, 이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그도 모용준의 손에 죽어 넘어갈텐데." "뭐야? 천하의 영웅이 난쟁이에게 죽는다고?" 홍칠공이 깜짝 놀라며 몇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다가 담화의 젖가슴이 두 눈에 들어오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자우가 열쩍은 태도를 보였다. "그대가 애간장을 태우든 말든 이젠 소용이 없다구." 왕중양이 죽는다면 의군은 자연 흩어지고 말 게 분명했다. 홍칠공은 적지 않은 위기감에 초조해졌다. "그렇다고 그저 두고만 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왕중양이 내 동생이라도 되는가? 난 그런 골치 아픈 싸움엔 휘말리고 싶지가 않아." "자꾸 그렇게 나오면 그 계집을 죽여 버리겠다!" "이 거렁뱅인 놈이 실성을 했나? 감히 누구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야?" "죽인다면 죽인다!" 사자우가 침대 옆에 세워 둔 병장기를 집으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홍칠공이 정말 앙심을 품게 되면 개방의 무리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담화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 탓이었다. 담화를 잃어 버릴 것을 생각하니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만 같았다. "좋아, 딱 한 번만 자네의 일을 도와주겠어. 그래,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사자우가 한풀 꺾인 태도를 보이자 홍칠공이 안심을 했다. "모용준이 해치기 전에 왕중양을 데려오면 돼." 침대에서 일어난 사자우가 느릿느릿 옷을 찾아 입었다. 병장기를 부여잡은 그가 담화를 턱으로 가리켰다. "알겠네. 내 다녀올 테니 그동안 저 계집을 잘 보고 있으라구." 그러더니 홍칠의 눈치를 보면서 담화를 이불에 한차례 감싸고 혈도를 눌렀다. 담화는 반듯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요 귀여운 것아. 내 번개같이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담화의 볼을 토닥이던 사자우는 곧 문을 차고 밖으로 나갔다. 모용준은 왕중양을 가죽주머니로 쓰러뜨리고 나서 잠시 숨을 돌렸다. 술잔을 기울이며 깊은 생각에 몰입하려는데 막사 밖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지청이 얼른 밖으로 뛰쳐나가며 꾸짖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수선스럽느냐?" 한 군사가 황급히 허리 숙여 고했다. "난쟁이 하나가 무작정 통수부를 향해 들어오고 있사온데 도무지 막을 수가 없사옵니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퍼뜩 든 지청은 그쪽을 향해 뛰어갔다. 사자우였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군사들을 터밭의 무 뽑듯 쓰러뜨리며 노도처럼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황급히 그에게로 날아간 지청이 허리를 숙였다. "이거 사자우 선생이 아니십니까요?" 누군가 훑어보던 사자우가 목청에 힘을 주었다. "모용 공자에게 일러 직접 나와 나를 맞으라고 해라!" 지청이 달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미안하지만 공자님께서는 군무로 급하셔서 오늘만은 힘들 것 같소이다. 내일로 미루면 어떨지요?" 시답지 않은 소리라고 일축한 사자우가 다시 벼락치는 소리를 내질렀다. "모용준! 대관절 나올 셈이냐, 아니면 앉은 자리에서 죽고 싶은 거냐?" 지청이 좋게 따돌리려고 하는데 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어허허허! 선배님이 어인 일이시오? 금나라 오랑캐를 치는 우리 의군을 도우러 오셨군요. 이거 정말 감사하외다." 모용준이었다. 그는 한껏 연막을 깔며 사자우의 화기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다. "모용준, 왕중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통수부에 없는 걸 보니 여기에 있는 게 분명해."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사자우가 두리번거리자 모용준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여러 강호객들이 지켜 보고 있는 입장이라 그에게 무조건 머리를 숙일 수는 없었다. 또한 자신의 대사에 일조를 하겠다던 사자우가 약속과는 달리 나오자 조금은 당황이 되기도 했다. 낭패해진 모용준이 멋쩍게 웃었다. "낸들 큰형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어찌 알겠소?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찾아보시오." 눈치 빠른 지청이 모용준을 감싸고 나섰다. "그래요, 제가 모시고 한바퀴 돌아보지요." 그러자 사자우가 앙천대소하며 병장기를 높이 쳐들었다.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들이냐? 난 모용준에게 속을 사람이 아니다. 어서 왕중양을 내놓으란 말이다!" 사자우가 병장기를 앞으로 내뻗은 채 막사 끝에 서 있는 모용준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네 명의 가신들이 그를 가로막아 섰다. "이 놈들, 이제 보니 꿍꿍이 수작이 있었구나! 너희들 말대로 막사 안을 살피려는데 어찌 죽기 살기로 막아선단 말이냐?"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몰랐던 강호객들도 그제야 그를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모용준의 태도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모용준은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사자우에게 따져 물었다. "큰형님을 죽이려는 속셈이 아니오? 만약에 형님의 몸에 손끝 하나 댔다가는 알아서 하시오!" 강호객들을 의식한 모용준은 오히려 왕중양을 위하는 척했다. 예상대로 곧 강호객들은 태도를 바꾸어 모용준 편을 들었다. 구경하던 강호객 중 하나가 성큼 나서며 말했다. "모용 공자, 저 사자우가 공자께 손을 대면 나도 보고만 있지는 않겠소!" 그러나 그들이 사자우와 맞선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와 대적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상황은 모용준 쪽으로 기울고 있는 셈이었다. 사자우가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매서운 눈초리를 번뜩이며 협박했다. "모용준, 그대가 얼마나 지독하고 엉큼한 자라는 걸 난 알고 있다. 내 입이 터지는 날엔 세상에 다시 고개를 쳐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왕중양을 내놓거라!" "모두들 믿을 만한 소리를 하시오. 난 아다시피 금나라를 치려고 일어선 사람이외다. 물론 연나라를 회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잃어버린 송나라의 국권을 되찾을 생각이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모용준은 그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꺼내게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매우 놀랍고도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대연을 꿈꾸고 있다니……. 강호객들은 그런 모용준을 또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일단 사자우의 말대로 막사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강호객 하나가 모용준에게 제의했다. 별 수 없었다. 모용준이 사자우에게 함께 들어가 보자는 손짓을 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사자우는 심상치 않은 얼굴로 코를 벌름거렸다. 요상한 냄새가 풍겨 왔는데 필시 여인의 체취가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침대 위에는 두 여인이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다가 게으른 동작으로 일어서는 게 보였다. 막사 밖에서 이를 본 강호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준이 여인과 몰래 즐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지금껏 고집을 부렸구나 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후 사자우는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가죽으로 된 주머니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주춤했다. 그 가죽 주머니 사이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다리가 삐죽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건 뭔가?" 모용준이 태연스레 꾸며댔다. "글쎄 수상한 자가 병영 안으로 잠입했기에 잡아다가 엄하게 문초를 한 일이 있었소. 그런데 지난 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뭡니까?" 곧 모용준이 문밖에 있던 군사들에게 큰소리로 일렀다. "왜 이 시체를 아직 이곳에 두었느냐? 어서 내다 버리거라!" 대여섯의 군사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왕중양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메고 나갔다. 그런데 그와 때를 같이하여 사자우의 시선에는 이상한 것이 잡혔다. 네 명의 가신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잡으며 여차하면 덤빌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닌가. 사자우는 수상한 낌새에 일순 몸을 사리며 주위를 세밀히 살폈다. 군사들이 밖으로 나가고 가신들이 비로소 안심하는 틈을 타 그가 몸을 날렸다. 막사 밖으로 쏜살같이 날아간 사자우가 군사들 앞에 버티고 섰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왕중양이 없으니 대신 이 첩자라도 메고 가야겠다!" 가죽주머니를 둘러멘 사자우가 묘한 보법으로 재빨리 달아났다. 뒤늦게 뛰쳐나온 모용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서 저 놈을 잡아랏!" 가신들이 뒤쫓았으나 사자우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객주집으로 돌아온 사자우는 담화의 행방부터 확인했다. 담화는 홍칠공과 마주앉아 있었는데 그를 보자마자 반가워 활짝 웃기부터 했다. 그에게 정이 든 그녀는 깨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홍칠이 덤덤하게 결과를 물었다. "그게 뭐요? 왕중양을 데려오라니까 모용준이 숨겨 둔 보물이라도 훔쳐온 것이오?" "내 생각으로는 이 안에 왕중양이 들어 있는 것 같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시선이 재빠르게 교차했다. 곧 바닥에 널브러진 가죽주머니를 열어 본 홍칠공이 그만 입을 떠억 벌리고 말았다. 사자우의 추측대로 그 안에서 왕중양이 나온 것이다. 홍칠은 왕중양의 시체를 놓고 고심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강호객들 앞에서 간교하고 악랄한 모용준의 정체를 까발리고 싶었다. 그런데 사자우가 내키지 않아 하자 홍칠이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왜 웃기만 하는 거요?" "이 시체를 보니 모용준의 됨됨이가 한눈에 보이는군. 하지만 자네 말대로 하면 의군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지 않겠소." "그럼 어쩌자는 거요?" "송장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장차 어떻게 36만 개방을 다스린다는 말인가?" 사자우의 표정으로 보아 필시 좋은 계략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쉽게 가르쳐 줄 생각은 않고 피곤하다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어서 물러가게나. 난 한숨 자야겠으니." 담화를 끌어안고 누운 그는 곧바로 코를 곯아 가며 깊게 잠이 들었다. 홍칠은 모용준의 잔혹성에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다시는 기를 펼 수 없도록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 얼른 다녀올 테니 그동안 이 왕중양의 시체를 잘 보라구 " 사자우가 했던 것처럼 홍칠도 한마디 남기고는 청하니 밖으로 나갔다. "젠장, 진작 나갈 것이지." 사자우는 자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화가 울상이 되어 사자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서워요. 어떻게 죽은 사람과 함께……." "망할 놈의 거렁뱅이 같으니라구. 잠깐만 기다려. 내 저 송장을 시궁창에 처박고 올 테니." 사자우가 엄청난 팔힘을 자랑하듯 가죽주머니를 어깨에 메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곧장 객주집 뒤로 길게 난 산길을 치달아 올랐다. "산사람을 찾으러 갔다가 송장만 안고 온 꼴이로군. 그리고 뭐, 나더러 송장이나 지키고 있으라구?" 그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듯한 벼랑 끝에까지 이르렀다. 가죽주머니를 내려놓으며 또 한 번 홍칠공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홍칠이 네 놈 때문에 이 고생이다. 에이, 산 짐승에게 적선이나 하자." 왕중양의 시체는 벼랑 아래로 까마득히 굴러 떨어졌다. 사자우가 가죽주머니를 빼앗아 가자 모용준은 서둘러 평양성을 공격했다. 평양성 밖에서는 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웠고 합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모용준의 의군들은 여러 갈래로 분산된 채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뒤쪽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복문을 통해 슬그머니 빠져 나온 금나라 군사들이 역습을 가해 온 것이다. 모용준이 급히 외쳐 댔다. "지비 대사, 어서 뒤로 달려드는 적들을 물리쳐 주시오!" 지비 대사가 곧 군사들을 이끌고는 그쪽을 향해 가려는데 사방에서 아우성이 터졌다. 분주, 형주 쪽의 금나라 군사들이 협공을 하기 시작했다. "왕중양을 놓치지 마라!" 금나라 장수 중 하나가 이렇게 외치자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금군은 삼면에서 좁혀 들어왔다.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으나 의군들은 번번이 실패를 했다.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어느새 많은 의군들이 말발굽에 짓밟히거나 금군의 화살에 쓰러져 갔다. 곧 의군의 전멸이 눈앞에 놓인 상태였다. 모용준이 장검을 뽑아 들고는 그의 가신과 함께 앞으로 전진해 갔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돌연 무심과 귀낭자가 달려왔다. "모용준, 어딜 도망치려 하느냐!" 무심이 비아냥대자 모용준은 느긋하게 받아쳤다. "무심, 네가 과연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무심과 귀낭자는 그러나 공격은 해오지 않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면서 모용준에게 슬쩍 눈짓을 하는 게 아닌가. 무심의 의도를 읽은 모용준과 가신들은 금나라 군사들을 쳐죽이며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개방의 제 장로 역시 제자들을 거느리고 금군과 맞서고 있었다. 금군의 장수 하나가 제 장로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어찌나 사나운 기세로 덤비는지 제 장로는 이제껏 공격을 막기만 하는 처지였다. 이번에도 제 장로의 몽둥이 위로 칼이 꽂혔다. '오랑캐의 사기를 올려 줘서는 안 되겠다!' 속으로 자신을 다그친 제 장로는 몽둥이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다시 금군 장수의 육중한 칼이 번쩍하며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제 장로가 몽둥이를 쳐들었다. 그런데 그만 몽둥이가 두 동강이 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