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38편 (38/60)
놈이 내리친 칼은 어느새 그 손바닥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얼마나 큰 힘이 들어갔는지 놈은 칼을 거두지도 못했다. "내 칼을 받아랏!" 다른 놈이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지비 대사가 얼른 잡고 있던 칼날을 작신 부러뜨렸다. 이것을 본 다른 놈이 주춤 걸음을 세웠다. 올리요는 사태가 범상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너희놈들은 도대체 누구냐? 누구인데 감히 대금국의 장수들에게 덤비려는 거냐?" 낯선 사람들 중 하나가 툭 하고 가지고온 보따리들을 그의 앞으로 내던졌다. 피가 흠뻑 젖어있는 그 보따리가 흩어지면서 데굴데굴 금군의 머리가 굴러 나왔다. "자 똑똑히 봤을 테니 각오들 해라!" 이 말에 올리요가 떨리는 손으로 낭아봉을 꽉 움켜쥐었다. "네 놈이 누군데 대금국에 맞선단 말이더냐?" "이놈아, 중원무림이 오늘 맹주의 명령 아래 금나라 오랑캐를 멸살시키려 왔다!" 이 무리의 통솔자로 보이는 사내는 득의양양하게 외쳤다. 올리요는 약이 올라 두 눈을 매섭게 뜨더니 낭아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통솔자로 보이는 사내가 어깻죽지를 감싸 쥐고는 약간 비틀거렸다. 칠십 근도 더 되는 올리요의 낭아봉에 맞았는데 어찌 그 충격이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사내는 곧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울리요를 노려보았다. 오히려 몸을 사린 것은 올리요였다. "네 놈은 누…… 구길래 내 낭아봉을 맞고도……." 그러자 사내의 찌렁찌렁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그깐 낭아봉으로 나를 칠 수 있겠느냐!" 올리요가 도망치려 하자 지부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는 늘어졌다. "장군님, 가시려거든 저와 함께……." 올리요가 지부를 떠밀었다. "어쿠!" 뒤로 나가떨어진 지부가 허둥대는 틈을 타 올리요가 내빼려고 했다. "어디 가려고!" 올리요 앞에 웬 사내가 산맥처럼 막아 섰다. 올리요는 다리를 심하게 떨며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사내가 올리요의 덜미를 잡아 허공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이 놈! 네 놈이 그 사악하기 그지없는 오랑캐 놈이렷다!" 그러나 올리요는 끝까지 체면을 차리려는지 데롱데롱 매달린 채로 거만을 떨었다. "난 대금국의 장수이다. 나를 죽였다가는 된통 당하게 될 줄 알아라!"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 목젖을 드러내며 웃어댔다. "하하핫! 입까지 더러운 놈이로구나!" 올리요의 정수리를 콱 움켜쥔 사내가 용트름을 했다. 막 공중으로 빙글 빙글 돌리려고 하자 올리요가 빌었다. "아이고, 제발 목숨만 살려 주소." 땅에 엎드린 지부도 손이 보이지 않게 싹싹 빌어 댔다. "너같은 놈들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다!" 사내가 지부의 머리를 장으로 내리쳤다. "욱!" 다시 뒤로 나자빠진 지부의 입에선 선혈이 꾸역꾸역 쏟아졌다. 정강에 있던 금나라 군대는 일망타진되고 세 명의 장수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태자(太子) 납한(衲罕)은 대로했다. 그는 곧 호국선사(護國禪師)인 철의법왕(鐵衣法王)을 불러 대책을 논하기에 급급했다. 이 자리에는 무심도 동석해 있었다. 철의법왕이 예를 올리며 심각하게 물었다. "태자님께서 어인 연고로 소승을 부르셨나이까?" "우리 금나라 대군은 지금껏 송나라를 걸림돌 하나 없이 쳐들어갈 수가 있었소. 그런데 무심 공자가 전해온 말로는 송나라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고 하오. 그 사람의 무공은 최고로 고강하여 천하 기인인 동사 황약사도 그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오. 이름은 왕중양이라고 하는데 어떤 문파의 사람이기에 그렇게 강한지 알 길이 없소이다. 또한 그가 무림 인사들을 휘동하여 정강에 있는 우리 군사들을 전멸시켰니 내 밤잠을 잘 수가 없는 지경이오." 납한의 장황한 탄식을 다 듣고 난 철의법왕이 여유를 부렸다. "소승이 너무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는 중에 그런 호수가 중원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제야 때를 만난 것 같아 즐겁기만 합니다. 오랜 만에 대적할 상대가 나타났다니 더없이 반갑습니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겁이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약사의 무공마저도 뛰어넘는 상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철의법왕은 일전에 바다를 건너 도화도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황약사와 맞붙게 되었었다. 철의법왕이 먼저 싸움을 걸었는데 시체만 남겨놓을 뻔했었다. 철의법왕이 도화도에 이르자 누군가 개탄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이 도화도엔 무얼 찾아 먹겠다고 오는가? 목숨을 바치러 오는 모양이로군." 이에 철의법왕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는 법장(法杖)을 세워들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꽃이 만개한 복숭아나무들만 눈에 띌 뿐 사람의 그림자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다시 개탄의 소리가 들려 왔다. 방금 전에 들렸던 같은 목소리의 같은 내용이었다. 화가 난 철의법왕은 곧장 복숭아밭으로 뛰어들었다. 그렇지만 소리를 낸 사람을 찾지 못하고 미궁에 빠진 듯 그속에서 헤매게 되었다. 그는 법장을 마구 휘둘러 복숭아나무를 쓰러뜨리기에 이르렀다. 삽시간에 복숭아밭을 망가뜨린 그는 그 위에 있는 한 돌집으로 올라갔다. 그 돌집 앞에 이른 철의법왕은 기묘한 광경에 경악했다. 고요한 평화가 깃들어 있는 돌집에 웬 어여쁜 낭자가 동요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암초는 돌인데 바다도 암초요 인생도 암초지요 사람이 죽은것도 암초와 같아요 모두들 죽으면 만사를 잊는다지만 그러지를 못하여 눈물을 남기니 가족들의 애간장을 찢어놓고 있네요……. 철의법왕은 여인에게서 범상하지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여인은 자기 앞에 그가 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그녀는 세상에는 어린아이밖에 없다는 식으로 요람 속에 든 갓난아이만 들여다보았다. "시주님, 빈승이 인사를 올립니다." 건성으로 합장을 한 철의법왕이 큰소리로 말을 건넸다. 비로소 고개를 든 여인이 미소를 띄우며 되물었다. "대화상(大和尙)께선 이 섬엔 무슨 일로 오셨나이까? 칼부림을 하시로 오셨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찌 대화상의 얼굴엔 살기가 그득하나요? 우리 딸애의 고요한 눈가에 그 어두운 빛이 들까 심히 근심스럽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여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철의법왕은 그것을 여인의 웃음이라 여겼다. "대화상께선 어떤 법력(法力)을 갖고 계시나요?" "그건 알아서 무엇 할 것이오?" 철의법왕은 놀림을 받는 기분이 들어 목에 힘을 주었다. 여인이 실망한 낯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법력이 없으시다면 할 수 없군요. 저는 이 섬에서 지금까지 내 딸 용아(蓉兒)를 위하여 불법을 빌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화상께서 오신 김에 법력을 빌어 볼까 했는데 힘들겠군요." 철의법왕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도화도의 황약사가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을 데리고 산다는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황약사의 처란 말인가? 그리고 요람의 아기는 황약사의 딸……? 철의법왕이 천천히 요람 앞으로 다가가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희고 볼에 살이 토실토실 붙은 아기가 방굿 웃었다. "대화상께선 정령 법력을 쓸 줄 모르시나요?" 여인이 힐금 그를 훔쳐보며 다시 물었다. "쓸 줄은 압니다만……." 철의법왕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게 되었다. 아기가 다시 옹알이를 하며 방실방실 웃어댔다. 그 웃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철의법왕은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속으로 그는 아이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대화상은 벌써 일곱번이나 그 애를 칼로 내리칠 마음을 가졌지요?"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자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사실보다는 그 목소리가 여인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 더욱 놀란 것이다. 그가 깜짝 놀라 소리나는 쪽을 휙 돌아보았다. 황약사가 어느샌가 뒷짐을 지고 뒤에 떠억 버티고 있는 게 아니던가. 그후 철의법왕은 황약사와 겨루었는데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그는 도화도 도주 황약사의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는 것을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후부터 내심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중양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법왕님, 제가 보건데 왕중양이란 사람은 홍칠이나 황약사보다 더 무서운 인물인 듯하옵니다." "음…… 그래?" 철의법왕의 눈꼬리가 길게 위로 올라갔다. 그게 사실이라면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무심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다른 방법으로 내쳐야 합니다. 그의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골라 유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식은죽 먹기가 되겠죠. 그리고 황약사도 그리 두려워할 건 못되지요. 그 사람은 고고하여 남과 휩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일에 나서는 것도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대송이니 대금국이니 하는 남의 일에 섣불리 나설 위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 사람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다. 또한 홍칠은 미식가이고 대식가로 알려져 있기에 음식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약점이 있습니다. 먹는 일에 정신을 쏟다가 언젠가는 크게 일을 망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자기 손가락을 끊으며 맹세까지 하였다지 뭡니까? 문제는 왕중양인데…… 아직 그에게 어떤 단점이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왕중양의 무공이 그렇게 출중하다면……." 철의법왕의 눈빛이 차츰 흐려졌다. 중원에 기인이 또 하나 생기게 되었다는 말인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왕중양도 이전에는 무공이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선천신공을 익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심의 말에 철의법왕이 어깨를 들먹이며 웃어댔다. "하하핫! 나 역시 그 선천신공 비본(秘本)을 하나 얻었었지. 후에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야. 그 이유를 알겠는가?" 무심이 슬쩍 웃음을 감추었다. 그 이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자기 입으로 토설을 한다면 철의법왕에게 노여움을 사게 되어 모른 척하려고 했다. "그 비본이 누구 손에 들어간다고 해도 사실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거든. 그 비본에 무어라 씌여있는 줄 아나? 이 무공은 비록 신기에 가까운 것이지만 반드시 물속에서 연마하여야 한다고 되어있지. 그 물은 잡것이 섞여 있지 않은 깨끗한 물이어야 하며 또 얼음같이 차지만 얼음이 들어 있어서도 안 된다고 했지. 허허, 그러나 그런 물을 어디 가서 찾을 것이며 또 찾는다고 해서 누가 선뜻 그 속에 들어가겠는가? 모르긴 해도 왕중양도 힘들었을 텐데, 혹시 그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그 무공의 힘은 어느 정도지요?" 무심의 말에 철의법왕이 눈을 가만히 감았다. "그 무공을 연마하게 되면 대단한 힘을 얻게 된다네. 마치 땅과 하늘의 온 정기를 받아 안은 것처럼 무궁무진한 힘을 소유하게 되지." 무심의 눈이 부러움과 두려움으로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그래, 자네가 똑똑히 눈으로 보았는가? 정말로 선천신공이 틀림없다는 말이지?" 철의법왕이 무심을 향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무심이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철의법왕이 벌떡 일어나 태자에게 읍하며 단호한 기색을 내보였다. "태자님, 대왕님께 전해주십시오. 소승이 중원으로 달려가 왕중양의 머리를 가져오겠다고 말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태자님도 대왕님도 만나뵙지 않겠습니다." 태자는 그의 말에 흐뭇해져서 당장 떠날 것을 윤허하였다. 철의법왕은 곧 무심과 챵바를 불러 중원으로 향했다. 이들 일행은 밤낮을 걸어 정강부에 이르렀다. 지부의 막사에 들어가니 새로 부임해 온 지부가 대금국 국사인 철의법왕을 보고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 새로 부임해 온 지부의 속셈은 따로 있었는데 철의법왕을 한껏 이용해 먹을 계산이었다. 그래야만 자기가 지부 노릇을 무사히 이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부가 격양된 목소리로 철의법왕에게 보고를 했다. "전에 놈들이 우리 대금국의 관병들을 죽이고 지부까지 도륙한 후부터 강호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고 있습니다. 금나라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죽여서 이 정강 일대에서 함부로 나다닐 수도 없게 된 실정이지요." 철의법왕이 킁! 하고 알 수 없는 코방귀를 뀌었다. "왕중양이란 작자는 지금 모용세가에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철의법왕의 콧소리에 잠시 위축되었던 지부가 다시 안면근육을 실룩거리며 굽신댔다. "예, 예, 그러하오이다. 국사님은 정말 훤히 내다보시고 계시는군요. 헌데……." "뭔가?" 마뜩찮게 바라보는 철의법왕을 슬쩍 살핀 지부가 또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예, 모용세가는 몇백 년의 기틀을 지니고 있는 무림세가입지요. 그러니 그곳에는 별의별 재간과 초수를 익힌 놈들이 모여 있답니다. 대사님께선 부디 몸조심을 하셔야……." 철의법왕이 탁자를 꽝 내리치며 화를 냈다. "쓸데없는 소리! 그럼 여기서 더 지체할 것 없이 난 모용세가로 가 봐야겠다." 철의법왕은 뻗친 기운에 차 한잔 마시지도 않고 곧장 지부의 막사에서 나왔다. 쉴 겨를도 없는 상황이라 판단한 철의법왕은 걸음을 재촉해 모용세가로 향했다. 모용세가가 멀리 보이는 곳까지 당도한 이들은 정자 곁에서 배를 기다렸다. 호수 너머로 보이는 모용세가의 위풍을 거만한 눈길로 보고 있는데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말로는 원수라지만 꿈에도 서로 못잊네 만나면 그들 서로 아는척도 안하면서 언제나 쌀쌀한 표정으로 냉담한 말 한마디 '간밤 찬비 내렸네' 노랫가락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던 무심이 탄성을 질렀다. "좋다! 그 가락 한 번 좋구나!" 챵바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 말을 걸고 넘어졌다. "잘하기는 개뿔이 잘해? 구성지기만 한 게 온몸이 다 꾸물꾸물하네." "네가 뭘 안다구 그래? 노래나 들을 줄 아느냐고?" 발끈한 무심이 챵바를 노려보았다. 챵바도 주먹을 들어 그를 내치려다 그만두었다. 또 사부의 당부가 머리 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무심이 가는 데로 따라가고, 무심이 하는 대로 하라는 말……. 그러나저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배는 오지 않았다. "이거 낭패인걸!" 철의법왕이 강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 큰 모용세가에 손님을 맞는 배 한 척이 없겠어요. 좀더 기다려 보시지요." 무심이 생각 없이 내뱉자 철의법왕이 화를 벌컥 냈다. "기다려 보라고! 그럼 없는 배가 생기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이때였다. 버들숲으로 가려진 저쪽으로부터 작은 배가 서서히 떠내려왔다. 그 배 위에 타고 있던 자그마한 계집 하나가 이쪽에 대고 큰소리로 물어 왔다. "모용세가로 가시는 분들이세요?" 이들은 곧 배에 올라탔다. 이들은 모두 적지 않은 체격인데도 나비처럼 사뿐히 몸을 날려 배 위로 오르자 계집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쩜, 모두들 무공이 뛰어나시네요?" 그러자 이들은 제각기 목에 힘을 주고는 어서 노를 젓기나 하라고 딴청을 부렸다. 배가 호수 복판으로 이르니 먼곳에서 다른 배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 공자님을 뵈러 오시는 길이죠? 요사이 공자님을 배알하러 오시는 강호객들이 줄을 서고 있다구요." 종알대는 계집의 말에 무심의 심기가 뒤틀렸다. "너희 공자라는 게 누구냐? 모용준인가 하는 난쟁이가 맞지? 우리 국사님은 그런 어린애 만한 난쟁이를 보러 가시는 길이 아니다." "그럼 누구를 보러 오신 거죠?" "우리 국사님은 명성이 있다는 대협 왕중양을 만나실 생각이시다." "그래요? 그분은 우리 큰공자님이신데……." 계집이 이를 감추며 살짝 미소 지었다. 무심도 왕중양과 모용준이 의형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큰공자님이라고? 누가 말이더냐?" "말씀드렸잖아요. 왕중양 공자님이라구요. 큰공자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세요. 또 그분은 아무일도 하지 않지만 공자님과는 아주 정답게 지내신답니다." 챵바가 불쑥 끼여들며 물었다. "임 아무개라고 하는 여인도 있지?" 무심이 뱀눈을 만들자 계집이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요. 난 그런 여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배가 기슭에 닿자 철의법왕이 무심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무심이 계집의 머리채를 틀어쥐며 윽박질렀다.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길이나 안내해라! 우리 국사님이 그 큰공자라는 작자와 무예를 겨루어 볼 것이다!" "우하하하핫!" 호수의 물이 출렁일 만한 벽력같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위풍도 당당한 공자님께서 한낱 계집과 그러시다니 남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그는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이봐. 네가 무공깨나 쓴다고 들었지만 나와는 적수가 되지 못해!" 무심이 대뜸 지청을 향해 비아냥댔다. "글쎄, 그럴 수도 있을 테지. 헌데 무심 공자가 계집에게도 손을 대는 것을 보니 믿어지지가 않는데." 철의법왕이 이들의 말싸움이 듣기 싫었는지 인상을 구기며 끼여들었다. "뭘 하는 놈이지?" 무심이 얼른 허리 숙이며 답했다. "모용세가를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놈이지요. 저 녀석을 해치운다면 모용준과 왕중양은 제 발로 뛰쳐나오고 돼 있습니다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득달같이 지청에게로 몸을 던진 철의법왕이 괴성을 내질렀다. "야아압!"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청은 미처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다. 어깨에 무언가 쾅 하며 부딪쳤는데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악!" 지청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비틀거리자 아닌게아니라 곧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정과 목우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는 한 걸음에 달려들었다. "어서 공자님을 불러오너라!" 지청이 이렇게 울부짖자 주정과 목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적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더군다나 공자를 불러오라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앞에 있는 중이 누구길래 저럴까 하고 있는데 모용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사께서는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모용준이 철의법와 앞으로 가더니 읍했다. "지옥에서 왔다!" 철의법왕은 인사도 받아 주지 않은 채 뇌까렸다. "허허, 지옥에서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난 네 놈을 지옥 구경을 시켜 주려고 왔다. 또한 다른 한 놈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라니……?" "이놈! 어서 왕중양을 불러오지 못할까? 난 그놈의 무공을 보러 이곳까지 오신 귀한 몸이시다!" 철의법왕이 호통을 치며 발을 바닥에 힘껏 굴렸다. 물기에 밴 모래흙이었지만 어찌나 위력이 센지 먼지처럼 흙이 먼곳까지 풀풀 날렸다. "형님은 지금 없으니 일단 저와 대화를 나누시지요?" 모용준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지만 무심이 대신 빈정댔다. "흥, 우리 국사님께서는 왕중양의 무공을 눈으로 확인하러 오신 것이다. 만약 그가 국사님을 이긴다면 우리는 전에 있었던 일을 용서해 줄 수도 있다!" "어떤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모용준이 태연스럽게 나오자 무심이 노발대발했다. "뭐라고! 수백 명이나 되는 생명을 해친 일을 벌써 잊었단 말이더냐?" "허허, 정 그렇다면 내 큰형님을 모셔오지요. 허나 승부는 나와 내야 할 것이오. 왜냐하면 형님은 겨룰 수가 없는 처지요." 잠시 후 모용세가에 머물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소식을 전해들은 강호객들이었는데 얼추 봐서 일백 명은 넘을 듯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무심은 약간 겁을 먹었다. 철의법왕이 전음입밀법으로 무심에게만 들리도록 혀를 놀렸다. "준마는 한 필만 있어도 하루에 천 리를 가니 걱정 말아라." 자기 혼자서도 얼마든지 무리칠 수가 있다는 호언장담이었다. 무심을 본 조평이 씹어먹을 듯 고함을 질렀다. "전번에 내가 왜 너를 죽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번 기회에 네 놈의 사지를 찢어 저 호수에 던지리라!" 무심이 한 걸음 나서려다 철의법왕을 보았다. 그는 다리를 벌리고 서서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는 왕중양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철의법왕의 소원은 곧 이루어지게 되었다. 저쪽으로부터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바로 왕중양이었다. 왕중양이 가까이 오자 철의법왕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자네가 말한 사람이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이상하군……." 다시 왕중양의 표정을 힐끔 확인한 철의법왕은 역시 알 수 없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의 판단으로는 전혀 싸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살기가 느껴지기는커녕 무공이라고는 손가락 끝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혹시 무공을 섣불리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일까?' 철의법왕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잠깐만요!" 한 사내가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뛰어오는 게 아닌가. 왕중양과 엇비슷한 연배로 보였는데 몸집이 우람한 사내였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는 넙죽 왕중양 앞에서 엎드리며 애원을 했다. "사부님, 부디 저를 사부님의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왕중양으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철의법왕의 손에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왕중양은 눈앞에 일어난 일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는 모용준이 철의법왕이 자기와 겨루려고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기력해진 자신이 죽어 강호의 무림들에게 적개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려 했었다.