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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44편 (44/60)

2026-09-30 18:52:09 조회 19
"누구……?" "지난번 선배님과 함께 짜고 성공시킨 조평의 일이 그만 금나라에게 알려졌소. 무심과 귀낭자가 토설을 하면 믿을 사람이 없겠지만 철의법왕의 말이라면……." "철의법왕? 문제없어. 내 국자 앞에서는 벌벌 떨고 말테니." "선배님, 듣자하니 철의법왕이란 자는 금나라에서 으뜸가는 고수라고 하던데 정말 자신이 있습니까?" "아니, 나를 뭘로 보고!" 사자우가 불현 정색을 하며 탁자를 쾅 하고 내려쳤다. "그따위 중 놈이 다 무슨 고수야? 이 사자우 앞에서는 호랑이앞에 토끼 신세일 뿐이야!" 모용준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아무튼 고맙소이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저희 대연제국을 회복하는 일에 선배님의 힘을 믿겠소이다." "헌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계집과 흥청망청 노는 것이 최고지." 모용준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모용준이 재차 다짐을 구했다. "정말 철의법왕은 문제가 없겠지요?" 모용준의 말이 비아냥대는 소리로 들린 모양이었다. 그가 주먹으로 탁자를 쾅 치며 노발대발했다. "뭐야? 나 사자우는 천하에 제일 가는 고수라구!" "좋습니다. 그리고 이건……." 간사스럽게 웃으며 모용준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것은 사내의 정력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담화와 즐기실 때 도움이 될까 해서……." "그래? 그럼 어디 당장 시험을 해·봐야지." 모용준이 내민 병의 마개를 뜯은 사자우가 서너 알을 꺼내 꿀꺽 삼켰다. 그리곤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담화에게 다가갔다. 잿빛 황혼이 깃을 펴기 시작했다. 모용준은 흐뭇한 기색으로 방을 나오자마자 객주집 주인에게 귀띔했다. "주인장, 저 방에 든 양반을 잘 모시기 바라오. 잘못했다가는 주인장의 목을 칠 것이오!" "예, 예, 잘 알겠습니다요." 그는 이미 사자우의 살기 어린 눈빛에 주눅이 든 상태라 굽실거리며 쩔쩔맸다. 모용준은 객주집을 나와 걸음을 재촉했다. 이튿날 날이 희붐하게 밝아 오자 사자우가 담화를 들쳐업고 모용준의 막사로 찾아왔다. 모용준을 만나자마자 그는 대뜸 으름장을 놓았다. "담화를 한 사나흘 맡겨야겠어. 허나 담화의 몸에 손끝 하나 댔다가는 모용세가를 싹 쓸어 버리겠다!" 모용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헤벌렸다. 사자우는 그 길로 경공을 써 멀리 치달았다. 이윽고 평양성에 진을 치고 있는 금군 병영 앞에 이르렀다. "철의법왕은 나와 내 말을 듣거라!" 그러자 군사 하나가 망루 위에서 꾸짖었다. "네 놈은 누군데 감히 금나라의 국사를 오라 가라 하느냐?" "이 놈! 썩 내려오지 못할까? 네 놈이 내려오면 그때 가르쳐 주마." 망루 위에 서 있던 군사가 사라지더니 곧 대여섯 명의 군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대관절 뉘시오?" 군사 하나가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대답할 것도 없었다. 사자우가 장을 뻗어 그 군사의 머리를 보기 좋게 날렸다. 비명조차 내지를 사이 없이 군사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나머지 군사들이 달려들자 사자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놈들아, 난 사자우 어른이시다! 공연히 생죽음 당하지 말고 어서 철의법왕이나 불러와라!" 어찌나 목소리가 크던지 이들은 옴쭉달싹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생김새와는 영 딴판인 사자우의 무공에 모두들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이들은 사자우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더니 곧장 병영 안으로 도망을 쳤다. 철의법왕이 모습을 보인 것은 조금 후였다. 그는 무심과 귀낭자를 뒤에 달고 천천히 병영으로부터 걸어 나왔다. 요상하게 생겨 먹은 사자우가 병장기를 휘저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늙은 중 놈아, 내 오늘 너에게 제삿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러 왔다!" 철의법왕이 코웃음을 쳤다. "흥, 이 무례한 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큰소리냐? 그 짧은 다리를 작신 부러뜨리기 전에 어서 집에 가 젖이나 더 먹고 오너라!" "허허허, 주둥이는 그만 놀리시고 용기가 있으면 덤비거라. 내 오늘 너에게 고수의 진면목을 보여 주마!" 철의법왕의 낯색이 돌변했다. "좋다. 그럼 자리를 옮겨 네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 이들은 병영에서 멀지 않은 한 언덕 위로 옮겼다. 철의법왕이 사자우를 향해 비웃었다. "사자우라고 했더냐? 내가 만약 지면 내 머리를 송나라에 갖다 바쳐도 좋다. 하지만 네 놈이 지면 다시는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특히 금나라에는 얼씬도 못하게 만들겠다." 철의법왕이 장기인 소맷자락을 하늘 높이 치켜 올렸다. 곧 소맷자락에서 질풍이 쏟아졌다. 사자우가 국자에 몸을 의지해 한쪽으로 이동시키며 약을 올렸다. "이 늙은 중 놈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을 명심하거라!" 이들은 곧 본격적으로 무공을 겨루기 시작했다.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가 하면 서로 원을 그리며 빈틈을 찾기 위해 불꽃 튀는 보법을 부리기도 했다. 한차례 공중에서 맞붙었던 두 사람이 갈라서며 매섭게 상대를 쏘아보았다. "이제 된맛을 보게 될 것이다!" 사자우가 국자를 번쩍 들어 철의법왕을 내리쳤다. 철의법왕은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아무리 사자우가 날뛴다 해도 무쇠 소맷자락 앞에서는 소용이 없으리라 믿었다. "간다!" 철의법왕이 소맷자락을 휘날려 사자우에게 질풍을 쏘았다. 병장기를 들고 있는 사자우의 팔을 겨냥한 것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사자우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철의법왕이었다. 소맷자락을 한번 펄럭이면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던 소가 넘어지고 바위마저 멀리 날아가지를 않았던가. 그런데 사자우는 튀는 흙탕물쯤으로 여기듯 그의 공격을 쉽게 피했던 것이다. "야앗!" 사자우가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병장기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어찌나 소리가 드세었던지 금나라 군사들 중 몇몇은 들고 있던 병장기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소이다. 괜히 이 사자우 앞에 무릎을 꿇고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만들지 마시오." 사자우가 부아를 돋우자 철의법왕이 달려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막 앞으로 달려가려고 쳐든 발이 꼼짝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것은 사자우가 병장기를 수평으로 쳐들고는 내력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의법왕은 한참 동안이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을 쳐들고 있기만 했다. 겨우 사자우의 내력에서 풀려난 철의법왕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노기를 뿜어댔다. 사자우가 이죽거렸다. "스님은 이제 죽을 팔자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소. 스님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으니 말이야." "필경 모용준이란 난쟁이렷다!" 철의법왕은 이미 모용준의 술책을 읽고 있었다. 같은 난쟁이인 사자우가 그의 사주를 받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철의법왕은 절에서 내려와 중원 땅을 두루 밟아 보았지만 지금껏 사자우 같은 난쟁이는 처음이었다. 난쟁이들은 그 무공이 한계가 있는 법인데 이 사자우는 그악스러을 정도였다. 아무튼 이 난쟁이에게 진다면 천하 무림의 세계에서 다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은 불 보듯 했다. 철의법왕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좋아, 오늘 죽든 살든 결판을 내야겠다!" 곧 양쪽의 소맷자락을 쳐든 철의법왕이 몸을 회전시키며 사위를 휩쓸었다. 소맷자락에서는 엄청난 질풍이 몰아쳐 주위의 나무와 바위들을 저 멀리 날려보냈다. '횡불오악(橫拂五岳)'이라는 장법이었다. 이 장법이면 치명타는 입히지 못해도 사자우를 서너 걸음 밀어 버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사자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상태로 복부를 내밀 뿐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철의법왕이 타타타! 하는 소리를 내며 사자우에게로 쏜살같이 달려 들었다. 사자우 바로 앞에서 갑자기 치솟은 철의법왕이 소맷자락을 내밀어 검처럼 앞으로 뻗었다. 순식간에 단단한 몽둥이로 변한 소맷자락은 정확히 사자우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탕!" 철의법왕의 소맷자락이 병장기에 부딪히며 굉음을 터뜨렸다. 철의법왕의 입에서 가는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공격을 한 순간 어느 사이에 사자우의 국자가 법왕의 가슴에 와 꽂혔던 것이다. "내가 도와드리리다!" 무심이 막 두 사람 사이에 들어서려고 했다. 그때 귀낭자가 만류했다. 평소 철의법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귀낭자는 위기에 처해 있는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가 않았다. 무심도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구경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철의법왕이 수세에 몰리자 이를 보고 있던 금나라 통수 미르도가 소리를 쳐 군사들을 풀었다.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자 군사들은 사자우를 향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사자우가 병장기를 천천히 돌리다가 우뚝 세우더니 호통을 쳐댔다. "이 오랑캐 무리들아! 어서 덤비거라. 이 갈고리로 사지를 조각내 주마!" 군사들은 일제히 통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 왔다. 군사들이 다시 물러서는 것을 본 사자우가 더욱 흥분을 했다. "이 놈들!" 군사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싶었는지 미르도가 새로운 명령을 전달했다. "화살을 퍼부어라!" 곧 사자우를 향해 하늘을 온통 메울 듯한 화살이 쏟아졌다. 사자우는 당황하여 얼른 병장기를 빠르게 돌리며 방어했다. 화살들은 사자우의 손에 들린 병장기의 회오리를 뚫지 못하고 부러지거나 튕겨져 멀리 날아갔다. 왜소한 사자우를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개의 화살이 병장기를 헤치고 사자우의 귀를 살짝 스치며 지나갔다. 깜짝 놀란 사자우가 뒤로 물러서자 군사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사자우가 화살에 맞은 걸로 착각한 것이었다. 사기가 오른 군사들이 사자우를 향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사자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병장기를 휘둘러 순식간에 열 명에 가까운 군사를 쓰러뜨렸다. 더는 접근하지 못하고 군사들이 뒷걸음질을 치려 하자 사자우가 기세를 몰아 앞으로 치달았다. 군사들은 꼬리에 불붙은 개처럼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자우는 통수 앞에까지 이르렀다. 위기에 처한 통수를 보호하기 위해 무심과 귀낭자가 몸을 날렸다. "어서 통수님을 보위하라!" 무심이 고함을 치며 미르도 옆으로 다가섰다. 사자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미르도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오늘은 이만 솜씨를 보이고 난 돌아가련 다. 어여쁜 계집 생각에 싸움이 싱거워졌거든. 하하핫!" 사자우가 뒤뚱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사자우를 확인한 무심과 귀낭자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심과 귀낭자는 철의법왕에게로 달려갔다. 철의법왕이 사자우에게 입은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보기보다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달려온 미르도에게 무심이 심각한 얼굴을 말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먼저 돌아가십시오. 철의법왕님은 소인과 귀낭자가 돌봐드릴 테니." 더 이상의 아쉬움은 없다는 투로 미르도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럼 수고하게나." 곧 군사들을 데리고 병영으로 향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언덕 위에 무심과 귀낭자만이 남아 철의법왕을 돌보고 있었다. 철의법왕의 얼굴은 상기되었으며 한기를 느끼는지 몸을 몹시 떨어댔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철의법왕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죽을 뻔했었군!" "참, 대단하십니다. 살속 깊이 사자우의 내력이 박힌 것 같은데 견뎌 내시다니……" 무심의 말에 철의법왕이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아냐, 아직 완치를 한 것은 아니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며칠간만 나의 시중을 들어줄 수 있겠나?" 자기 가슴을 한차례 탕 하고 치며 무심이 떠벌렸다. "대금은 저의 모국이고 법왕님은 대금의 국사님이신데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한풀 기가 꺾인 철의법왕이 더욱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고맙네. 가슴의 상처는 하루아침에 아물 수 없다네. 헌데 이 평양성은 어수선해서 좀 조용한 곳으로 가 몸조리를 하고 싶네만…… 수고스럽지만 조용한 곳으로 함께 가 며칠 동안만 내 시중을 들어주게나." 무심과 귀낭자의 눈빛이 순간 야릇하게 변했다. "글쎄요,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 있기는 한데 여기서 좀 멀지요." "조용한 곳이기만 하면 멀어도 상관이 없다네." 이때까지 잠자코 있던 귀낭자가 제법 근심 어린 기색으로 한마디했다. "법왕님, 상처 입은 몸으로 어떻게 먼길을 가시겠어요?" 철의법왕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썼다. "괜찮을 거야. 헌데 거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반나절이면 충분히 닿을 수가 있습니다." "음…… 좋아, 어서 그리로 가자구." 어슴푸레한 달빛이 산모퉁이를 포근히 덮어 주고 있는 밤이었다. 세 사람은 칠흙 같은 어둠 속을 헤치고 어느 동굴 입구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상처 입은 몸으로 겨우 이곳까지 걸어온 철의법왕은 매우 지친 상태였다. 괴물의 입과도 같은 어두컴컴한 동굴 안을 들여다보며 철의법왕이 물었다. "여긴가?" "그렇소이다." 무심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렇게 훤히 드러난 동굴에 사람이 없을 리 있겠는가?" "사람들이란 반대로 이런 곳은 피하고 으슥한 곳에 있는 동굴을 더 찾는 법이지요." "그렇겠군!" 철의법왕은 무심의 말이 맞을 거란 생각에 별생각 없이 이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달빛이 동굴 안까지 넉넉하게 비쳐 주고 있어 숨어 지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무심이 철의법왕을 한곳에 편히 앉히며 안심을 시켰다. "오늘 밤은 여기서 푹 쉬십시오. 저희들이 편히 모시겠습니다." 무심이 곧 귀낭자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굴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 앉은 철의법왕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무심과 귀낭자가 서로 주고받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 왔다. "귀낭자, 지금 무슨 생각을 하지?" 귀낭자가 난데없이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 무심 공자라 이름 그대로 소견머리도 없고 분위기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로군요. 이곳은 우리 둘만이 밀회를 나누는 장소인데 어쩌자고 철의법왕을 모셔 왔어요?" "법왕이 어디 남인가?" "그럼 저분이 지켜 보고 있는데 그 짓을 할 생각이세요?" 귀낭자가 뾰로통해져서 입술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저 거추장스러운 철의법왕을 어떻게 하면 좋겠어?" 이들이 나누는 말소리를 모두 듣고 있던 철의법왕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무심의 다음 행동을 잔뜩 긴장하여 주시하였다. 무심이 자리에서 벌떡 밀어나더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법왕님을 하늘처럼 믿었는데 왕중양과 모용준 앞에서는 맥을 못 추더군요?" 무심이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철의법왕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려 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철의법왕이 상체를 일으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젠 발톱도 이빨도 모두 빠진 맹수꼴이 되고 말았군요." "뭐야, 이 배은망덕한 놈들! 비록 차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는 있다만 네 놈들을 겁내지는 않는다!" 귀낭자도 슬금슬금 걸어와 무심의 뒤에 섰다. 그러나 이들은 섣불리 철의법왕을 덮치지는 못했다. 아무리 회복의 가능성이 없을만치 깊은 상처로 신음하고는 있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철의법왕이 가래 낀 소리를 내며 말한다. "이 놈아! 왜 덤비지를 못하느냐?" 잠시 귀낭자를 돌아보던 무심이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스님,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괜히 젊은 사람들 손까지 더럽혀서야 되겠소? 그러니 스스로……." "뭣이라고! 음…… 네 놈들이 기어코 나를 죽이겠다는 수작이로구나!" 무심이 예사롭지 않은 걸음을 옮기며 서서히 철의법왕에게로 접근했다. 그런데 귀낭자가 무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무심 공자, 정신 나갔어요. 저 귀신같은 스님이 팔 소매만 들면 우리는 먼지처럼 사라진다고요!" 그러자 무심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스님 손으로 마무리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네 놈도 대금국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죽일 테면 어디 네 놈 손으로 직접 해 봐라!" "허허, 건망증이 심하시군요. 이 무심 공자는 대금국 사람이 아니라 대몽골 사람올시다." 뒤에 있는 귀낭자를 향해 한쪽 눈을 찡그린 무심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 귀낭자 역시도 대몽골 사람이지요. 아무튼 오늘 스님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처지라는 것만 알아 두시오!" 무심이 품속에서 둥그스름한 철통을 꺼낸 것은 이때였다. "스님, 이것은 화살 열 개가 들어 있는 쇠뇌입니다. 이것은 귀신도 막아낼 방도가 없는 신기한 물건이지요. 하하하……." 무심이 시위를 당기려고 하자 철의법왕이 손을 들었다. "잠깐!" 무심이 냉소를 흘렸다. "부처님을 섬기는 스님이라면 속세에 대한 미련은 접어 두시고 편히 가셔야지요. 계집들처럼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하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화살이 철의법왕을 향해 날아들었다. 급히 앉은걸음으로 몸을 튼 철의법왕이 소매를 내저었다. 화살들은 다행히 소맷자락에 막혀 힘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급작스레 힘을 쓴 탓에 철의법왕은 울컥 입으로 피를 쏟고 말았다. 가슴에 맺혔던 피가 일순 거꾸로 솟구친 모양이었다. 때를 늦추지 않고 무심이 다시 열 대의 화살을 힘껏 쏘았다. 이번에는 피할 겨를도 없었다. 철의법왕의 몸에 열 개의 화살이 꽂혔다. 철의법왕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하하핫! 천하의 으뜸이라고 떠들어대던 철의법왕이 이 무심 공자의 손에 죽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 동굴 안으로 두 그림자가 얼핏 비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로 숨을 죽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무심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 왔다. "세상에 저런 짓을 하고도 웃는 놈이 다 있을까요?" "무심 공자를 보게. 저렇게 아무도 몰래 철의법왕을 죽이지 않았나." 무심은 더욱 귀를 기울이며 이들의 대화를 탐색했다. "만약 우리에게 발각된 줄 안다면 저 무심의 반응은 어떨까요?" "기어이 눈알을 뽑아내기 위해 날뛸 테지." 더는 듣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무심이 그쪽을 향해 고함을 쳤다. "누구얏! 어서 모습을 드러내거라!" 잠시 후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무심의 눈이 커졌다. 무심이 평소 가장 꺼려 하던 이들이었다. 한 사내는 지청이었고 또 다른 사내는 모용준이었다. 모용준이 철의법왕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기르던 강아지에게 다리를 물린다더니 끝내는 무심에게 욕을 당하고 말았군!" 철의법왕은 아직 숨결이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이미 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핏기가 차츰 사라지고 있는 얼굴을 봐서 곧 숨이 끊어질 듯했다. 철의법왕이 모용준을 발견하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모용…… 공자, 이 노승을 구……해 주면 꼭 보답하리다……." "그래 무엇으로 보답을 하겠다는 말이오?" 모용준이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며 그에게로 다가섰다. "대……금국 군사를 출병……치켜 연나라를 복구하는 데 돕겠소." 모용준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무심이 빠르게 귀낭자의 눈치를 살폈다. 귀낭자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모용준과 지청을 죽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무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용준을 불렀다. "모용 공자, 내가 누군지 알겠소?" "내가 알 바 아니다!" "어허, 나는 대몽골 걸아멸부(乞兒蔑部) 족장의 아들이란 말이오!" "그래서 나와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말인가?" "나는 대몽골 여러 부족들의 청을 받아 중원을 돌며 금나라 사람들의 기세를 꺾어 놓고 있는 중이오." 귀낭자도 거들었다. "당신들은 금나라 군사가 무서운 줄만 알았지 대몽골 군사의 기풍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군요. 대몽골 군사는 천하 무적이란 사실만 알아 두세요." 무심이 다시 말을 받아 이어 나갔다. "우리 부족은 대몽골에서도 으뜸가는 부족이오. 우리가 나서기만 하면 당신은 얼마든지 연나라를 되찾고 당당히 군림할 수가 있을 거요." 모용준의 귀가 솔깃해졌다. 지청을 바라본 모용준이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소곤댔다. "내가 대연제국을 회복하는 대업을 이루려고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를 않았다네. 그런데 오늘 이 같은 말들을 들으니 쉽게 판단이 서지를 않아1 누구의 말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은가?" 그러자 지청이 심드렁한 반응을 내비쳤다. "어느 쪽도 도움은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우리 선조인 모용복의 경우도 그랬어. 여기저기에 도움을 청했는데 나중엔 서하(西夏)에까지 가서 빌붙은 적도 있었지. 그러나 누구 하나 도움을 주었던가? 흥, 도움은커녕 거들떠 보려고 하지도 않았어. 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모용준의 말에 위기를 느낀 무심이 단호하게 나왔다. "흥, 그러나 우리를 죽이지는 못할걸!" 귀낭자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설 듯 격한 동작을 취하며 맞섰다. "아무렴,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지!" 무심과 귀낭자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잠깐!" 무심이 손을 뻗어 귀낭자를 가로막았다. 바로 이 순간 모용준의 뒤로 낯선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다. 자세히 보니 주정과 목우 그리고 허불잉이었다. 사태는 점점 무심에게 불리한 지경으로 치달았다. 모용준과 지청과의 싸움이라면 몰라도 숫자가 늘어난 이상 불리한 것은 뻔한 이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