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39편 (39/60)

2026-09-30 18:52:09 조회 13
"전 이제껏 여러 사부님을 모셔 왔으나 천하의 으뜸으로 칠 수 있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언젠가 마주친 일이 있는 사내였다. 왕중양이 기억을 더듬으며 사내의 청을 정중하게 물리쳤다. "노완동, 난 동생의 사부가 될 수가 없다네." 그러니 노완동은 으레 사양을 하는 것이겠거니 생각하고는 더욱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황약사가 제게 일렀습니다. 스승을 섬기려거든 천하의 고수를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은 최고의 고수는 못 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사부님은 무림의 맹주이시자 천하 최고수란 사실을 누구도 거역하지 못합니다. 저를 사양 마시고 부디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노완동이 연신 큰절을 하며 왕중양의 승낙을 얻어내려고 했다. "아니오. 난 그럴 만한 힘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 가게나." 왕중양은 도저히 노완동의 청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이를 모고있던 철의법왕이 가소롭다는 투로 한마디 던졌다. "왕중양, 너 같은 놈이 맹주라고? 웃기지 말고 어서 나와 사생결판을 내보자!" 왕중양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쾌히 도전을 받아주었다. "좋소!" "허허, 일단 시원시원해서 그 점은 마음에 드는군!" "무엇부터 겨루어 볼까요?" 왕중양의 말에 철의법왕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시선을 뚝 한곳에 박았다. "저기 보이는 둥근 연자 위에 올라서기를 해 보는 거요. 누가 더 오래 서 있을 수 있나 해 봅시다." 왕중양이 그 연자를 보며 다시 쓴웃음을 입가로 피웠다. 무공만 잃지 않았으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서자마자 떨어질 게 분명하리라. 그러나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응수했다. "한 가지, 꼭 나하고만 겨루어 본다고 약속하시오." "좋다. 네 말대로 해주마." 철의법왕이 먼저 연자 위로 뛰어올랐다. 뛰어난 경공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 나는 새와 같이 날랜 동작이었다. 왕중양도 천천히 연자 곁으로 걸어갔다. "역시 대단한 경공이로군!" 이게 무슨 기이한 일인가? 아직 경공도 쓰지 않았고 또 쓸 수도 없는데 철의법왕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역시 대단해. 저처럼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만 봐도 알겠어."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 철의법왕이 긴 소맷자락을 높이 들었다. 곧 소맷자락은 강한 바람을 안은 돛처럼 부풀려졌다. 그는 그것으로 왕중양을 향해 내뿜으려 했다. 제23장 임조영과의 이별 지하궁전의 궁녀들은 모여앉아 여유럽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실 이 여인들에게는 밤과 낮의 구별은 필요가 없었다. 지하에는 낮도 밤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리라. 그녀들은 답답하면 이렇게 서로 모여앉아 시간을 보냈고 피곤하면 누워 잠을 잤다. 웃기도 하고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되묻기도 하며 한창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웬 그림자가 비쳤다. 퍼뜩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에 놀란 한 궁녀가 소스라치며 소리질렀다. "누구얏!"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개미의 그림자도 찾을 길이 없었다. 가뜩이나 어슴프레하니 분위기가 묘한 궁전 안이었다. 덜컥 겁이 난 궁녀들은 그 자리에 굳어져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다른 방에 갇혀있던 임조영도 그 그림자를 발견했다. 눈앞으로 무언가 빠르게 스쳐지나가는가 싶더니 곧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멀건히 임조영을 바라볼 뿐 한동안 숨소리조차도 내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임조영이 먼저 물었다. "누…… 구세요? 지옥의 도깨비와도 같은 흉칙한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꽤나 혐오스런 모습이었다. "나지 누구겠소." 그 가면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웃음기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난 당신을 구해 주러 왔소." "누가 그런 부탁을 하던가요?" 임조영이 경계를 늦추지 않자 그가 잠시 우물거렸다. "글쎄, 그런 부탁을 받은 일은 없지만……." "무슨 이유로 나를 구한다는 거죠?" "어허, 배짱 한 번 두둑한 여인이로군!"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더니 몇 발짝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는 얼굴을 다시 임조영에게로 돌렸다. "가만, 이 정신 좀 보게. 한 가지 잊을 뻔했네. 지금 왕중양이……." "왕중양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임조영은 불길한 예감이 스쳐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왕중양이 위기에 빠져 있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것이오. 어서 서둘러 구하지 않으면 그는 죽게 되오." "왕중양이 죽게 된다고요? 그럴 리가…… 모용준이 그를 이용하여 자기의 야심을 채우고는 있지만 섣불리 죽일 수는 없을 텐데……." "왕중양을 해치려는 사람은 그가 아니오. 그런데 모용준을 그렇게 믿고 있는 거요? 만약 그가 왕중양을 해치러 온 사람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하겠소?" 그 말은 임조영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왕중양을 해치러 왔다니?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죠?" 임조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왕중양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말에 그녀는 철창이 휘어지도록 손을 부르르 떨었다. "굼나라 국사인지 뭔지 하는 철의법왕이라는 사람이오." "어떻게 그를 구할 수 있을까요?" "왕중양에게 그대와 같은 위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천운이오." 사내가 넉넉한 웃음을 날렸다. "저를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임조영이 애를 태우며 철창을 뒤흔들자 그가 가까이 왔다. 그가 손가락 하나로 철창을 건드리자 놀랍게도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또 다른 쪽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휘어졌다. 그 사이로 임조영이 재빨리 빠져 나왔다. "그들이 지금 어디 있죠?" 임조영이 묻자 그가 앞장을 서며 손짓했다. "나를 따라 오시오." 계속 긴장을 하고 있던 궁녀들은 또 한 번 가슴을 어루만졌다. 자기들 눈앞으로 이번엔 그림자 둘이 이어서 휙 휙 하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정말 도깨비라도 나타난 게 아닐까 하고 궁녀들은 가슴을 조이며 몸을 떨었다. '쿠 웅!' 철의법왕의 소매에서 강한 돌풍이 쏟아졌다. 그 힘은 집채만한 바위도 간단히 가루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일단 한차례 겁을 주려는 듯 공중을 향해 강풍의 위력을 보인 철의법왕이 기분 나쁜 웃음을 토했다. "우하하하하!" 이번엔 왕중양의 정면에 대고 강풍을 날릴 차례였다. "얏!" 그대 큰소리로 기합을 내지르며 연자 위로 뛰어오른 사람은 왕중양이 아닌 모용준이었다. "하하하, 너같은 중 놈이 감히 큰형님과 시합을 벌이겠다고? 형님의 명성만 더럽힐 뿐이다. 네가 죽기가 그리 소원이라면 나와 해 보자. 어떤 시합이든 기꺼이 받아 주겠다!" "흥, 너 같은 난쟁이 족속과는 말도 하기 싫다. 저리 꺼지지 못하겠느냐?" 철의법왕도 만만하지 않았다. 아니 한술 더 떠서 그는 모용준을 말 그대로 하찮은 난쟁이로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뭣이라고!" 모용준이 천군횡권(千軍橫卷)이라는 초수를 써 장을 날렸다. 이것 역시 대단한 위력을 지닌 것으로 일진광풍이 철의법왕을 향해 퍼부어졌다. 그러나 철의법왕이 내지른 돌풍에 걸려 좌절되고 말았다. 공중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괴력은 요란한 굉음을 남기며 흩어졌다. "난쟁이 주제에 제법 용을 쓰는군!" 다시 소매를 높이 치켜든 철의법왕이 돌풍을 만들었다. "윽!" 모용준은 그만 연자 밑으로 떨어졌다. 철의법왕은 무쇠 같은 몸에 36육식라살대도(三十六式羅煞大道)를 수련하여 강철이라도 꿰뚫을 만한 무공을 갖고 있었다. 모용준이 그의 장풍에 쓰러지자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왕중양을 향해 거들먹거렸다. "자, 이번엔 네 놈 차례다!" 왕중양의 심정은 어느 때보다 담담한 상태였다. 아무런 욕심도 없었고 생에 대한 미련 따위도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철의법왕의 돌풍이 차라리 기다려졌다. 다행히 정강부의 금군을 물리쳐 항금의 봉화를 올렸으니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추진한다면 전국적인 항금의 깃발이 오르게 될 것이다. 이제 눈감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만 남은 것이리라. "형님, 우리들의 위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모용준의 하는 말은 일단 목숨을 살리고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철의법왕의 손에 죽으면 죽었지 항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왕중양은 고개 들어 철의법왕의 소매를 응시했다. 그는 그 소매로 열두 가지 초수를 부릴 줄 알았다. 사실 지금은 철의법왕이 왕중양에게 열두 가지 초수가 아니라 그중 하나만을 써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막을 모르는 철의법왕은 괜시리 망설여졌다. 행여 왕중양이 저러고 있다가 무공을 쓰기 시작한다면 도리어 당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왕중양을 물리치는 방법이라고는 선제공격밖에는 없었다. "야아." 철의법왕은 두 팔을 들어 계속 강한 바람을 끌어 모았다. 바람이 어떤 칼과 검보다 위력적인 힘이 될 때까지 그는 온 기를 모았다. 이를 지켜 보던 강호객들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왜 저토록 왕중양이 무기력하게 서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사내가 참다못해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맹주님, 검을 써요 검을!" 그러나 차고 있는 검 역시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무공이 사라진 왕중양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건일 따름이었다. '어서 나를 죽여라!' 그는 속으로 이렇게 주문하고 있었다. 철의법왕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그는 왕중양의 의연한 모습에서 서서히 전의를 잃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철소매의 위력을 막을 수 있는 자신이 있기에 왕중양이 저러고 있는 거란 생각에 은근히 두려움마저 생겨났다. 이때 왕중양의 귓가로 반가운 소리가 들려 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왕중양의 귀가 번쩍 뜨였다. "왕 공자님!" 임조영의 음성이었다. 그녀의 애타는 마음이 다시 왕중양의 귓가로 전해졌다. "어서 소리를 지르세요. 철의법왕이 손을 쓰지 못하도록 어서 소리를 치세요!" 눈을 감고 있는 왕중양은 그녀가 볼 수 있도록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어서 제 말대로 소리를 지르세요!" 왕중양은 소용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풀렸다. 임조영이 시키는 대로 그는 소리를 내질렀다. "꼼짝 마라!" 왕중양이 괴성을 내지른 것과 거의 동시에 철의법왕이 돌풍을 뿌렸다. 철의법왕이 깜짝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왕중양이 드디어 무공을 쓰려는구나 하는 두려움 탓이었다. "으……." 그러나 돌풍에 얻어맞은 왕중양이 비틀비틀 몇 걸음 밀려났다. 이를 본 철의법왕이 흐흐흐 웃었다. '네 놈이 지금 나를 속이려고 교묘한 술책을 쓰고 있구나. 힘이 없는 척 그러고 있다가 내게 한차례 당하고 만 꼴이렷다. 내가 네 놈의 술책에 넘어갈 성싶으냐!' 그는 왕중양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믿었다. "이건 또 누구야!" 갑자기 철의법왕이 두리번거리며 당황했다. 그의 귀에 주인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당신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한참을 어미 잃은 새끼오리처럼 허둥대던 그의 시선이 한곳으로 가 멎었다. 예상 밖으로 그곳은 왕중양이 서 있는 자리였다. 왕중양이 내는 소리로 믿은 그도 전음입밀법을 이용해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렷다!" "그렇다. 전에도 내게 진 적이 있지 않는가?" 그 말에 철의법왕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진 일이라고는 오로지 한 번, 도화도에서의 일밖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왕중양이 그 당시 도화도에 있었다는 말인가? 다시 철의법왕의 귓가로 말소리가 들려 왔다. "넌 죽는다. 죽는다고 경고를 하는데도 그러고만 있을 건가. 왕중양이 손을 쓰는 날이면 너는 송장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이 왕중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철의법왕은 더욱 주위를 살피며 몸을 사렸다. "누구요? 당신의 정체는……." "너는 그 사람의 적수가 못된다니까." 철의법왕은 강호객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려 찾아보았다. 그러나 짐작이 가는 사람조차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한편 갑자기 허둥대는 철의법왕을 지켜 보던 무심의 심정은 차츰 꼬여갔다. 오늘따라 철의법왕이 하지 않던 행동까지 보이고 있어 내심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국사님, 망설이지 말고 어서 놈을 꺾어 버리세요. 지금 뭘하고 있는 겁니까?" 무심이 소리치자 철의법왕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렇지. 내가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종국에는 내가 죽고 말 것이다. 어느 놈이 떠들고 있건 간에 난 어서 저놈을 죽여야 한다!' 철의법왕이 이를 윽물고는 앞으로 조심스레 한 걸음 나섰다. 그러나 다시 귓전을 울리는 소리에 그만 어깨를 움츠렸다. "철의법왕, 내 시 한수 읊어 드리리다." 하지만 철의법와의 가슴엔 오로지 왕중양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런 철의법왕의 살기로 싸늘해진 가슴과는 관계없이 목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암초는 돌인데 바다도 암초요 인생도 암초지요 사람이 죽는 것도 암초와 같아요 모두들 죽으면 만사를 잊는다지만 그러지를 못하여 눈물을 남기니 가족들의 애간장을 찢어 놓고 있네요…… 철의법왕의 낯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도화도에서 있었던 굴욕이 되살아나 그의 가슴은 더욱 얼음장으로 변해갔다. 그는 황약사를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인간으로 믿었다. "좋다, 어디 두고보자!" 상황이 이렇게 된 판에 체면 따위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철의법왕은 두말없이 돌아서 달아나버렸다. 무심과 챵바는 갑작스런 일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왕중양을 곧 쓰러뜨릴 것처럼 큰소리를 치던 철의법왕이 꽁무니를 감추고 달아나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들도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행랑을 놓았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모요준은 내심 깜짝 놀랐다. 무공이 완전 폐해진 게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모용준은 내색하지 않고 다가와 왕중양을 부축했다. "큰형님, 형님의 무공은 정말 대단합니다. 나도 그 늙은 중 놈을 감당해 내지 못했는데 형님은 손 한 번 쓰지 않고 물리치셨군요." "아니, 내가 이긴 게 아냐." 왕중양의 말속에서는 날카로운 가시가 도사리고 있었다. 모용준의 태도가 역겨웠으며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일로 인해 심경이 혼란스러웠다. "여러분들, 오늘 우리 큰형님은 철의법왕을 멋지게 물리쳤습니다. 천하에 보기 드문 최고의 무공이었습니다. 난 비로소 무형의 공격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으며 고수들의 참된 무공이 어떤 것인지도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모용준이 뻔뻔스럽게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모용준의 말에 따라 찬사를 보낼 뿐이었다. 무림의 사람들은 경외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왕중양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구성진 퉁소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은 주위를 휘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용준, 날 모르겠나?" 귀신이라도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 말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휙하는 그림자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 어느샌가 모용준 앞으로 누군가 나타났다. 임조영이었다. 그녀는 손에 옥녀검을 쥐고는 당장이라도 모용준을 내리칠 기세였다. 모용준은 지하궁전에 갇혀 있는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자기 앞에 나타나자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얼른 교활하게 처신했다. "동생은 왜 이제서야 오는 겐가? 방금 좋은 구경거리가 있었는데. 큰형님이 강적 하나를 통쾌하게 물리쳐 내쫓았거든……." 임조영이 말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모용준이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것을 깨달은 임조영이 얼른 말을 막았다. "모용준. 허튼소리 그만해!" 모용준이 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는 왕중양을 끌고는 그녀 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모용준의 손가락은 어느새 왕중양의 맥문(脈門)을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시선으로 이들을 주시했다. 임조영은 섣불리 입을 뗄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버렸다. 만약 그녀가 지하궁전에 있었던 일을 조금이라도 실토한다면 당장 왕중양은 죽게 될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는데 왕중양이 대신 말문을 터주었다. "동생, 이렇게 나를 구해 주러 와서 정말 고맙네." 왕중양의 말에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모용준은 왕중양이 철의법왕을 물리쳤다고 했었다. 그렇지만 왕중양은 임조영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며 그것에 감사를 한다니 사람들은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임조영은 왕중양을 위해 모용준에게 애써 웃음까지 띠우며 청을 했다. "왕 공자님과 저는 이제 이곳을 떠나겠어요. 괜찮겠지요?" "무슨 소리! 형님은 지금 막중한 소임을 맞고 계시는 분인데 가긴 어딜 간다는 말인가? 저 여러 호걸들과 같이 또 대사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 그 무슨 철없는 소리야. 가겠다면 동생 혼자 가게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에게 꽂고 있는 모용준의 눈빛은 살기로 번뜩였다. 임조영은 그 눈빛의 의미를 읽었다. 일을 그르치면 왕중양을 죽여버릴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왕중양이 임조영에게 눈길을 주었다. "동생, 무엇보다 금나라를 내치는 일이 가장 크지 않는가?" 임조영은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지금 왕중양이 어떤 모욕과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언제까지나 왕중양을 모용준의 마수에서 허덕이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필요없어요. 어서 저를 따라가기나 해요." 그러나 왕중양은 이미 미래를 포기한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말했다. "동생, 가려거든 동생이나 가게. 난 아무래도 둘째와 함께 있어야 할 것 같네." 왕중양은 다른 것을 몰라도 모용준이 금나라와 맞서 싸우려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굳게 믿었다. 그렇기에 비록 자기가 그로 인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대의를 이룰 수만 있으면 기꺼이 모욕을 감수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는 터였다. "이번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요." 고심을 하고 있던 임조영이 격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녀는 가슴은 이미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왕중양이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녀의 흐려져 가는 두 눈을 바라보는 왕중양의 가슴도 메어졌다. '나느 갈 수가 없다. 임조영과 같이 떠난다면 난 오히려 그녀에게 부담만을 안겨 줄 뿐이다. 난 이미 무공마저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던가!' 왕중양이 세게 머리를 저었다. "그럼 어서 떠나게.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게 되겠지." 그녀의 마음이 나약해지기 전에 어서 임조영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왕중양은 단호하게 말했다. 임조영의 눈빛이 더욱 흐려졌다. 임조영은 조용히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어리석은 여인일지도 몰라. 저 사내가 없이는 살지 못하는 여인처럼 행동하고 있다니…….' 왕중양과 모용준을 번갈아 보던 임조영은 이제 길을 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절감했다. "뜻이 다르면 서로 돕지 못하는 법. 이제부터 난 당신들과 절교를 할 생각이오.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오!" 왕중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임조영에게 할말은 많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모용준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용준은 임조영의 단호한 결심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럴 것까지는 없잖은가?" 그러나 임조영은 돌아서 이들과 작별을 하고 돌아섰다. 그녀는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달려갔다. 강한 맞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말의 갈기처럼 휘날렸다. 벼랑 끝에까지 다다른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는 자신을 달랬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임조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가면을 쓴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푹 빠져 있는 그녀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무정한 사람에게 혼자 정을 주었으니 그러지?" 사내가 임조영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서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사내를 알아본 임조영이 말을 받았다. "당신이었군요?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죠? 왜 저를 구해주시고 또 왕중양까지……." "하하하! 눈매가 무섭군. 나와 결투라도 해 볼 생각이요?" "누가 무서워할 줄 아시오. 당신은 나를 구해준 은인이니 내가 이겨도 목숨만은 살려 드리리다. 그것으로 서로의 빚은 상쇄되는 것이니까." 임조영이 검을 쑥 뽑아들었다. 숙녀요죽(淑女요竹) 초수로 검끝에 기를 모으며 서서히 사내에게 접근했다. "얏!" 임조영이 뻗은 검을 옆으로 슬쩍 흐르게 한 그가 껄껄 웃어댔다. "난 평소 여인을 깔보는 사내는 아니지만 그대같이 오만무례한 사람은 처음인데?" 임조영이 다시 검을 정신없이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대단히 화가 나 있어 발에 채인 돌덩이들이 멀리까지 날아갔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증거로 결코 완벽한 초수를 구사할 수가 없기도 했다. 괴보법(怪步法)을 쓴 그가 임조영의 검을 피하며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저 아래로 떨어져 뼈가 박살이 났을 거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절벽 중간쯤까지 떨어지던 그가 삐죽 돌출되어 있던 바위를 박차고는 다시 튀어오른 것이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임조영에 게 자신의 무공을 보이려는 행동이었다. 그리곤 빠르게 몸을 날려 번쩍 번쩍 정신없이 자리를 옮겨가며 임조영을 현혹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